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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8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비난과 저주마저도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본문 : 사무엘하 16장 11절
그런 다음에 다윗이 아비새와 자기의 모든 신하에게 말하였다. "생각하여 보시오. 나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도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하물며 저 베냐민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키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새번역>
길었던 추석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던 한 주, 건강하고 평안하게 보내셨습니까? 하나님의 평안으로 인사 전합니다. 샬롬! 추석을 지나고 나니 한결 더 가을이 가까이 와 있는 듯합니다. 성경 읽기 딱 좋고! 기도하기 딱 좋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기에 딱 좋은 계절입니다. 모쪼록 풍성하시고, 충만하시고, 복된 일정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9월의 세 번째 주일 저희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하 16장 11절을 본문으로 하여 ‘비난과 저주마저도 하나님의 음성이라면?!’이라는 제목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비난과 저주가 하나님의 음성이라 느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의 말씀인지 오늘 설교를 통하여 함께 배우고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롯이 말씀에 집중하여 말씀이 운행하는 시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하며 먼저 새번역으로 준비된 본문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다윗이 아비새와 자기의 모든 신하에게 말하였다. "생각하여 보시오. 나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도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하물며 저 베냐민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키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사무엘하 16장 11절, 새번역>
그 누가 비난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리고 어느 누가 저주를 기뻐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작은 비난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이 아프고, 저주라는 단어조차 두렵게 느껴집니다. 되도록 살아가면서 비난과 저주를 듣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던히도 노력합니다. 어떻게든 칭찬과 축복을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비난과 저주를 듣게 될 때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실이든 거짓이든, 듣게 될 때가 있습니다. 아마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께서 그런 상황에 놓여 보셨을 것이고, 들려오는 비난과 저주로 인하여 깊은 절망감도 느껴 보셨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나를 향해 들려오는 칭찬을 비롯한 좋은 말들은 왠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끼게 하는 음성같이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잘했다' 칭찬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칭찬이나 좋은 말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난이라면 어떨까요? 더 나아가 나를 향해 들려오는 저주라면 어떨까요? 동일하게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비난과 저주마저도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여길 수 있을까요? 저는 아직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저 칭찬과 축복만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다윗에게서 배워보려고 합니다.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에 편식하며 생긴 '신앙 영양 불균형'을 제대로 정상적인 ‘밸런스’로 맞춰 보려고 합니다.
소위 사무엘하 11장에 등장했던 '다윗과 밧세바' 사건은 다윗의 회개를 통해 일단락될 것 같았지만 계속해서 다윗을 괴롭힙니다.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그 사건의 여파는 이제 다윗을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치는 처지가 되도록 까지 만들었습니다.
'도망자 다윗',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지긋지긋했던 과거가 다시 떠올라 더욱 마음이 아팠을 다윗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아들에게 쫓기는 신세라니! 하지만 아무리 신세 한탄을 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모두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설상가상 다윗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상황이 생기게 됩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치면서 ‘바후림’ 마을이란 곳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그곳에는 사울 집안의 친척인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므이가 다윗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굳이 길거리에 나와서 지나가던 다윗을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말로만 저주한 것이 아니라 다윗과 다윗을 호위한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기까지 하였습니다. 도저히 왕에게 할 수 없는 말들을 퍼붓습니다.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여 말하였다. "영영 가거라! 이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야! 이 불한당 같은 자야! 네가 사울의 집안사람을 다 죽이고, 그의 나라를 차지하였으나, 이제는 주님께서 그 피 값을 모두 너에게 갚으신다. 이제는 주님께서 이 나라를 너의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 주셨다. 이런 형벌은 너와 같은 살인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재앙이다." <사무엘하 16장 7~8절, 새번역>
분명 시므이가 하고 있는 말들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이 아닌 말들로 그저 자신의 집안을 무너뜨렸다는 분노에 빠져 외치는 저주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집안사람을 다 죽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나라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셔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은 충분히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면서, 대적하는 시므이를 죽여 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저주를 곱씹으며, 그 비난을 들어보면서 오히려 분노한 것이 아니라 점점 차분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이토록 차분해 질 수 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느낍니다. 이래서 다윗이 칭찬받는 하나님의 사람인 거 같습니다.
먼저 다윗의 신복으로서 도저히 견디지 못해 당장에라도 시므이를 죽이려하는 아비새 장군을 잘 달래어 주기 시작하는 다윗입니다. 자신의 상관을 향해, 그 것도 한 나라의 왕을 향해 퍼붓는 저주를 신하들이 어찌 계속 듣기만 하며 견딜 수 있겠습니까? 당장에라도 충성심을 발휘하여 저주를 말하는 이를 죽여 왕의 기분을 풀어 주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 행동을 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비새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분노에 찬 아비새 장군에게 오히려 침착하게 이야기합니다.
왕은 대답하였다. "스루야의 아들아, 나의 일에 너희가 왜 나서느냐? 주님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고 분부하셔서 그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그가 나를 저주한다고, 누가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느냐?" <사무엘하 16장 10절, 새번역>
다윗왕은 지금 시므이를 통해 들려오고 있는 이 비난이! 이 저주가!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들려주시는 음성은 아닐까 듣는 내내 생각했던 다윗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곧 확신이 되었습니다. 이 비난마저, 이 저주마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다윗이 아비새와 자기의 모든 신하에게 말하였다. "생각하여 보시오. 나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도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하물며 저 베냐민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키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사무엘하 16장 11절, 새번역>
이제는 모든 신하들에게 시므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모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라고 선포하게 됩니다. 도대체 다윗은 무슨 마음이었을까요? 알 수 없는 복잡한 그의 마음 가운데 그나마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은 지금 자신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밧세바와의 사건이 있는 동안, 암논이 다말을 겁탈하고,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동안, 그리고 다시 압살롬을 이스라엘로 불러 들였던 순간까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을 찾을 겨를도 없었고, 하나님을 찾을 염치도 없었던 다윗이었습니다. 그의 삶에서 하나님은 완전히 ‘외인’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압살롬을 피해 궁을 나서는 순간부터, 쫓기는 자가 된 순간부터 다윗의 신앙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다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을 사무엘하 15장 이후로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랜 어둠의 터널을 지나 드디어 다시 하나님을 찾게 되는 다윗이었습니다. 염치없어도, 부끄러워도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다윗입니다. 그렇게 아주 조금씩 하나님을 찾게 되자 동시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는 현재 자신의 상태를 처절하게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필립 얀시가 쓴 책 제목처럼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입니다. 드디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했기에 존재했던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비난과 저주마저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어떤 저주도 비난도 자신에게 주는 하나님의 관심이요, 사랑이요, 사랑의 채찍질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다시 다윗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깨달음'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깨달으면 바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용기'를 가진 자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비난과 저주마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듣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은 마땅히 그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사람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난 몇 년을 돌이켜 보니 자신의 모습이 참 한심스러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향해 마음속으로 품고 있었던 비난과 저주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그 한심스러웠던 몇 년 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의 비난과 저주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다윗도 없습니다. 꽤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의 음성 없이 살아왔던 다윗은 드디어 귀를 열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설사 그것이 비난과 저주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압살롬이 죽고 다시 왕의 자리에 복귀하는 다윗은 자신을 저주한 시므이에게 복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므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준 이였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나단 선지자 이후로 참 오랜만에 들어본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어떤 영역까지 열어놓고 계십니까? 어떤 말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다윗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비난과 저주마저도 '하나님의 음성'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윗이니깐 가능한 영역의 일이 아닙니다. 다윗은 어쩌면 우리 신앙인들이 자신처럼 하나님이 없는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히려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경고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으며, 그래서 '비난과 저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발견하는 데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말입니다. 비난과 저주의 말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전에 꼭 발견하라고 조언해 주고 있는 듯 들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치 다윗의 이런 마음과 말을 완성시키려는 마음이신듯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누가복음 6장 28절, 새번역>
솔직히 이 구절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계속 이 구절을 곱씹어 보시면 아마 저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실 것입니다. 저주하는 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면, 그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야 한다는 답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보내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들려주시는 음성을 전하러 온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똑같이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고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조차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말씀을 실천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A, 새번역>
십자가에 달리신 그 고통과 절망 가운데에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메단 자들의 용서를 구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결단하게 됩니다. 아직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커녕 원수란 단어조차 싫지만, 비난 받는 것이 싫고, 저주받는 것이 화가 나지만, 칭찬을 비롯한 좋은 말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싶지만, 이젠 그런 좁은 마음에서 벗어날 것을 결단해 봅니다. 다윗처럼, 예수님처럼 비난과 저주마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나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나를 모욕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결코 저주를 저주로 갚지 않고,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겠습니다. 그렇게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도록 하나님 앞에 다시금 서봅니다. 혹시 여러분도 저와 함께 이렇게 결단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저와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결단이 있을 때 일어날 놀라운 일을 전하며 오늘 하나님의 주신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올바르게 행동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처음에는 여러분이 악하다고 비난하다가도, 여러분의 옳은 행실을 직접 보고는, 장차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날에 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2절, 쉬운말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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