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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삼태사와 경주의 삼보,삼기,팔괴*****
포항 기계면, 유삼재·신몽삼·윤신달 등 태사 3명을 배출한 선비의 고장
▲ 기계 유씨의 재실 부운재의 전경.(사진/포항시 제공) ⓒ2013 CNBNEWS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고려시대 삼사(三師)의 하나로 정일품의 벼슬에 해당하는 태사(太師)를 3명이나 배출한 마을이 있다.
오랜 역사 속에 선비정신과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는 이곳은 바로 경북 포항시 기계면이다. 기계면은 포항에서 청송과 안동 등 북부 내륙지방으로 통하는 31번국도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학산·운주산 등 높고 험함 봉우리가 사방을 호위하고 있다.
예부터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이 지역에서는 특히 유태사 유삼재, 신태사 신몽삼, 윤태사 윤신달 등 기계 삼태사로 불리는 이들의 숨결을 만날 수 있다.
이 세 명의 태사는 대체 기계면과 어떠한 인연을 맺고 있을까?
유태사 유삼재는 기계유씨의 시조로 신라시대에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 벼슬을 지냈다. 유삼재의 묘소는 기계면 미현리에 있다.
신라가 쇠하고 그의 후손 유의신이 고려에 불복하자 태조 왕건이 그를 기계 호장으로 삼았고, 이후 그 후손들은 기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묘소와 함께 선조의 덕을 추모하고 후손의 번창함을 기원하는 기계 유씨의 재실(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 부운재를 빼놓지 말고 들러봐야 한다.
부운재와 관련, 숙종15년(1689) 경주부윤 유하겸이 마을 어른들의 증언을 토대로 기계 유씨 시조묘를 찾아 이듬해 표석을 세웠다. 이를 시작으로 후손들이 증축을 이어왔다.
또 부운재에는 이곳을 찾는 이들이 덕을 쌓고 효를 실행하는 계기를 만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탁기가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면서 세운 신도비도 있다.
신도비란 높은 관직을 지낸 사람의 공적을 흠모하는 뜻을 담아 무덤 근처나 큰길가에 세우는 비석을 말한다.
기계 유씨의 대표적 인물은 사육신의 한사람인 유응부, 영조 때 노론의 원로로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 개화의 선구자 유길준 등이 있다.
▲ 신태사 신몽삼의 묘.(사진/포항시 제공) ⓒ2013 CNBNEWS
신태사 신몽삼은 영산·영월 신씨의 시조로, 묘는 기계면 화봉리에 있으며 1918년 발견됐다. 묘비에는 ‘태사공영주신지묘’라고 적혀 있고 배위에 정부인 문주류씨라 기록돼있다.
신몽삼은 고려 명종 19년(1189)년에 급제해 보문각 대제학 검교 태사 영원부원군에 올랐다.현재 기계면 기동저수지 서쪽에 고려신태사 몽산묘와 재실인 화봉재가 있다.
윤태사 윤신달은 파평 윤씨의 시조로 고려태사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윤신달은 동료인 신숭겸, 홍유 등과 더불어 918년 궁예를 축출하고 새로운 국왕으로 왕건을 추대했다.
▲ 파평 윤씨의 재실 봉강재의 내부 전경.(사진/포항시 제공) ⓒ2013 CNBNEWS
왕건의 고려 건국에 대한 공로로 2등 공신에 책훈돼 윤신달에게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관직이 내려졌다.
기계면 봉계2리 운주산에 위치한 윤태사의 묘소는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후손들은 이곳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1일 추향제를 열고 있다.
이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조선 영조 때 창건된 재실 건물인 봉강재는 28세손인 윤광소가 처음 건립했으며 이후 1762년과 1763년에 수리됐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01호로 지정됐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구조재의 짜임새가 세심하게 이뤄진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아울러 1868년 내려진 서원철폐령으로 부서진 봉강서원 자리에 세워진 유허비 역시 파평 윤씨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대표적 문화재로 손꼽힌다.
특히 봉강재 입구에서 묘소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비밀의 정원 같은 산속 풍경이 보인다. 이곳을 찾으면 볼 수 있는 또 다른 눈요기이다. 작은 연못과 그 위에서 노는 오리들이 엄숙하기만 했던 봉강재를 푸근한 쉼터로 바꿔주기도 한다.
이처럼 뛰어난 자연 절경과 문화재가 있으며,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기계면은 각 동네마다 세월의 흔적을 지닌 채 자손들의 복을 빌고 있다.
조상들의 강인한 정신을 이어받아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민중들이 숨 쉬는 곳, 이곳에서 삼태사와 교감해 보는 것은 어떨까? /김희정 기자
ㆍ신라시대 전설·문화유산… 책으로 내 관광상품화(三寶,三奇,八怪)
신라시대 삼기(三奇), 팔괴(八怪), 삼보(三寶)를 아시나요? 이는 세 가지 기이한 물건(삼기)과 여덟 가지 괴이한 현상(팔괴), 그리고 호국과 백성들의 정신통합을 상징하는 세 가지 보물(삼보)을 말한다.
팔괴 중 하나는 경북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야산에 옛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금장대(金丈臺)다. 금장대 아래쪽은 경주의 젖줄인 형산강과 알천이 합류한다. 깎아지른 암벽 위에 세워진 금장대는 신라 제20대 자비왕(458~479) 때 을화(乙花)라는 기생이 왕과 연희를 즐기다 실수로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김동리의 단편소설 ‘무녀도’의 배경이기도 하다. 암벽에는 사람 발자국과 사냥 모습 등의 암각화도 있다.
‘압지부평(鴨池浮萍)’과 ‘백율송순(栢栗松筍)’도 팔괴에 포함된다. 압지부평은 안압지(임해전지)의 부평초가 땅에 뿌리가 닿지 않아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일컫는다. 소나무에는 원래 순이 돋지 않는데 경주 백율사의 소나무는 가지를 치고 나면 다시 새순이 돋아나 이를 가리켜 백율송순이라고 부른다.
경주 팔괴의 하나인 압지부평. 뿌리가 땅에 닿지 않고 떠다니는 모습을 일컫는다.
경주시가 내달 중순 완공 목표로 복원 중인 현곡면 금장대 조감도
이 외에 남산부석(南山浮石·남산의 뜬 돌), 문천도사(蚊川倒沙·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문천의 모래), 계림황엽(鷄林黃葉·움이 트면서 붉은색을 띄는 것이 신비로운 계림의 나뭇잎), 불국영지(佛國影池·영지에 비친 불국사의 전경), 나원백탑(羅原白塔·흰색 화강암의 빛깔이 아름다운 나원리 석탑)도 팔괴로 꼽는다.
삼보는 신라를 지킨 세 가지 보물인데, 황룡사 ‘장육존상’과 신라 진평왕 때 천사가 궁중에 내려와 왕에게 줬다는 ‘천사옥대’, 그리고 ‘황룡사 9층목탑’을 말한다. <삼국유사>에는 ‘고려 왕이 신라를 치려고 하다가 말하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배가 있으니 침범해서는 안된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현존하는 문화재가 아니다. 몽골의 침략으로 불에 탄 장육존상은 현재 황룡사지에 석조대좌만 남아 있다.
삼기는 금척(金尺)과 옥적(玉笛), 화주(火珠)이다. 금척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꿈에 신인(神人)으로부터 받았다는 금으로 만든 자(尺)다. 옥적은 옥으로 만든 피리인데, 죽어서 용이 된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의 혼령이 합해져 신문왕에게 내려 준 만파식적이라는 설도 있다. 화주는 선덕여왕이 지녔던 수정 돋보기다. 햇볕을 비추면 솜에 불이 붙어 화주라고 불렀다.
경주시가 문화유산을 스토리텔링해 최근 펴낸 <신비로운 경주, 삼보 삼기 팔괴>책자. | 경주시 제공
경주시는 16일 신라시대 전설과 문화유적 등을 스토리텔링한 <신비로운 경주, 삼보 삼기 팔괴>라는 책자(50여쪽)을 내고 관광상품화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책은 경주의 전설·설화와 함께 각 문화유산 관련 사진과 삽화가 곁들여져 있다. 경주시 도시디자인과가 제작을 주관했고, 이채경 문화재학예사가 전문해설을 맡았으며 최양식 경주시장이 삽화를 그렸다.
최 시장은 “경주는 돌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전설이 서려있는 노천박물관”이라면서 “문화유적을 널리 알릴 책자 발간에 힘을 보탤 수 있어 뿌듯하다”고 말했다.
경주시는 사라져버린 금장대를 복원(정면 5칸·측면 2칸) 중이며, 내달 중순쯤 완공할 예정이다. 금장대에서는 오는 9월9일 지구촌 문인들의 축제인 국제펜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경주시는 행사 이후 금장대를 일반인에게 개방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단군,고구려,신라,가야역사 신화
위서(魏書)』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지금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서, 아사달(阿斯達)[『산해경(山海經)』에서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였고 또 백악(白岳)이라고도 하였는데 백주(白州)에 있다. 혹은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 이것이다.]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하였으니, 바로 중국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였다.”
『단군고기(檀君古記)』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옛날 환인(桓因)[제석(帝釋)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桓雄)이 있었는데, 종종 하늘 아래 세상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었다. 아버지가 자식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 그래서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고 내려가서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삼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太伯山)[태백산은 즉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다.]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서 그곳을 신시(神市)라고 불렀다. 이 분을 바로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한다. 환웅천왕은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ㆍ생명ㆍ질병ㆍ형벌ㆍ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시켰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신웅(神雄, 환웅)에게 사람이 되고 싶다고 기도하였다. 이때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몸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곰은 삼칠일(21일) 동안 참아서 여자의 몸이 되었지만, 호랑이는 참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혼인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날마다 신단수 아래에서 아기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였고, 웅녀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 분을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한다.
왕검은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기원전 2333)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도 사실이 아닌 듯하다.]에 평양성(平壤城)[지금의 서경(西京)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이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도읍을 옮겼다. 이곳을 궁홀산(弓忽山)[방홀산(方忽山)으로 된 것도 있다.]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 그래서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단군 신화
시조의 성은 박씨,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일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居西干)이다. 이때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으며 나라의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개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觜山)의 진지촌(珍支村)[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진한(辰韓) 6부가 됨.
고허촌의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곧장 가서 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커다란 알이 있었다. 그것을 쪼개자 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기에 거두어 길렀다.
나이 십여 세가 되자 뛰어나고 영리하며 몸가짐이 조신하였다. 6부의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신비롭고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진한 사람들은 박[匏, 조롱박]을 ‘박(朴)’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커다란 알이 마치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으로 한 것이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로 임금을 뜻한다.[혹은 존귀한 사람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신라 혁거세 신화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토해(吐解)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나이가 62세였다. 성은 석(昔)이며, 왕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는데, 이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쪽 1천 리 밖에 있다.
앞서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의 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커다란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였다.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이는 상서로운 일이 아니다. 버리는 것이 마땅하리라.”
그 여인이 알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되는대로 흘러가도록 하였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 해변에 닿았으나, 금관 사람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닿았다. 이때가 곧 시조 혁거세(赫居世) 39년(기원전 19)이었다. 그때 해변에 있던 할머니가 상자를 줄로 끌어올려 해안에 매어놓고 열어보니, 한 어린 아이가 있었다. 할머니가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이 아이가 어른이 되자 키가 9척이 되었으며, 풍채가 빼어나게 훌륭하였고,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이 아이는 성씨를 알 수 없구나. 처음 궤짝이 당도했을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면서 따라 날아왔으니, 까치 작(鵲)자를 줄여 ‘석(昔)’으로 성을 삼도록 하자. 또한 궤짝에 넣어둔 것을 풀고 나왔으니, 탈해(脫解)라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다.”-석탈해 신화
『9년(서기 65) 봄 3월, 임금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도록 하니, 나뭇가지에 금빛이 나는 작은 궤짝이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를 아뢰자, 임금은 사람을 보내 그 궤짝을 가져오게 하였다. 열어보자 그 속에는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뛰어났다. 임금이 기뻐하며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로 준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자라나자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니, 그의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하였다. 금빛이 나는 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金)씨라고 하였다. 시림을 고쳐 계림(雞林)이라 부르고, 이를 나라 이름으로 하였다-김알지 신화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이고, 이름이 주몽(朱蒙)[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이다.
앞서 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지내 대를 이을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어느 날 그가 몰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렀는데, 말이 그곳의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임금은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보게 하니, 금빛 개구리[와(蛙)는 와(蝸)라고도 한다.] 모양의 어린 아이가 있었다.
임금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 아이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주신 아들이다!”라고 하며 거두어 길러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고, 아이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훗날 재상인 아란불(阿蘭弗)이 말하였다.
“어느 날 하느님이 내게 내려와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양이 기름져서 오곡이 잘 자라니 도읍을 정할만 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임금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그 옛 도읍지에는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하면서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에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발견하고, 그 여자의 내력에 대해 물었다. 그 여자가 말하였다.
“저는 하백(河伯)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들과 함께 나가 놀고 있었는데, 때마침 한 남자가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저를 웅신산(熊神山) 아래 압록(鴨綠)강 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였습니다. 사사로이 정을 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의 부모는 제가 중매도 없이 남자를 좇았다고 꾸짖고,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습니다.”
금와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녀를 방 안에 가두었다. 그녀에게 햇빛이 비추었고, 그녀가 몸을 당겨 피하면 햇빛이 또 따라와서 비추었다. 이로 인해 임신을 하여 다섯 되쯤 되는 크기의 알 하나를 낳았다. 임금은 그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다시 길 가운데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고 밟지 않았다. 나중에는 들에 버렸으나 새가 날개로 그것을 덮어주었다.
다 임금은 그것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어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머니가 그것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그 아이는 골격과 외모가 빼어나고 기이하였고, 나이가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에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성숙하였다. 손수 활과 화살을 만들었고,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扶餘)의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 하였으므로 이를 아이의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금와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들의 재주가 모두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맏아들 대소(帶素)가 임금에게 말하였다.
“주몽은 사람이 낳지 않았고 그 사람됨이 용맹스러우니 만약 일찍 처치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없애버리십시오!”
그러나 임금은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여러 말 중에서 빠르게 달리는 말을 알아내어 먹이를 적게 주어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임금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할 때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은 짐승을 훨씬 더 많이 잡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가 또 주몽을 죽이려고 모의하자, 주몽의 어머니가 그들의 계략을 몰래 알아내어 주몽에게 말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할 것이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살지 못하겠느냐? 여기에서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느니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을 것이다.”
王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裹之 置於暖處 有一男兒 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嶷然異常 自作弓矢 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其伎能皆不及朱蒙 其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其爲人也勇 若不早圖 恐有後患 請除之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而減食令瘦 駑者 善養令肥 王以肥者自乘 瘦者給朱蒙 後 獵于野 以朱蒙善射 與其矢小而朱蒙殪獸甚多 王子及諸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而不可 與其遲留而受辱 不若遠適以有爲
그래서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과 벗이 되어 엄시수(淹淲水)[개사수(盖斯水)라고도 한다. 지금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강을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어 그들은 따라오는 병사들에게 잡힐까 두려워하였다.
주몽이 강을 향해 말하였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뒤쫓는 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해야 하는가?”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주어 주몽은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져버려서 뒤쫓던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위서(魏書)』에는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렀다.’고 이른다.] 세 사람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람은 삼베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중옷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마름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물었다.
“자네들은 어떤 사람이며,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삼베옷 입은 사람이 말하였다.
“이름은 재사(再思)입니다.”
중옷 입은 사람이 말하였다.
“이름은 무골(武骨)입니다.”
마름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였다.
“이름은 묵거(黙居)입니다.”
그러나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克氏)를, 무골에게는 중실씨(仲室氏)를, 묵거에게는 소실씨(少室氏)의 성을 주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한다. 마침 세 분의 어진 이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주몽은 마침내 그들의 능력을 헤아려 각각 일을 맡기고, 함께 졸본천(卒本川)[『위서』에서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이른다.]에 이르렀다. 그곳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으로 정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다만 비류수(沸流水)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다른 설로,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을 때 그곳의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비상한 사람인 것을 알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고, 왕이 돌아가시자 주몽이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였다. -고구려 동명성왕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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