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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크리스천 코칭과 반 목회(1)
성경교사들은 인생코치로 일어나라
아르바이트 성경교사
성경교사. 그들은 누구인가? 성경교사를 교회․주일학교‘교사’(敎師)라고도 하고 그전에는‘반사’(班師)라고도 했다.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교사로서의 교사, 아이들을 불러 모아 반을 만들고 반(班) 목회를 통해 아이들을 양육하는 개념으로서의 반사(班師)-두 명칭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교육과 양육 개념이 있는 교사야말로 성경적인 교사상(像)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 제자를 삼으신 것은 바로 두 개념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이다.
지난 세월, 교회 교사들은 이런 사명을 잘 감당해 왔다. 설교집을 구입하고 교육월간지를 구독하면서 잘 가르치려 했고(교육) 항상 아이들과 함께 함으로 그들을 목양하고 관리하고 그들을 선한 곳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목양(양육)의 일념들이 그들에게 있었다. 그래서 주일학교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성장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성경교사는 단지 성경을 가르치는‘아르바이트 선생’으로 전락되기 시작했다. 교사는 단지 주일 공과공부를 위한 20분짜리 아르바이트 선생이 되고 만 것이다. 그 말은 결국 교사의 두 기능 중, 교육만 붙잡고 양육은 놓아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교회교육이 일반교육보다 처지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를 돌보지 않고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교사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교회에서 만나는 교사 역시도 내 개인의 성장보다는 성경을 공부식으로 가르치려는‘선생’들에 불과한데. 그 지겨운 공부를 교회에서도? 아이들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라‘공부’해야 될 과목에 불과했다. 그러자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교사들을 만나러 굳이 교회까지 갈 필요도 없어지면서 주일학교는 내리막의 조짐을 보이게 된 것이다.
주일학교 하향화 현상의 1차 책임은 교사들 자신에게 있다. 스스로를 성경 과외교사로 치부하는 교사 자신들의 아르바이트생 마음자세가 주일학교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소위‘알바’의 특징은 무엇인가? 학생들의 인격형성, 인생관, 세계관 등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야 될 의무도 없다. 알바는 단지 성적을 높여주면 된다. 그 성적은 원하는 대학에, 시험 점수에 해당되는 실력이다. 그 아이가 어떤 자세나 행동을 취하던 별로 관계가 없다. 그 아이가 공부만 잘 하면 되고 과목에 대한 이해와 습득이 빠르면 되는 것이다.
이런 아르바이트생 교사들은 학원 선생들과 흡사하다. 물론 지금의 학원은 강의만 하는 지난날의 선생들과는 많이 다르다. 학원에도 반의 개념이 있고 담임제도가 있다.
그러나 담임제도는 형식일 뿐, 학교에서의 담임의 개념이 아니다. 그들은 아이들이 원하는 대학에 잘 들어갈 수 있도록, 공부에 매진하도록 관리, 감시하기 위한 담임일 뿐이다. 담임에게서 얻어야 하는 인생의 영향력이 거의 없다.
진정한 교사는 학생들의 학과공부를 돕기도 해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학생들을 잘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이나 좋은 성적을 위한‘관리’가 아니라 인생의 꿈이 들어오는 창문-유년시절에 어떤 장래를 계획할 수 있는가, 인생에서 해야 할 일을 결정짓게 될 청소년 시절에 어떤 비전을 세워주어야 하는가? 그런 분야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교과공부 갖고는 안 된다. 아이들 개인에 대한 관심과 돌봄과 지도가 함께 할 때 좋은 스승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대학성적을 위해 좋은 열매를 맺게 해준 아르바이트, 혹은 학원 강사는 고마운, 유익한 선생은 될 수 있어도 인생의 명확한 비전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준‘스승님’은 되지 못한다.
오늘 교회가 그렇다. 교회교사들은 단순히 성경교사인가? 그래서 성경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교회교사는 스스로를 아르바이트생으로 전락시키고 있고 교회는 성경학원에 불과하다. 그들은 스승으로서의 주일학교 교사라기보다는 성경을 전달하는 학원 강사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교사(敎師)와 반사(班師)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교사가 성경이나 전달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는 단지 교사일 뿐이다. 그들은 1주일에 20분외에는 학생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학생들 개인에 대한 비전도 없다. 그냥 교회에서 교사직을 맡겼으니, 혹은 선생님 소리를 듣고 싶다는 호기심 때문에 교사가 된 것이다.
그들은 주어진 공과시간을 위해서 있다. 아이들이 듣던 말든 공과에 나와 있는 내용만 전달하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 성경의 위인들처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자라나고 있는지, 하나님의 언약 아래 우리 학생들이 있는지… 별로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없다는 이야기가 맞을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에서 돌아서면 아이들을 잊어버린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는데, 아르바이트생 교회교사들은 교회 밖을 나가는 순간 마음에 학생들은 남아 있지 않다. 어차피 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왔고 주일학교에 나왔다. 예배와 순서가 끝나면 그 아이들을 교회에 놔두고 떠나가는 것이다. 마음속에 아이들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마음속에 없기에 그들을 생각할 수도 없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도 없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생각해봤자 정성이 들어있지 않기에 열매가 나올 리가 없다. 그래서 더욱 기도하지 않게 되고 아이들 역시 주일에 성경의 씨앗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교사의 돌봄과 기도가 없기에 싹이 나오거나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학교 감소의 1차적 책임을 교사에게 두게 되는 것이다.
가르침과 돌봄 사역
주일학교 교사는 단지 성경교사만이 아니다. 20분 동안 성경을 가르치고 떠나가는 아르바이트생 교사도 아니고 그만큼 교회는 성경학원, 예배학원, 종교학원도 아니다. 교회는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스승들을 보여주는 곳이다. 가르침은 입에서 귀로 전달되기도 하지만 행동에서 눈으로 이어지는 교육도 있다. 이것이 진짜 교육이다. 눈에서 마음으로 이어질 때 감동이 있고 감동을 통해서만 아이들은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보여주는 교육,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교육은 단지 입으로만 전달되는 성경교육이 아니다. 그것은 목양의 길이다. 목양(牧羊)은 돌봄이다. 돌봄은 주일 하루만, 내가 그 아이들을 맡아있는 학기동안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토록 지속되어야 한다. 이런 교육이 반목회이며 목양이다. 목양은 어머니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 어머니는 단지 젖만 준다고 전부가 아니다. 젖과 함께 아이들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 돌봄과 보호와 공급과 사랑스러움과 격려, 기대가 있다. 이런 마음을 고루 갖춘 가슴은 어머니에게 밖에 없다.
(생략)
한국교회의 성장, 특히 도시교회의 성장은 농어촌 출신들에 힘입은 바가 크다. 농촌에서 신앙을 갖고 주일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서울로, 대도시로 올라오면서 충실한 교인들이 되었고 특히 목회자들과 동역했다. 그들은 농촌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함으로 목회자를 하나님처럼 떠받들며 순종하며 헌신하며 목회를 도왔다. 그들 때문에 도시교회는 대형교회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주일학교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지난날 교사강습회의 열성 참석자들이 되어 교회교육을 발전시키는 데 일조한 교사들도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노회 주일학교연합회에서, 전국주일학교연합회에서 주역을 감당했다. 그들이 신학교로 들어가고 목사가 되었다. 그들은 한국교회 부흥의 주역들이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제대로 교육이라도 받았는가? 그들을 가르쳤던 시골교회의 반사들은 겨우 중학교 졸업자들이고 초등학교 출신 교사들도 허다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한국교회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을까? (생략)
코칭(coaching)은 무엇인가?
코치의 개념
성경교사는 코치이다. 코치는 사람들이 현재 있는 위치에서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곳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도자이다. 성경교사는 그들이 처한 현재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원하시는 곳까지 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세움을 받은 직분이다.
운동선수들에게 코치는 절대적이다. 어떤 코치를 만나느냐에 따라 선수로 성공할 수 있다. 박세리를 비롯한 수많은 골프선수들에게서 코치의 중요성을 찾아볼 수 있고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선수들이 세계적인 선수들이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히딩크라는 좋은 감독, 코치를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역시도 그렇지 않은가? 내가 지금 여기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내 일생에 좋은 코치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코치들은 유치원에서 만날 수도 있고, 유년 시절에, 청소년 시절에, 청년 시절에 만난 그 어떤 분일 수 있다. 코치를 만난 곳이 학교일 수도 있고 교회가 될 수도 있다. 또한 어떤 그룹에서 좋은 코치를 대면하게 된 기쁨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코치’라는 말은 교사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핼렌 켈러에게 설리번 선생은 훌륭한 코치였다. 그 코치는 삼중고(三重苦)의 장애가 있는 소녀를 세계적인 명사의 자리로 운반(?) 해주었다. 그래서 코치라는 직분은 훌륭한 일이고 좋은 코치를 만나는 일은 행운이기도 하다.
1500년대에‘코치’라는 단어는, 사람들을 현재 있는 곳에서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마차(馬車)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1880년대에‘코치’는 케임브리지에 있는 캠 강(江)에서 대학생들에게 노 젓는 것을 개인적으로 지도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운동 용어가 되었다. 이런 용법이 그대로 자리를 잡아 코치는 운동선수들을 도와 어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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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CEO는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며 상명하달 식 경영을 하거나, 주변의 진행과정을 모두 인식하고 매사를 지시하는 것이 버겁게 되었다. 이제는 새로운 경영방식을 계발하고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고 더 효과적으로 일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코칭은 상담이 아니다.
이처럼 코칭은 다양한 용법으로 발전되어 왔다. 코칭(coaching)의 이런 배경을 감안해서 정의를 내린다면,‘코칭은 한 개인이나 그룹을 현재 있는 지점에서 그들이 바라는 더 유능하고 만족스러운 지점까지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기술이자 행위’이다(게리 콜린스).
코칭은 사람들이 자신의 비전을 키우고 자신감을 가지며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돕는다. 또한 스스로의 기술을 증진시키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실제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돕는다. 상담이나 치료와 달리 코칭은 덜 위협적이며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사람들이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특징이다.
코칭은 상담이 아니다. 상담이 과거로부터 받은 정서적, 영적 고통의 영향을 극복하기 위한 심리치료라고 한다면, 코칭은 사람들이 비전을 세워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돕는다. 즉, 사람들을 격려하고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를 성장시키도록 돕는 과정인 것이다.
상담이 역행적으로 과거를 돌아보도록 하는 것이라면, 코칭은 주도적으로 앞으로 바라보는 말이다. 상담은 문제해결에 중심을 두지만 코칭은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상담은 상당히 힘든 작업이 될 수 있지만 코칭은 매우 유쾌하며 성취감을 안겨줄 수 있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상담자는 결혼문제를 다루거나 심한 불안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며 어려운 일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반면에 코칭은 원만한 결혼생활을 하는 이들이 더욱 풍성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기쁨과 보람을 찾도록 도와주거나 좀 더 가치 있는 직업을 선택하도록 인도할 가능성이 높다. 비즈니스계에서 코치는 회사가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 더욱 성공적인 경영을 하도록 도울 수 있다.
이를 종합한다면, 코칭은 치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장에 관한 것이다. 상담이 약점을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코칭은 기술과 힘을 기르는데 초점을 맞춘다. 상담이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나눈다면 코칭은 대등한 동반자, 동역자의 관계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밥빌(Bobb Biehl)이 맨토링을“한 사람의 맨토가 그의 제자를 도와주거나 하나님이 주신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평생을 함께 하는 관계”라고 정의했는데 코칭도 맨토링과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크리스천 코치들의 특징
크리스천 코치들도 세속적인 코치들이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기술을 사용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하다.
㉠ 크리스천 코치는 자신과 코치를 받는 사람의 관계에 도입하는 성경적인 세계관이 다르다.
(생략)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며 그분의 백성을 알고 계시며 자기 자녀들을 인도하시며 능력을 부여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간다.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가 가진 열정과 인생의 목적, 내적인 힘, 그리고 미래를 향한 비전을 인식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깨닫고 있으며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살 때에만 궁극적인 만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크리스천 코치에게는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이 그들 존재의 중심에 계시고 하나님이 모든 코칭 사역을 위한 안내자가 되신다.
㉡ 크리스천 코치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 만약에 신실한 크리스천 코치라면 예수님의 관점에서 삶의 모든 측면에 접근하려 한다. 결혼생활과 부모 역할, 생활양식, 가치관, 소비, 시간관리, 직업 그리고 코칭에 대한 시각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영향을 미치며 이는 나아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에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헌신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무언가가 있으며 영적생활에서 무언가가 빠져있고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미지근하게 헌신하면서도 코치로 일할 수 있겠지만 그런 코칭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일 때 나타날 수 있는 능력과 영향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요약본-9월호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