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조선국 사헌부감찰 증 가선대부 예조참판 송공 묘갈명(有明朝鮮國司憲府監察贈嘉善大夫禮曹參判宋公墓碣銘) 병서
옛날 임진년에 왜구(倭寇)가 난리를 일으켰을 때 동래(東萊)의 수신(守臣)으로서 왜적을 맞아 싸우다 의롭게 전사한 이가 바로 송공 상현(宋公象賢)이다.
이에 앞서 송공이 동래로 나가려 할 때에 왜구와 이미 틈이 벌어져 언제 변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동래야말로 왜적과 맨 처음 맞닥뜨리는 지역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그런데 이때 동래공(東萊公)의 부친인 감찰공(監察公)이 아직 늙은 나이로 생존해 있었는데, 공만은 홀로 의연히 말하기를,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직분이다. 죽을 곳이라고 해서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동래공이 결국 관소에 부임하여 죽었는데, 이에 대해 군자들이 말하기를,
“동래공이야말로 진정 열사(烈士)이다. 그 의로운 행동은 본디 가르침을 받은 곳이 있었다.”하였다.
그 뒤 3년 있다가 감찰공도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뒤에 동래공이 원종(原從)의 훈작(勳爵)을 받음에 따라 규례대로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에 증직(贈職)되었다. 36년이 지나 차자(次子) 상인(象仁)이 남원 부사(南原府使)가 된 뒤 비로소 묘갈을 세우려 하면서 나에게 명(銘)을 청해 왔다.
상고하건대 공의 휘(諱)는 흥복(興復)이요 자(字)는 무선(武先)이다. 송씨의 계보는 여산(礪山)에서 비롯되는데, 비조(鼻祖)인 숙문(淑文)은 고려 조정에 벼슬하여 관직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그 뒤 9대를 내려와 휘 익손(益孫)에 이르러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훈(策勳)되고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졌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호(瑚)는 사직서 영(社稷署令)이었고, 조부는 승은(承殷)이고 부친은 전(琠)인데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모친 안동 전씨(安東全氏)는 부장(部將) 원(瑗)의 딸인데 가정(嘉靖) 정해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조모인 박씨(朴氏)의 양육을 받았다. 학문에 정진하면서 문사(文詞)에 공력을 들여 누차 해액(解額 초시(初試) 향시(鄕試))에서 으뜸을 차지하였으며 교제하는 이들이 모두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임자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한 뒤로 여러 차례 대과(大科)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급제하지 못하였다. 만년에 어버이가 늙으신 관계로 은혜를 입고 벼슬길에 올라 평릉도 찰방(平陵道察訪)이 되었고, 몇 차례 옮겨 다니며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와 양지(陽智), 용안(龍安), 평강(平康) 등 3곳의 현감과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다.
경인년에 송화 현감(松禾縣監)으로 재직 중 문과(文科)에 뽑혔는데, 이때 공의 나이는 64세요, 전 부인(全夫人)은 이미 팔순을 넘겼다. 그리고 동래공의 아망(雅望)이 한 시대에 중히 여김을 받으면서 바야흐로 어사중승(御史中丞)에 몸담고 있었으므로 당시에 사람들이 기이한 일이라고 일컬었다.
이듬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가 얼마 뒤에 전 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또 이듬해에 왜란이 일어나자 공이 상복을 입은 몸으로 병란을 피해 호남 고부군(古阜郡)에 우거(寓居)하였는데, 피로와 슬픔이 겹쳐 병이 들어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향년 68세였다. 이에 군(郡) 동쪽 천곡산(泉谷山) 간향(艮向)의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선영의 예에 따른 것이었다.
부인 증 정부인(贈貞夫人)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고려의 명신(名臣) 방경(方慶)의 후예로서 충의위(忠義衛) 승석(承碩)의 딸이다. 부인은 집안을 잘 다스렸고 부도(婦道)가 완벽했는데 나이 71세로 공보다 3년 뒤에 작고하여 공의 묘소에 부장되었다.
슬하에 모두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이 바로 동래공이고, 차남 남원공(南原公) 역시 문과를 통해 조정에 진출하여 대각(臺閣)의 직책을 거쳐 언사(言事)에 걸려 지금의 관직으로 좌천되었다. 사위는 학유(學諭) 장언오(張彦悟)와 생원 한효상(韓孝祥)이다.
동래공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인급(仁及)은 문과 출신으로 예조 정랑이고, 효급(孝及)은 진사이다. 남원공은 2녀를 두었다. 학유에게 아들 둘이 있으니 대생(大生), 극생(克生)이고, 생원에게 아들 셋이 있으니 필진(必震), 필항(必恒), 필승(必升)이다. 내외의 증손으로 남녀 약간 명이 있다.
공은 젊어서 몇 차례나 불운을 당한 나머지 오래도록 급제를 하지 못한다가 노년에 접어들어 대과에 합격하였는데 끝내 현달(顯達)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동래공이 대절(大節)을 수립하여 우뚝 천하 후세에 그 이름이 전해지게 되었는데, 지금도 사람들이 동래공의 훌륭함을 일컬을 때면 반드시 가정의 가르침에 그 아름다움을 돌리곤 하니, 이것이 어찌 이른바 부자(父子) 모두 흠이 없다고 하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이 정도면 명(銘)을 남길 만하다.
명은 다음과 같다.
덕으로 몸 추스르고 / 禔身以德
충성으로 아들 가르침에 / 敎子以忠
부친의 교훈 받들고서 / 子服父敎
나라에 몸 바쳤도다 / 殉國以躬
누군들 아들 없고 / 人誰無子
누군들 죽지 않으랴만 / 亦孰無死
대의 위해 몸바쳐야 / 子死而義
참으로 아들 두었다 하리 / 是謂有子
빛나도다 가문의 명예 / 赫赫家聲
자손 대대로 이어지리니 / 垂之雲仍
뒷날 반드시 보답받아 / 後必食報
나의 이 명 증거하리라 / 吾銘可徵
有明朝鮮國司憲府監察贈嘉善大夫禮曹參判宋公墓碣銘 幷序
粤昔壬辰倭寇之難。爲東萊守臣而抗賊死義者。曰宋公象賢。先是宋公之出東萊也。倭釁已成。朝暮且有變。而東萊當賊初衝。人皆危之。時東萊公之父監察公。尙在已老矣。獨毅然曰。不辭難。臣職也。死將焉避。東萊公竟赴官以死。君子謂東萊公誠烈士。乃其義方之訓有自來云。居三歲。監察公亦卒。後用東萊公原從勳例。贈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副賓客。越三十有六載。次子象仁。爲南原府使。始樹碣于墓。請維銘之。按公諱興復。字武先。宋氏出礪山。鼻祖淑文。仕高麗爲政堂文學。九傳而至諱益孫。策靖難功臣。封礪山君。公之高祖也。曾祖曰瑚。社稷署令。祖曰承殷。考曰琠。皆不仕。妣安東全氏。部將瑗之女。以嘉靖丁亥。生公。少孤。鞠於祖母朴氏。力學攻文詞。屢魁解額。所與交皆名人。中壬子司馬試。自是屢擧輒不第。晩爲親老筮仕。爲平陵道察訪。屢遷宗簿寺主簿陽智龍安平康三縣監,司憲府監察。歲庚寅。由松禾縣監。擢文科。時公年六十四歲。全夫人已踰八十。而東萊公雅望重一世。方爲御史中丞。一時稱以爲異事。明年。棄官歸。無何。丁全夫人憂。又明年。倭難作。公持服避兵。寓居于湖南之古阜郡。勞毀成疾。竟不起。得年六十八。葬于郡東泉谷之山艮向之原。從先兆也。配曰贈貞夫人安東金氏。高麗名臣方慶之後。考曰忠義衛承碩。夫人善內治。婦道甚備。年七十一。後公三歲而卒。祔于公之墓。生二男二女。男長卽東萊公。次南原公。亦以文科進。歷官臺閣。坐言事貶今官。女壻學諭張彥悟,生員韓孝祥。東萊公有二男一女。男仁及。文科禮曹正郞。孝及。進士。南原公有二女。學諭有二子。大生,克生。生員有三子。必震,必恒,必升。內外曾孫男女若干人。公少數奇。久困公車。旣老而獲一第。竟未顯以沒。而東萊公能樹立大節。卓然有聞於天下後世。至今人稱東萊公之懿者。必歸美於庭訓。豈所謂有子考無咎者耶。是可以銘。銘曰。
禔身以德。敎子以忠。子服父敎。殉國以躬。人誰無子。亦孰無死。子死而義。是謂有子。赫赫家聲。垂之雲仍。後必食報。吾銘可徵。
장유 (張維)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 · 묵소(默所). 장례원사의 장자중(張自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목천현감 장일(張逸)이고, 아버지는 판서 장운익(張雲翼)이며, 어머니는 판윤 박숭원(朴崇元)의 딸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5년(선조 39)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당(湖堂: 독서당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다. 이듬해 겸설서를 거쳐 검열 · 주서 등을 지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해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해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봉교를 거쳐 전적과 예조 · 이조의 낭관을 지내고, 그 뒤 대사간 · 대사성 ·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이듬해 신풍군(新豊君)에 책봉되어 이조참판 · 부제학 · 대사헌 등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다.
그 뒤 대제학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했고, 1629년 나만갑(羅萬甲)을 신구(伸救)하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다음 해 대사헌 · 좌부빈객(左副賓客) · 예조판서 ·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1631년 원종추숭론(元宗追崇論)이 대두하자 반대하고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를 지어 왕에게 바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공조판서로 최명길(崔鳴吉)과 더불어 강화론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18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했고, 장례 후 과로로 병사하였다.
일찍이 양명학(陽明學)에 접한 그는 당시 주자학(朱子學)의 편협한 학문 풍토를 비판해, 학문에 실심(實心)이 없이 명분에만 빠지면 허학(虛學)이 되고 만다 하였다. 또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 마음을 바로 알고 행동을 통해 진실을 인식하려 했던 양명학적 사고방식을 가졌다.
이식(李植)은 그의 학설이 주자(朱子)와 반대된 것이 많다 하여 육왕학파(陸王學派)로 지적했으나, 송시열(宋時烈)은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程子)와 주자를 주로 했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고 칭송하였다.
천문 · 지리 · 의술 · 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했고,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 · 신흠(申欽) · 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많은 저서가 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 『계곡만필』 · 『계곡집』 · 『음부경주해(陰符經注解)』가 전한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