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군란?
구세군은 기독교의 한 교파이며 행정과 실천에 있어 매우 두드러진 특성을 가지고 있다. 구세군은 기독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교리를 가지며 신앙신조는 하나님의 인간구원의 목적을 위해 복음을 증거하며 인류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선도와 교육, 가난의 구제, 그리고 기타 자선 및 사회사업 통해 전인적 구원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일하는 기독교 단체이다. 1865년 윌리암 뿌드(William Booth)에 의하여 영국 런던에서 시작된 선교운동은 기독교전도회(Christian Mission)라 불리었고 그후 세계 각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인종, 문화적 배경에 차등없이 평등한 국제적 관계를 가지며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됨을 강조한다.
조직은 준 군대식 제도이며 1878년 그 명칭을 "구세군"이라 하였다. 시대적 요청에 따라 기독교 교회가 이룩해야할 과제가 무엇인지를 민감하게 찾아나가며 이에 부응하고자 노력하는 구세군은 통일성있는 군복과 연합체계로 매우 신속하고 일치된 활동을 펼칠 수 있으며 인간의 구원,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결한 삶, 이웃봉사의 정신을 나타내는 군기, 그리고 사관 및 평신도를 보다 조직화 해주는 계급제도를 가지고 있다.
구세군의 선교와 사회봉사 사업은 세계대장의 권한과 지도력을 따르는 사관(교역자)과 병사(평신도),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수행되고 있으며 또한 여러지지자들과 후원자들이 구세군의 자문위원으로서 보다 높은 사회봉사사업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세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구세군의 사회봉사는 국제적 봉사단체, 각 정부기관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으며 교회로서의 선교적 사명을 수행하는 동시에 불우한 이웃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여 주는 사랑의 실천을 계속해 가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 사람을 바탕으로 우리의 지구촌이 더욱 복된 세계가 되도록 행복한 삶을 건설해 가고자 하는 것이 구세군의 기본 목적인 것이다. (1980년 구세군의 헌장 중)
한국 구세군의 역사
1908년 10월1일. 허기두 사관과 그의 가족들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여명의 나라, 그러나 전혀 알지 못한 낯선 땅 한국에 도착했다.
군기 휘날리며 한국선교 시작
개척 사관들이 가장 먼저 서두른 일은 물론 한국말로 전도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곧 조선말로 군가장(찬송가)을 만들어 예배에 사용하였으며, 제1영(현 서대문영)을 월세 50원을 주고 빌렸다. 이 영문은 11월 첫 주 에는 600명이 모일정도로 엄청난 선교효과를 가져왔다. 1909년에는 이들의 전도로 인해 구세군인이 되었던 임문상 이라는 한국인이 최초의 사관으로 임명 받아 강경리에 파송되게 된다. 이후 계속적인 선교사관의 입국과 한국인 사관의 양성으로 구세군의 전도는 엄청난 속도로 확산 되었으며, 수개의 지방을 개설하고 또한 구세군 영문 건물을 건축하면서 경성(현 서울)을 중심으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그리고 평양 및 신의주까지 전도여행을 통한 교세가 확장됐다. 사관의 필요성 증가로 인해 성경대학(현재의 사관학교)을 개설하고1910년에는 24명의 사관학생을 임관하여 파송했다. 곳곳에 영문이 개척되면서 1925년에는 영문 170개, 사관218명, 병사9천명이라는 한국선교 18년만의 경이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곳곳에서 경이로운 성장
문서선교의 필요성을 직감한 개척 사관들은 1909년부터 '구세신문' 이라는 언론매체를 발간하고 1920년에는 예배를 돕기 위한 구세군가를 발행하고 사관지를 발행하여 목회자료로 사용하는 등 활발한 출판활동이 이루어 졌다.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 라는 구세군의 창립 정신은 또한 사회사업을 시작하게 하였고, 그 첫 사업은 1916년 29명의 걸인 아동을 돌보는 "남자실업관"(서울후생학원)이었다. 곧 빈민 숙박사업, 여자 육아원(혜천원), 여자부양소 (서울여자관)등이 신설되었다. 또 각종 재해구제 및 태풍수해 구제, 한재구제, 지붕개량사업, 급식사업 등 사회봉사활동도 발전하였다. 이를 위해 1928년에는 최초의 자선냄비가 서울 거리에 등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1922년에는 의료선교사업을 시작하였고 이는 이후 이동 진료소, 영동병원 개원(1924)으로 이어졌다. 또한 민중 계몽을 위해 절제운동 및 교육사업을 펼쳤는데, 1921년에는 첫번째 금주호를 2만부나 발간하고 적극적인 금주, 금연운동에 나섰다. 1930년에는 가정 단이 발족되었고 여성들을 신앙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공과도 발행되었다.
거세진 일제탄압, 수난 연속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에는 일본의 탄압이 더욱 거세져 총독부의 강압에 의해 구세군의 조직명칭이 변경되고 신사참배 문제로 여러 사관들이 경찰에 구금되는 등 수난이 이어졌다. 외국인 선교 사관들이 국외로 추방되고 구세군은 구세단으로 개편되었으며 결국 일본 총독부의 종교탄압 정책으로 모든 교회가 강제 병합된 합동교단에 함께 흡수됨으로 그 명맥을 잃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다시 재건되기 시작했다. 이때 돌아온 사관은 99명에 불과했으나 '5개 군국 사업계획'이라는 복음전도 운동에 전념한 결과로 다시 구세군의 교세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터지면서 또다시 역경은 시작되었다. 전쟁기간 동안 노영수 참령을 위시한 몇 명의 사관들이 순교 또는 피살되었으며, 로드부장, 김삼석 고등정위와 김진하 참의 그리고 17명의 후생학원 악대원들이 강제 납북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전쟁동안 구세군 본영은 부산으로 자리를 옮기고 부산으로 몰려있던 피난민을 위한 급식사업, 구호사업 등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전쟁 후 사회 구제사업활발
전쟁 후 다시 서울로 복귀하면서 사관학교도 다시 문을 열었다. 이후 외국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인 전쟁난민구제 사업으로 고통과 슬픔, 가난에 지쳐있던 한국사회에 따뜻한
불빛을 비춰주는 역할을 하였다. 전후 한국 구세군은 부흥과 성장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제발전에 힘입어 자급과 신개척을 향한 비전을 더욱 확대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한국 군국 자급을 꿈꾸며 계획되었던 신문로 구세군 회관이 신축되었고, 지방영문 및 영문은 자급선언을 목표로 열심을 다했고, 병사증가 운동은 모든 구세군 영문에서 더욱 불이 붙어 갔다.
개척운동으로 성장의 불길
1970년대는 한국 구세군사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 사령관이었던 전용섭 부장의 취임의 영향으로 한국 상황에 맞는 선교정책을 시도하고 한국인 스스로 군국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개척운동과 자급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이후1976년 대전 헬몬수양관에서 가진 제 1차 군국성장전략 연구회에서 더욱 구체화 되면서2,000년까지의 성장목표가 세워졌고,이에 대한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를 각 지방으로 파급시켜 나갔다. 이 운동은 그간 몇 차례의 성장전략연구회, 성장개척수련회, 성장 세미나 특히 1997년 용평에서는 처음으로 14개국 89명과 함께 1,300명이 모인 제12차 성장대회가 성령의 뜨거운 불길 속에 "21세기 성년군국을 향한 대도전"을 위한13개 결의문을 채택하고 500개 사업처 조기달성,전영문 병설개설, 3-6-5운동을 통한12만 군우 확보, 대형화영문 6개처 추진, 사역자수급 7백명, 협력 사역자 3백 명을 확보키로 하였으며, 21세기 선교회관 건립을 적극 추진키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1세기 맞아 새로운 도약
선교사업의 발전은 영문 사업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여성 사업부와 청년부 그리고 사회사업 각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자선냄비운동이 매스미디어의 초점으로 떠오르면서 구세군의 사회봉사 활동은 대중에게 많은 호응을 얻게 되었고 구세군은 신뢰 받는 교회로 인식되었다. 교육부분에도 상당한 발전이 있어 평신도의 영적성숙을 위한 "브렝글 성결 수련회"가 개설되었고, 1985년에는 과천에 구세군 사관학교 이전후, 1987년에 사관연장교육으로 "성교신학원"이 창설되어 사관학교 7년궤도가 도입되었으며, 1996년부터 평신도 지도자 육성을 위한 '권역별 수련원'이 개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외에도 영문 복수 정교제 도입으로 개영문 자급과 선교에 큰 활력소가 되었으며, 1989년에는 전국 구세군 정교연합회가 발족되었다. 이제 한국 구세군 선교 100주년이 되는 2008년을 바라보며 구세군의 발걸음은 성령의 축원으로 든든히 나아가게 될 것이다.
세계 구세군의 역사
구세군의 해외선교는 1880년 부터 시작되어 유럽 여러나라와 캐나다에 전파되었고 동양에서는1895년에 처음으로 일본에 전파되었다. 한국에 구세군이 전파된 것은 1907년 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암뿌드 대장의 일본 순회 집회때 참석했던 조선 유학생의 요청에 따라 1908년 10월 1일 허가두 정령일행이 서울에 들어와 서대문구 평동 삼성강북병원 (전 고려병원) 자리에 본부를 정하고 처음가로전도를 시작함으로 한국선교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인 나라를 잃은 민중들에게 제복과 군사적 용어를 사용하는 구세군은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급속한 발전을 하게 되어 1908년 11월 11일에 한국 구세군의 첫번째 영문인 서울제일영 (현 서대문영문)이 당주동에 개영하게 되었다. 그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초대 한국 사령관인 허가두 정령이 8년 재임기간 동안 사관 87명, 병사 2753명, 영문(교회) 78개소를 개척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사회사업은 1918년 한 독지가의 기부금으로 서대문과 충정로에 아동구제시설인 혜천원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1926년에는 윤락여성을 위한 여자관과 교육사업인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24년부터는 재난에 대한 구호를 실시하여 선교에 못지 않게 사회 사업에도 활발한 활동을 펴서 구세군에 대한 관심과 좋은 호응을 같게 하였다.
일제하에서의 선교는 일본의 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탄압이 시작되었고 1940년에는 세계적 조직인 구세군이 스파이 행위로 의심받아 오던 중 1941년 일본 구세군에 의해 구세단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해외 사관들은 모두 귀국 조치 시키는등 일본 구세군에 의해 운영되다가 1943년 새로운 사령관의 부임과 더불어 사업이 재개 되었다. 이때 시작한 의료사업(영동구세병원)은 미국인 리차드 박사의 적극적인 참여로 사회사업에 새로운 장을 여는 듯 했으나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당시 구세군 사령관이던 로오드 부장은 피납되었고, 진주영문 담임사관이던 노영수 참령은 순교 당하는 등 많은 피해를 당하는 수난이 계속되었다.
지금까지 88년간 구세군은 역사의 흐름속에서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교단으로 인식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그동안 20여명의 사령관이 바뀌어 오는 동안 현재에는 230여개의 영문과 110,000여명의 교인 그리고 67여개의 사회사업시설을 운영하는 등 선교와 사회사업에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구세군 교리
1. 우리는 신구약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으며 성서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천의 표준임을 믿는다.
2. 우리는 유일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만이 만물의 창조자, 보존자, 통치자이시며 예배의 참대상이심을 믿는다.
3. 우리는 하나님안에 성부, 성자, 성령의 세위가 있으며 이는 본질상 동일하시고 권능과 영광으로도 동등하심을 믿는다.
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안에 신성과 인성이 합하여 있으며 그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심을 믿는다.
5. 우리는 인류의 시조가 본래 죄없이 창조되었으나 그들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전적으로 타락하여 정결과 행복을 잃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 것을 믿는다.
6.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는다.
7.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새로 나는 것은 구원에 필요한 것임을 믿는다.
8.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얻으며 믿는 자마다 그 안에 증거를 갖게됨을 믿는다.
9. 우리는 구원의 상태의 지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하는 믿음을 계속 가져야 함을 믿는다.
10. 우리는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은 모든 신자의 특전이며 "저들의 심령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다시오시는 날까지 완전하고 흠없게 지켜 주실 것"을 믿는다.
11.우리는 영원한 생명, 육체의 부활, 세상끝의 총심판, 의인의 영원한 행복과 악인의 영원한 형벌을 믿는다.
구세군 자선냄비의 유래
1891년 성탄이 가까워 오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선냄비는 그 첫 종소리를 울리게 되었다. 도시 빈민들과
갑작스런 재난을 당하여 슬픈 성탄을 맞이하게 된 천여 명의 사람들을 먹여야 했던 한 구세군 사관(조셉 맥피 정위)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옛날 영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누군가가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그는 오클랜드 부두로 나아가 주방에서 사용하던 큰 쇠솥을 다리를 놓아 거리에 내걸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렇게 써 붙였다. "이 국솥을 끊게 합시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성탄절에 불우한 이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할 만큼의 충분한 기금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웃을 돕기 위해 새벽까지 고민하며 기도하던 한 사관의 깊은 마음이 오늘날 전세계 100여개국에서 매년 성탄이 가까워지면 실시하게 되는 구세군 자선냄비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오늘날 모든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를 타고 우리 사회 깊숙이 파고들어 모든 이들에게 이웃사랑의 절실한 필요성을 되살려 주고 있으며 모두가 더불어 잘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회만들기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1928년 12월 15일 당시 한국 구세군 사령관이었던 박 준섭(조셉 바아) 사관이 서울의 도심에 자선냄비를 설치하고 불우 이웃돕기를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