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
조선에는 뛰어난 시문으로 중국과 일본 문인들에게 폭발적 관심을 얻으며,
시선 이태백과 견줄 정도의 '하늘이 내린 천재'라는 찬사까지 들었던 여류
시인이 있었다. 본인보다는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작자인 허균의
누나로 더 잘 알려진 허난설헌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그녀의 문집을 발간하려는 경쟁이 붙어 종잇값이 뛸 정도
였고, 사신들은 조선에 올 때마다 그녀의 시편을 수집하기 위해 열을 올렸으
며, 그들이 귀국하면 중국의 문인들이 몰려와 수집한 그녀의 시를 보여달라
고 간청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후일 그녀의 이름은 일본에까지 알
려져 번역시집이 나오고 널리 암송되었다 하니 가히 '동양 문학게의 히로인'
이었다
이러한 인기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경을 넘어 이어진다. 그녀의
작품들이 조선시대 고금여사, 열조시집 등 10여종의 중국 문헌에 실려 북경
소재 국가도서관에 고스란히 소장되어 있는 가운데 중국 최고의 대학인 북
경대 조선어학과에서 허난설헌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지거나 학생들의 박사
학위 논문에 소재가 되기도 한다.
또 중국에서 편찬되는 시집에 그녀의 시들이 수록되어 낭송되고 있으며,
매년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국제 학술세미나에서는 한중일 3국의 학자들이
나란히 참석해 난설헌의 삶과 작품들을 재조명한다.
허난설헌은 1563년 강릉의 엣 지명인 임영 초당마을에서 3남 3녀중 셋
째 딸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홉 살경 아버지의 벼슬 생활을 따라
상경해 한양의 건천동에서 생활하던 중 열다섯 살에 출가한다. 불행은 이때
부터 시작되었다. 남편 및 시어머니와의 불화가 계속되었고 마지막 버티목
이던 어린 딸까지 잃고는 스스로 말한 세 가지 '좁은 조선 땅에서'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 김성립이란 사내와 결혼한 것'을 가슴속 한으로 품은 채 젊디
젊은 27세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조선 후기 야담집<대동패림>에 따르면, 당시 그녀는 아무런 병이 없었음
에도 어느날 갑자기 깨끗이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올해가 3.9수에 해
당되는 해로, 스물일곱 송이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물든다"고 말한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또한 임종 3년을 앞두고 월궁에 다녀온 꿈울 꾼
후 지었다는 <몽유광상산>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듯한 내용이라 신비
롭기만 하다.
푸르른 물결은 구슬 같은 바다를 적시고(碧海浸瑤海/벽해침요해)
파란 난새는 오색찬란한 난새와 어울리는데(靑鸞奇彩鸞/청난기채난)
부용 스물일곱 송이가 휘늘어진채(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붉은 꽃잎이 떨어지니 달빛 속 서리만 차다.(紅墮月霜寒/홍추월상한)
**芙蓉三九㚓의 3.9는 27세를 합한 9수를 뜻함**
이처럼 처연한 회한을 남긴채 요절한 난설헌이지만, 결혼하기 전까지는
비교적 자유분방한 가풍을 가진 명문가에서 꿈 많은 문학소녀로 자라났다
전해오기를 '외모가 출중하고 천품이 어질었으며, 시문뿐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났다' 고 하니 그야말로 재색을 겸비한 대갓집 규수였던 그녀였다.
왕실의 여인들에게조차 언문과 기본적인 경서 이외에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던 시절이었음에도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를 보인 그녀는 아버지의 묵인
아래 남자 형제들과 함께 글공부에 참여할 수 있었다.
특히 동복 오빠인 허봉이 자신의 친구 이달에게 동생들의 시문교육을 부탁
한 것은 이례적일 수 있었다. 남녀가 유별하던 때, 그것도 서얼 출신에게
여동생의 교육을 맡기는 것은 가히 파격적이었다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난설헌은 동생 허균의 시 작품들을 고쳐주고 조언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허균은 "누님의 시와 문장들은 모두 하늘이 내려준 거다
시어가 한없이 맑고 깨끗해 사람의 솜씨라고는 믿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 가운데서도 사륙문(四六文:중국 육조시대에 유행하던 문체)이 가장 아름
다웠다. 누님은 신선과 같은 성품을 지녔는데 머리에는 늘 화관을 쓴 채 방
안에 향을 피워놓고 서안앞에서 시문을 읊곤 했다"고 난설헌을 회고한다.
난설헌과 관련된 또 하나의 파격은 그녀의 이름에 관한 것이다. 당시는
여인들이 이름을 가져서는 안 되는 시대였다. 어린 시절에는 이쁜이, 곱단이
언년이, 별이, 간난이와 같은 아명(兒名)이나 누구의 여식(女媳), 누이 등으로
불리다가 결혼 후 뉘집 부인, 며느리, 아무개 자당, 무슨댁 정도면 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는 당당히 본명(本名:허초희(許楚姬))과 호 난설헌(蘭雪
軒)은 물론 자 경번이라는 자까지 갖고 있었다.
이 중 가장 잘 알려진 난설헌은 '눈 속에 난초가 피어 있는 집'이라는 의미
로 무언가 신비스런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본명 초희/楚姬의 '희'는 고대
중국에서 녹봉을 받던 여자관리(女官)를 지칭했으니 곧 초나라의 여자관리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나타낸 것인데 지금 들어도 참 세련된 이름이다.
이제 이야기를 결혼 이후로 돌려보자. 난설헌의 시댁은 5대째 대과에 내리
급제한 안동 김씨 명문가였다. 둘째 오빠 허봉과 시아버지 김첨이 동문수학
하던 인연으로 이루어진 혼인이었다. 남편 김성립은 그녀가 사망하던 해에
28세 나이로 과거에 합격하고 남양 홍씨와 재혼했지만, 결국 자식을 얻지 못
해 양자를 들였다. 3년 후 발발한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출진해 전사했으며,
시신을 수습하지 못함에 따라 생전에 입었던 의복만으로 장사를 치렀는데
이때의 벼슬은 정9품 홍문관 정자였다. 열하일기로 유명한 실학자 박지원은
'본시 규방에서 시를 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녀의 이름이 대국까지
미쳤으니 유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의 부인들은 일찍이 이름이나 자를
갖지 않았던 만큼 난설헌은 호 하나만으로도 과분한 일이다. 후세에 재주
있는 여인들은 이를 잘 살펴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라고 말 할 정도
였었으니.................
난설헌의 생가터는 초당동에 자리하고 있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어
항시 적막한 분위기다. 아니 그 위치조차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주변에는 최근에 세워진 조그만 동상 하나와 몇몇 자료들이 비치된 허균.
허넌설헌 기념관이 조촐하다. 어쩌다 찾는 사람마저 휭하니 둘러보고는 울
창한 소나무 숲을 나와 "공기 좋다" "경치 끝내준다"고 붙이는 감탄사가 고
작이다. 승용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신사임당의 오죽헌이 늘 붐비는 관
광객을 맞이하고 수학여행의 고정 코스가 된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아무리 개인적인 역량이 뛰어나 국제적인 문인이 되었다고 해도 가부장 사
회에서 변변한 아들 하나 두지 못하고 친동생의 정치적 실패로 가문이 몰락
한 결과를 후세에까지 감수해야 하는가 보다. 자신의 처연한 숙명을 일찍이
예견했는지 난설헌은 다음과 같은 서럽고도 구슬픈 노래를 남겼다.
고택에는 대낮에도 오가는 이 없고(古宅晝無人/고택주무인)
뽕나무 위에 부엉이와 올빼미만 슬피 우네(桑樹暝鵋鶹/상수명기류)
옥섬돌엔 차가운 이끼와 넝쿨만 무성하고(寒苔蔓玉砌/한태만옥체)
빈 누각엔 새들만이 깃들어 있네(鳥雀樓空樓/조작루공루)
그 옛날 수레와 마차 바삐 오가던 곳(向來車馬地/향래차마지)
이제는 여우와 토끼들만 나드는 언덕이 되었구나(今成狐兎丘/금성호구)
이제야 알겠도다 선현들이 하신 말씀(乃知達人言/내지달인언)
부귀는 내가 구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富貴非吾求/부귀비오구)
첫댓글 난설헌은 죽을 때 자신의 글이 담긴 책을 모두 태우라고 유언을 했는데
태워진 책이 방 하나를 가득 채울만큼 많은 분량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남겨져 있는 것은, 허균이 당시 갖고 있던 것과 중국에 있던 것으로
그녀의 작품 중 소수에 불과하다고 해요.
난설헌의 시는 신선의 세계에 살고 있는 듯, 선계를 묘사한 시가 많지요.
허난설헌은 황진이, 이매창과 함께 조선의 3대 여류시인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허난설헌이 대단한 여인인건 알았는데 이렇게 또 다시 읽게되니.감회가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
6번째,兎(토)자가 빠졌구만요!
ㅎㅎㅎ 무서워~~~~
숙아 참~표현 잘했다.ㅎㅎㅎ
토끼가 무서우면, 호랑이는 자물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