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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분 / 한글자막>
전설의 시발점이 되었던 글렌 굴드의 1957년 러시아 공연
철의 장막을 사이에 두고 동서 양진영의 갈등이 최고조에 다다랐던 무렵인 1957년 5월, 창백한 얼굴을 지난 캐나다의 한 젊은이가 모스크바의 대중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당시 소련에서 거의 금기시되었던 바흐의 작품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반신반의하며 앉아있던 관객들은 조금씩 그의 마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인터미션 때 관객들은 공중전화를 향해 달려갔고, 공연 후반부는 정원 이상으로 빼곡히 채워진 관객들의 뜨거운 열기 속에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글렌 굴드의 전설은 시작되었다. 당시 그의 연주를 경험했던 러시아 각계의 인사들은 지금까지도 그때의 신선한 충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요시프 페이진버그의 음악 다큐멘터리 <글렌 굴드 - 러시아 여정>은 글렌 굴드의 등장이 러시아 각계에 안겨주었던 문화적 충격을 다양한 각도에서 반추하고 있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그가 가졌던 연주회와 강연에 관련된 여러 희귀 자료들과 당시를 증언하는 로스트로포비치와 아슈케나지를 비롯한 다양한 인사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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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캐스트 2009년 5월 7일자 발행, 글 이상용>
[인물 세계사]
캐나다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Glenn Herbert Gould, 1932. 9.25 ~ 1982.10. 4
모스크바 주립음악원의 그랜드 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글렌 굴드는 익히 연주해온 프로그램들을 선보였다. 바흐의 <푸가의 기술> 중 몇 작품과 파르티타 6번 마(E)단조, 베토벤 소나타 30번 작품 109, 그리고 베르크의 소나타였다. 청중들은 굴드의 연주에 얼어붙은 듯했다.
러시아인들은 그토록 생동감 넘치고 파격적으로 바흐와 베토벤을 연주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베르크의 소나타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12음 기법 작곡가들의 음악이 퇴폐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연주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냉전의 침묵을 깨는 최초의 북미인이자 캐나다인이라는 영광
1957년의 소련 정부는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캐나다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서방과의 교역을 추진하면서 ‘철의 장막’을 조금은 열 때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피아니스트를 초대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상징적으로 글렌 굴드는 냉전의 침묵을 깨는 최초의 북미인이자 캐나다인의 영광을 차지했다. 모스크바에서의 연주는 글렌 굴드 개인에게 유럽의 순회연주를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다. 첫 연주회에서 그는 수 차례의 앙코르와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스웰링크의 환상곡과 그를 유명하게 만든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10곡을 연주해야 했다. 러시아에서의 일정은 연주와 강연으로 계속 이어졌으며 이 성공은 베를린으로 이어졌다.
1957년 5월 24일, 25일, 26일 사흘 동안 굴드는 베토벤 협주곡 3번 다(C)단조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하였다. 글렌 굴드의 표현을 따르자면 카라얀이 내뿜는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힘”에 단박에 끌렸다. 두 사람은 이후 서로의 예술에 대해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이 공연은 글렌 굴드의 명성을 한층 더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쇤베르크의 전기를 쓴 유럽의 주요 비평가이자 작곡가인 H.H.슈트켄슈미트는 다음과 같은 비평을 썼다. “그의 연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경지에 도달해 있다. 양손 모두 유려한데다 자유자재한 역동성, 다양한 색채감이 결합되어 부조니 시대 이후 볼 수 없었던 대가의 경지를 보여준다.”
1960년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리허설에서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왼쪽)과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오른쪽)와 함께한 글렌 굴드
유럽 순회공연의 종착지는 빈이었다. 빈으로 가는 도중에 손가락을 다치는 사고가 있었지만 6월 7일에 있었던 독주회는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빈 연주 이후 글렌 굴드는 여행을 계속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빈에서는 대부분의 음악당이 연주회 중이어서 연습을 할 장소가 없었다. 그는 다시 토론토로 돌아갔다.
글렌 굴드는 1932년 9월 25일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음악교사일을 했고, 어머니는 굴드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굴드가 세 살 되던 해 그는 악보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소위 절대음감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섯 살 때 그는 작곡을 시작했고,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조그마한 작품을 연주했다. 여섯 살 때에 굴드는 요제프 호프만의 마지막 토론토 연주회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이 연주회는 소년 굴드에게 깊고 중요한 인상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10살이 되던 해에 굴드는 토론토의 로얄 콘서바토리에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굴드는 또한 프레데릭 실베스터에게 오르간을, 레오 스미스에게 음악이론을 배웠다. 그는 12살 때인 1944년, 음악원을 수료하고 키바니스 음악 페스티벌의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였다. 1945년에는 로얄 콘서바토리의 독주자 종합시험을 통과하여 완전한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수준에 도달했음을 인정받게 된다. 굴드가 14살 되던 1946년 그는 음악이론 시험에 합격하고 최고 성적으로 졸업장을 수여받았다.
10대의 굴드에게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은 아루투르 슈나벨과 로잘린 투렉의 바흐 녹음 그리고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였다. 1946년 그는 로얄 콘서바토리에서 베토벤의 4번 협주곡을 연주하여 독주자로 데뷔한다. 이 연주에 대해서 굴드는 그 자신이 슈나벨의 녹음을 2년이 넘도록 소유하면서 듣고 있었다. 굴드의 공식적인 첫 번째의 리사이틀은 1947년에 스카를랏티, 베토벤, 쇼팽 그리고 리스트로 구성된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졌다. 마침내 1955년 1월 11일 저녁 굴드는 뉴욕 데뷔 연주를 가졌다. 일부에서는 이 연주회가 성공적이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입장권 판매는 미미했고 전문가들도 그리 많은 참석을 하지 않았다. 글렌 굴드가 국제적인 스타가 된 것은 바로 전날에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굴드와 함께 실내악을 연주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산더 슈나이더는 데이비드 오펜하임의 전화를 받았다. 오펜하임은 컬럼비아 음반사의 녹음부 책임자였고, 새로운 피아니스트를 찾는다며 자문을 구했다. 슈나이더는 “애석하게도 살짝 미치기는 했지만 피아노에서는 사람들의 넋을 빼앗을 만큼 놀라운 연주를 해내는 인물”이라며 글렌 굴드의 공연을 알려주었다. 그 덕분에 오펜하임은 글렌 굴드의 데뷔 연주회에 참석할 수가 있었다.
1955년 충격적인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과 '괴짜 글렌 굴드'
글렌 굴드는 뉴욕 연주회 다음날 컬럼비아 음반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1955년 6월의 어느 한 주 동안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컬럼비아 녹음부와 함께 뉴욕 이스트 30번가에 있는 오래된 교회에서 녹음 했다. 이때에 선보인 굴드의 기괴한 모습은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굴드는 외투에 베레모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까지 끼고 나타났다. 그의 ‘장비’는 통상적인 악보 뭉치와 수건 묶음, 큰 생수 두 병, 작은 알약 다섯 병, 그리고 이후 굴드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애용품으로 유명해진 피아노 의자였다.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연주할 때 몸의 각도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 굴드는 두 손을 20분간 더운 물에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수건으로 손을 닦아 냈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도취된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컬럼비아의 녹음 기술자들은 굴드의 허밍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 음반은 레코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반 중의 하나가 되었고 발매 당시에도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오늘날까지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굴드가 연주때마다 항상 가지고 다녔던 피아노 의자의 복제품
굴드의 바흐 연주는 당대의 음악적인 분위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는 낭만주의 음악들이 인기를 누렸고, 당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이 낭만주의자들의 기교가 넘치는 연주를 선호했다. 바흐 연주에는 뛰어난 업적을 남겼지만 글렌 굴드가 선택한 낭만주의 음악 연주를 들어보면 상대적으로 흥미롭지가 않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바흐를 연주하는 것은 새로운 모험이었고, 영미권에서는 지루해하던 바흐의 연주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작업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굴드는 농담처럼 자신의 연주를 <굴든베르크 변주곡>이라고 불렀다.
굴드가 처음으로 대위법을 접한 것은 12,3세 때였다. 바흐가 아니라 모차르트의 C장조 푸가 K. 394를 통해서였다. 하루는 그가 이 곡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가정부가 피아노 옆에서 청소기를 틀었다. 그러자 연주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 순간 굴드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감했다고 한다. “촉감으로 느낄 수 있는 이 푸가의 현존은 손가락의 위치로 표현되지만, 또한 우리가 샤워를 할 때 얻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음향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젖은 머리를 흔들 때 양쪽 귀로 물이 흘러나오면서 나는 소리, 그것은 상상이 미치는 한 가장 근사하고 가장 자극적인 무엇, 가장 특별한 소리였다.” 대위법이 풍성한 바흐에 관한 해석은 <파르티타>를 비롯한 여러 연주로 이어졌고, <골드베르크 변주곡>도 여러 차례 녹음이 되었다. 1957년에 행한 짤즈부르크 실황 녹음도 있고, 1981년에 소니에서 녹음한 판본도 있다.
굴드가 스튜디오 레코딩에 앞서 스타인웨이 피아노 저장소에서 녹음에 쓸 피아노를 연주해 보고 있다.
그는 연주에 도취되어 노래를 부르곤 했다.
"나는 콘서트 보러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뛰어난 연주자가 연주회보다는 레코드 음반을 선호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콘서트를 비난했던 가장 큰 이유는 청중의 존재로 인해 연주가 왜곡된다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도 많지만 한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레코드형 인간입니다. 나는 콘서트 보러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콘서트를 들으러 갈 때에는 늘 지나치게 긴장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레코드를 듣고 있을 때에는 편안한 상태가 됩니다. 실제로 나는 거의 레코드로만 음악을 듣습니다. 레코드는 음악을 즐기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긴장과 모든 문제를 의식하지 않는, 프로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레코드가 절대로 완벽하게 콘서트를 대신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는 1964년 4월 10일 LA에서 피아니스트로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이후 콘서트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는 1982년 10월에 사망했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글렌 굴드는 녹음을 하거나 연주를 하는 동안 굴드는 특유의 허밍 소리를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1981년도 녹음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고 있노라면 피아노 건반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의 허밍 소리를 접하게 된다. 그것은 또 다른 음의 영역이자 마르지 않는 글렌 굴드의 신화가 퍼져 나가는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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