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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두계 이병도씨의 고백을 기록해 놓고 싶었다. 단군을 신화로 치부했던 그가 말년에 단군은 역사적 사실임을 고백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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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
단군(檀君)은 신화(神話)아닌 우리국조(国祖)
"역대왕조(歷代王朝)의 단군(檀君)제사 일제(日帝)때 끊겼다"
원로(元老) 문헌사학자(史学者) 이병도(李丙燾)씨 본지(本紙)특별기고(寄稿)
"요(堯)와함께 개국(開国)…기자(箕子)보다 앞서 입국(立国)"
삼국사기(三国史記) 이전 고기(古記)등 기록(記録) 믿어야
웅녀(熊女)는 곰 토템족(族) 여자‥‥천신족(天神族) 환웅과 결혼
구월산(山)은 궁궐(宮闕) 있던 궐산(闕山)의 장음화(長音化)된 이름
진설도(陳設図)-세연가(世年歌)등 물증(物証)많아
이병도(李丙燾)
대체 천(天)이란 말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천(天)을 군장(君長)의 뜻으로 해석할때에는 개천절(開天節)은 즉「군장(君長)을 개설(開設)한다」는것이 되므로 개국(開国),건국(建国)의 뜻이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개천(開天)은 즉 최고(最古) 시조인 단군(檀君)의즉위와 개국(開国)을 의미하는 개천(開天)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삼국유사(三国遺事) 기이(紀異) 제1권의「고조선(古朝鮮)(왕검조선(王儉朝鮮))」조(條)에 의하면『단군왕검(檀君王儉)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고 국호(国号)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고 했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桓雄)이「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理念)을 가히 실현확만하므로 하늘이 그를인간세계에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니 환웅(桓雄)이 무리 3천을이끌고 태백산정(頂) 신단수하(神壇樹下)에내려와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그를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하게 되었는데,그는 풍백(風伯)(풍신(風神))우발(雨㤄)(우신(雨神))운발(雲㤄)(전신(電神))의 삼신(三神)을 거느리고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형(主刑) 주선악(主善惡)등 무릇 인간삼백육십여사(人間三百六十余事)를 주관(主管)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이것은 일견지상국가를 천상국가의 한연장으로 관념(観念)한데서 생긴신화와같이 보이나 이 신화를 검토하면 환웅(桓雄)천왕의 존재는 실상 지상국가를 개창한 군장(君長)이라기 보다는 인간사회의 백사(百事)를 주관하는 수호신적(守護神的)성격을 가진 존재임을알 수 있다.
서낭당은 천왕당(天王堂)
이 수호신(守護神)의 주처(住処)는 곧 신단수(神壇樹)로 이것은 지금 민속(民俗)중에 생생히 남아 있다.다시말하면 지금의 서낭당이 그것이니 선왕당(仙王堂)(서낭당)은즉 천왕당(天王堂)인 것이다.이 서낭당의 나무가 곧 신단수(神壇樹) 그것이고 그 밑의 돌무더기가신단(神壇)이다.그리고 옛날에 이신단(神壇)을 중심으로 한 부락이신시(神市)였던 것이다.
신단수(神壇樹)는 실상 원시사회의수목숭배(수목숭배(樹木崇拜))에서 시작되어 처음에는 수목(樹木)자체가신(神)그것이었는데,그후 변천하여 신단수(神壇樹)는 천신(天神) 천왕(天王)의 강하계단(降下階段),혹은 천왕(天王)의 주처(住処)또는 그것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하고 옛날의국호(国号)는 대개 도읍지의 이름과 일치하므로 단군의 도읍지라고하는 아사달(아사달(阿斯達))이 정작 국호였고 조선(朝鮮)은 후에 이르러「아사달(阿斯達)」을 아역(雅訳)한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서울대(大) 논문집(사회과학(社会科学))제2집에「아사달(阿斯達)과 조선(朝鮮)」이란졸고를 통해서 자세히 발표하였다.환웅천왕이 웅녀(熊女)와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이야기가 고기(古記)에 전하여오지만여기의 웅녀는 고기(古記)에는 웅(熊)이 여신(女身)으로 화(化)한것이라 하나 이는 웅(熊)(곰)토텔족(族)의 여자로 해석하여야 옳다고 나는 연래(年來) 주장해 오고있다.
즉 웅(熊)을 신성시(神聖視)하여 자기의 조상이 곰에서 나왔다하여 종족의 칭호로 삼던 족속의 여자란 뜻이다.그리고 보면 웅녀는 지상족(地上族)이라 할 수있고 이에 대하여 환웅은 천상족(天上族) 천신족(天神族)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단군은 즉 이 천신족(天神族)과 지신족(地神族)과의 결혼에서 생긴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0월3일(음력)을개천절(開天節)이라하여 단군(檀君)의 개국일(開国日)로 기념하여온데는 역시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원래 십월절(十月節)은 종교적으로나 민속적으로 큰의의를 가진 달이다.
즉 4월절(月節)은 4계절의 하나로서 계절과 농업과는 큰관계를 가졌으므로 고대 농업사회에서는「계절(季節)」이란것을 상당히 중시하였다. 그래서 계절마다 부락공동체의 종교적 대제전(大祭典)이 행해져 신인공락(신인공악(神人共樂))의 놀이를 하였던 것이다. 이를 계절제(季節祭)(Season festival)라고 하는것인데 계절제 중에도 더 중요시하는 것이 낙종(落種)(하종(下種))시의 계절제와 추수기의 계절제였다.
이 두 계절제는 어느 계절제보다 더 중요시하고 따라서 그 의식도 성대하였다.전자는 즉 신(神)에게 연사(年事)의 풍등(豊登)을 기원하는것,후자는 수확에 대한 감사제 혹은 천신제(薦新祭)로서 서양에서는 이것을「T—hanks giving」이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행하고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낙종기(落種期)의 제전(祭典)을 오월(五月)에,추수기의 그것은 10월에 행하여 군중이 한데 모여 천신(天神)에게 제사하고 가무(歌舞)와 음주(飮酒)로 주야를 쉬지않고 즐겁게 놀았는데(군민(君民)이 동락(同樂)하였는데) 이 제사를 수리라고 했던 것 같다. 후세에 5월 단오(端午)를 수릿날이라하여 수리취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여러가지의 놀이를하며 십월(十月)을 상달이라 하여 초생에 집집이신(神)에게 고사하고,선조무덤에 시제(時祭)를 지내는 풍속이 있지만 이야말로 옛날로 부터 내려오는 오월제(五月祭) 십월제(十月祭)의 유풍(遺風)이라할 것이다.
「상달」은「수리달」
「수리」란 말은 상(上), 고(高), 산(山), 신(神)등을 의미하는 고어(古語)로 그어원은「솟」 「소슬」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보면10월을 상달이라고 하는것도 즉 「수리달」의 역(訳)으로 볼 수밖에 없다. 부여(夫余)의 영고제(迎鼓祭), 고구려(高句麗)의 동맹제(東盟祭), 동예(東濊)의 무천제(舞天祭)가 다 이러한 추수감사제인 것은 더 말할것도 없고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연등대회(燃燈大会), 팔관대회(八関大会)도 춘동이기(春冬二期)의 국가적 대제전이었지만 그중에도 가장 성대하던것이 중동팔관(仲冬八関)이었다. 그런데 최근세 갑오경장 이후로 민족의식 민족정신이 앙양됨에 따라이 10월절의 고속(古俗)을 갱생시켜 이로써 단군립국(檀君立国)의 개천절(開天節)을 삼은것은 오랜 전통에 기인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민속에 흔히 음력10월초생 특히 3일에 「고사」를 지내왔다는데 왜 3일을 택했느냐하면 3이란수는 세계적으로 널리 애용되는 수인 까닭이다.3은 정족(鼎足)의 수인만큼 안정감을 가진것이니 1이나 2는 실상 불안정감(不安定感)의 수이다.
일제의 멍에를 벗고 해방이 되자 그해로부터 개천절을 우리의 전민족적 국경일로 삼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행하여 오다가 정부수립후에는 양력10월3일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 말한것들은 졸저 「두계잡필(斗溪雑筆)」에 이미 말한 바있다. 그런데 현정회이사(顯正会理事) 이희수(李喜秀)씨가 1977년 10월「현정지(顯正誌)」에「사서상(史書上)에서 본 국조단군(国祖檀君)」이라는 제목하에서 삼국유사(三国遺事)의 저자 일연(一然)이 지금은 없어진「고기(古記)」와 「구삼국사기(旧三国史記)」와 현존 위서(魏書)와는 다른 또 하나의 위서(魏書)의 단군기사(檀君記事)에서 인용하였다고 그 출처를 밝히고 있을뿐 아니라 사대(事大)의 입장에서 기술한 삼국사기(三国史記)의 저자 김부식(金富軾)도 삼국이전의 사기(史記)를 의식적(意識的)으로 피하려고 하면서도 여러곳에서 고조선(古朝鮮)과 단군에 관하여 언급했다고 주장한바 있다.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三国史記)에서 단군에 관한 기재(記載)를 제외하였지만 동서권십칠(同書卷十七) 고구려본기오(高句麗本紀五) 동천왕이십일년춘이월조(東川王二十一年春二月條)에「왕이환도성경난불가복도축평양성이민급묘사평양자본선인왕검지택야혹운왕지도왕검(王以丸都城經乱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이라고 하였다 (혹운(或云)이하의 왕지(王之)는 왕(王)노릇을 하였다는 동사(動詞)로 읽어야하고 「도왕검성(都王儉城)」의 도(都)도 동사로 읽어야 할것을 잘못 「왕지도왕검(王之都王儉)」이라고연서(連書)하였다). 그뿐아니라 이때의 평양(平壤)은 지금의 평양(平壤)이 아니라 고구려(高句麗)의 황성(黄城)(황성(皇城) 즉 환도성(丸都城))의 대안(対岸)인 동황성(東黄城)(금강계(今江界))인 것이다. 지금의 평양(平壤)에는 아직도 이때 낙랑군(樂浪郡)이 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선인왕검지택(仙人王儉之宅)」이라고 한 평양(平壤)은 후일의 평양(平壤)(지금의 평양(平壤))의 지칭이므로 전후자(前後者)를 혼농하여서는 안된다.
당시 평양(平壤)은 다른곳
김부식(金富軾)과 같은 사가(史家)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고성기자지택(古聖箕子之宅)이라고 하지않고 선인왕검지택야(仙人王儉之宅也)라고 한것은 김부식(金富軾)의 머리속에 지금의 평양(平壤)이 선인왕검(仙人王儉)의 도을지인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史実)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외사서(内外史書)들이 한결같이 지금의 평양(平壤)을 왕검성(王儉城)이라고 하는데는 이의(異議)가 없었던 것 같다.
김부식(金富軾)이 고기(古記)를 인용한부분을 보면
① 사기지리지고구려조(史記地理志高句麗條)에서「고기운주몽자부여도난지졸본칙흘승골성(古記云朱蒙自夫余逃難至卒本則紇升骨城)」② 사기(史記) 지일(志一) 제사조(祭祀條)에서「고기운온조왕이십년춘이월설단사천지(古記云温祚王二十年春二月設壇祀天地)」③ 사기(史記) 열전(列伝) 김유신상(金庾信上)에서 김춘추(金春秋)가 강화(講和)하려고 고구려(高句麗)에 갔던 기록 가운데 주석을 달기를「차여본언진평왕(此与本言眞平王) 십이년소서일사이소이이개고기소전고양존지(十二年所書一事而小異以皆古記所伝故兩存之)」라고 하였다.
여기서 보면 고기(古記)에는 단군기사(檀君記史)가 기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기록이 고구려(高句麗)에 김춘추(金春秋)가 갔던 서기(西紀) 64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김부식(金富軾)이 사기(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동천왕(東川王) 이일년서이월조(二一年書二月條)에서 「평양(平壤)은 본래 선인왕검(仙人王儉)의 택(宅)」이라고 한 것은 역시 고기(古記)이거나 단군기(檀君記)를 인용한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리고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三国史記)에서 신라(新羅)의 육촌(六村)도 조선(朝鮮)의 유민(遺民)이 산간(山間)에 와서 자리잡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三国史記) 권제일신라본기제일(卷第一新羅本記第一)에보면「시조성(始祖姓) 박씨(朴氏)…즉위거서간시년십삼국호서나벌선시조선유민분거(即位居西干时年十三国号徐那伐先時朝鮮遺民分居) 산곡지간위육촌(山谷之間爲六村)」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일연(一然)이 인용한 고기(古記)의 단군기재(檀君記載)를 근거있다고 볼 수가 있으며 거듭 언급하지만 김부식(金富軾)이 평양(平壤)이 선인(仙人)(단군(檀君))왕검(王儉)의 택(宅)이라고 명기한데서 고기(古記)가 단군기사(檀君記事)를 실재(実載)하였다고 볼수가 있다.일연(一然)이 마치 근거도 없는 고기(古記)를 들먹여서 단군기사(檀君記事)를지어냈다고는 볼수가 없다.
우리민족이 여러차례의 국난(国難)을 겪으면서도 단군묘(檀君廟)에제사하며 국가의 대행사인축제때에는 노래(세연가(世年歌))에의하여 단군(檀君)의 사적을 전해내려온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세종실녹권(世宗実錄卷)40 세종(世宗)10연무신(年戊申) 6월조(月條)에 유관(柳寬)의 상서(上書)를보면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 동령(東嶺)허리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어느때에 세웠는지 알수 없으나 북벽(北壁)에 환웅천왕(桓雄天王), 동벽(東壁)에 환인천왕(桓因天王),서벽(西壁)에 단군천왕(檀君天王)을 모셨는데 문화현(文化縣)사람들은 이를 삼성(三聖)이라고 일컬으며 산아래 부락을 성당리(聖堂里)라고 한다고 하였다. 유관(柳寬)은 그 상서(上書)중에서「구월산(九月山)은 현(縣)의주산(主山)이던 단군조선(檀君朝鮮)때에는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하였으며, 신라(新羅)에 와서 궐산(闕山)이라고 고쳤다. 그때에 문화현(文化縣)을 궐구현(闕口縣)이라고 처음에 이름하였다. 고려(高麗)때에 유주감무(儒州監務)로 하고 후에 또 문화현(文化縣)으로 고쳤다. 산이름의 궐(闕)자를 느리게 소리내어 구월산(九月山)이라고 부른다.
두 수(首)의 시(詩)에 나타나
문화(文化)의 동쪽에 장장(藏壯)이라고하는 지명이있다. 부로(父老)들이 전하기를 단군(檀君)의 도읍지(都邑地)라고한다…」하였으며「구월산하(九月山下)에는 환웅(桓雄)을 남면(南面)으로 모시고 동서향(東西向)으로 환인(桓因)과 단군(檀君)을모신 삼성당(三聖堂)이 지금도 존재하며 단군(檀君)이 입도(立都)하였다는 자취를 볼수있다」고 하였다.
세종(世宗)18년 병진(丙辰) 12월정해조유사눌(月丁亥條柳思訥)(유관(柳寬)의 조카)의 상서(上書)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신이세연가고지단군초도평양후도백악무정팔년을미입아사달산위신기가일형국일천사십(臣以世年歌考之檀君初都平壤後都白岳武丁八年乙未入阿斯達山爲神其歌日亨国一千四十)
팔지금묘재아사달칙기무소거호우황고려건묘어구월산하기당우위판유존여세연가합(八至今廟在阿斯達則豈無所拠乎又況高麗建廟於九月山下其堂宇位版猶存与世年歌合)」.
이로써 보면 고기(古記) 단군기(檀君記)외에 가사(歌詞)형식으로 된 단군기사(檀君記事)가 전해지고 있었음을알 수 있다. 또 그 세연가(世年歌)는 사실들과 부합되니 단군기재(檀君記載)에 근거가 있다고 하였다. 유사눌(柳思訥)은 한성부사(漢城府使)를지냈는데 또 상서하기를 「신(臣)이 단군세연가(檀君世年歌)를 보니 단군(檀君)은 조선(朝鮮)의 시조입니다. 그 출생이 일반사람과 다르고몰(沒)함에 신(神)이 되었다」고 하였다.어쨌든 조선세종대(朝鮮世宗代)까지 단군세연가(檀君世年歌)가 남아있었고 식자(識者)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기해 둘만한 사실인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유관(柳寬)의 상서(上書)에 따르면 삼성당(三聖堂)은 황해도(黄海道) 구월산(九月山) 동령(東嶺)에 있다.유관(柳寬)은 젊었을 때부터 거기에 내려가서 부로(父老)들로부터 단군사적(檀君事迹)이 오래되었음을 알았다고했다. 삼성당(三聖堂)에 환웅천왕(桓雄天王)을 상좌(上座)에 모셔서 남면(南面)하게하고 동벽(東壁)에는 환인천옥(桓因天玉)을 모셔서 서향(西向)하게 하고 서벽(西壁)에는 단군천왕(檀君天王)을 모셔서 동향(東向)하게 하였다고 한다.
삼성당(三聖堂)의 경내외에는 새짐승들이 서식하지 않으며 산짐승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또 가뭄이 심할때 빌면 비가 내린다고 했다.
문헌비고(文献備考) 권(卷)64 예고(礼考)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있다. 삼성사(三聖祠)는 황해도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에 있으며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모셨으며 춘추(春秋)로 제사를 드린다하고,역시 문헌비고(文献備考)에의하면 조선조 성종(成宗)13년에 황해도관찰사 이예지(李芮之)의 말에 좇아서 구월산(九月山)에 삼성묘(三聖廟)를 세우고 평양(平壤)의 단군묘(檀君廟)의 예에 따라서 매년 향축(香祝)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国輿地勝覽) 권(卷)42 문화현사묘조(文化縣祠廟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삼성사(三聖祠)는 환인환웅(桓因桓雄) 단군(檀君)의 사(祠)이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며 가물때 빌면효험이 있다.」
「동국여지승람권(東国輿地勝覽卷)51평양조(平壤條)」에 보면 두 수(首)의 시(詩)를 통하여 「개국(開国)한지가 멀고 먼 단군(檀君)은 조선시조(朝鮮始祖)이다. 단군(檀君)의 역사는 언제 비롯되었는가. 요(堯)와 함께 개국(開国)하였다고 들었으니 거금(去今) 사천년(四千年)이며 단군묘(檀君廟)를 남겼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주체(主體)사상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고려 조선양조를 통하여 1천년간에 단군에 대한 국가적 태도는 묘(廟)를 세우고 제사(祭祀)를 받드는 등 자못 융성하였다. 이것은 단군을 국조(国祖)로 섬겼음을 알 수 있다.
세종(世宗)때 새사당(祠堂) 지어
문헌비고(文献備考) 권(卷)13 여지고(輿地考)1역대국계(歷代国界)1에서는 단군조선국(檀君朝鮮国)을 첫머리에 싣고 유사(遺事)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백악(白嶽)은 지금의 문화현(文化縣)이며 구월산(九月山)의 본명은 궐산(闕山)인데 단군(檀君)의 궁궐터가 있기 때문이다. 궐산(闕山)은 소리를 느리게 내어 궐산(闕山)이 구월산으로 와전되었으며 구월산(九月山)의 장당경(藏唐京)은 또 장장평(藏藏坪)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세종때의 사(司)□주부(注簿) 정척(鄭陟)의 상서에 의하면 「평양(平壤)의 기자사당(箕子祠堂)에 가보니 기자(箕子)의 위패(位牌)는 북쪽에 있어서 남향(南向)하였고 단군의 위패는 동쪽에 있어 서향(西向)하였다. 신(臣)의 생각으로는 단군은 당요(唐堯)와 같이 입국(立国)하였고 기자(箕子)는 무왕(武王)의 명으로 조선(朝鮮)에 봉하여졌으니 제왕력연수(帝王曆年数)로 보더라도 제요(帝堯)에서 무왕(武王)까지는 1230여년이 된다고 하였읍니다. 그러니 기자(箕子)가 북향하여 남면(南面)하고 기자(箕子)보다 앞서서 입국(立国)한 단군(檀君)을 동(東)쪽에 배향(配享)하는 것은 입국전세(立国伝世)의 선후에 위배됩니다. 신(臣)이 본조(本朝)의 제사의식(諸祀儀式)을 고찰해보니 단군제(檀君祭)의 진설도(陳設圖)에 이르기를 「신위(神位)는당(堂)의 중앙에 모셔서 남면(南面)토록되어 있으며 신(臣)이 기자사(箕子祠)에서 본서향(西向)의 좌(坐)는 진설도(陳設圖)와 맞지 않다.
만일 단군을 기자(箕子)와 나란히 남향(南向)하게 하더라도 단군을 상좌(上座)에 기자(箕子)를 다음에 앉히는 것이 입국(立国)의 선후에 어긋나지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기자사당(箕子祠堂)인데 단군을 주신(主神)으로 하는것도 편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臣)의 생각으로는 따로 단군사당(壇君祠堂)을 지어서 단군(檀君)을 남향(南向)하게 하고 제사(祭祀)를 받들면 사의(祀儀)에도 맞을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예조(礼曹)에 명하여 정척(鄭陟)의 장서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이상에서 보면 단군은 역대왕조에서는 국조(国祖)로서 사당(祠堂)을 세우고 제사(祭祀)를 받들었으니 기자(箕子)보다는 상위(上位)로 여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단군(檀君)의 제향(祭享)이 끊어진것은 일제(日帝)때부터였다고 본다.
단군조선(檀君朝鮮) 연구 숙제
삼국유사(三国遺事)의 단군기재(檀君記載)는 타서(他書)등에서 뒷받침되는 바가 없지 않으므로 믿을만한 것이며 일연(一然)의 창작은 결코 아님을 알수있다. 일연(一然)이 인용한 고기(古記)도 김부식(金富軾)의 인용 고기(古記)와 일치되는 바가 많으므로 고기(古記)는 당시에 분명히 있었으며 김부식(金富軾)도 선인왕검(仙人王儉)과 그 도읍지를 평양(平壤)으로 알고있는 것으로 보아 고기(古記)에는 단군사기(檀君史記)가 분명히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또 단군(檀君)의 세연가(世年歌)가 전하여져서 많은 식자(識者)들이 알고 있었으며 여러곳에 단군(檀君)의 사묘제천단(祠廟祭天壇)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또 향단군진설도(享檀君陳設図)가 세전(世伝)되어왔고 그것은 단군제의(檀君祭儀)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이 역대왕조에서는 조의(朝議)에 의하여 건묘(建廟) 봉제사(奉祭祀)했던 것이다. 만일 단군이 하나의 전설 신화거리에 불과하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아뭏든 단군과 단군조선에 관한 기재(記載)는 숙제로 남길지언정 신화(神話)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삼국사기(三国史記)에서 단군기재(檀君記載)를 제외한 것은 김부식(金富軾)의 사대적(事大的)태도보다는 ① 삼국사기의 명분상 삼국이외에는 부여(夫余) 등도 모두 제외하였으며 ② 신라중심의 삼국사(三国史)로하였고,신라보다 상대(上代)의 역사는 피하려고 한 데다 ③ 단군을 부인하려는 생각보다는신라사를 돋보이게 하려는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