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기예수의 행적
① 성령으로 잉태
아기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가 갈릴리 나사렛에 살 때에 성령으로 잉태된다(눅1:26-38). 마리아는 자신에게 아기 예수가 수태되었고 친족 엘리사벳도 세례요한을 잉태하였다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유대의 산중에 사는 사가랴의 집으로 간다. 친족 엘리사벳을 찾아 문안하고 3개월을 머물렀으며 다시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간다(눅1:39-56).
(눅1: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유대 엘리사벳의 집에서 돌아와 갈릴리 나사렛에 머물던 마리아는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세금을 거둘 목적으로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하라는 명을 듣게되고 요셉이 유대사람이었기에 마리아는 남편 요셉과 함께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여행한다.
직선거리로 110Km가 넘는 나사렛에서 유대로의 여행은 마리아에게는 힘든 여행이다. 이즈음 마리아가 만삭의 몸이었다는 성경적 표현은 없지만 아마도 만삭의 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해산할 날이 되었다면 오래 머무르는 동안 사관을 구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산할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여행하게 되었고 호적하러 고향으로 돌아온 친척이나 친지가 많았기에 사관이 없었을 것이다. 만삭의 몸으로 먼 거리(110Km이상)를 여행하는 마리아의 고생도 고생이지만 태중에서 고생하신 아기 예수의 상황도 예삿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종단면 : 갈릴리에서 유대로 >
( 눅2:3-6)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② 베들레헴 한 집(동굴)에서 태어나심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엄동설한 추운 겨울인 12월 25일에 우리네 농촌과 같은 마구간(사람들이 기거하는 집에서 떨어진 한쪽에 만들어져 있는 가축들을 기르는 장소)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짜나 계절에 대한 언급이 없고 우리네 농촌에서 보는 외양간이나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이라 기록하지도 않는다.
☞ 아기 예수 탄생 시기에 대하여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짜 연구에 따르면 교회 역사의 초기인 3세기에는 2월 28일, 4월 2일, 4월 19일, 5월 20일등 여러 날짜를 추측하여 기념하였으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심한 시기였으므로 공공연하게 크리스마스를 기념할 수는 없었다. 주후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인정하고 4세기 말에 마침내 로마 제국의 국교로 인정함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확산되고 교회가 확립되어 아기 예수의 탄생일 설정이 요구되었다. 이로서 크리스마스를 제정하여 기념하였는데 354년 처음으로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신 계절을 성경에 근거하여 생각해 보면 최소한 겨울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눅2:8-14절에 따르면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을 때에 천사가 나타나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는 소식을 전한다. 이 구절을 근거로 당시의 계절을 유추해 본다면 최소한 겨울은 될 수 없다. 팔레스타인의 기후를 생각할 때 겨울 밤에 양떼를 밖에 있게 하지는 못한다. 성경을 근거로 한다면 봄에서 여름을 지나는 시기로 추측할 수 있다.
☞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셨다고 생각하는 마구간(?)에 대하여
성경에 아기 예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는 구절은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아기 예수께서 마구간이나 외양간에서 태어나셨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 마구간으로 연상될 수 있는 ‘구유'에 뉘여 졌기 때문일 것이고, 이것이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 통념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는 설교자들이 ‘구유'라는 단어를 통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농촌의 마구간이나 외양간을 상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유'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화트네'인데 누가만이 누가복음에서 4번 쓰고 있다. 3번은 예수의 탄생기사를 기록할 때 쓰였고 나머지 한 번은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던 여인을 안식일에 살리셨을 때 안식일에 병고친다하여 회당장이 분낼 때에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화트네:구유)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눅13:15)” 할 때에 쓰였다. 이 ‘구유'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나라의 마구간이나 외양간 같은 곳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생각했을 것인데 이것은 오해이다. 그렇다면 아기 예수는 어디에서 태어나셨을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유대인의 한 집의 가축을 두는 곳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신 마구간은 우리네 농촌에서 보는 그러한 마구간이나 외양간이 아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가옥구조를 보면 한국의 농촌의 모습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팔레스틴의 가옥구조는 한국의 농촌과 같이 불을 피워 방을 따뜻하게 하여 난방을 하는 구조가 아니다. 당시의 가옥구조는 한기를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졌고 난방 할 기구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키우는 가축들의 체온을 이용하기 위해 가축들이 거하는 공간(마구간)을 집안에 방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

<전통적인 유대인의 방4개짜리 가옥구조>
요셉과 마리아는 묵을 사관이 없어서 개인 집에 머물게 되었고 마침 가축들이 들에서 머물며 풀을 뜯을 수 있는 계절이었기에 가축들이 머물던 장소에 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곳에 거하던 요셉과 마리아는 태어난 아기예수를 가축들의 먹이를 먹는 구유에 뉘였기에 ‘구유'라는 단어가 탄생기사에 나타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동방박사의 경배를 받았다. 이것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한 별을 따라와 별이 한 집에 머물자 그 집으로 들어와 경배하였다는 성경 기록으로 뒷받침 할 수 있다.
(마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두 번째는 사관에 머물던 여행객들의 가축보관소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보통의 성경 독자들은 ‘사관'이라는 구절을 읽을 때 여관이나 여인숙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당시 팔레스타인의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 많은 여관이나 여인숙이 있었고 그 모든 여관과 여인숙이 많은 손님으로 들어차 머물 곳이 없어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의 마구간에 에서 머물렀고 거기서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셨다고 볼 수는 없다. ‘사관'이라는 단어는 ‘카탈뤼마'로 정확한 의미는 ‘객실'에 해당한다. 신약성경에 카탈뤼마는 3번 쓰였는데 아기 예수의 탄생기사에서 한 번 쓰였고 고난주간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제자들을 보내시며 준비하게 하신 사건에서 쓰였다(막14:14, 눅22:11).
‘카탈뤼마'를 여관 전체라 생각하지 않고 머물 객실로 생각하면 여관에 객실이 없었고 여행객들이 타고 다니는 말이나 약대가 머무는 곳에 머물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도 마구간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이곳은 여행객의 물품이나 가축들을 보관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여행객들의 종들이 함께 거하는 곳으로 가축들을 먹일 구유도 있었다. 이곳에 요셉과 마리아는 머물렀고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 구유에 누이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곳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외양간이나 마구간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장소이다.

<베들레헴 아기예수 탄생 기념교회>
현재 성지답사를 통해 방문하는 베들레헴 아기 예수 탄생 기념교회를 생각해 보자. 비잔틴 시대에 건축된 기념교회 지하에 내려가면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신 동굴이 있고 누이셨던 장소에 14꼭지를 가진 별이 장식된 곳이 있다.

<지하 동굴의 아기예수 누이신 자리>
당시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이나 자라나신 나사렛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또한 예루살렘이나 세포리스, 가버나움등 로마와 관련된 큰 도시나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집이 아닌 동굴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추측하건대 요셉과 마리아도 큰 재물을 소유한 부자가 아니었기에 나사렛에서 살 때에 집이 아닌 동굴에서 살았고(나사렛의 수태고지기념교회나 요셉기념교회는 지하의 동굴에 유적이 있음) 베들레헴에 와서도 동굴로 된 집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경험과 우리의 문화, 우리의 사고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여러 곳에서 잘못된 개념을 가지게 하고 잘못된 메시지나 교훈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대한 성경이 전하는 사건이 일어난 상황과 환경을 반영하여 성경을 읽을 때 본문이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좀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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