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龔直)은 연산군(燕山郡 : 지금의 충청남도 연기군 및 충청북도 청원군)의 매곡현(昧谷縣 :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지략이 있어, 신라 말에 그 고을의 장군이 되었다. 당시가 마침 난세라 결국 후백제를 섬겨 견훤의 심복이 되었으며, 맏아들 직달(直達)과 둘째 아들 금서(金舒) 및 딸 하나를 후백제에 볼모로 보냈다. 공직이 일찍이 후백제의 조정에 들어갔다가 나라가 무도함을 보고는 직달에게,
“이제 이 나라를 보니 사치하고 무도한지라, 내 비록 왕과 가깝긴 하지만 다시 오고 싶지 않구나. 들으니 고려 왕공(王公 : 왕건)의 문덕(文德)은 충분히 백성을 안정시킬 만하고 무덕(武德)은 충분히 포악한 자를 제압할 만하므로 사방에서 다들 위엄을 두려워하고 그 덕을 사모한다고 하는구나. 내가 그에게로 귀부하고자 하는데 너의 뜻은 어떠하냐?”
고 물었다. 직달이,
“볼모로 들어 온 이래 이 나라의 풍속을 살펴보니, 부강한 것만 믿고서 교만하고 뽐내는 일만 힘써 다툴 뿐이니 어찌 나라가 제대로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아버님께서 현명한 군주에게 귀부하시어 우리 고을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하고자 하시니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마땅히 동생과 누이와 함께 틈을 타서 귀부할 것입니다. 비록 귀부하지 못할지라도 아버지의 현명한 결단에 힘입어 남은 경사가 자손까지 이어진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라고 하므로 공직은 마침내 귀부를 결심하였다. 태조 15년(932)에 공직이 그의 아들 영서(英舒)와 함께 조정에 와서 왕을 뵙고서,
“신이 보잘 것 없는 고을에 살면서 주상께서 백성을 잘 교화하신다는 말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습니다. 비록 주상을 도울 힘은 없으나 신하의 절의를 다하기를 바라나이다.”
고 뜻을 밝혔다. 태조가 기뻐하여 대상(大相)에 임명했으며 백성군(白城郡 :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을 녹읍(祿邑)으로 주고 대궐의 말 세 필과 채색 비단을 내려주었다. 그의 아들 함서(咸舒)를 좌윤(佐尹)으로 삼고, 왕실의 친족인 정조(正朝) 준행(俊行)의 딸을 영서의
아내로 삼고는,
“경은 치란과 존망의 기미를 환히 살펴보고 나에게 와서 귀부하였소. 짐은 이를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왕족과 인척을 맺게 하여 나의 후의를 보이니, 경은 마음과 힘을 더욱 다하여 변경을 진무하고 우리 왕실의 울타리가 되어 주시오.” 라고 격려하였다.
공직이 감사를 올린 뒤,
“후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 : 지금의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은 우리 고을과 접한 곳으로, 신이 귀화한 후 항상 침입과 약탈을 자행하여 우리 백성이 생업에 편히 종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신이 그 곳을 공략하여 우리 고을의 백성들이 노략질을 당하지 않고 오로지 농사에만 힘쓰도록 만들어, 귀부한 뜻을 더욱 굳게 하고자 하옵니다.”
라고 건의하니, 태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견훤은 공직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직달(直達)과 금서(金舒) 및 공직의 딸을 잡아 가두고 다리의 힘줄을 단근질하여 끊으니 직달은 죽었다. 후백제가 멸망한 뒤에 나주(羅州)에서 포로로 잡아 둔 후백제 장군 구도(具道)의 아들 단서(端舒)를 금서와 교환하여, 금서를 부모에게 돌려보냈다.
태조 22년(939)에 공직이 좌승(佐丞)을 지내다가 죽자, 태조가 사자를 보내어 조문하고 정광(政匡)으로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봉의(奉義)라고 하였다. 함서를 후사로 삼았으며, 뒤에 사공(司空)·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