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문학과 사찰 / 名刹 품안에서 명작 나오고…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丹楓)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온 국민이 향유하는 ‘님의 침묵’은 망국의 울분을 달래던
만해스님의 혼이 서린 백담사에서 태어났다.
1925년 바랑 하나 걸머지고 내설악의 숲으로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표표히 들어가
마침내 민족의 시집 〈님의 침묵〉 88 편의 주옥편(珠玉篇)을
지어 낸 만해스님은, 지금도 백담사에 가면 살아있는 듯하다.
한국문학의 원류는 불교의 서정성에서 출발한다.
국문학 속에 언제나 사찰이 살아있는 이유다.
불교의 세계관이나 사상 등을 주제로 하는
불교문학 속 사찰들을 찾아갔다.
김동리의 ‘역마’는 하동 쌍계사. 칠불사가 낳은 명작…
동백꽃 고운 미당의 ‘선운사 동구’는 모두의 애송시
덤불딸기 따먹으며, 달팽이가 진물 토한 땅을 밟고,
칠불사로 가는 계연이와 성기를 그려본다.
새파란 으름을 성기의 코끝에 내밀어 장난치다,
풋내 나는 두 입술이 포개졌던 언덕.
섬진강 열리는 화개장터 옥화주막에서
구성진 육자배기 한 자락 절규하는 바로 그 곳.
1948년 작 김동리의 ‘역마’(驛馬)는
하동 쌍계사와 칠불사가 낳은 명작이다.
민족의 역사와 문화 정신이 서린 사찰은
문인들에게 문학적 자양분을 제공한 어머니며 대지였다.
예술가들의 혼이 집약되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자연을 살찌우는 고찰(古刹)은 문인들을 만나 또 한 번 빛을 발한다.
한국인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을 꼽을 때 늘
수위를 다투는 고창 선운사도 그 중 하나다.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이러 피지 않 했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되어 남았습니다. /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미당의 시 ‘선운사 동구’ 하나만으로 선운사는
동백꽃의 자생지와 봄을 대표하는 명소가 됐다.
‘등신불’과 경남 사천 다솔사의 인연은 또 어떤가.
단편소설 ‘등신불’에서 저자 김동리는 일인칭 화자 기법으로
일제강점기에 학병이된 ‘내가’ 주둔지 부대를 탈출해
등신금불이 있는 중국 정원사로 어떻게 갔느냐로 시작한다.
마치 자신의 경험을 작품화하고 있는 듯, 하지만
실제는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스님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엮은 작품이다.
일제 당시 독립운동을 위해 스님들이 결성한 만당의 본거지,
다솔사 대웅전 앞뜰이 내려뵈는 객사에 앉아
동리는 만적의 소신공양을 떠올리며 등신불을 썼다고 회고한다.
이 소설로 인해 다솔사는 차의 도량에다
불교문학의 고향이라는 명성이 더해졌고
동리는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쓸수 있었다.
신문학의 선구자 춘원 이광수는 금강산 답사 길에 만난
월하 노스님의 인도로 〈법화경〉에 심취된 뒤
육촌형인 운허스님에게서 불교에 대한 영향 을 받아
‘원효대사’ ‘꿈’과 같은 불교 소설을 쓰고
대장경 역경에도 손을 댔다.
인연이야기는 봉선사 경내의 이광수 비에서 만날 수 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옛 문학작품에도 사찰이 어려 있다.
현존하는 향가 중 최고의 서정가요로 손꼽히는
‘제망매가’의 고향, 사천왕사지.
여기서 능준 대사의 상좌로 머물렀던 신라 향가의 대가
월명스님은 죽은 누이를 못 잊어 저녁마다 애달픈 피리와 향가를 불렀다.
“죽고 사는 일은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갑니다’ 말도 못 이르고 가나닛고∼”
사천왕사에서 누이의 49재를 올린 스님은
결국 연처(緣處)를 구하지 못하고 중유에서 떠도는
죽은 누이를 향해 고함치듯 노래한다.
금당을 중심으로 동탑과 서탑이 있는 쌍탑 가람 형식의
큰절이었던 월명리 사천왕사엔 현재 금당도 탑도 사리지고
휑한 들판에 머리 잘린 거북돌과 당간지주만이 천년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세 개의 산봉우리가 세개의 연꽃잎을 이룬 경주 남산 삼화령.
헤어진 장삼과 버드나무통을 메고 매년 삼월삼짇날 차 공양을 올렸던 충담스님의 혼이 어려 있다.
그 옛날 충담스님은 안민가를 청하는 경덕왕에게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 태평하리라(君君 臣臣 民民)”고 했다.
삼월삼짇날과 중구절이면
미륵세존께 차례를 올렸던 스님의 깊은 뜻이다.
숲이 깊은 영축산 망해사에는 ‘처용가’의 넋이 있고
경주 남산 용장사에서는 매월당의 ‘금오신화’ 태어나…
울산 영축산 망해사에는 ‘처용’의 넋이 남아있다.
처용은 누굴까.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를 보면
처용이 동해용의 아들로 묘사됐다.
처용은 왕을 따라 서울로 오게 되고 왕은 그를 미인에게 장가들이고
벼슬까지 내줬다고 한다.
그런데 처용 아내의 미모를 탐낸 역신이 그녀와 통정하다가
그 현장을 처용에게 들키고, 처용은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물러갔다.
역신이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미덕에 감복했고,
이후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서 나쁜 귀신을 쫓고
경사스런 일을 맞아들였다 전한다.
‘서라벌 밝히는 달이여/ 밤들이 노닐다가/
들어사 자리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해였고/ 둘은 뉘 해인고//
본래 내 해이지마는/ 빼앗음을 어찌 하리오……’
‘내 해’라는 나의 집착과 ‘뉘 해’라는 다른 누구의 집착이 부딪치다
결국, ‘빼앗음을 어찌하리오’란 초탈로 이어지는
처용은 번뇌의 원인을 스스로 소멸하는 중생의 지혜를 발휘한다.
처용의 ‘관용(?)’만큼이나 품이 넉넉하고 숲이 깊은
영축산의 망해사 대웅전에 들면 헌강왕이 망해사를 짓겠다고
동해용과 약속하는 형상이 연기설화로 그려져 있다.
망해사엔 또 60년대까지만도 용 형상의 귀면도가 출토됐고
용왕당도 있었다고 한다. 솔나무. 밤나무가 우거진
절 뒤뜰에 오르면 석조부도 몇 기만이 무심히 처용암 개운포를 바라본다.
최치원의 ‘입산시(入山詩)’를 읊으면 해인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스님 그대/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
정녕 산이 좋다면/ 어찌 다시 산에서 나오는가/
두고 보라/ 다른 날의 내 종적을/
한번 청산에 들어가서는/ 다시는 나오지 않음을…’
제국의 중심에서 천자의 명을 받아 ‘토황소 격문’의
유려한 격서를 내보이며 문재를 떨쳤던 최치원이,
초라한 지식인이 되어 친형인 현준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해인사로 입산, 불귀향(不歸鄕) 선언을 대변한 작품이다.
고뇌하던 지식인 최치원의 현란한 장광설이 뚝뚝 묻어나고 있는
절창의 입산시다.
가야산 해인사와 백련암, 청량사는 시대와
불화(不和)를 이겨내지 못해 은둔이라는 극단적인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 최치원을 넉넉하게 담아냈다.
백련암에 올라 중생을 불국토로 이끄는 방주모양의 가야산을 보며
변혁을 꿈꾸는 최치원. 현준선사와 함께 학사대에 올라
거문고를 타며 흥겹게 시를 읊조리던 그의 자취는
천년세월을 건너뛰어 역사의 잔해로만 남아있었다.
“…스님은 샘물줄기 찾아내어 얼음 헤치고 물 길어오고/
학들이 나무 끝에서 일어날 때마다 눈발이 날리네/
일찍이 시와 술을 벗 삼고 흥 누린 도연명 접했다면/
세도의 명리 나도 잊엇을 것 아닌가.”
〈‘겨울날 이전장관과 산사에서’ 중〉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연상케하는 최치원의 천재성이 돋보인다.
마치 한 폭의 겨울 서정화를 보는 듯 서정과 일상이 절묘하게
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속세를 등진 불우한 지식인의
뒤늦은 후회의 정감이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수십 년에 걸친 무신정권. 몽고전란기를 다 겪고도
한국고대문학사의 실증서인, 〈삼국유사〉를 토해낸
일연스님이 살아있는 인각사 역시 국문학의 산실로 꼽힌다.
아홉 살 때부터 출가의 뜻을 품고 지금의 광주, 해양 무량사에서
공부를 시작한 일연스님은 열네 살이 되던 해
설악산 진전사로 출가, 가지산문과의 길고 깊은 인연을 맺어
구산문 사선(九山門 四禪)의 최고승에 오른다.
그후로도 남해 정림사에서 대장경 간행 사업에 참여하고
왕명에 따라 청도 운문사로 옮겨가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삼계가 꿈과 같음’을 깨달은 스님은
‘풀뿌리와 약초로 배를 채우나
꿈길에도 세속에는 가지 않으리라’는 시를 읊기도 했다.
운문사를 거쳐 말년에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노모가 있던
인각사에 찾아든 스님은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집필했다.
신라 선덕여왕 11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인각사.
일연스님 당시 구산문도회를 두 번이나 개최했다고 전해지듯
당시 전국불교의 본산이었다.
경내에는 보물 428호인 보각국사(일연스님)탑과 비가 있고
사찰 앞에는 수많은 백학들이 서식했었다는 운치 있는 학소대가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병암과 마주치고
그 밑으로는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비경을 연출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우리나라 사찰 중 드물게 강을 바라보고 선 신륵사에서
나옹스님이 써낸 작품이다.
경내에는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중앙에 버티고 섰고,
절 입구에는 나옹선사의 지팡이가 싹터 자랐다는
은행나무와 무학대사가 심었다는 종향나무가 연륜을 자랑한다.
강변 절벽에는 신륵사 다층전탑과 대장각비가
남한강을 굽어보는 절경을 이루고 있으니,
그 옛날 내로라하는 묵객들이 시 한수씩 남긴 연유를 단박에 알만하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에 무상을 느끼고 불문에 귀의한
나옹스님은 요연선사를 찾아가 출가,
전국의 이름 있는 사찰을 찾아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년)
양주 천보산 회암사에서 대오(大悟)했다.
그때 이 절에 우거하고 있던 일본 스님 석옹에게 깨달음을 인가받고
1347년(충목왕 3년) 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에 머물며
그곳에서 인도 스님 지공의 지도를 받으며 4년 동안 지내다가
1358년(공민왕 7년)에 귀국했다.
귀국 후 오대산 상두암에 은신하였으나
공민왕과 태후의 간곡한 청에 의하여 잠시 신광사에 머무르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들을 지도했으며 그 후 신륵사에서 열반에 든다.
신륵사 조사당을 지나 양지바른 구릉에 올라 스님이 잠든
석종부도를 바라보면 지금은 멀리 북한강의 강물이 굽이쳐 흐른다.
선시의 보고 〈선문염송〉을 엮어
보조국사 지눌의 선사상을 문학화한 고려의 불교시인
혜심스님의 얼이 담긴 전남 강진 월남사지도 빼놓을 수 없다.
1900년대 초까지 무위사 스님들이
1년에 한 번씩 비단으로 감싸고서 불공을 드렸다고 전한다.
월남사지 3층 석탑 주변에 드문드문 남아있는
외곽 담장의 흔적과 마을 곳곳에 있는 옛 절의 기단석 등은,
혜심스님이 창건한 당시 월남사는 꽤 큰 사찰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선문염송〉은 혜심스님이 조계산 수선사에서 46세 때인
1223년 즈음에 제자인 진훈 등과
여러 선사들의 어록과 이어오는 내력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편찬한 방대한 저술이다.
부처님에서부터 서천축의 28조, 중국의 6조, 여러 선지식 등의
순서로 배열하여, 선맥(禪脈)을 쉽게 살펴볼 수 있게 한
역작인 동시에 한국 선불교의 가장 중요한 저술 가운데 하나다.
매월당 김시습이 지은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가 태어난
경주 남산 금오봉 용장사지. 매월당이 7년간 머물며
‘금오신화’를 창작한 산실이다. 5세 때 세종대왕 앞에서
시를 지어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로 총명했던 매월당은
삼각산 중흥사에 들어가 학문에 열중하던 중
세조의 단종 폐위 사건 소식을 접하고는 크게 통곡한 뒤
읽고 있던 책을 모두 내어 불태운 다음
스스로 머리를 깎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설잠(雪岑). 높고 아른한 눈 덮힌 산이라는 법명의 수행자가 된 것이다.
10여년의 만행을 통해 설잠스님은 불교를 익히고
세속의 속내를 샅샅이 들여다 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안착한 곳이 금오산.
지금의 경주 남산인 금오산은 절터가 100여 곳,
석탑과 불상이 150여개가 남아있는 신라 불교 유적의 보고다.
지상 극락정토를 건설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염원이 서린 곳.
김시습도 이 곳에서 정토의 이상세계를 꿈꾸었을지 모른다.
7년간 머물며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창작한
용장사는 이제 터만 남았지만,
남산 전체를 내려다 보며 서있는 탑 한기만으로도,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되기를 수차례,
세월 따라 문인도 가고 문학 작품속 풍경도 많이 사라졌다.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도 ‘화개장터 옥화주막’도 없고
월명스님이 노래했던 도솔천은 빈터만 남아 황량하다.
“하늘에 기대어 절간을 지었기에 /
풍경소리 맑게 울려 하늘을 꿰뚫네”라며
‘월명암’을 노래했던 매창은 시비만이 남아
여인의 불심(佛心)을 소리없이 전해준다.
석굴암 관세음의 노래 - 서 정 주
그리움으로 여기 섰노라
호수와 같은 그리움으로.
이 싸늘한 돌과 돌 사이
얼크러지는 칡넝쿨 밑에
푸른 숨결은 내 것이로다.
세월이 아조 나를 못 쓰는 티끌로서
허공에, 허공에 돌리기까지는
부풀어 오르는 가슴 속에 파도와
이 사랑은 내 것이로다.
오고가는 바람 속에 지새는 나날이여.
땅 속에 파묻힌 찬란한 서라벌,
땅 속에 파묻힌 꽃 같은 남녀들이여.
오~ 생겨났으면, 생겨났으면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이
천 년을 천 년을 사랑하는 이
새로 햇볕에 생겨났으면.
새로 햇볕에 생겨 나와서
어둠 속에 날 가게 했으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이 한마딧 말, 님께 아뢰고
나도 인제는 바다에 돌아갔으면!
허나, 나는 여기 섰노라.
앉아 계시는 석가(釋迦)의 곁에
허리에 쬐그만 향낭(香囊)을 차고
이 싸늘한 바윗 속에서
날이 날마다 들이쉬고 내 쉬이는
푸른 숨결은
아, 아직도 내 것이로다.
-사찰은 왜 문학의 산실일까…
고요함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격외(格外)의 선사들과 교유할 수 있는 사찰은
예부터 문학의 요람으로 톡톡한 구실을 해왔다.
산세가 수려하고 전망이 좋은 곳에 입지한 사찰은
문학을 창작하며 자연경관을 유람하는 즐거움도 선사한다.
세속의 티끌을 털어버린 비범하고 성스러우며
신비한 광경을 연출하는 공간, 즉 성소(聖所)로 인식된다.
사찰은 문학작품마다 개별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사찰의 기능과 성격은 작품에 혼재되어 발현된다.
지혜의 손길이 그윽한 산사는 시인에게 귀의할 고향이요,
세속의 땀으로 얼룩진 심신을 어루 만져주는 위안처이기도 하다.
자연미의 인식을 통해 선미(禪味)를 만끽하는 산사가
문학 속에 새겨지는 이유다.
승속의 분별을 떠나 선취(禪趣)를 즐기는 모든 작가들의
제2의 고향이 바로 사찰이다.
2005. 04. 18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