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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형편을 살펴보는 잣대로 몇 가지만 말하고 싶습니다.
이번 성령 강림절에 그 이름으로는 유명한 강남의 한 교회의 목사가
자신이 성령강림에 대해 21번째 설교를 하는데 지금까지 20번 동안
성령을 받지 못해도 이번 21번째는 꼭 받자고 말하는 걸 듣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있으며 계시가 없는 자인 걸
자인하는 말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그리스도를 주로 믿지 못하잖아요?
그러면 구원의 주가 그들 안에 계시지 않으면 구원은 바깥에 있는 거지요.
또한 천국 지옥을 봤다고 하는 목사의 수준은 지금 죽으면 불 못입니다.
불 못에 갈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를 위해 하나님이 경고를 하시는 겁니다.
또한 각종 질병에 신음하는 이들을 보면 구약 같으면 하나님의 징계가
일차로 전쟁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는 기근이 오고 맨 나중에 질병이 옵니다.
질병은 마지막 경고의 시그날입니다. 새 언약 아래에서는 십자가를 따르지 않고
악에 처해 있으면 성격이 나빠지고 다툼이 일어나며 경제적인 문제가 생기고
그래도 안 되면 몸이 나빠집니다. 그러므로 질병의 원인은 연약이며 그 연약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진리의 복음을 수용하지 않는 불순종의 죄로
곧 사망의 삯을 받는 자리에 회개치 않고 고집을 부리고 믿는다고 하는 탓입니다.
그로 인해 연약해지고 그 연약을 따라 사람마다 취약한 부분에 질병이 오는 겁니다.
또 구원 받은 그 이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 사람은 구원의 총량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이라는 기상천외한 말을 하다 보니 구원 받은 이후라는
성경에 없는 희한한 말을 만들어 유통시키는 현실입니다. 복음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의에서 의로 나아가고 거룩함을 얻어 거룩에 나아가 영광에 이르는 구원의 도리입니다.
일단 디테일하게 말하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홍길동은 지혜로워서 하나 하면 열을
깨닫는다는 말이 있듯 이 정도하면 각자에게 주시는 깨달음으로 챙기시길 바랍니다.
15절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7절의 말씀을 반복합니다. 그만큼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마음의 완고함은 언제 올까요? 가만히 있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완고함이 생깁니다. 철학을 들을 때는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 유튜브 강의를 들어보고 구수한 철학적인 설교를 들어보세요. 귀가 쫑긋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딱 걸립니다. 완고해 집니다. ‘뭘 그래, 별 소리 다 하시네’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아니면 완고함이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들으면 인간성과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죄의 유혹입니다. 왜 나를 포기해야 되느냐 자존심 상하게 왜 그러느냐는 거죠.
그게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수많은 사람들은 어찌 할꼬 하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가 아니라 세례를 동반한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자로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도
선물로 받는다(행2:38)는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스데반의 설교가 베드로의 설교보다
더 낫지만 스데반의 설교를 들을 때 그만 사람들이 이를 갑니다.
강퍅(완고)함이 왔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면 완고함이 오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죄의 유혹입니다.
가룟 유다는 아주 중요한 요14장 15장 16장을 듣기 전에 마음이 강퍅하게 되었습니다.
발을 씻기 시작할 때에 사단이 가룟 유다 마음속에 예수를 팔려는 마음을 넣었습니다.
그래서 강퍅해집니다. 예수님이 이를 알아보시고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라 하십니다.
그래서 발 씻는데서 부터 가룟 유다를 젖혀버립니다. 떡도 한 조각만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너는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선언해 버리십니다.
예수님이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라 하시면 그게 판정입니다. 말씀하시면 종결입니다.
왜 하필 그때 강퍅하게 되냐는 거지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요14장 15장 16장의
결정적인 말씀을 하실 찰나에 그만 가룟 유다의 마음이 강퍅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꼭 결정적인 진리의 말씀을 증거할 때 마음이 강퍅해지는 사람이
있어요.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다 보면 마땅히 그러지 않아야 할 사람이 졸고 있습니다.
고향이 어디십니까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면 그렇게 상냥하게 말하던 사람이
‘그런데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면 그만 얼굴색이 싹 변해버립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에게 강퍅이 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의 음성만 들으면 강퍅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이 들리면 강퍅해집니다. 사도행전에는 관원들이 사도들에게 죽기
싫으면 예수를 그리스도라 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완고해져서 그럽니다.
다시는 그리스도라 전하지 말라는 것은 주의 사도들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지금 어떤 교단에서는 성령 얘기를 못하게 한답니다. 또 어떤 교회는
성령에 관한 얘기를 해도 은사나 표적이나 사역의 영의 얘기밖에 못합니다.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 계신다 이 소리를 못합니다. 감히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을 해 하고 마귀의 사주를 받은 아주 겸손(?)을 떱니다. 그래서
못합니다. 그랬다가는 장로 권사들이 일어나서 목사를 쫓아내 버린답니다.
지금 어떤 교단은 성령 얘기를 아예 못해요.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만 들으면 사람들이 그만 강퍅(완고)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진리의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신다고 외치면 점잖은 장로들이 으흠하고 헛기침한다고 하더라고요.
부산의 어느 성당의 주임신부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참 용감하십니다.
우리 성당에서는 예수가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이라는 말을 하지 못 해요.
대신 낙태금지 사회정의 이런 얘기를 해줘야만 신자들이 좋아 합니다 하더라고요.
16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애굽에서 갈라진 홍해를 건너온 자들이 과연 그럴 수 있느냐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격동하시게 했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기적과
표적을 맛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 앞에는 완고하고 격동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성이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 병 고침, 여러 가지 체험을
받고도 넘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델이라는 겁니다. 제가 말씀을 같이 나누면서 제일 고민스러운 것은
사람들이 원리에 대해서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신앙의 원리를
공부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만들어진 것을 주워 먹으려고 합니다.
기도나 말씀 연구는 목사님이 대신하고 다만 주일마다 우리를 기분만 좋게
충족시켜 달라는 거지요. 이것이 목회자로서 제일 속상하게 되는 원인입니다.
그래서 제 경험에는 성경공부를 하여 지식으로만 깨닫고 우리 목사님 말씀이
좋다고 나팔을 부는 사람들과 세상에 좀 있다고 하는 자들이 목사와 은근한 흥정을
하여 자신들을 인정해 주기만 하면 잘 따르겠다는 부류들이 마음에 늘 걸리더군요.
우리에게 모든 복은 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히브리서를 우리가 왜 공부를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정해진
원리로 관계를 이루어서 그 관계에서 나오는 복을 받자는 얘깁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신앙의 원리는 터득하지 않고 뭔가를 따 먹기만 하려는
사람들이 그만 미혹당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원리를 알지 못해도
쉽게 신앙생활 하는 방법이 있다는 겁니다. 유치하지만 거기 200만원 내놓고
20일만 기도하면 아들 낳는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하는 겁니다. 오늘 하나님이
내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고 한 구절 붙잡고 관찰 해석 적용한다는 사람들은
말씀을 연구하지 않고도 바로 복을 받는 방법이 있는데 왜 말씀을 연구하냐는 거죠.
제발 속지 마십시오. 지금 세상에는 속고 속이고 그렇게들 하고 있는 중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모압 평지까지 인도한 사람입니다. 새 언약까지 인도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소망까지 간 사람입니다. 히3:6절은
소망을 자랑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여호수아가 모세의 바통을
이어받아 이스라엘을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과 구름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는 성령으로 인도했다는 뜻입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 이것은 장막을 의미합니다. 낮의 해가 상치 못하고 밤의 달이 해치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요단강은 법궤를 앞세워 건넙니다. 법궤는 말씀입니다.
돌비는 말씀이고 만나는 생명의 떡이고 싹 난 지팡이는 부활이요 왕권입니다.
법궤는 껍데기 곧 질그릇이고 내용은 보화를 의미합니다. 고후4장 7절은 질그릇 속에
보화가 담겨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담으면 법궤가 된다는 겁니다. 맞습니까?
우리가 ‘보좌로 주여 임하사’ 노래함은 바로 은혜의 보좌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겁니다.
법궤는 언제 없어졌는가? 솔로몬 성전까지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룹바벨 성전에는
없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절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전과 함께 완전히 그 존재가 없어졌습니다. 성전이 없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 몸이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파악하여 확실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노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방주를 짓고 난 다음에 올라탔습니다.
방주가 물에 떴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소돔 성에 천사의 말씀이 전달됐습니다.
롯의 구원을 보면 롯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로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예표입니다.
롯의 두 딸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소돔성에서는 구원을 받았으나
다시 세상에 씨를 퍼뜨립니다. 모압과 암몬입니다. 그러나 롯의 두 사위는
천사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이건 완전히 구원에서 탈락입니다.
멸종됐습니다. 그런데 롯의 처의 구원도 세상과의 벗됨 곧 음녀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믿는 만큼 구원하신다’입니다. 롯의 처도 그 만큼 구원받은 겁니다.
소돔고모라의 유황불에서는 나왔는데 세상과 다시 결탁합니다. 음녀와 적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나왔다고 요한일서는 말씀합니다. 그리고 롯의 두 딸도 세상에서
나와서 다시 세상에 씨를 퍼뜨립니다. 롯만 구원 받은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생각해야 될 것은 노아 한 사람만 의인인데 과연 노아 혼자만
방주에 타라고 하면 노아가 타겠습니까? 자기 가족을 구원해 주지 않는데 노아가
혼자 타겠습니까? 롯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사가 ‘네 숙부가 너만 나오라고 하더라’
하면 롯이 나오겠어요? 안 나옵니다. 가족들을 데리고 나오라고 하니까 데리고
나오는 겁니다. 지금도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잘 알지 못합니다만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하나님이 권념하사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는 겁니다.
요17장의 기도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요17장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주신 영광을 이제 내게도 주사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내가 저희들에게 주었으므로 말미암아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옴을 알게 되고 저들이 말씀을 받아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내가 데려가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보존되길 기도하는데
이 보존 되는 방법은 아버지의 말씀으로 보존됩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저희들이 아버지가 내가 하나된 것과 같이 저희도
우리와 하나가 되어 사랑하므로 세상으로 하여금 저들이 우리와 하나인 것을
알게 하여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입니다. 지금 이 주님의
기도의 내용이 우리에게 유효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으시고 지금 우리가 되어져
가고 있는 겁니다. 이게 대제사장의 기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입니다.
롯이 부족하지만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때문에 소돔 고모라에서 나오듯이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런 중보기도를 드리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참 기도를 하려면 요17장의 기도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기도가 됩니다. 또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 기도가 주님의 기도와 맥락이 같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정말 괜찮은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말씀을 듣는 데
완고하게 된다는 의미는 듣고서 금방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귀가 꽉 막힌 것입니다.
길 가 밭이며 바로 마귀의 밥인 겁니다. 그리고 말씀을 기쁨으로 받으나 시험이
올 때 금방 돌아서는 것은 두 번째의 밭입니다. 그리고 가시덤불은 땅은 좋으나
세상의 염려나 재리의 유혹으로 그 키가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롯의 사위처럼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이 바로 귀가 꽉 막힌 사람이입니다.
길 가 밭입니다. 롯의 처는 기쁨으로 받으나 금방 뒤돌아섭니다.
롯의 두 딸은 그 때 가장 귀한 것은 종족 보존이었습니다. 세상 염려입니다.
다시 돌아가 버립니다. 이는 가시덤불과 같은 밭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는 마음은 옥토이지만 단단한 사람이 있고 질퍽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에 동의도 하지만
말씀을 받아도 믿음의 화합이 안 되는 것이 그 얼굴에 나타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사모하는데 그 말씀을 내가 화합을 이룰만한 심령이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단단하거나 질퍽해 있기 때문입니다. 질퍽한 사람은
그 말씀을 받아도 쑥 들어가고 맙니다. 단단한 사람은 그 말씀이 베어들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아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먼저 옥토가 되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을 사모해서 배우려고 하는데 얀네와 얌브레처럼(딤후3:8) 배워도
그 말씀이 자기 구원에 유익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따라 성령의 감동이 임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에 뿌리를 내릴 때까지 우리의 의지를 사용해야 됩니다.
말씀을 듣는 인격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음이 순수하고 정직하고 진지해야 합니다.
첫댓글 내가 주님의 의로운 판단들을 배울 때에는 올바른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
(시편 119:7)
"믿음" 하나만 봐도, 인간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크게 상충된 놀랍고도 충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제 지인중에 대화를 나누다가 십자가 복음을 들려주면 그만 딱 거기서 멈추라고 해긴 하곤
더 이상 듣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 입니다.
저도 주님의 의로운 판단들을 배울때는 "자존심"이 상하는것을 아주 자주 발견합니다.
마귀와 연합된 나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고,
성령으로 연합된 새사람으로 살고 있지만
여전히 삶속에서 나 자신의 존재가 없어지는것이 죽기보다 싫은(?) 내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이 사시는 하나의 "삶"만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카네이션" 할때까지 나의 삶이 고달픈것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임하시면 나는 버리고 새로운 나를 해산하는 싸움이 오는데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죠. 제게도 또한 긴긴 환난 인내 연단의 과정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부터 성향이 바뀐 나를 발견하니 할렐루야입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로 더 더 가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