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3장1-10절 구시 기도 시간에260504 원주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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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원고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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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적주의를 넘어 일상의 거룩함으로
한국 최고의 신유 사역자라던 조용기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한테 비서실을 통과해서 안수기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대개 사회적 저명인사들이라고 합니다. 어느 장로님, 어느 기업 회장님... 그분들도 암에 걸리고 아프니까 마지막 소원으로 "조 목사님 안수기도 한 번 받으면 좋겠다" 하고 온다는 것이죠. 비서실 통과하려면 돈이 많이 들지 않습니까?
"주여!" 하고 오면서 그분들도 자기 이름 세 글자 값은 해야 하잖아요? 그냥 안수만 덜렁 받기엔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천만 원, 이천만 원 막 헌금하니까 교회 재정부 담당자 입장에서는 "이분들 정도면 받게 해줘야지" 하며 간절히 마음의 문을 열어드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받으면 셋 중에 하나는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교회 70만 성도 중에 이름 없고 가난한 분들이 조 목사님한테 안수기도 받겠다고 달려들면, 교회가 성도들을 못 이길 건 없지만 대개 거절당합니다. 한두 번 거절당하다 보면 "아이고, 안 되는가 보다. 나 같은 놈은 목사님 기도도 못 받네" 하며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내가 하나님 직접 만나면 되지 뭐!" 하며 오산리 금식기도원 가서 "주여 살려주옵소서!" 했던 분들은요, 80%가 낫는답니다.
그래서 기적주의나 한탕주의보다 일상의 거룩함, 그리고 일상 속에서 주님이 늘 함께하심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바빠도 기도의 시간을 따로 떼는 믿음
자,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베드로가 제구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지금 무척 바쁩니다. 3천 명이 주께 돌아왔으니 그 사람들을 양육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지금처럼 예배당 시설이 좋아서 마이크로 3천 명 다 모아놓고 "예배 몇 시, 수요기도 몇 시" 공지하면 편하겠지만, 그때는 마이크도 앰프도 큰 건물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다 집에 모였습니다. 작은 가정집들을 계속 돌아다니는 겁니다. 열두 제자와 120문도가 구역 예배 드리는 모임을 두 명씩, 세 명씩 조를 짜서 계속 돌아다니며 말씀을 양육하고 기도했습니다.
중국 처소 교회도 똑같이 했습니다. 당시에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큰 건물을 짓는 것이 엄청난 공사였습니다. 콘크리트나 철근이 어디 있습니까? 돌을 쌓아 기둥을 만들고 지붕을 올리는 게 난공사입니다. 중동 지방은 나무가 귀해서 돌로 천장을 둥글게 돔 형태로 만듭니다. 돌끼리 서로 맞대어 힘으로 버텨내야 하니 굉장한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크게 짓지를 못합니다. 지진이라도 오면 와르르 무너지니까요.
그래서 작은 집을 짓고 구역 예배를 드리는 학고방 같은 교회들을 계속 다녔습니다. 큰 그룹으로 모일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예루살렘 성전뿐이었습니다. 성전에서는 "예수가 그리스도다"라고 대놓고 외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유대인으로서 가서 기도할 수는 있었습니다. 다만 방언 기도를 너무 세게 하면 "이단스럽다"며 쫓겨나니 주의해야 했지요.
이런 바쁜 와중에도 베드로와 요한이 제구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여러분, 바쁠 때 제일 먼저 빼먹는 게 뭡니까? 바쁘다고 새벽기도 빼고, 예배 빼고... 예배 시간이 가장 먼저 희생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차라리 밥을 굶으십시오. 밭 매는 것을 좀 포기하더라도 예배 시간은 지키십시오. 가정에서도 기도의 단을 쌓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집은 심방을 가면 바로 압니다. 성령의 임재가 탁 올라옵니다. 어떤 집은 앉으면 담배 냄새가 확 날 때가 있습니다. 담배를 피운 건 아니지만 영적 어두움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이죠. 영성 사역을 하는 사람은 센서가 예민해서 알지만, 모르는 분들은 설교할 때 말씀이 막히는 느낌을 받습니다. 기도가 쌓이지 않은 집과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랬습니다. 제가 처음 와서 설교하는데 기도가 하나도 안 쌓여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기도는 저 위 던천에 다 쌓아놨고, 여기 예배당 짓고 나서는 새벽 제단이 엉망이 된 거예요. 기도가 안 쌓여 있으니 성도들이 예배를 통해 성령의 터치를 받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설교할 때 성도들과 아이컨택하며 교감해야 재미가 나는데, 기도가 없으면 말씀이 툭툭 튕겨 나갑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엇을 빼지 않았습니까? 바로 '기도 시간'입니다.
3.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걸인을 예배자로 바꾸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 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한 시간을 깨어 있지 못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영적 원리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3천 명이 돌아왔다고 자랑할 게 아니라, 기도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겁니다. 성전에 올라가는데, 거기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리가 다쳐 완전히 못 걷게 된 그를 사람들이 매일 성전 미문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구걸하기 위해서였죠.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은 비교적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이 있으니 동정심을 유발하기 좋은 장소였던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 입장에서는 낭패일 수도 있습니다. 헌금하려고 천 원 가져왔는데 "저 사람 주면 하나님께 뭘 드리지?" 고민할 수도 있고, 누가 저 사람을 여기 뒀냐며 양심에 찔려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어쨌든 이분은 '목' 좋은 자리를 잘 잡았습니다. 지하철 목 좋은 곳에 앉아 있어야 돈이 되지, 사람 없는 육교 밑에 있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요즘은 사회 복지가 좋아 나라에서 도와주지만 옛날에는 개인의 동정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지요.
베드로와 요한이 들어가려 하자 그가 구걸합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주목하며 "우리를 보라"고 합니다. 돈이 없으면 그냥 외면할 텐데 주목하니까, 이분은 "드디어 때가 왔구나. 한 푼이 아니라 두 푼은 주겠지" 하고 바라봅니다. 그때 베드로가 선포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리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습니다.
보통 이런 이적이 일어나도 근력이 약하면 휘청거리기 마련인데, 이분은 성령이 얼마나 강하게 임했는지 곧바로 뛰고 서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저 성전 미문의 거지라면 어떤 마음일까요? 이분이 기술이 있습니까, 사회생활을 해봤습니까? 오로지 "한 푼 줍쇼" 하는 게 일이었는데, 이제 나았으니 그 일을 못 하게 된 거잖아요. 이분도 "나으면 이제 내 손으로 밥 벌어 먹어야 하는데 어쩌나" 하는 고민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내 삶의 안정감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 있을 때, 인간은 변화를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분은 고민하지 않고 성령의 권능에 마음을 맡겼습니다.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성전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장애가 있으면 성전에 못 들어가는 악습이 있었는데, 이제 나았으니 당당히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한 것입니다. 구걸하던 인생이 예배하는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4. 어떤 상황에도 기도자로 예배자로 섭시다.
우리 안에 어떤 이적이 일어나든지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으로 서기를 축복합니다. 베드로는 기도 시간을 소중히 여겼고, 그 기도의 자리에서 치료받은 이분은 성전 안으로 뛰어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모든 백성이 심히 놀랍게 여겼습니다. 놀라워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행하신 회복과 살림의 역사임을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곧 설교가 되었고,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일 때문에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왜 성전이 소란하냐, 이 사람 진짜 나은 게 맞냐"며 난리가 나고 신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참 아이러니하지요. 예배를 집례한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를 신문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은 기도하러 갔다가 한 명의 예배자를 만나는 하나님의 축복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 은혜가 부어지기를 축복합니다.
목회자도 성도들도 기도하는 중에 주님을 예배하고, 그 속에서 주님이 함께하시는 이적을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걷게 된 것이 이적이지만, 여러분에게 필요한 이적은 다를 수 있습니다. 병이 낫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식의 앞길이 열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중심을 가지고 기도할 때, 주님은 다양한 이적과 기사로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일상의 삶을 거룩하게 살아가며 그 복을 일궈가는 우리 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날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저희들 되게 인도하여 주시고, 아버지의 뜻과 의를 이루며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온전한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해 주시기를 원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