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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객(老客)정철(鄭澈)과 소녀기생(少女妓生)진옥(眞玉)의 연정(戀情)-
시조집 권화악부(權花樂府)에 정송강(鄭松江) 여진옥상수답(鄭松江 與眞玉相酬答)이란 기록이 있다.
정철(鄭澈)이 56세 때 광해군(光海君)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다 선조(宣祖)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 되었다. 그를 파직시켜 유배 보내면서 이 때 선조는 정철(鄭澈)을 향해 대신으로서 주색(酒色)에 빠져 있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 는 말을 하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선조가 56세의 늙은 재상에게 이렇듯이 노골적으로 꾸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철(鄭澈)은 술과 여자에 심하게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술을 좋아하였던 정철(鄭澈)은 술을 마시고 취하면 그 취기로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고 정다운 친구들과 이별을 아쉬워하며 시문을 썼을 것이다.
정철(鄭澈)이 유배지(流配地) 강계(江界)에 우거해 있을 때 만난 아리따운 여인이 바로 말년을 쓸쓸함을 위로해준 진옥(眞玉)이라는 기생이다.
조선시대 전라도 기녀인 진옥(眞玉)은 파란 많은 인생을 살다간 송강(松江) 정철(鄭澈)로 인해 이 시대에 기억되는 여인이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서 주고받은 이야기는
진옥아, 내가 시 한 수 읊을 테니, 너는 그 노래에 화답을 해야 한다.고 하자
예, 부르시옵소서. 할 수 있겠느냐? 지체해서는 안 되느니라.
진옥(眞玉)은 말없이 거문고의 줄을 고른다. 정철(鄭澈)은 목청을 가다듬어 읊는다.
玉이 옥이라커늘 반옥(반玉)만 너겨떠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Ы?(的實)하다
내게 살송곳 잇던니 뚜러 볼가 하노라
-정철(鄭澈) 근악槿樂) 391-
정철(鄭澈)의 노래가 끝나자 거문고에 손을 올린 채로 진옥은 지체 없이
철(鐵)이 철(鐵)이라커늘 섭철(섭鐵)만 녀겨떠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잇던니 뇌겨 볼가 하노라.
-진옥(眞玉) 근악槿樂) 392-
정철(鄭澈)은 놀랐다. 진옥(眞玉)의 즉석에서의 화창은 조선 제일의 문인이라고 칭송하는 당대의 대문장가 정철(鄭澈)을 완전히 탄복시키고도 남았다. 정철(鄭澈)의 시조에 자자구구 대구 형식으로 서슴없이 불러대는 진옥(眞玉)은 정녕 뛰어난 시인이었다.
두 사람의 은유적 표현 역시 뛰어난다. 반옥은 진짜 옥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모조 옥(玉), 진옥(眞玉)은 진자 옥을 뜻하면서, 기생 진옥(眞玉)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며, 살송곳은 살(肉)송곳으로 남자의 성기(性器)'를 은유하고 있는데, 진옥은 쉽게 그 뜻을 알아낸 것이다. 한 술 더 뜬다. 반옥'에 대해서 섭철(?鐵), 진옥(眞玉)에 대해서 정철(正鐵), 살송곳에 대해서 골풀무의 대(對)는 놀라운 기지와 재치와 해학이다. 섭철(?鐵)은 잡것이 섞인 순수하지 못한 쇠를 말하고, '정철(正鐵)은 잡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쇠를 뜻하면서, '송강 정철(鄭澈)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며, '골풀무'는 '불을 피우는데 바람을 불어 넣는 풀무'인데 '남자를 녹여내는 여자의 성기(性器)'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뛰어난 명기(名妓)이다. (? 쇠조각 섭)
옥(玉)을 옥(玉)이라커든 형산백옥(荊山白玉)만 여겻더니
다시보니 자옥(紫玉)일시 적실(的實)하다
맛참이 활비비 잇더니 뚜러 볼가 하노라
-옥이(玉伊) 병가(甁歌) 545-
철(鐵)을 철(鐵)이라커든 무쇠석철(錫鐵)만 여겻더니
다시보니 정철(鄭澈)일시 적실(的實)하다
맛참애 골풀모 잇더니 녹여 볼가 하노라
-철이(鐵伊) 병가(甁歌) 546-
누가 이들의 노래를 추잡한 시정잡배의 오입질 노래라고 할 수 있을까
누가 평소 흠모하던 대 문장가인 정철(鄭澈)을 향한 사랑스런 여자의 육체와 정신의 합일을 이루는 행위는 숭고한 그 자체다.
유배생활에서의 외로운 밤을 찾아 든 여인
대 정치가며 대문장가 정철(鄭澈)의 강계 적거(謫居 유배생활)에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명리를 찾아 평생을 살아왔는데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하고 유배당해 객지로 떠돌아야 하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과 그 적소의 울분과 실의를 달래기 위해 술과 시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여자...
추일작(秋日作;가을 어느 날에)-정철(鄭澈)
山雨夜鳴竹 草蟲秋近床
산우야명죽 초충추근상
流年那可駐 白髮不禁長
유년나가주 백발부금장
산에 비 내려 밤새 대숲 울리고
가을 풀벌레 소리 밤엔 더욱 크게 들리네
흐르는 세월을 어찌 멈추랴
길어지는 흰 머리 막을 수 없네
江界謫中次梁靑溪大樸韻 강계의 귀양지에서 양청계(대박)이 운에 차하다
黃昏有佳月 吾與美人期
황혼유가월 오여미인기
劒閣卒來坦 太行何事危
검각졸래탄 태행하사위
誰能識上古 方欲問無爲
수능식상고 방욕문무위
滿酌一杯酒 共歡堯舜時
만작일배주 공환요순시
황혼에 고운 달이 있어
나는 미인과 더불어 기약했지.
검각산도 급히 오면 평탄커늘
太行山(태행산)이 무슨 일로 위태하리.
누가 능히 상고을 알까마는
바야흐로 무위를 묻고져.
한 잔 술 가득 부어
함께 요순시절을 기뻐하나니.
임금과 위정자(爲政者)들과 백성들에 대한 세상사의 어지러움과 학문과 뜻으로 통하였던 이이(李珥), 성혼(成渾),송익필 宋翼弼) 같은 친교를 나눈 동반자들과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처자의 안부. 시름을 잊고자 한잔 술을 찾아야 했고 그리움을 잊고자 또 한잔을 마셔야 했던 정철(鄭澈). 가을달밤 귀뚜라미의 울음이 적객(謫客)의 가슴을 더욱 외롭고 괴롭혀 초가을 밤은 쉬이 잠들지 못하는 긴 밤을 괴로워하면서 시를 썼겠지.
누은들 잠이오며 기다린들 님이오랴
이재 누으신들 어내 잠이 하마오리
찰하리 안즌 고대셔 긴밤이나 새오리라
-북전(北殿)-
청천의 발근 달은 임의 얼골 보련마는
나는 엇지하여 져 달과 갓치 못 가는고
님도 져 달 보고 날 생각 한는지
-원세순(元世洵)-
진옥(眞玉)은 본래 무명의 강계의 기녀였다. 그녀가 무명의 기생으로서 일약 이름을 떨친 것은 어쩌면 강계에 유배된 정철(鄭澈)을 그녀가 가까이에서 뫼신 인연이 계기가 되어 정철(鄭澈)의 명성과 더불어 빛이 난 것이다.
그때 조용히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철(鄭澈)은 누운 채로 대답했다. 문이 열리며 소리 없이 들어서는 여인, 그녀가 진옥(眞玉)이었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의 방문에 놀란 것은 정철. 더욱 놀란 것은 장옷을 벗고 보인 화용월태)(花容月態의 아름다움. 잘 손질해서 입은 모시옷의 우아함. 꼭 한 마리의 백학이었다. 침침한 불빛에 비친 얼굴은 담장(淡粧). 그러나 그 소박한 얼굴의 주인은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아미를 숙여 깍듯이 예를 드린다. 정철은 말을 잃고 앉아만 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놀라운 미인의 방문이었다.
진옥(眞玉)은 예, 벌써부터 대감의 명성을 들었사옵고, 더욱이 대감의 글을 흠모해 오는 천기이옵니다.
"그래 내 글을 읽었다니, 무엇을 읽었노?"
"제가 가야금을 타 올릴까요?" 하고는
居世不知世 戴天難見天
거세부지세 대천난견천
知心惟白髮 隨我又經年
지심유백발 수아우경년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모르겠고,
하늘 밑에 살면서도 하늘 보기 어렵구나.
내 마음 아는 것은 오직 백발 너뿐인데,
나를 따라 또 한 해 세월을 넘는구나
그로부터 외롭고 쓸쓸하고 괴로웠던 정철의 귀양생활(謫所生活,적소생활)에서 진옥의 샘솟는 기지와 해학이 넘치는 이야기와 가야금의 선율을 들으면 헝클어졌던 마음이 진무되고 우울함을 잊을 수 있었다. 정철(鄭澈) 앞에 나타난 그녀는 단순한 기녀가 아니고 시와 가무(歌舞)에 능하고 지혜롭고 슬기롭고 아름다운 여인 정철(鄭澈)은 이런 진옥을 사랑하게 되었다.
적소(謫所)의 생활 중에서 부인 유씨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도 정철(鄭澈)은 진옥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적어 보내기도 하였다. 정철은 부인 유씨를 사랑하고 존경하여 여자문제에서는 이외로 담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부인 유씨의 인품도 도드라지는 것은 일세를 풍미하는 정치가 남편이자 최고의 문장가로 세상에서 가장 이름을 떨치며 한량의 조건을 충분히 갖춘 남편에게 수 많은 여류 기생들이 그의 시와 노래에 대한 흠모의 정을 갖고 서로 가까이에 모시고자 했겠지만 정실부인에 대한 예의를 변함없이 지키는 남편에 대한 깊은 이해로 남편을 믿고 편하게 해 주었기에 남편이 여자 문제로 속 썩이게 하는 대신 소상히 정철(鄭澈) 자신이 스스로 자기 주변의 여자 얘기를 숨김없이 의논하게 만든 것이었던 것이다.
부인의 서신 속에도 진옥에 대한 투기나 남편에 대한 불평보다는 남편의 적소 생활을 위로해 주는 진옥에 대한 고마움이 적혀 있음을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남자로서 부인과 자기에 대한 진실되고 솔직한 정철의 처신에 진옥은 더욱 깊은 애정과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이리하여 두 사람 사이에는 누구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뜨거운 애정의 강물이 교류되어 갔던 것이다.
隱居(은거)의 생활
그의 은거의 생활은 을축년에 이르는 약 4년간의 기간이었는데, 그가 고양(高陽) 신원(新院)과 전라 창평에 은거하면서 세상을 비관하면서 지낸 기간이다.
노을 지는 저녁 어스름 무렵 멀리 절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
신라(新羅) 팔백년(八百年)의 놉도록 무은 탑(塔)을
천근(千斤)든 쇠붑소?l 티도록 울힐시고
들 건너 적막산정(寂寞山亭)의 모경(暮景) 도올뿐이라
새원 원주 되어 시비를 고텨 닷고
유수 청산을 벗삼아 더?p노라.
아해야 벽제의 손이라커든 날 나가다 하고려
쓴 나물 데온 믈이 고기도곤 마시 이셰
초옥 조븐 줄이 긔 더욱 내 분이라
다만당 님 그린 타사로 시름 계워하노라
가난한 생활, 그 자체는 불평이 없으나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마음은 변함아이없다는 것이 송강 정철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석양(夕陽) 빗긴 날에 강천(江天)이 한빗친제
풍엽(楓葉) 노화(蘆花)에 우러녜는 뎌 기럭아
가을히 다 디나 가되 쇼식 몰라 하노라
50세 때인 1585년(선조 18) 동인(東人)이 합세하여 서인(西人)을 공격하므로 서인의 앞장을 섰던 송강은 부득이 고향인 창평(昌平)에 내려가 4년 동안을 지내야만 했다
창평에서는 외숙 김성원의 산정을 얻어 수석과 갈매기와 학을 벗하여 독서를 하면서 항상 나라를 걱정하는 정이 이때 지은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사미인곡 중에서
연군의 정(忠臣 戀君之 詞), 임금을 그리는 마음
이 몸이 태어날 때에 임을 따라 태어나니,
한평생 함께 살아갈 인연이며
이 또한 하늘이 어찌 모를 일이던가?
나는 오직 젊어 있고, 임은 오직 나를 사랑하시니,
이 마음과 이 사랑을 비교할 곳이 다시없다.
아마도 내가 임금님 곁에 없는 동안에 간신배들이 임금님의 총명을 어둡게 할까 걱정이 되는구나
니화는 발셔 디고 졉동새 슬피 울 제,
낙산 동반으로 의상대에 올나 안자 일출을 보리라 밤듕만 니러하니,
샹운이 지?c는 둥 뉵용이 바틔는 둥,
바다히 떠날 제는 만국이 일위더니,
텬?O에 티뜨니 호발을 혜리로다.
아마도 녈구름이 근쳐의 머믈셰라.
(관동별곡 중에서)
글란 생각 마오.
매친 일이 이셔이다.
임을 뫼셔 이셔 임의 일을 내 알거니,
춘한 고열은 어찌하여 지내시며,
죽조반 조석뫼 예와 같이 셰시는가.
기나긴 밤의 잠은 어찌 자시는고
(속미인곡 중에서)
우리 역사를 통하여 임금님에 대한 연군의 정을 끊임없이 노래한 사람으로 정철(鄭澈)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의상대(義湘臺)에서 해 뜨는 모습을 보면서, 봄이 되어 추위를 이기고 핀 매화를 보면서도, 조석으로 밥상을 받으면서도 임금님을 생각하는 정이 솟구치고 있다.
가사 전후미인곡(前後美人曲)은 시골(창평)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정확한 연월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그의 작품 생활의 절정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는 정해(丁亥) 무자년간(戊子年間)인
듯하다는 기록이 있다. 서포김만중(西浦 金萬重)은 동방의 이소(離騷)라 하여
극찬하기도 하였고, 이수광(李?光1563~1628), 홍만종(洪萬宗 1643∼1725), 김춘택(金春澤 1670∼1717)등은 다음과 같이 격찬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참다운 문장은 단지 이 세 편뿐이다 (서포만필西浦漫筆)
우리나라 노래로는 鄭澈의 작품이 가장 우수하여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이 후세에 성행하였다 (지봉유설 (芝峰類說))
송림의 눈이 오니 가지마다 곳치로다
한가지 것거내여 님 겨신대 보내고져
님이 보신후 제야 노가디다 엇디리
가는 세월에 늙어가는 자기의 처지와 외로움은 시조나 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靑天(청천) 구름밖에 높이 뜬 鶴(학)이더니
人間(인간)이 좋더냐 무슨일로 내려오느냐
긴??이 다떨어지도록 날아갈줄 왜 모르느냐
나무도 병이드니 亭子(정자)라도 쉬리 업다.
豪華(호화)히 셔신제는 오리가리 다 쉬더니
닙디고 가지 것근 후난 새도 아니 안는다.
口號(구호)소리쳐 불러본다)-정철(鄭澈)
白髮心俱白 山靑眼亦靑
백발심구백 산청안역청
流年如可駐 鴨水去還停
류년여가주 압수거환정
머리 희어지니 마음도 희어지고
산이 푸르니 눈도 또한 푸르러라
흐르는 세월을 멈출 수 있다면
압록강 물도 가다가 다시 멈추리라
청원극리(淸源棘裏철월 귀양살이)-정철(鄭澈)
居世不知世 戴天難見天
거세불지세 대천난견천
知心惟白髮 隨我又經年
지심유백발 수아우경년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몰라
하늘을 이고서도 하늘 못 보봐
내 마음 아는 건 백발 뿐
나를 따라서 또 한 해를 보낸다.
별퇴도선생(別退陶先生 퇴계선생과 이별하면서)-정철(鄭澈)
追到廣陵上 仙舟已杳冥
추도광릉상 선주이묘명
秋風滿江思 斜時獨登亭
추풍만강사 사시독등정
뒤따라 광릉에 이르니
배는 이미 떠나 아득하다
가을바람에 강에 가득한 그리움
해 지는 시간, 홀로 정자에 오른다.
그 마음은 충성(忠誠)되고 그 뜻은 맑고 그 절개는 곧으며, 그 문장은 우아하며 완곡하고, 그 가락은 비애로우나 바르기 때문에 거의 굴원(屈原 BC 343?∼BC 277?)의 이소(離騷)에 짝할 만하다 (북헌집 北軒集)
淞江의 짧은 사랑
노재상(老宰相) 정송강(鄭松江)과 기녀 진옥(眞玉)과의 절창(絶唱)이 만들어진 것은 송강의 강계 유배지에서였다. 진옥(眞玉)은 시조문학에 있어 송강첩(松江妾)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시조 문헌 중에 작자를 누구의 첩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진옥(眞玉) 뿐이다. 대개는 기명을 적었는데, 여기 소개하는 진옥(眞玉)도 기녀임에 틀림없는데 송강첩(松江妾)이라고 기록된 것은 송강(松江)의 지위와 명성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사회제도 속에서 양반이 축첩하는 것은 조금도 허물될게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이런 기록이 더 많이 있을 수 있으련만 유독 송강첩(松江妾)이라는 기록만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송강(松江)이 진옥(眞玉)이라는 기생과의 사랑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떳떳이 여길 뿐만 아니라 그녀의 시적 재능을 자랑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 또한 송강(松江)의 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또 한편으로는 송강(松江)의 문학적 대명에 송강(松江) 첩의 작품이라고 밝혀도 조금도 손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작품성을 자신하였다.
우리나라의 시조 작품 중에서도 첩과 정실부인과의 시새움을 노래한 작품이 남아 있다.
첩이 ??타 하되 첩의 설폐 들어 보소.
눈에 본 죵 계집은 기강이 문란하고
노리개 녀기첩은 범백이 여의하되
중문안 외방관기 긔 아니 어려우며
양가녀 첩하면 그중에 낫건마는
안마루 발막짝과 방안에 쟝옷귀가
사부가모양이 저절노 글너가네
아무리 늙고 병드러도 규모 딕히기는 정실인가 하노라
육청(六靑)
첩이 좋다 하되 첩의 나쁜 점을 들어 보시오.
눈요기하기에 좋은 종을 올려 앉힌 첩은 기강이 문란하고,
노리개로 좋은 기생첩은 여러 가지 일들이 뜻과 같으나,
중문안 지방 관아에 매인 기생을 들여앉힘이 그 아니 어려우며,
양갓집의 딸을 첩으로 맞아 오면 그 중에 가장 낫지마는,
마루 아래 놓이는 신발짝과 장롱의 귀퉁이가 사대부 집 가풍이 저절로 잘못되어 간다.
아마도 늙고 병들어도 가정의 가풍과 제반 규모를 지키기는 정실부인인가 하노라
病中書懷 병중에 회포를 쓰다
家懷湘楚靑山遠 身繫安危白髮長
가회상초청산원 신계안위백발장
每到五更愁未睡 臥看明月下西廓
매도오경수미수 와간명월하서곽
집 생각의 저 남방의 푸른 산은 멀고
安危(안위)에 몸이 매여 백발만 길었네.
매번 五更(오경)에도 시름으로 잠 못 들고
서쪽 행랑 아래 누워 밝은 달을 보나니.
關東有贈妓(관동유증기) 관동에서 기녀에게 주다
十五年前約 監司察訪間
십오년전약 감사찰방간
吾言雖或中 俱是?毛斑
오언수혹중 구시빈모반
십오 년 전에 언약이
감사나 찰방이 된다 하였지.
내 말이 비록 적중했다지만
그대와 함께 귀밑머리 반이나 새었네.
증별(贈別;이별하며 주다)-정철(鄭澈)
惜別重携手 論懷更命樽
석별중휴수 논회갱명준
一生頻聚散 萬事任乾坤
일생빈취산 만사임건곤
아쉬운 이별에 다시 또 손잡으며
회포를 논하며 다시 술 마시라 한다.
일평생에 자주 모였다 흩어지니
온갖 일은 하늘에다 맡겨보자꾸나
감사(監司)나 찰방(察訪)은 모두 각 지방에 이를 수 있는 벼슬이다. 하여 관동지방(關東地方)의 기생과 헤어지면서 감사나 찰방이 되어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던 것이다.
遣興(견흥) 8수 중 제3수
我有一端綺 拂拭光凌亂
아유일단기 불식광릉란
對織雙鳳凰 文章何燦爛
대직쌍봉황 문장하찬란
幾年협中藏 今朝持贈郞
기년협중장 금조지증랑
不惜作君袴 莫作他人裳
불석작군고 막작타인상
나에게 고운비단 한 끝 있삽기에
털고 닦아 깨깔이 으리으리해
한쌍의 봉황이 수 놓여 짜져
그 무늬 정말 찬란스러워
몇 해를 행담 속에 간수하옵다
오늘 아침 님에게 드리옵니다.
당신 바지 짓는 거야 아깝잖사오나
남의 치마 짓게는 주지 마옵소서.
遣興 (견흥)4
精金凝寶氣 鏤作半月光
정금응보기 루작반월광
今日贈君行, 願君爲雜佩.
금일증군행, 원군위잡패.
不惜棄道上 莫結新人帶.
불석기도상 막결신인대.
곱게 다듬은 황금으로
반달 모양 만든 노리개는
시집 올 때 시부모님이 주신 거라서
붉은 비단 치마에 차고 다녔죠
오늘 길 떠나시는 님에게 드리오니
먼 길에 다니시며 정표로 보아주세요
길가에 버리셔도 아깝지는 않지만
새로운 여인에게만은 달아 주지 마셔요
위 두 시는 許蘭雪軒(허난설헌)이 바람 피우는 남편 金誠立(김성립)에게 준 시이다.
그러나 송강(松江)의 부인 유씨와 眞玉(진옥)의 사이는 그렇지 않았다.
선조 25년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그 해 5월 강계에서의 적소생활에서 풀려 송강(松江)이 57세 때 다시 관로(官路)에 나가게 되자 송강(松江)의 풀림을 기뻐하면서도 보내기 아쉬운 정이 진옥(眞玉)을 눈물짓게 했다. 송강(松江) 역시 적소의 생활을 청산하는 기쁨 속에서도 진옥(眞玉)의 일이 마음 아팠다. 마지막 송강(松江)을 보내는 자리에서 진옥(眞玉)은 아쉬움을 이렇게 불렀다.
人間此夜離情多 落月蒼茫入遠波
인간차야이정다 낙월창망입원파
惜間今硝何處佰 旅窓空廳雲鴻過
석간금초하처백 여창공청운홍과
오늘밤도 이별하는 사람 하 많겠지요.
슬프다 밝은 달빛만 물 위에 지네
애닯다 이 밤을 그대는 어디서 자오
나그네 창가엔 외로운 기러기 울음뿐이네.
부인 유씨는 서울로 올라온 송강(松江) 더러 진옥을 데려오도록 권했다. 송강(松江) 역시 진옥(眞玉)에게 그 뜻을 물었으나, 진옥(眞玉)은 끝내 거절했고 강계에서 혼자 살며 짧은 동안의 송강(松江)과의 인연을 되새기며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송강 정철 58살(1593년) 선조 26년. 1월에 체찰의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모함을 받고 북쪽 조정으로 돌아와서 5월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게 되는데, 출발에 임하여 임금께 글을 올려 국난에 임한 충정을 간절히 드러낸다. 귀국 후 명나라 조정에서 군사를 출동할 뜻이 없는 것 같이 송강의 일행으로부터 나온 거짓 보고 때문에 엉뚱한 모함을 입어 사면을 청하고 강화 송정촌으로 물러났다.
울분과 빈한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향년 58세인 1593년 12월 18일 파란 많은 일생을 마쳤다.
송강 정철의 묘
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遺感)소강의 무덤을 지나며
그의 묘는 처음에는 부모와 장남이 묻힌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마을에 썼지만 현종 6년(1665)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권유로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동 환희산 기슭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묘소 앞의 사당 송강사는 충북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잇다.
송강사에서 묘소로 올라가는 야트막한 야산 기슭에는 ‘사미인곡’일부를 새긴 시비가 서 있어 일세의 풍운아 송강 정철의 위대한 풍류정신과 문학정신을 새삼 되새기게 해준다.
송강(松江)이 선조 26년(1593) 12월 18일 강화의 우거에서 생을 마치는 운명의 자리에 소리 없이 흐느끼는 여인이 있었다. 진옥(眞玉) 그녀였다. 그 후 진옥은 강계를 떠났다. 그리고 그녀의 그 후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 아무도 모르게 대감이 묻힌 곳 가까운 데를 찾아 간 것이었을까?
사람이 죽어지면 어드러로 보내는고
뎌셩도 이성 갓치 님한데 보내는가
진실노 그러곳 할쟉시면 이제 죽어 가리라
죽음을 앞두고 황진이(黃眞伊)는 지나온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내가 죽거든 울지도 말고 고악(鼓樂)으로서 상여를 전송해 달라'고 부탁을 할 때에는 일세의 명기다운 생각을 한다고 수긍을 하였지만 '생전에 업보로 관도 쓰지 말고 동문밖에 자기의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으라' 고 하였다한다.
병가(甁歌)집에 보면 이런 시가 한 수 전해져 온다.
이몸이 죽어지거든 뭇지 말고 주푸리여 매혀다가
주천(酒泉) 깊흔 소에 풍덩 드리쳐 둥둥 띄여두면
일생에 질기던 거시미 장취불성(長醉不醒)하리라
송강(松江)처럼 평소 술을 몹시 좋아하던 사람이라면 이런 유언을 남김직도 할 것 같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는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뭇??는다
잔(盞) 잡아 권(勸)하리 업스니 글을 슬허 하노라
나중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의 한탄을 담은 술 한 잔이 그 무덤 앞에 올려진 걸 보면 사람들은 황진이(黃眞伊)를 동구 밖에 내쳐 둘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일세의 명기의 죽음을 애달파한 사람들이 초라하지만 청초 우거진 무덤을 쌓아 올린 걸 보면 썩어 없어질 육신이나마 잠깐이라도 황진이(黃眞伊)의 모습 그대로 눕도록 해주고 싶다는 갸륵한 마음 이였을 것이다.
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遺感) 석주 권필(石洲 權?;1569-1612) 淞江의 무덤을 지나며
空山木落雨簫蕭 相國風流此寂寞
공산목락우소소 상국풍류차적막
?愴一盃難更進 昔無歌曲卽今朝
추창일배난경진 석무가곡즉금조
빈 산엔 잎이 지고 궂은 비만 내리는데,
상국(相國)의 풍유로움이 이제는 적막하구나.
슬프다 한 잔 술을 다시 권키 어려우니
옛날의 그대 노래가 바로 그대로구려.
석주 권필(石洲 權?)이 松江의 묘를 지나며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한 것이 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遺感)이다.
장진주사(將進酒辭)를 불렀던 주인공 송강 정철(松江 鄭澈)도 또한 남의 노래의 객이 되었다. 그것이 인생유전(人生流轉)의 법칙(法則)이며 자연(自然)의 섭리(攝理)일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권석주(權石洲)는 광해군(光海君) 비(妃) 류씨(柳氏)의 아우 유희분(柳希奮 )등 척족(戚族)들의 방종(放縱)을 궁류시(宮柳詩)로써 비방하여 광해군의 진노를 사서 심한 국문을 당한 후 귀양을 가는 노중(路中) 성치 않은 몸으로 동대문 밖에서 사람들이 동정하여 주는 술을 주는 대로 받아 마시고 이튿날 죽었다.
山寺夜吟 - 鄭澈 산사의 밤
蕭蕭落木聲 錯認爲疎雨
소소낙목성 착인위소우
呼僧出門看 月掛溪南樹
호승출문간 월괘계남수
나뭇잎이 지는 쓸쓸한 소리를
성근 빗소리인줄 잘못 알고서
스님에게 문을 나가 보라 했더니
시내 남쪽 나무에 달만 걸렸네.
장진주사(將進酒辭) 한잔 술에 인생을 마시는
선조실록(宣祖實錄)에 보면 정철은 강화에 우거(寓居)하다가 술병으로 죽었다고 하였고, 정철 자신도 주중사객(舟中謝客)에서 반백 인간이 술에 취하고, 이름을 얻었다. 라고 하고 있다.
재 너머 성권롱 집의 술 닉닷 말 어제 듯고
누은 쇼 발로 박차 언치 노하 지즐 타고
아해야 네 권롱 겨시냐 정좌수 왓다 하여라
친구 정철의 자질과 능력을 몹시 아끼고 사랑했던 栗谷 李珥는 ‘제발 술을 끊도록 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을 없애라’ 고 수 차례 권면을 하곤 했다. 그렇지만 정철의 눈에 비취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乖離)에서 오는 허탈감은 그를 술의 세계로 이끌었고 술을 마시고 취하여 세상과의 괴리를 잊고자 하였지만 아무리 술을 마셔도 현실에 대하여 근심하고 걱정하는 마음속의 어지러움은 어째 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한잔을 먹사이다 또 한잔을 먹사니다
꼿프로 술을 빗저 무궁무진 먹사이다
동자야 잔 가득 부어라 취코 놀고 하자고나
<무명씨>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가 허무한 인생을 더욱 쓸쓸하게 노래한다.
술을 주는 대로 받아 마시고 이튿날 죽었다. 그래서 술에 대한 시도 많다.
산촌에 술이 막 익었는데
천리 길에 친구가 왔도다.
촌심 얘기해도 다함이 없고
정원 나무엔 석양을 재촉한다.
오랜 병에 사귐을 폐하니
사립문에 눈 바람이 두들긴다.
산간에 좋은 일 생겼으니
해는 저물고 술은 항아리에 가득하네
<대점봉최희직기2수(大岾逢崔希稷棄二首)>
詠紫薇花(영자미화)-송강
一園春色紫薇花 ?看佳人勝玉釵 재겨우 재 비녀 채
일원춘색자미화 재간가인승옥채
莫向長安樓上望 滿街爭是戀芳華
막향장안루상망 만가쟁시련방화
온 동산에 봄빛의 紫微花(자미화)는
미인이 옥비녀를 겨우 이기는 듯.
장안의 樓에 올라 바라봄을 바라지 마시길
온 거리가 다투어 향기로운 꽃들을 사모하나니.
(.?看: 겨우 ~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