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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어린이와 문학』2009.12월호
동시적 상상력, 진지함과 유쾌함
-내가 읽은 2009년 동시집
오 인 태
1. 실종과 부재, 퇴행의 연대
힘겹다. 여태껏 피와 땀을 보태며 지켜왔던 공동체의 가치와 체제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상황을 지켜보는 일도 그렇고, 그 가치와 체제의 중심에 우뚝하니 서있던 이들이 하나 둘 떠나간 빈자리의 황량함과 우울함을 견디는 일도 그렇고, 막무가내로 저지르는 횡포와 전횡에 따르는 박탈감과 곤궁함을 참아내는 일도 그렇다. 그러나 무엇보다 글줄이나 읽은 사람으로서 이성과 양심, 상식과 원칙이 실종된 시대, 그리하여 오로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 야만의 사회를 살아내기가 몹시 힘들다. 우리는 다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만’ 하는, 시간과의 힘겨운 싸움에 들어갔는가.
실종과 부재의 연대, 나는 2009년을 감히 이렇게 규정하련다. 우선, 우리가 지켜온 가장 큰 가치체계였던 민주주의가 사라졌다. 이를 지탱하는 법과 원칙이 사라졌다. 그 징표가 되었던 영웅들이 속속 사라졌다. 삶의 터전이 사라지고, 민족이 사라지고, 역사가 사라지고, 언어가 사라져 가고 있다. 모든 소통의 통로도 사라졌다. 금방 눈앞에 있던 모든 것이 갑자기 사라지고, 없는, 이 당황스런 시대를 ‘실종과 부재’로 밖에 달리 형용할 말이 없는 탓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그것은 누군가의 손에 쥐어져 있을 테다. 그 ‘누군가’가 다수라면 진보로 보아주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소수라면 누가 뭐래도, 이건 역사의 퇴행이다.
또, 한 해를 보내고 세모를 맞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은 진보한 자리인가. 퇴보한 자리인가. 그 현상과 징표들은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2. 양적 빈곤, 질적 풍요
실종과 부재의 자리에 남는 건 없다. 그나마 있다면, ‘편중’과 ‘궁핍’일 테다. 이것이 바로 2009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을 짚어볼 수 있는 가장 뚜렷한 현상이자 징표다.
실종과 부재에 따른 편중과 궁핍 현상은 올해 동시를 짚어보는 자리에서도 드러났다. 우선, 물량 면에서 가난해졌다. 지난해에 이 지면에 연간 평을 쓰면서 내가 읽은 동시집은 모두 스물세 권이었다. 해서, 불황의 조짐들이 도처에 나타나는 와중에서도 동시 출판만은 신기하게도 활황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올해에는 인터넷에서 출판목록을 뒤적이면서까지 구해 읽은 동시집은 모두 열다섯 권이다. 최근까지 애써 구해 읽은 책까지 포함해서다. 처음엔 고작 열 권의 시집을 들고, 그것도 특정출판사에 쏠린 시집들로 연간 평을 써야하는 불만과 곤혹감에 한참을 뭉그적거렸다. 그러다가 최근에 한겨레 ‘시인의 마을’에서 이정록 시인의 동시를 읽고는 ‘아, 이 시인이 동시집을 냈나?’ 하며 곧바로 창비에서 나온 『콧구멍만 바쁘다』와 새로 눈에 띈 몇 권의 동시집을 구매한 것을 추가해 그렇다는 말이다. 그 ‘반가움’이라니, 그때까지만 해도 창비에서 낸 동시집은 단 한 권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물론 작년에 낸 시집이든, 올해 낸 시집이든 실린 시들이 모두 당해연도에 쓴 시들은 아닐 테다. 그렇지만 뚜렷한 출판 물량의 감소는 출판사의 출판사정이나 작가들의 창작의욕이 그만큼 위축되고 감퇴된 데 따른 것이라 추측하는 근거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권오삼의 『똥 찾아가세요』(문학동네), 권영상의『잘 커다오, 꽝꽝나무야』(문학동네) 김륭의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문학동네), 최종득의 『쫀드기 쌤 찐드기 쌤』(문학동네), 신형건의 『콜라 마시는 북극곰』(푸른책들), 한상순의 『뻥튀기는 속상해』(푸른책들), 문삼석의 『흑염소는 까매서 똥도 까맣다』(섬아이), 민현숙의 『달팽이가 말했어』(섬아이), 권영상의 『구방아, 목욕 가자』(사계절), 함민복의 『바닷물 에고, 짜다』(비룡소), 이정록의 『콧구멍만 바쁘다』(창비), 김영미의 『재개발 아파트』(청개구리), 김중근의 『너랑 나랑』(미래문화사), 백우선의 『느낌표 내 몸』(시로 여는 세상), 배진희의『정말! 모르지...』(구름서재), 이렇게 열다섯 권이 내가 읽은, 2009년 출간 동시집 목록이다.
굳이 수치로 제시할 필요도 없이 특정출판사 편중현상이 뚜렷이 드러난다. 문학동네에서는 아베 히로시의 동시 그림책 세 권도 냈다. 후발주자의 의욕으로 보아주기엔 다른 출판사의 궁핍이 영 켕긴다.
그렇다면, 올해 출간 동시집의 이런 양적 빈곤과 편중현상이 질적 빈곤과 편중까지 불러왔을까. 그럴 개연성은 있다. 그러나 양적 빈곤이 곧바로 질적 빈곤으로 이어지리라는 추측은 무리다. 정치사회적 상황이나 경제 불황으로 인한 양적 빈곤은 출판사나 출판시장에 해당하는 문제이겠지만, 질적 빈곤은 오로지 창작자에 창작역량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외부의 조건이나 상황이 창작자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다. 그러나 아직 문화정책이나 사회적 조건이 문화예술과 문학 창작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주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학문과 언론에는 시시각각 차꼬가 채워지고 재갈이 물려지고 있음을 알지만, 창작에까지 저들의 손이 미친 것으로 보이지는 않은 탓이다. 속내를 밝히자면, 창작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영역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아무리 괴벨스의 망령이 부활한다 한들 어찌 현실 너머를 꿈꾸는 창작자의 상상력까지 제약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동심으로 한 꺼풀 더 위장한(?) 아동문학을 속속들이 파헤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역설이지만, 이 무지막지한 정부에 그럴 능력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오히려 억압상황일수록 문학의 토양은 그만큼 비옥해진다. 언론에 속박이 가해지면 문학이, 산문에 검열기제가 채워지면 시가 그 자리를 대신해온 사실은 역사가 증명해 준다. 요컨대, 양적 빈곤은 외부에 그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문제일지라도, 질적 빈곤은 오로지 창작자의 창작역량에 관련된 문제라는 말이다.
이 사실을 입증하듯 올해에도 풍족하지는 않지만 우리 동시의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주는 몇몇 작가와 작품들은 여전히 빛났다. 출판사에 따른 질적 편중도 거의 없었다. 상대적으로 양은 달리지만, 창비에서 낸 『콧구멍만 바쁘다』(이정록), 비룡소에서 낸 『바닷물 에고, 짜다』(함민복), 사계절에서 낸 『구방아, 목욕 가자』(권영상), 푸른책들에서 낸 『콜라 마시는 북극곰』(신형건), 『뻥튀기는 속상해』(한상순), 섬아이에서 낸 『흑염소는 까매서 똥도 까맣다』(문삼석), 청개구리에서 낸 『재개발 아파트』(김영미)는 올해 내가 읽은 좋은 동시집으로 소개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오히려 지난해보다 출판사별로 텍스트를 고르게 가려 뽑을 수 있어서 마음 편하고 기쁘다.
3. 생태적 상상력, 진지함과 안정감
2009년을 굳이 ‘상실과 부재의 시대’라 부른 내심에는 우리 사회 다수의 진보를 위한 대열의 앞장을 지키던 세 지도자를 잇달아 잃은 상실감이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으리라. 물론 이 상실감과 공허함은 믿고 의지하던, 또 그럴만한 어른을 잃은 데서 느끼는 감정일 테다. 기실, 어른이 없다고 하는 말은 이전부터 들어온 얘기다. 세계 최고의 노령화사회를 맞고 있는 판국에 물리적 나이를 머릿속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제대로 역할을 하는 어른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다행히 우리 (동)시단은 예외였다. 올해 동시집을 낸 세 분 원로의 작품은 아직도 이 분들이 너끈히 우리 시단을 떠받치는 버팀목 구실을 하고 계시구나, 하는 안도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권오삼, 권영상, 문삼석 시인이 그분들이다. 그리고 이력과 능력으로 봐서 우리 시단에서는 중견에 해당하는 두 시인, 신형건과 한상순의 동시들도 여전히 역량이 건재함을 보여준다.
나일론 그물을 둘러친 닭장처럼 생긴 커다란 새장에
참새들이 몰래 들어가 모이를 먹고 있다 금계, 꿩, 잉꼬, 문조, 십자매, 모란앵무가 먹어야할 모이를
참새들이 먹다가 사람 소리가 나면 일제히
새장 밖으로 포르르 달아났다가
금세 다시 새장 안으로 포르르 날아 들어와 먹는다
새들은 저들이 먹어야 할 모이를
참새들이 가로채 먹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듯
모이통에 나란히 붙어 서서 사이좋게 먹고 있다
나는 참새들이 하는 짓도 재미있었지만
서로 다투지 않는 것이 참 신기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맹수나 사람들 같았으면 어땠을까 하면서
-권오삼, 「새들의 세계」전문, 『똥 찾아 가세요』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사뭇 고즈넉하고 따뜻하다. 다른 새들이 먹어야할 먹이를 가로채 먹는 참새에게까지도 말이다. 그러나 기실, 새들에게는 네 먹이 내 먹이가 따로 없을 테다. 오직 맹수나 인간만 네 것 내 것을 가릴 따름이다. 아니, 인간은 네 것 내 것을 따지는 게 아니라 남의 것까지 넘보는 데서 문제를 발생시킨다. 인류사의 온갖 전쟁이나 오늘날, 생태계 파괴에 따른 지구의 위기가 바로 남의 것을 넘보고 독차지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이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던가. 시인의 인식과 상상력은 거기까지 닿아있음이 분명하다. 바로 생태적 상상력이다. 생태적 상상력이란 인간도 세계의 한 개체이자, 수많은 개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전체, 즉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것을 말한다.1) 물론 이러한 생태적 상상력은 세계를 바라보는 진지하고도 따뜻한 시선에서 비롯한다. 시집의 다른 많은 시편에서도 기계화, 물신주의, 인간중심주의로 대변되는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의식과 진지한 생태적 상상력이 발휘되고 있다는 데서, 왜 이 노시인의 시정신이 오래도록 노쇠하지 않고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풀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
산에서 자란 나무들은
귀가 밝다.
가랑잎 뒤척이는 소리에도
샘물 때구르르 구르는 소리에도
퍼뜩 귀를 연다.
삐잇삐, 어린 산찌르레기
외로이 우는 울음에도
나무는 놓치지 않고 귀를 기울인다.
그걸 안다, 목수는.
목수는 그걸 알고 산에서 자란
나무를 베어 문을 만든다.
여보세요,
누군가 힘없이 부르는 작은 소리에도
선뜻 귀를 열어 주는
그런 문을.
-권영상, 「여보세요」전문, 『구방아, 목욕 가자』에서
동화작가로도 귀에 익히 익은 권영상 시인의 동시다. 그래서인지 이 시에서도 동화적 발상이 언뜻 비치긴 하지만, 나무의 귀를 사람 사는 집의 문으로 환치시키는 시적 상상력은 시인의 만만찮은 시적 역량을 가늠케 한다. “가랑잎 뒤척이는 소리에도” “샘물 때구르르 구르는 소리에도” “퍼뜩 귀를” 여는 나무나 “여보세요, / 누군가 힘없이 부르는 작은 소리에도 / 선뜻 귀를 열어 주는” 그 나무로 만든 문의 귀는 기실, 다름 아닌 시인의 귀일 터인즉, 이런 자연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들을 수 있는 시인의 귀는 얼마나 밝은 것인가. 그러나 이건 실제 들은 소리가 아니라 시적 상상력으로 들은, 이를테면, ‘상상의 소리’다. 이것을 인간의 언어로 기호화하는 것이 시적 형상화다. 인간의 말은 발화 자체가 언어공동체의 공통약호로서 그 성원이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 이외의 뭇 생명, 사물까지도,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으려면 시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가능한 일이다.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시의 대상과 합일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시적자아와 대상의 경계가 없어져 자아의 것이든 대상의 것이든 무엇이든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래서 항상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시의 대상과 소통을 통한 일체화를 추구하는 바, 시적 상상력이란 대개 인간과 자연을 동격체로 인식하는 생태적 상상력과 연결되어 있음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아동성의 중심속성이 자아와 세계를 동일화하는 동일성이고, 마찬가지로 세계와 자아의 동일화를 추구하는 장르가 시라면, 이 둘을 다 아우르는 동시는 본질적으로 생태적 상상력의 산물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테다. 이처럼 세계에 해당하는 모든 생명, 심지어 사물에게까지 진지한 마음으로 귀와 눈을 밝게 열어놓고 소통할 줄 아는 시인은 얼마나 미더운 존재인가.
세상에서 가장 큰 입으로
세상에서 가장 큰 먹이를 먹은 하마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입으로
세상에서 가장 작은 먹이를 먹은 개미가
어느 날 아침
똑같이 말했대.
-오늘 아침은
참 잘 먹었어!
-문삼석, 「똑같이」전문, 『흑염소는 까매서 똥도 까맣다』에서
문삼석은 올해로 일흔 연세를 바라보는 원로 시인이다. 그동안 10여 권의 동시집을 내고 계몽사아동문학상, 소천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등 굵직굵직한 상들을 모두 수상하며, 이미 우리 동시사에 그 이름을 번듯이 올려놓은 무게 있는 동시인이다. 그의 시는 마치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나 손녀를 무릎에 앉혀놓고 눈을 맞추며 세상 이치를 조곤조곤 설명하는 듯하다. 그래서 대체로 쉽게 읽힌다. 이런 시가 빠지기 쉬운 함정, 예컨대, 하나마나한 유치하고 뻔한 얘기나 교훈조에서는 한참 벗어나 있다. 오히려 경륜에 따른 지혜와 어린이화자를 앞세운 순수한 동심이 동시로서 완성도와 안정감을 높이고 있다. 이 시도 아이들이 이해할 만한 시적상황과 언어로 결코 얕거나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생명이 제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만족한다면, 생태계의 질서가 깨어질 까닭이 없다. 오직 인간만이 먹고 남기고, 남의 것까지 넘보며,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데서 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 즉 기의를 그렇지 않은 다른 생명체들의 생태현상, 곧 기표로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답답하고 무거운 기의를 이렇게 가볍고도, 일면 유쾌한 기표로 표현한 시가 바로 「똑같이」이며, 그래서 이 또한 생태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동시라 할 만하다. 동시란 무릇 이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문삼석 시인의 동시에 믿음이 가는 이유는 짧다는 데 있다. 시와 마찬가지로 동시 또한 산문과 경계를 허물며 줏대 없이 길어지거나 경박해지고 있는 현실에서 ‘시가 짧다’는 것은 시인이 그만큼 시의 본질과 원칙을 중시하고 있는 것으로 비치는 탓이다. 내가 읽은 올해 동시들은 대체로 너저분하게 길어지는 현상이 뚜렷했다. 이미 시에서 문제로 지적되는 현상을 굳이 동시가 따라야 할 까닭이 없다.
아빠가 화분에 넣을 흙 한 줌
퍼 오라 해서 뒷산에 갔다.
모종삽을 들고 두리번거리다
떡갈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았는데
막 삽질을 하려다 움찔하고 말았다.
모종삽을 땅에 푹 꽂으려는데
마침 거기에 제비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고,
조금 옆으로 비켜나 또 삽질을 하려는데
아기소나무가 바람에 살랑 몸을 흔들고,
그 아래에 개미 몇 마리가 발발발
줄지어 기어가고, 또 그 옆에
새포름한 이끼가 폭신한 담요를 깔았고,
별게 없으니 여긴 괜찮겠지, 하며
반쯤 썩은 가랑잎들을 슬쩍 들추었더니
아유, 깜짝이야! 지렁이가 꿈틀대고…….
흙 한 줌에 깃들어 사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글쎄 한참을
쪼그려 앉아 바라보기만 했다.
-신형건, 「흙 한 줌」전문, 『콜라 마시는 북극곰』에서
이야기하듯 읊조리는 독특한 진술방식, 그리고 활달한 상상력과 재기발랄한 문체를 가진 그의 시풍은 이번 『콜라 마시는 북극곰』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번 시집은 이에 더해 좀더 작은 생명에 대해 더욱 진지하고도 세밀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점이 우선 반갑다. 그의 시적 상상력이 생태적 상상력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지켜보는 반가움이다. 그 방증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 시집에 실린 「쇠똥구리」「양재역의 비둘기」「유리 감옥」「비룡폭포의 다람쥐」「떡갈나무에게 인사하기」「콩닥콩닥」「콜라 마시는 북극곰」「무서운 얼음땡놀이」「탄소 발자국」「뉴질랜드에서 온 양의 이메일」「벌레 먹은 자리」「자장 이야기」와 같은 시는 유리창, 콜라로 상징되는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의식과 생태적 상상력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시들이다. 앞에 적은 시「흙 한 줌」도 지구 곳곳에서 숨쉬고 있는 뭇 생명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 소중함을 환기시키고 있다. 발랄하면서도 주제의식이 뚜렷하다는 것이 신형건 동시의 미덕이자 강점이다. 다만, 「콜라 마시는 북극곰」「무서운 얼음땡놀이」「탄소 발자국」「뉴질랜드에서 온 양의 이메일」등의 시에서는 다분히 ‘강성 녹색문학’2)의 소지가 엿보이지만, 뭐 그런들 어떠랴. 우리 동시에서도 그런 시인 한 사람쯤 가지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신형건 시인은 이미 동시단에서 독특한 목소리로 한 자리를 차지하며 우리 동시를 더욱 다채롭게 하는 색깔 하나를 보태고 있는 시인이 아닌가.
감나무에
홍시 세 개
까치밥으로 남겨 두셨대
밤나무에
밤송이 세 개도
다람쥐 몫으로 남겨 두셨고
추수가 끝난 다랑논에도
벼 이삭 몇 개
참새 몫으로 꼭 남겨 놓으셨다지
가을걷이가 끝나면
들에서 고생한 허수아비
꼭 집으로 데려오셨고
어둑어둑 땅거미 내릴 때
들일 마친 할아버지,
소달구지에 마저 실어도 될 곡식 가마니
지게에 한 짐 나눠 지고 다니셨대
“말 못 허는 짐생도 잘 거둬야 하는 벱이여!”
할아버지는 늘 그러셨대
“이게 할아버지께 받은 유산이란다.
네게도 꼭 물려주고 싶은…….”
아빠는
입버릇처럼 늘
내게 말씀하시지
-한상순, 「할아버지 유산」전문, 『뻥튀기는 속상해』에서
“감나무에 / 홍시 세 개 / 까치밥으로 남겨” 두시는 마음이나 “밤나무에 / 밤송이 세 개도 / 다람쥐 몫으로 남겨” 두시는 마음이나 “추수가 끝난 다랑논에도 / 벼 이삭 몇 개 / 참새 몫으로 꼭 남겨” 놓으시는 마음이나 “가을걷이가 끝나면 / 들에서 고생한 허수아비 / 꼭 집으로 데려” 오시는 마음이나 “들일” 마치고 “소달구지에 마저 실어도 될 곡식 가마니 / 지게에 한 짐 나눠 지고” 다니신 마음이나 모두 “말 못 허는 짐생”조차도 세심하게 배려하는 자비심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자비심을 실천하는 것을 일러 ‘보살행’이라 부른다. 인간과 모든 생명을 동격체로 여기는 이 일원적 사고야말로 우리 선조들의 오랜 세계관이었다. 이것을 바로 자연의 ‘벱(법)’이라 여기며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옛날 우리 농부들은 콩을 심을 때 꼭 세 알씩을 묻었는데, 그 까닭은 한 알은 공중에 나는 새의 몫이요, 한 알은 땅에 사는 벌레의 몫이요, 나머지 한 알은 심는 사람의 몫으로 생각했던 탓이다. ‘할아버지의 유산’은 다름 아닌 이런 세계관, 곧 ‘자연의 법’이다. 이 소중한 유산을 걷어차 버린 못난 후손들은 오히려 자연의 법을 거스르며 자연을 모조리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 전 지구적 생태위기의 본질이자 정체다. 이 시 또한 우리의 비뚤어진 세계관을 은근하게나마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뻥튀기는 속상해』를 쓴 한상순도 이미 『예쁜 이름표 하나』『갖고 싶은 비밀번호』등의 시집을 내고 ‘황금펜 아동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동시단에서는 중견급에 해당하는 시인이다.
4. 동시적 상상력, 역설적 소망과 유쾌함
올해에도 동시동네에 나타난 새 얼굴들이 눈에 띈다. 시를 쓰던 시인들이 동시동네로 몰려오는 추세를 두고 지난해에 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진단한 바 있다. 해서 지난해 우리 동시동네에서는 이 문제가 가장 큰 관심을 끈 토론 주제가 되기도 했다. 올해에도 시만 써오다가 동시로 눈을 돌려 처음으로 동시집을 냈든, 애초부터 동시로 시작해서 마침내 첫 동시집을 냈든 동시동네에 얼굴을 내민 새 얼굴이 많았다. 문학동네에서는『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의 김륭과 『쫀드기 쌤 찐드기 쌤』의 최종득을, 창비에서는 『콧구멍만 바쁘다』의 이정록을, 비룡소에서는 『바닷물 에고, 짜다』의 함민복을, 청개구리에서는 『재개발 아파트』의 김영미를 첫 시집을 들려 내세웠다. 이 가운데 최종득은 2004년『어린이문학』에 동시를 발표한 이래 동시만 써오면서 이번에 첫 동시집을 냈고, 김영미는 그림책을 써오다가 지난해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고 올해 첫 동시집을 낸 경우다. 김륭은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실은 1988년 불교문학 신인상과 2005년 월하지역문학상을 받는 등 일찍부터 시작활동을 해온 시인이다. 물론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는 그의 첫 동시집이다. 이정록과 함민복은 이번에 각각 창비와 비룡소에서 첫 동시집을 냈다. 모두 반가운 얼굴들이다. 특히 이정록, 함민복, 김륭은 시단에서도 그 역량을 인정받는 시인들인데, 이번에 읽은 동시도 기대 이상이었다.
날마다
옥수수 이 빠지듯
불 꺼진 창이 늘어 간다
관리실 아저씨는
떠나간 집마다
커다랗게 검은 색으로
×표를 그린다
이제 통로엔
우리 집
하나 남았는데
갈 곳을 정하지 못해
날마다 조바심 내는 엄마
처음으로 나는
커다란 ×표를
받고 싶었다.
-김영미, 「재개발 아파트」전문, 『재개발 아파트』에서
세상에 ×표 받기를 안달하는 아이가 있다니, 아이들이 가장 받기 싫어하는 낙인이 ×표인데? 그러나 이건 현실이다. 우리 아이들이 처한 현실이다. 아직 우리 동시인들이 눈 여겨 살펴야할 아이들의 현실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현실을 너무 낙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아이들의 현실에 등을 돌리고 있는 건 아닐까. 「재개발아파트」는 재개발 아파트에 사는 아이의 역설적인 소망을 통해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시의화자는 사약처럼 엄마에게 내려진 가난을 그토록 받기 싫어하는 ‘커다랗게 검은 색’의 ×표를 대신 받음으로써 엄마의 죄(?)를 상쇄하고자 한다. 어쩌면 ‘×표’는 아이로서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을 만든 어른들에게 보내는 경고인지 모른다. 여기서 이 시의 진정성이 확보된다. 시의화자가 아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것이 바로 동시의 힘이다. 아직 우리 동시가 용산 참사와 일제고사 같은 야만적인 폭력이 버젓이 가해지는 아이들의 현실에 주목해야 할 까닭이다. 『재개발 아파트』에는 이 동시뿐만 아니라 소외된 이들과 여전히 가난한 어린이들의 현실에 짠한 눈길을 주는 시들이 많다. 「아빠의 청바지」「할아버지와 솟대」「지하도의 아이」「타워 크레인」「근로자 대기소」들이 바로 그런 시다. 시인은 아이들이 꿈과 현실 모두를 번갈아 사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더욱 믿음이 간다. 책날개의 이력을 보니 김영미 시인은 광주에 있는 어린이집 원장이다.
우리 반에서 키우던
금붕어가 죽었다.
숨쉬기 좋으라고 넣어 둔
공기주입기에 끼여
숨 막혀 죽었다.
눈길도 안 주던 동무들
어항 앞에 모여서
죽은 금붕어 바라본다.
살아서 받아 보지 못한 관심
죽어서 받는다.
-최종득, 「금붕어」전문, 『쫀드기 쌤 찐드기 쌤』에서
최종득도 아이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시인이다. 초등학교 교사라는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의 시가 탄생하는 공간은 학교가 아니면 그가 일하는 학교가 있는 어촌마을이다. 그의 고향이기도 한 이 어촌마을에서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쓰고 있다. 동시인으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어린이문학』에 동시를 발표하던 무렵부터 그의 시를 지켜본 나로서는 이런 조건들이 그의 시에 끼치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비교적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는 편이다. 한 마디로 그의 이런 조건들이 그에게 동시적 상상력과 소재를 제공하는 측면이 있지만, 거기에 매몰될 위험성도 함께 지닌다는 것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의 소재도 대개가 학교, 마을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도 바로 이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시적 상상력의 진폭이 그다지 넓지 않다. 이럼에도 아직은 그의 시가 남다른 미덕과 가능성을 가지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이해와 애정, 세계에 대한 진지하고 착한 시선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것만큼 좋은 동시를 쓰는 데 중요한 자산은 없을 테다. 동시적 상상력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탓이다. 그리고 그는 특유의 시적상황을 포착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역설적 상황’ 설정 방식이다. 이 시가 보여주는 “숨쉬기 좋으라고 넣어 둔 / 공기주입기에 끼여 / 숨 막혀 죽”은 이라든지, “살아서 받아 보지 못한 관심 / 죽어서 받는” 같은 것은 다 역설적 상황 설정 방식이다. 이러한 역설적 상황은 이 시 외에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늘 주면서도 / 외할머니는 미안해하고 / 늘 받으면서도 엄마는 큰소리 칩니다.” (「이상하다」일부), “우리 반에서 / 받아쓰기 가장 못하는 한길이가 / 한글 만든 이야기에 /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글」일부), “선생님이 하도 고마워해서 / 내가 거꾸로 선물 받은 것 같다.” (「선물」일부) “숫자 나눗셈은 잘 못해도 / 삶은 고둥 친구들과 나눠먹는 셈은 곧잘 하잖아.”(「답장」일부) “경운기가 주인인 길에서 / 소나타가 되레 큰소리다.” (「손님이 주인처럼」일부), “코를 찌르는 썩는 냄새 / 동네 사람들 못살겠단다. // 돈 벌게 해 줄 때는 굴밖에 없다 해 놓고” (「사람 마음」일부), 이런 역설적 상황 설정 방식은 메시지나 이미지의 선명한 대비효과를 통해 뻔하거나 밋밋할 수도 있는 ‘진지함’에 긴장감과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정작 초등교사 출신의 좋은 동시인이 드문 동시단에 최종득은 기대되는 유망주다. 일단,『쫀드기 쌤 찐드기 쌤』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앞마당 빨랫줄에 앉았던 어미 새 한 마리
갸웃갸웃 오 촉 알전구보다 작은 머리에
불이 들어왔나 보다
눈도 못 뜬 새끼들 배고파 운다고
동네 시끄러워 낮잠 한숨 못 자겠다고
나무에게 전화 받았나 보다
포동포동 살찐 배추벌레 한 마리 입에 물고
날아간다 꽁지 빠지도록
새끼들 찾아간다
나무의 가장 따스한 품속에 놓인 공중전화
벨소리 그치지 않는 둥지 찾아
날아간다
나무들도 전화를 한다
까맣게, 하늘이 새까맣게 타도록
전화를 한다
-김륭 「나무들도 전화를 한다」전문,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에서
기존의 동시에 낯익은 독자의 눈에 김륭의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는 사뭇 낯설다. 발상이 낯설고 언어도 낯설다. 그만큼 실험적이다. 동시에 대한 그의 이런 실험적인 시도는 성공할 것인가. 일단, 참신하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리고 고만고만한 동시에 식상한 독자들에게 별미를 제공할 것이다. 상투성에 빠져 있는 동시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과 자극을 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시 곳곳에 ‘전화기’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시인은 소통 부재상황에서 소통을 갈망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몇몇 예민한 어른들을 제외하고는 그와 소통될 수 있는 상대는 그리 많지 않을 듯싶다. 아예 어린이는 그의 소통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으로 읽혀진다. 그 자신도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서문에서 “시골 할머니가 입고 있던 빨강내복처럼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관습적인(?) 상상력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달아나 보고 싶었습니다. 울퉁불퉁 이야기가 있는 동시를 쓰고 싶었고 아이들보다 먼저 엄마 아빠에게 읽어 주고 싶었습니다.”고 밝혔다시피 그가 미리부터 상정한 독자는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이 분명하다. 설령 독자가 어른이라 하더라도 그의 동시를 읽는 독자는 대번에 당혹감에 휩싸이게 될 것 같다. 동시를 읽는 어른 독자도, 기실, ‘어른 속의 어른’으로서가 아니라 ‘어른 속의 어린이’의 눈과 마음으로 동시를 읽는다. 어렸을 적의 아련한 추억, 곧 무뎌진 동심을 스스로 일깨워 시의화자의 ‘동심’에 젖어보고, 또한 ‘공감’하는 것이다. 물론 나로서도 그 동심을 딱히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동심과 상상력의 영역을 그다지 제한적으로 보는 사람이 아니다. 호이징하도 “시를 짓는 것은 사실상 놀이기능이다. 그것은 정신의 놀이터 즉 정신이 그것을 위해 창조해주는 그 독자의 세계 속에서 진행된다”3)고 했다. 또 그는 “만약 진지한 말을 생활을 일깨우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정의한다면 시는 결코 진지함의 수준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시는 진지함 너머에, 즉 어린이, 동물, 미개인, 예언자가 속하는 보다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수준, 꿈, 매혹, 엑스터시, 웃음의 영역에 존재한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법의 망토 같은 어린이의 영혼을 지닐 수 있어야 하며 어른의 지혜를 버리고 어린이의 지혜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4)고도 했다. 그리고 나는 바슐라르의 “상상력은 정신적 생산력 자체”5)라는 견해에도 거의 동의하는 편이다. 지금, 김륭 시인의 발랄한 상상력과 시에 대한 실험적 시도를 문제 삼는 게 아니다. 굳이 ‘동시’를 쓰고자 하면서, 처음부터 독자대상에서 아이들을 제외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라는 의문과 우려를 제기하는 것이다. ‘동시’에서의 실험적 시도는 ‘동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유능한 시인이 좋은 동시도 써 줬으면 하는 소망과 기대에서 하는 말이다. 시에 대한 실험적 시도나 탐구도 좋지만, 어린이에 대한 좀 더 진지한 성찰을 권한다. 안달복달, 지지고, 볶으면서도, 부대끼며 정붙여 살아가는, 살아내야 하는 서민의 애환어린 일상을 구차한 현실이 아니라 시적 상상력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와 진정성은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한다. 「깔깔거리는 꽃밭」, 그 정도였으면 좋겠다.
마실 다녀온 놀래미 새끼가
어미에게 물었어요
병어는 병들어 죽으면
옆으로 눕잖아요
그럼
옆으로 누워 헤엄치는
가오리, 서대는
죽으면 일어서나요?
뭐, 놀래미 엄마가
노랗게 놀랍니다.
-함민복,「놀래미」전문, 『바닷물 에고, 짜다』에서
올해 첫 시집을 낸 시인들의 시에 진정성과 참신함을 느끼면서도 무언가 불안하고 답답했던 마음이 함민복의 동시를 읽으면서 말끔히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동시가 환해졌다. 역시 시를 잘 쓰는 시인이 동시도 잘 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동안 시를 쓰던 시인들이 동시동네로 몰려오는 현상을 반기면서도, 내심 미덥지 못하고, 마뜩찮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기대를 채워줄만한 동시를 보여주는 시인이 그다지 없었던 탓이다. 지난해에 좋은 동시의 전형을 보여준 것으로 소개했던 곽해룡 시인도 본디 동시를 써오던 시인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이러다 동시의 생명을 살리는 수혈이 아니라 그나마 있는 피마저 말리고 혼탁하게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첫 동시집을 내며 동시동네를 찾은 함민복 시인과 뒤이어 소개할 이정록 시인의 동시는 이런 내 불만과 걱정을 깔끔히 불식하며 다시 시인 출신 동시인에게 기대와 희망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선 밝아서 좋다. 말놀이 동시에 가까운 이 동시의 발상은, 발칙하고, 엉뚱하고, 가벼운, 그러면서도 웃음 짓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이것이 함민복 동시의 강점이자 미덕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발칙하고’, ‘엉뚱하고’, ‘가벼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손에 잡고자 하던 ‘동심’에 가장 근접하는 형용사가 아닐까. 물론, 치기에 가까운, 그래서 시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할 만큼 가벼운 동시들도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동시는 이런 까탈조차도 사양한다.
뻘에 찍힌
도요새 발자국
조촘조촘 멈춘 자리
무슨 생각 망설였을까
발자국 난 길이 굽었다
울음소리 길도 굽었겠지
그러다가
발자국이 뚝
야, 여기부터는 다리가 쉬고
날개가 일하기 시작했겠구나
-함민복,「도요새 발자국」전문, 『바닷물 에고, 짜다』에서
놀라운 시적 상상력이지 않은가. 시의화자는 “뻘에 찍힌 도요새 발자국”이 “조촘조촘 멈춘 자리”를 보고 “무슨 생각 망설였을까” 하고, 상상한다. 그리고 “발자국 난 길이 굽은” 것을 보고 “울음소리 길도 굽었겠지”라고, 또 상상한다. “그러다가 / 발자국이 뚝” 끊긴 것을 보곤, 상상이 끊겨버린 것이 아니라 “아, 여기부터는 다리가 쉬고/ 날개가 일하기 시작했겠구나” 라고, 상상의 극점(이 시를 낳게 한 시적 상상력의 출발점일수도 있다)에 이른다. ‘다리-날개’ ‘끝-시작’ ‘쉼-일’ ‘멈춤-비상’, 이것이 이 시의 ‘시적 상상력’의 공식이다. 그 이후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이처럼 시인의 상상력은 오히려 치밀하고, 시어의 선택이나 배치도 매우 용의주도하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전혀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이만하면 됐지 않은가.
절에 갔다가
아빠랑 화장실에 갔다.
깊고 넓은 똥 바다
꼬추를 조준해서
아빠의 오줌 폭포를 맞혔다.
칼날이 부딪는 것 같았다.
아빠도 재밌는지
내 오줌 줄기를 탁탁 쳤다.
옆 칸이라 안 보이지만
아빠 꼬추도 삐뚤어졌겠다.
아빠 손에도 오줌이 묻었겠다.
-이정록 「칼싸움」전문, 『콧구멍만 바쁘다』에서
함민복에 와서 밝고, 가벼워진 동시는 이정록에 이르러서는 일순, 유쾌함으로 바뀐다. 이 유쾌함은 우선, 그동안 닫혀있던 금기의 문이 열리는 것에서 비롯한다. 우리 동시가 반세기 이상 깨지 못한 금기를 이정록은 단번에 깨버린 것이다. 바로 성기에 대한 금기다. 사실, 이 금기를 벌써부터 깬 것은 어린이였다. “오줌이 누고 싶어서 / 변소에 갔더니 / 해바라기가 / 내 자지를 볼라 한다. / 나는 안 비에 줬다 / -이재흠,「내 자지」, 3학년 어린이시)” 는 어린이시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에 박성우가 『불량 꽃게』에서 노골적으로 어린이의 성의식을 다루었대서 화제가 되기는 했다. 그러나 이정록은 금기를 깬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어렸을 적 한 번씩은 했음직한 ‘오줌줄기 싸움’을 「칼싸움」으로, 그것도 아빠와 함께하는 놀이로 환치시킴으로서 우리를 유쾌한 동심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아빠 꼬추도 삐뚤어졌겠다./ 아빠 손에도 오줌이 묻었겠다.”는 표현에서 어른이든, 어린이든 누가 웃음을 머금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 아빠와 나는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달으며 아이는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해 갈 것이다. 동시의 교육성은 이렇게 구현되어야 한다.
앞니 두 개 뽑았다.
대문니가 사라지자
말이 술술 샌다.
침이 질질 흐른다.
웃으면 안 되는데
애들이 자꾸만 간지럼 태운다.
갑자기 인기 짱이다.
귀찮아서 죽겠다.
입 다물고 도망만 다닌다.
콧물 들이마시랴 숨 쉬랴
콧구멍만 바쁘다.
-이정록 「바쁜 내 콧구멍」전문, 『콧구멍만 바쁘다』에서
앞니 두 개를 뽑고 말마따나 ‘앞니 빠진 고양’이 꼴이 된 어린이가 어찌 이렇게 천연덕스러울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아이들의 본디 모습이 아닐까. “말이 술술” 새고, “침이 질질” 흐르는 상황에서도 “갑자기 인기 짱이다.”고 짐짓 능청을 떨어댈 수 있는, “입 다물고 도망만” 다니며 “콧물 들이마시랴 숨쉬랴” 경황없는 가운데서도 ‘숨이 막혀 죽겠다’가 아니라 “콧구멍만 바쁘다”고 익살을 떨어댈 수 있는 존재, 그가 바로 어린이라는 것을 아는 시인은 ‘어린이’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거나 그 자신 이런 천연덕스런 ‘동심'을 듬뿍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내가 익히 알기로도 이정록은 매우 천연덕스럽고 유쾌한 시인이다. ‘시적 상상력’과 ‘동시적 상상력’을 두루 갖춘, 그는 내가 올해 목격한 가장 미덥고 반짝이는 동시인이다. 우리 동시가 그로 해서 더욱 자유롭고, 풍요롭고, 유쾌해지길 기대한다.
5. 가난한 자는 노래한다
올해 우리 동시가 악조건 속에서도 비교적 풍작을 이룬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오랫동안 우리 동시단을 지켜오며 마르지 않은 동심과 여전한 동시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동시의 본보기를 보여준 원로와 중견 동시인, 그리고 시를 쓰다가 고군분투하는 동시에 눈을 돌려 화력을 지원하며 전력을 보강해준 중견시인, 신예동시인들 덕분이다. 고맙고 든든하다.
그러나 전혀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오랫동안 동시를 써왔든, 이제 동시를 막 쓰기 시작했든 우리 동시가 점점 산문화되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엄격한 정형성을 요구하는 건 아니더라도, 시가 본디 노래였다는 점은 상기했으면 한다. 더구나 동시는 어린이들의 노래가 아닌가. 실험적인 시도는 좋지만, 그리고 예술과 문학은 끊임없는 실험정신을 요구한다는 것도 이해하지만, 시는 시의 영역 안에서, 동시는 동시의 영역 안에서 실험되고, 자유로워져야 한다.
다시 현실로 눈을 돌리자면, 암담하다. 답답하다. 궁핍하다. 이 우울한 시절을 노래라도 하지 않는다면 어찌 견뎌낼 것인가.
오인태 ㅣ
본지 상임운영위원.『그곳인들 바람불지 않겠나』『아버지의 집』등, 몇 권의 시집을 펴냈으며,『어린이시의 생성심리와 표현상의 특징』이란 논문으로 경상대학교대학원에서 교육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초등학교와 교육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 ‧ 동시 ‧ 평론 글을 쓰고 있다.
1) 오인태,「동시에 나타난 불교와 생태적 상상력」, 『불교문학과 생태적 상상력』(2009 만해축전 심포지엄 자료집), 2009, 48-57쪽 참조.
2) 김욱동, 『생태학적 상상력』, 나무심는사람, 2004, 24-37쪽 참조. 서구 자연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삶에 대하여 염세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정도에 따라 ‘강성’ 자연주의와 ‘연성’ 자연주의로 나눈다. 이 책의 저자도 생태주의를 직접 드러내놓고 다루느냐 아니면 좀더 묵시적으로 다루느냐에 따라 ‘강성’ 녹색문학과 ‘연성’ 녹색문학으로 나눈다. (이 책, 333쪽 주석 재인용)
3) 호이징하, 『호모루덴스』, 까치, 2001, 183-206쪽 참조.
4) 호이징하, 앞의 책, 183-206쪽 참조.
5) 진형준, 『상상적인 것의 인간학』, 文學과知性社 , 1992, 32-42쪽 참조.
첫댓글 책에 오자가 있어 수정해서 여기에 올립니다.
책 64쪽<구방아 목욕 가자> (김종상)은 --><구방아 목욕 가자> (권영상)입니다.
64쪽 밑에서 셋째 줄 '권오삼, 김종상, 문삼석'도 '권오삼, 권영상, 문삼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