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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방가족에게 드리는 글
안녕 하세요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수고하시는 영등포소방서 소방가족 여러분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직원들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우선 이 편지를 읽으시는 분들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읽어주시기를 당부 드리고 싶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모두가 좋게 생각하고 읽어주시리라 생각하고 편지를 드리려고 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부정적인 생각에서 보면 오해와 불신이 깊어지고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할 수 있습니다.
중국 삼국시대에 조조가 도망을 가다가 여백사란 집에 머물게 되었을 때 여백사 가족은 평소에 조조가족을 흠모해 오던 터라 환영하고 돼지를 잡아 대접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조조는 쫓기는 입장이라 뒷 곁에서 칼 가는 소리를 듣고 그것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인들이 칼 손질 하는 것으로 오해해 여백사 일가족과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집안 밖을 뒤척이다 돼지가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실수한 것을 알았습니다.
사전에 무얼 하느냐? 고 한마디만 물었더라도 그런 비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순간에 잘못된 판단과 오해가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내게 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최초의 관군승리의 주역 이였던 경기부원수 신각은 잘못된 보고가 왕에게 전달되어 그의 목을 베라는 어명이 내려져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는 그 순간 적을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장계가 올라가고 있었으니 기가 막히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목이 짤리고 두시각도 되지 않아 선조대왕은 선전관을 보내 처형을 중단하고 그의 공로를 높이라는 어명이 내려졌으니 신각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의 부대가 적군을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장계가 조금 늦게 도착한 것 뿐인데 말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직속상관인 경기도원수 김명원의 잘못된 보고가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생각이란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한다면 타인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예기치 않은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저 자신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잘하고 있느냐? 하고 반문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좀 더 자신을 반성하고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노력을 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편지도 대화의 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여러 가지 오해를 무릅쓰고 편지를 드리는 점 양해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는 오래전 파출소장으로 부임할 때 직원들과의 첫 번째 모임에서 달래강, 달래고개의 전설을 이야기 하며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서로가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는 말이 있듯이 죽음까지 가는 상황보다는 차선의 선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고 그리고 서로가 솔직하게 대화를 한다면 서로를 이해하고 좀 더 나은 방향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달래고개에서 남매가 처했던 사정은 물론 각자의 판단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이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대화를 나누었다면 죽음까지는 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대화란 가족이나 조직사회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부부간에도 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편지로도 솔직하게 대화로서 가정의 갈등을 해소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무튼 제가 쓰는 이 편지는 저자신의 변명이나, 권위나, 무슨 자랑을 위함이 결코 아님을 말씀드리면서 끝까지 읽으시는 동안 잘못 되었다고 생각되어 지적해주신다면 저자신의 반성의 기회로 여기고 겸허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제가 첫 번째로 소방조직에 몸을 담은 곳이 지금의 안전센터인 파출소였다는 것이 저에게는 여러 가지 느낌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여자가 시집을 가도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이 친정집이고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되어도 친정을 생각하는 것은 사람에게는 자신의 첫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녀가 결혼해도 첫 남자는 잊을 수 없고, 예로부터 기생들이 잊지 못하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이 첫 번째 남자라고 합니다. 저도 영등포를 떠난 지 오랫만에 찾아온 발걸음이 추억을 되살리는 계기가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는 소방관 생활 중 많은 시간을 외근생활을 주로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살아 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느끼는 때도 적지 않았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만나서 모든 일이 좋게만 되어진다고만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스스로 성실히 수행할 때 모든 일이 쉽게 풀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머리가 할 일이 있고, 다리가 할 일이 있고, 손이 할 일이 있듯이 사람마다 자기 직분에 맞는 소임을 충실히 하면 별 탈 없이 모든 일이 순리대로 풀릴 것입니다.
다리가 할 일이 있고, 손이 할 일이 있는데 모두가 머리가 할 일만 한다고 한다면 몸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옛말에도
“관은 아무리 낡아도 반드시 머리에 쓰고, 신은 아무리 새 것이라도 반드시 발에 신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위에 있을 것과 아래에 있을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고 했습니다.
한나라 문제가 우승상에게 전국적으로 재판이 몇 건쯤이냐 되느냐? 고 묻자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러면 국고는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그것도 모른다고 부끄러워 했습니다.
황제 문제는 진평이란 대신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자, 진평이란 대신은 말하기를
“그런 문제라면 각각 담당자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고 대답했습니다.
문제는 말하기를 “그럼 담당자가 누구냐?” 고 묻자 진평은 말하기를 “재판에 대해서는 정위가 있고 국고에 대해서는 치속내사가 있사옵니다.” 고 대답했습니다.
문제는 다시 말하기를
“그럼 담당자가 있다면 그대들은 무엇을 담당하는가?” 하고 묻자,
진평은 다시 말하기를
“모름지기 재상이란 위로는 황제를 보좌하고 아래로는 모든 만물을 잘살게 할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밖으로는 오랑캐와 제후들을 잘 다스리고 안으로는 만민을 다스리며 뭇 관리들에게 그 직책을 완수시키는 자리입니다.”
그 답변을 들은 황제는 훌륭한 답변이라고 수긍했다고 합니다. 결국 각자가 맡은 분야에 주어진 책무를 성실히 다해야 된다는 의미를 일깨워 주는 내용이라 생각 됩니다.
여러분들은 장기판에 나오는 붉은색의 한과 초록색의 초를 기억 하실 것입니다. 한나라와 초나라의 전쟁에서 한나라가 승리하여 황제의 지위에 오른 한고조는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 소하라는 참모를 최고의 일등공신으로 봉했습니다.
소하라는 인물은 전쟁에서 싸우지도 않고 후방에서 물자를 공급하는 책임자였는데 그를 일등공신으로 봉하자 많은 장수들이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사실 목숨을 걸고 싸운 장수가 수 백 명이 넘는데 칼 한번 들지 않은 소하에게 왜 최고의 공로를 인정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한고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하가 비록 일선에서 직접 싸우지는 않았지만 장수와 군졸들이 싸움에 차질이 없도록 물자를 제때에 대주었고 그들이 싸우는데 지치지 않도록 충분한 군량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해주었기 때문에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장수들은 한고조의 말에 수긍했다고 합니다. 나는 힘든 일을 많이 했으니 더 많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불평하시는 분들은 좋은 교훈이 되지 않을까요?
조직사회란 각 분야별로 주어진 임무를 얼마나 충실히 하느냐고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소방서에서도 내근이 있고 외근이 있고 경방, 운전, 구급, 구조대원이 있지만 모두가 소방가족이라는 공동체 의식 속에 서로가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할 때 국민들이 보는 시각도 달라지고 소방호라는 배가 순항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란 모두가 똑같을 수 없습니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도 체격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지 않습니까? 서로가 모자라는 것은 서로 보완하고 끌어주고 밀어주는 미덕은 조직사회의 힘을 배가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얼굴이 잘생겼다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힘이 세다고 능력이 우수한 것만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중국 삼국시대에 방통이란 인물은 제갈공명에 머금가는 지략이 있고 병법은 물론 천문지리에도 밝은 사람인데 그의 얼굴이 못생겨서 유비 같은 인자하고 훌륭하다는 사람도 그를 멀리 했다는 사실에서도 사람의 외모만 보고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방통은 훗날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유비의 참모로 다시 등용 되었지만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법가사상으로 유명하고 모든 분야에서 학식이 풍부했던 한비자는 얼굴이 못 생겼을 뿐 아니라 말소리마저 더듬어서 그의 능력이 의심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다른 사람이 감히 넘보지 못할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지은 책을 읽어본 진시황제마저도 그 책의 주인공인 한비자를 만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진시왕은 한비자를 만나기 위해 한비자가 사는 한나라를 침략해 가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비자를 만나본 진시황은 그의 얼굴이 잘 생기지도 못한데다 목소리마저 더듬어서 그를 제대로 쓰지 못했고 그의 능력을 알고 있는 한비자의 친구이사의 모함을 확인도 않고 죽이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만들게 됩니다.
사실 같이 공부해서 한비자의 놀라운 식견과 학식을 잘 알고 있는 이사는 자신의 출세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 한비자를 모함하여 죽이게 만들지만 결과가 훗날 자신도 모함을 받아 비참하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은 인과응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강감찬 장군도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어려서부터 친구들마저 강감찬과는 가까이 놀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민족의 위대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고 슬기로운 인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이란 몸으로만 하는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간혹 상대방의 약점을 들먹이거나 경원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어려운 사람이 있을수록 서로가 나눔의 미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같은 직원끼리도 어려운 직원이 있으면 서로 도와가며 상호 보완해 간다면 더 좋은 직장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 병법의 달인으로 통하고 손자병법을 완성시켰다는 제나라의 손빈은 자신과 3년과 동문수학했던 친구 방연의 배신으로 두 다리를 짤리는 병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다리를 잃고서도 손빈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여곡절을 겪는 끝에 제나라의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창, 칼로 싸우는 시대에 전선의 지휘관이 걷지도 못한다면 모순이 될 수 있지만 그는 전쟁에서 수레를 타고 다니면서 병사들을 지휘했고 병사들은 그의 지휘를 일사분란하게 따라주어 싸움마다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다리를 끊어 병신이 되게 한 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친구 방연도 죽이게 됩니다. 결국 상대방의 약점을 건드리지 않고 서로가 합심하면 더 큰 힘이 발생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이란 그 사람의 주어진 처지와 환경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매도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다른 사람이 갖고 있으니까 상대방의 능력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나라의 맹산군이란 사람은 평소부터 많은 사람을 대우해서 식객만도 30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훗날 그들로부터 여러 번 도움을 받게 됩니다.
맹산군이 한 번은 진나라 감옥에 갇혔을 때
그를 감옥에서 나오도록 주선한 사람은 여우가죽털옷을 훔쳐낸 도둑의 기질이 있는 사람의 공이 컸고(왕실창고에 있는 한 벌밖에 없는 백호 가죽옷을 왕비에게 받쳐서 그를 감옥에서 나오도록 로비를 함),
그가 성문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닭 울음소리 내는 사람의 공이 컸고(도망가는데 닭울음소리가 나야 성문이 열리게 되었기 때문),
관문을 지키는 검문소를 통과할 때는 글씨 변조의 천재적 재능을 가진 자의 공이 컸고(검문소를 통과할 때는 왕실의 통과증명서가 있어야 되는데 글씨를 똑같이 변조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증명서를 변조했기 때문)
그가 강가에서 뒤쫓아 오는 적군에게 위험에 처했을 때 부하 중 목소리 큰 사람이 강 멀리 떠있는 뱃사공을 불러서 배를 타고 도망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보통 사람 목소리로는 뱃사공이 들을 수 없는 위치였기 때문)
이러한 일들은 맹상군이 평소에 사람을 중시하고 모든 사람의 인격과 능력을 존중해 주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목숨을 보장받는 결과를 빚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는 고사를 생각하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사람의 미래란 알 수 없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온유겸손한 생활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문경교우란 고사로 유명한 조나라의 인상여와 염파는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조나라가 평화로웠지만 두 사람이 버림을 받았을 때 조나라가 쇠락의 길을 갔다는 사실을 주목해 봅니다.
염파란 인물은 원래부터 맹장으로 명문가의 출신이었고, 인상여는 천한 하인출신으로 말 몇 마디 잘해서 왕의 신임을 받아 염파보다 더 높은 벼슬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상여는 그 출신이 천하고 가문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타고난 지혜와 담력으로 이웃나라 강대국인 진나라왕을 말로써 굴복시킨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와 비교도 안되는 사람이 자기보다 높은 벼슬에 오르자 염파는 오히려 멸시하고 제대로 대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상여는 자기가 염파보다 벼슬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멀리서 염파만 보이면 골목으로 피했습니다.
이런 인상여의 비굴한 행동에 대해 하인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모두가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인상여는 수하들을 모아놓고 너희들은 진나라 왕과 염파 중 누가 더 무서우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수하들은 당연히 진왕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인상여는 다시 말하기를 “나는 진왕 앞에서도 당당하게 진왕과 진나라 대신들을 굴복시킨 사람이다. 내가 염파장군이 두려울 게 무엇이냐? 다만 우리 두 사람이 싸우게 되면 이웃 진나라에서 좋아할게 아니냐?” 이 말을 들은 수하들은 인상여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염파는 크게 깨닫고 가시나무를 지고 인상여를 찾아와 용서해 달라며 빌었습니다. 이후로 두 사람은 형제보다 더욱 가까운 사이로 조나라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 되었던 것입니다.
출신이나 과거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깨닫고 온유겸손한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어떤 지위에 부여 받으면 그 사람의 개인에 대한 대우보다 직위에 대한 예우가 필요합니다. 조직사회에서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그 조직은 죽어있는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손자병법을 만들었던 손무가 전선의 지휘관이 되어 첫 번째 지휘명령을 하기 위해 궁녀들을 모아 시범훈련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자, 손무는 왕이 가장 총애하는 여인 두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시범적으로 희생을 당하자, 많은 사람들의 그의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한나라의 한신이 대원수가 되어 전군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자, 많은 장수들이 불만을 터뜨리며 잘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난데없는 사람이 자신들의 지휘관이라고 큰소리치니 수긍이 안 갔던 것입니다.
한신은 군대에서 지휘체계가 서지 않으면 군사를 움직일 수 없다고 장수의 우두머리를 참수하고 누구든 이렇게 군율을 집행한다고 하자, 장수와 군사들은 그의 지휘에 따라 움직여서 승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조선 중기 때 개혁적인 인물로 유명한 조광조는 대사헌이라는 지위에 오른 뒤 국가질서를 강조 했습니다. 그는 지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호조판서가 길을 빨리 비키지 않았다고 호조판서 하인들을 데려다가 엄한 벌을 내렸습니다.
그 당시 법으로는 대사헌이 지나갈 때는 판서라 하더라도 길을 비켜주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자기 아버지 벌 되는 나이든 대신에게 너무하지 않느냐 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조광조는 대사헌에 대한 예의는 엄연한 국가질서를 바로잡는 차원에서 엄히 다스려야 국가기강이 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국가나 어느 조직이든 부여된 지위란 그 개인의 인격적 조건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그 지위에 대한 대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자신의 딸이 왕비로 있다가 집으로 쫓겨나도 어린 딸에게 중전마마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은 딸이기에 앞서 공인이기 때문입니다. 조직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하가 일체된 마음으로 조직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야 됩니다.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신포서 라는 사람은 초나라가 이웃 오나라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처하자, 이웃 진나라로 달려가 일주일동안 진나라 궁궐계단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통곡하며 구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자, 진나라 왕과 대신들은 신포서의 눈물겨운 행동에 탄복해서 구원군을 보내 초나라를 구해주게 했습니다.
사실 진나라는 평소부터 사이가 안 좋은 초나라인지 오히려 이번기회에 망하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신포서의 눈물겨운 정성에 감동하고 구원군을 보내주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초나라왕도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정치를 포학하게 했지만 신포서는 그래도 자기가 모신 왕에게 충성을 다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위나라의 방연이란 인물은 자신이 이웃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는 동안 나라가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왕이 전사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방연이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으나 왕은 이미 전쟁에서 전사하고 없었습니다. 방연은 전선으로 달려가 왕의 시체를 찾아 헤맸습니다.
다행히 아직 죽지 않은 시종이 왕은 죽어 시체가 갈기갈기 찢겨지고 온전히 남은 것은 간 하나밖에 없다고 말하자 방연은 간 앞에서 살아있을 때처럼 예의를 차리고 사신으로 갖다온 보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왕의 간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배를 갈라 왕의 간을 자신의 배안에 넣고 따라온 시종들에게 새로운 왕이 등극하거든 예를 차려 장례를 지내도록 부탁하고 자신은 왕의 간을 보호하기 위해 죽어간 것입니다.
위나라왕은 평소에 학을 좋아해 백성을 돌보지 않고 학을 기르는 사람에게만 벼슬을 주고 심지어 학에게도 벼슬을 주어 백성들의 원성을 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방연은 신하로서 자신의 도리를 죽음으로서 충성을 다한 것입니다. 비록 살았을 때는 백성을 괴롭히고 원성을 들었지만 왕에 대한 충성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방연의 생각이었는지 모릅니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몸매를 가꾼다.” 라는 고사로 유명한 예양이란 사람은 자신이 섬기던 지백이 죽자, 지백의 원수를 갚기 위해 처자식을 버리고 자신을 가장 잔인하게 학대 하면서까지 세 번이나 실패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원수를 갚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섬겼던 지백의 원수를 갚으려고 조나라의 왕인 조양자에게 세 번이나 잡혀서도 마지막 순간에도 조양자의 옷이라도 한 번 찌르고 죽게 해달라고 할 정도로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죽으면서도 주인을 위해 죽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월나라의 범려라는 사람 역시 충성심은 어느 누구 못지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월나라의 범려라는 인물은 월나라가 오나라와 전쟁에서 패해 월왕이 오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자, 범려는 스스로 자신도 월왕과 같이 포로로 되기를 자청하여 포로로 있는 동안 월왕에게 용기를 잃지 않도록 조언하고 월나라에 남아있는 신하들에게 미래를 대비하도록 준비하게 하고 재기할 계획을 세우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포로로 있는 동안에도 왕이 식사할 때 까지 무릎을 꿇고 모든 예를 한 번도 흩뜨리지 않고 충성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 포로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고 고국에 돌아가서는 왕을 도와 국력을 길러 오나라를 침략해서 지난날의 원수도 갚고 월왕의 소원도 풀어주게 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당연히 일등공신으로 부귀영화를 한 몸에 받아야할 범려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떠나게 됩니다. 범려는 월왕이 고난은 함께할 인물은 되지만 행복은 함께할 인물이 못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범려는 왕이 끝까지 신임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미리 간파했으면서도 고생을 하면서까지 월왕을 왜 끝까지 도왔을까요? 그것은 신하로서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열거한 신포서, 방연, 예양, 범려 등이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한 예는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요? 사람이 상사를 위해 지나치게 하는 것을 아부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아부와 책임과 예의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아부란 지나치게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대가성이 강하지만 자신이 처한 도리를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조직의 구성원이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제자리를 지키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된다고 봅니다.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고 신뢰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은 “개와 고양이” 라는 동화를 기억 하실 것입니다. 개와 고양이는 강가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로 꾸려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같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고기잡이로 어렵게 살아가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느 날 보물구슬을 얻어 갑자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씨 고약한 강 건너 사람에게 구슬을 도둑맞아 다시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개와 고양이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도와드리기 위해 강을 건너가 보물구슬을 찾아 오기로 했습니다. 헤엄을 잘 치는 개는 고양이를 등에 태우고 구슬을 찾아서 강을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구슬은 고양이가 입에 물고 등에 탔기 때문에 개는 구슬이 잘 있는지 몹시 궁금해서 고양이에게 구슬을 잘 물고 있는지 물었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고양이는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물었다” 고 하면 구슬이 강물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대답을 안 하자, 개는 더욱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물었냐” “물었냐” “물었냐” 고 대답을 독촉했습니다. 갈수록 개의 다그침이 심해지자 고양이는 그만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구슬은 강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고양이는 구슬을 잃었다는 죄책감에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천대를 받고 반면 개는 귀염을 독차지 했습니다. 고양이는 매일같이 눈물을 흘리며 강가에서 구슬을 찾아 헤매다가 어느 날 큰 고기를 한 마리 잡아다 할머니에게 갔다 드렸습니다.
할머니가 고기의 배를 가르자 거기서 구슬이 나왔습니다. 이제는 거꾸로 개는 천대받고 고양이가 귀염을 독차지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구슬을 물고 말할 수 없는 고양이의 심정을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사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정이 공적인 사정일 때는 동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우리에게 진실을 가르쳐 주고 새로운 미래의 방향을 제시해 주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의 교과서는 한마디로 역사서라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과거의 역사를 가르쳤고 그곳에서 새로운 지식을 익히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자기발전을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하는 인내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저도 외근생활을 많이 지내 봤지만 자기가 마음만 먹는다면 책을 읽을 시간은 만들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사람들은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 하고 핑계를 대고 자신을 합리화 시키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괄목상대” 라는 고사로 유명한 오나라의 여몽의 예를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나라의 손권이 여몽이란 부하장수에게 공부 좀 하라고 하자, 여몽은 바쁘고, 시간이 없어 공부를 못한다고 하자,
손권은 말하기를
“자네가 아무리 바쁘기로서 나보다 더 바쁘겠는가? 그리고 자네에게 박사가 되라고 공부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 말을 들은 여몽은 크게 깨닫고 공부를 해서 그 후에 여몽을 만나본 사람은 이 사람이 언제 이렇게 유식해졌나 하고 놀랬다고 합니다. 특히 노숙이란 중신이 여몽의 식견에 탄복하자,
여몽은 말하기를 “사람이 사흘을 헤어졌다 다시 만나면 그 사람의 인품을 다시 봐야 됩니다.” 고 말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양눌제란 사람도 나이 40이 될 때까지 기역 니은 자도 모르다가 자기 친구들이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을 보고 뒤늦게 공부하여 성공하여 판서, 찬성의 지위에 올라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면 그것이 모두다 피와 살이 되는 것이 아니지만 건강을 유지해 주듯이 책도 읽으면 그것이 모두 기억에 남지는 않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 많은 지식을 남겨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끔 신문지상에 등장하는 읍참마속, 토사구팽이라는 고사성어를 다시 한번 조명해 보려 합니다. 읍참마속은 글자 그대로 마속을 참했던 고사로서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제갈공명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장수인 마속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대변해 주는 대목입니다.
당시 제갈공명은 황제의 명을 받아 위나라 정벌 길에 나서 승승장구하여 자신의 계획대로 진격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위나라의 지휘관이 사마의로 바뀌자 상황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사마의란 인물은 공명에 버금가는 전술전략가로서 보통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공명은 진격도중 가정이란 전략요충지를 지키는 장수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마속이 가족의 목숨까지 걸고 가정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지만 유능한 부장을 딸려 보내서 신신당부하고 가정을 지켜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마속은 공명이 딸려 보낸 유능한 부장의 충고도 무시한 채 자기 고집대로 군사를 움직여 적군에게 패하여 가정을 지키는데 실패하고 촉나라 군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게 된 것입니다.
공명은 군법에 따라 마속을 죽이려 하자, 모든 장수들이 엎드려서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왕의 특사로 파견된 대신까지도 목숨만은 살려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명은 모든 장수들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마속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황제의 특사는 물론 모든 장수와 군졸들이 살려달라고 했기 때문에 살릴 수 있는 명분이 있는데 공명은 왜 마속을 죽였을까요?
공명으로서는 나름대로의 두 가지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속이란 장수는 공명이 가장 아끼고 친동생처럼 사랑하는 장수였습니다. 자기가 제일 아끼는 장수였기 때문에 공명은 마속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혼자서 통곡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측근을 보호하고 감쌌다는 비난도 두려웠겠지만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장수를 처형시킴으로써 군율의 엄격함을 모든 군대에 본을 보였는지 모릅니다.
또 하나는 공명은 마속이란 장수가 사마의의 상대가 되지 않을뿐더러 가정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제대로 쓰지 못한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공명은 마속을 죽이고 나서 “내가 너를 살릴 수 있었는데도 나의 잘못으로 죽였다” 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마속이란 한 장수의 실수로 촉나라 군대는 전략요충지를 상실하고 후퇴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으니 천지조화를 마음대로 부린다는 공명도 실수가 있으니 “슬기로운 사람도 천 가지 일을 생각하면 실수가 나오며 어리석은 사람도 천 가지 일을 하다보면 반드시 유익한 일을 하게 된다.” 는 옛말이 생각나게 합니다.
“토사구팽”이란 우리 일상에서도 간혹 인용하기도 하고 신문 지상에도 자주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뜯어보면 꼭 그렇게 토사구팽이라고만 단정 지을 수 없는 내용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토사구팽이란 한나라 고조와 한신과의 관계에서 등장한 걸로 인용하곤 합니다. 당시 한고조 유방은 시골에서 20~50명 정도 거느리는 십장정도의 인물에 불과 했습니다. 그런데 진나라 말기 어지러운 세상에 세력을 모아 유능한 참모들의 도움을 받아 천하통일을 하고 황제의 지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한고조가 황제의 지위에 오르기까지는 많은 장수와 참모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결정적인 공로자는 역시 한신 이었습니다.
한신은 군사를 부리는 귀신이라 할 정도로 110만이 넘는 군사와 800여명의 장수들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하여 싸움마다 승리하여 백전백승의 훌륭한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군사의 지휘에 관해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로 “다다익선”이란 고사를 만들어낸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한고조는 천하 통일 후 한신을 초왕의 제후에 봉해 그 공로에 보답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과정 중 한신은 초왕의 지위에서 밀려난 평민으로 격하되고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부추기는 무리들과 함께 재기하려는 반역을 꾀하다 잡혀 죽게 되었습니다.
한신은 그간의 공로를 생각해 목숨을 구걸했으니 한고조 부인의 명에 의해 여자의 손에 죽게 되는 비운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사냥꾼이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 는 고사로 인용되는 토사구팽이 한신의 예에서는 어떻게 이해를 할 수 있을까요?
한편으로 한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편단심이었다면 죽음까지 갔을까요?
비록 한고조가 서운하게 대했어도 자신의 진심을 끝까지 믿고 갔다면 죽음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선의 3대 임금이 되는 태종 이방원은 자신을 세자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충성을 다한 공신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충돌을 빚게 됩니다. 그런데 방원을 도운 공신들이 사병혁파와 왕권강화책에 끝까지 충성하고 도리를 다했다고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습니다.
공신들은 자신들이 공을 세웠으니 당연히 댓가를 기대하고 있었고, 사명혁파나 왕권신장에는 부정적 시각으로 생각했고 자신들의 세력유지에 중심을 둔 부분이 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요구가 정당한 요구도 있지만 왕권 유지에 불안을 느낀 방원과는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방원은 피를 흘리며 자신을 도운 공신들을 숙청 하므로써 인면수심이란 말까지 들어가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게 된 것입니다.
결국 목숨을 바쳐 방원을 도운 공신들은 이것이 바로 토사구팽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한탄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게 된 결정적 동기는 무엇보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합작품의 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를 신뢰하고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하고 서로 돕기를 주저하지 않아 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되었고 부귀영화도 함께 누릴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유신은 김춘추가 왕이 되도록 모든 뒷받침을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생을 김춘추의 부인이 되게 했고 김춘추는 자신이 죽고 아들에게 왕위를 물리면서 자식에게 김유신을 아버지처럼 받들라고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딸을 김유신에게 시집보낼 정도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백제가 처음나라를 세울 때 나라 안팎으로 어려울 때 을음이라는 신하는 왕이 백성의 원성을 사지 않도록 모든 총대를 혼자 둘러맨다는 각오로 일을 했습니다.
나라 안팎의 대. 소사의 크고 작은 일중 백성들의 원망을 살만한 일은 자신이 채찍을 들어가며 백성들을 다그쳤습니다. 그리고 칭찬 받을만한 일은 모두 왕인 온조에게 돌아가도록 진행시킨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일을 어렵게 하느냐고 물어도 자신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을 어떻게 세울 수 있느냐고 후세를 위해 초석을 다지는데 온힘을 기울인 결과 백제 건국의 기초를 닦은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 5패 중의 한사람으로 패자가 되어 실질적 주도권을 행사했던 제나라의 환공이 패자가 되기까지에는 관중의 공로가 무엇보다 컸습니다. 물론 환공이 관중을 기용하는 결단과 용기가 있었지만 관중을 등용하고는 끝까지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환공은 모든 결재의 대부분을 관중에게 미룰 만큼 국가의 대소사를 관중과 상의해서 처리하는 믿음을 주기도 했습니다.
관중역시 자신이 섬기는 환공을 위해 끝까지 충성을 다했고 혹시라도 왕에게 누가되는 일이 있으면 자신이 그 잘못을 뒤집어쓰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여자를 좋아했던 환공이 백성들의 비난을 받을 것을 우려해 관중은 자신이 먼저 미인들을 선발하여 왕에게 받쳐서 한때나마 왕이 주색에 빠지게 된 책임이 관중 때문이라고 백성들이 느끼게 했습니다.
그리고 환공에게는 적정한 생활의 자세를 하도록 했고 천하의 패자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도록 조언 했던 것입니다. 관중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환공은 관중의 집까지 찾아가 문병하고 뒷일을 부탁하여 관중이 천거한 인물을 등용하여 그를 끝까지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신뢰란 서로가 자신의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서로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한다면 반드시 어떤 문제가 발생 될 수밖에 없지만 서로를 신뢰한다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입니다.
관포지교로 유명한 관중과 포숙아는 서로간의 굳은 믿음으로 우정의 대명사로 불리우곤 합니다.
사실 앞에서 말한 관중은 환공을 죽이려고 독화살을 쏘았고 포숙아와는 서로 섬기는 주인이 달라 포숙아가 섬기는 환공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포숙아는 관중의 능력을 알고 있는지라 환공에게 천하를 얻고자 한다면 관중을 높이 써야 한다고 강력히 추천한 것입니다.
환공은 자신을 죽이려고 독화살을 쓴 관중을 살려둘 수 없다고 했으나 포숙아의 강력한 건의로 관중을 포숙아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포숙아는 관중이나 환공의 일처리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관중이 죽을 때 환공이 후임자로 포숙아가 어떻겠느냐고 물었을 때도 관중은 포숙아는 적임자가 아니라고 반대 한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살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출세하는데 모든 뒷받침을 해준 친구의 등용을 반대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해들은 포숙아는 전혀 서운한 감정을 표하지 않았습니다. 포숙아는 관중에 대해 관중은 개인적인 사소한 일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고 나라의 장래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고 오히려 관중을 두둔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의 믿음의 관계는 관중의 말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관중은 포숙아에 대해 말하기를 “내가 젊어서 아직 가난하였을 때 포숙아와 장사를 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이익의 할당을 항상 내가 많이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내가 어렵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하여 해준 일이 실패로 돌아가 그를 궁지에 빠뜨리고 한 일이 있었지만 나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적중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번이고 출사하여 파면된 일이 있었지만 그것을 무능하다고 보지 않았다. 전쟁시에는 몇 번이나 패하여 도망친 일이 있었지만 그것을 비겁하다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규가 패하여 소홀이 자살 하였을 때 나만이 오라를 받는 치욕을 당했으나 그것을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소사에 구애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 주신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 준 것은 포숙아다.“ 고 진심을 토로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사람의 언행을 통해서 얼마나 신뢰가 깊고 서로를 위해 살았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두 사람은 친구이면서 라이벌 의식이나 욕심이 전혀 없고 오직 믿음과 서로를 위하는 우정으로 굳게 뭉쳐 있음을 알게 해 주고 있습니다.
명재상으로 유명한 제나라의 안영이라는 사람도 백성들에게 궁궐공사를 독려하고 채찍질하여 왕이 사치를 하도록 안영이 부채질 했다고 백성들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도록 방패막이가 되도록 한 사람입니다.
백성들의 생각에는 안영이 왕에게 건의해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궁궐공사를 멈추도록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안영이 앞장서서 다그치니 그 원망을 안영에게로 돌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영은 왕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도록 바른 정도를 일깨워 주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해 주도록 모든 문제를 바른길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안영에 대한 많은 일화가 전해오기도 하지만 그는 가죽외투 한 벌을 30년을 입을 정도로 청렴한 공직자의 표본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 당시에는 백성들의 원망을 사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섬기는 왕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하는데도 세심한 배려를 한 것입니다.
요즈음 해외에서 활동하는 박지성, 김연아 선수 같은 스포츠스타가 우리 국민들의 답답함을 풀어주고 신선한 소식을 전해주지만 본인들의 영광이 자신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이자 우리 민족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우리의 국위를 선양해 주기도 합니다. 개인이 자기의 주어진 직분을 성실히 수행할 때 같이 있는 사람도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 때문에 혜택을 받았으니 대가를 요구할 수 는 없지 않습니까?
언젠가 강동소방서의 구급대원이 구급출동을 방해하는 사람을 처벌하지 않고 보상의 댓가도 바라지 않고 사회봉사 명령을 시키도록 조치한 것이 일간 신문의 사설에까지 게재되는 등 소방관 전체의 명예를 드높인 일이 있었습니다.
언론에서는 교육부산하 어느 교직자도 감히 생각하기 어려운 교육을 시켜서 건전한 사회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소방관의 자질에 대해 높이 평가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의 구급대원의 좋은 생각이 전체 소방관의 사기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이 짧으면 좋고 여자의 치마가 짧으면 좋다고들 하지요. 여자들의 치마가 짧으면 지나가는 여자들의 속살이라도 훔쳐보고 싶은 남자들의 욕망이기 때문일까요? 계단을 올라가는 여자들의 보일락 말락하는 속살이 더욱 궁금증을 더해주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말이 짧으면 좋다는 것은 단상에서 지루하게 한 시간 이상씩 말하면 답답하고 지루하니까 그렇겠지요. 그래서 요즈음은 목사님의 설교도 30분을 넘으면 은혜를 까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제가 드리는 편지가 약간은 길어도 여러분들이 며칠 동안 5분씩 나누어 읽어도 되니까 조금 길어도 쉽게 이해하고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 합니다. 이제 마무리를 하기 전에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고 미치려 합니다.
영국의 빅토리와 여왕이 남편 앨버트와 사소한 일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앨버트는 남편의 자존심이 상했던지 화를 내고 자기 방으로 가버렸습니다.
빅토리와 여왕은 한나라를 통치하는 여왕이지만 한 남편의 아내라는 사실 때문에 화해할 마음으로 남편을 따라 방문 앞에 가서 노크를 했습니다. 그러자 방안에서 남편인 앨버트가 “누구요?” 하고 물었습니다. 빅토리와 여왕은 “여왕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다시 노크를 했으나, 이번에도 방안에서 다시 “누구요?” 하고 물었습니다.
이번에도 빅토리아는 다시 “여왕입니다.” 하고 대답했으나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습니다.
빅토리아는 다시 세 번째 노크를 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방안에서 “누구요?” 하는 묻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빅토리아는 아내라는 생각에 “여보 문 좀 열어 주세요. 저예요! 당신의 아내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 때서야 방문이 열리며 남편이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여보 당신 사랑해요!” 하고 남편의 품에 안겼던 것입니다.
앨버트는 아내가 한 나라의 여왕이지만 한남편의 아내로서 자신을 대우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후로 두 사람의 부부애는 더욱 돈독해 졌다고 합니다. 여왕도 자신을 여인으로 대우해 주는 사람들을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자신의 위치에 맞는 처신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서없이 편지가 너무 길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흔히들 서로간의 만남을 인연이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불교에서는 한 지붕 밑에서 한솥밥을 먹는 사람은 적어도 4천년 전부터 전생의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소방관들은 대부분 한 지붕 한 식구처럼 살아가기 때문에 그 어떤 조직보다도 가족처럼 살아가는 인연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인연으로 만났다 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못하면 만나지 않은 것 만 못합니다.
좋은 인연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상대의 진실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신뢰를 쌓아간다면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주어진 임무를 자율적으로 각자의 직분에 맞게 수행하여 서로 간에 신뢰가 깊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좋은 뜻으로 이해하시길 바라며 우리가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기본근무 철저”가 모든 것을 대신해 준다고 생각 합니다.
기본근무란 포괄적으로 화재출동, 구급출동, 구조출동, 소내근무, 청사관리, 주어진 행정업무, 상하관계 등 모든 것을 요약 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앞의 모든 내용은 여러분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읽었느냐가 매우 중요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에 따라 모든 것이 좌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그러므로 운명을 바꾸려면 성격을 바꾸어야 하고, 성격을 바꾸려면 습관을 바꿔야 하고, 습관을 바꾸려면 행동을 바꿔야 하고, 행동을 바꾸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아무튼 좋은 생각으로 여러분들의 운명이 좋게 바뀌어 지시기를 바랍니다.
저와의 인연이 기연이나 악연이 아닌 좋은 인연으로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라면서 함께 타고 가는 “소방호”가 순항을 할 수 있도록 거듭 당부 드립니다.
영등포소방서 소방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건강하게 안녕히 계십시오
첫댓글 많이 살아온 인생은 아니지만 세상엔 갈등 멸시 등등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많이 일러나지요.. 직장에서도 상하 갈등 선배님 말씀중에 급여의 댓가는 50%는 일한 값. 50%는 참고 견딘값이라는게 이해를 할수 있는 나이가 된것 같아요.. 마음을 열고 갈등의 벽을 허물고 웃으며 즐겁게 생활합시다..
아 무척 내용이 길어 몇번을 읽었는지 모른답니다... 좋은 공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