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청, 800리 ‘지리산둘레길’을 잇다
민초들 상처 보듬으며 걷는 길 지나는 곳마다 보물 같은 문화재 … 분단의 아픔 가시지 않아
하늘에서 가까운 동네길. 동네에서 동네로 길 잇기 작업을 시작한지 4년 만에 활짝 열렸다. 산림청은 2008년 5월 전북 남원 매동마을∼경남 함양 금계마을(19.3㎞)구간을 시작으로 '지리산둘레길'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5월 25일, 봄이 가는 길목에 둘레길을 열었다. 영호남을 아우르는 지리산 둘레길은 경남 함양(23㎞)과 산청(60㎞), 하동(68㎞)을 연결해 전북 남원(46㎞), 전남 구례(77㎞) 등 274㎞ 3개 도, 5개 시·군, 117개 마을에 걸쳐있다. 전 구간을 완주하는 이음단을 따라 내일신문 지역 리포터들이 지리산 800리 길을 둘러본다.
백두대간의 등뼈를 이루며 뻗어내린 지리산은 2000년 전부터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백제와 변한, 진한과 마한의 역사를 시작으로 근현대사의 주요 무대가 됐다.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학문에 전념했던 처사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기도 했고, 남과 북이 총칼을 겨누던 시절에는 골짜기가 피로 물들었다.
<동강마을을 향하여 한마음 이음단이 19일 함양군 구시락재를 넘어 운서마을로 들어서고 있다. 구시락재는 조선초 유학자 김종직 선생이 지리산을 오르고 쓴 '유두류록'에 나오는 옛길이다. 오른쪽 사진은 순서대로 단속사 터에 남아있는 동·서 삼층석탑과 남명 조 식 선생 묘소, 그의 서재인 산천재 현판이다.>
중반을 넘긴 이음단(한마음, 푸르미)은 15일 산청군 시천면 중태마을에서 만났다. 9일 밤재에서 헤어진 후 6일만이다. 이날 '중간 만남의 날' 행사에 주민들의 뜨거운 열기가 더해졌다. 이음단 최연소 참가자 김정현(16)군이 오카리나 연주를, 마을 주민들 9명이 구성한 밴드 '나인로드'가 멋진 솜씨로 화답했다.
밴드 보컬을 맡은 김소정(50)씨는 "고사리 철이라 바쁘지만 둘레길 행사를 위해 매일 새벽 1시까지 연습했다"며 "처음 하는 공연이라 떨리지만 다들 즐거워해 기쁘다"고 말했다.
중태마을에는 실명제 안내소가 있다. 둘레길을 찾는 여행객들이 '책임여행과 공정여행'을 다짐하며 기록을 남긴다. 중태마을 이장은 자연건조로 맛이 일품인 산청곶감을 행사장에 풀었다. 최호림 이장은 "지리산 둘레길이 여행객과 주민들이 상생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양민학살 영혼 위로하며 걷는 길 = 동강~수철구간은 좌우이념투쟁 속에서 속절없이 사라진 사람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듬고 있다. 수철마을에서 고동재를 넘어 방곡마을로 발길을 옮긴다. 길목에 커다란 '산청함양사건 추모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1951년 2월 5일. 국군은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이유를 들어 무고한 양민들을 집단 학살했다. 실종된 숫자만 700명에 이른다. 1954년 이곳 유족들이 뜻을 모아 동심계를 조직하고 억울하게 죽은 양민들을 위로하고 있지만, 아직도 진실규명이 명확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방곡마을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서정석(75)씨는 "빨갱이가 뭔지도 모르는 가까운 친척들인데… 왜 죽였는지, 왜 죽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진정한 처사(處士) 조 식과의 만남 = 덕산을 지날 때 잠시 발길을 멈춰도 좋다. 시천면 사리 덕천강가에 남명 조 식의 서재였던 산천재와 묘소, 조 식 선생을 모신 덕천서원을 둘러보고 가도 좋다.
남명은 퇴계 이황과 동갑으로 당대 학문의 쌍벽을 이뤘던 인물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선생을 기리는 진짜 이유는 진정한 처사(處士)였기 때문이다. 남명은 임금이 내린 벼슬을 거절하고 학문과 제자양성에만 전념했다. 이이화 선생은 인물한국사에서 남명에 대해 "성운같은 도학자와 교우하고 탁족하면서 지냈다"고 썼다.
지금은 폐허가 돼 석탑만 남아있는 단속사지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단속사에는 신충이 그린 경덕왕 초상화와,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자취는 알 길이 없다.
발길은 다시 천왕봉이 보이는 중산리를 거부하고 대원사로 향한다. 대원사는 비구니들이 참선하는 청정도량이다. 통일신라시대 창건설이 있지만 빨치산 항쟁과 토벌과정에서 잿더미가 됐고, 불에 견딘 구층석탑만이 당시를 말해주고 있다.
30여분 더 올라가면 유평리 마을이 나온다. 지금은 폐교됐지만 유평국민학교보다 가랑잎 초등학교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이날 푸르미 이음단도 노고단이 보이는 한옥민박촌인 오미마을을 지난다. 남한 3대 명당중 하나로 꼽히며, 풍수지리에서는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졌다는 '금환락지'의 형국으로 불리는 마을이다.
잠시 노고단을 바라보며 타락한 인간이 지리산에 남긴 아픈 흔적을 떠올린다. 1920년대 서양 선교사들은 노고단에 별장을 52채나 지었다. 1959년 미국 영국 선교사들도 왕시리봉(1243m)기슭에 별장 10채와 교회, 수영장을 지었다. 인간의 탐욕이 자연에 남긴 죄악이다.
이음단은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박경리 선생이 쓴 '토지'의 주 무대인 토지면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둘레길 중태안내소 055-973-9850
구례안내센터 061-781-0850
글 사진 = 이선형 천미아 리포터 eppen-i@hanmail.net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