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월봉 방지
고대 중국의 염제(炎帝) 신농황제(神農皇帝)의 10세손 유망(楡罔) 황제의 장남인 휘뢰(諱雷)에게 외침을 물리친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주어 하남성(河南省) 우주시(禹州市) 방산(方山)지방에 봉하게 하므로서 그 지명을 따서 方씨로 득성하였는바(BC2357년) 휘뢰공이 방씨의 비조(鼻祖)가 되시었다. 직계 후손은 133세대를 이어오다 134세 군강(君講)의 차남 휘지(諱智) 월봉(月峯)선생께서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이 높아 대당한림학사(大唐翰林學士)의 관직에 오르셨는바 당고종(唐高宗)의 명을 받아 문화사절로서 신라에 오시므로(서기 669년) 방씨의 시조(始祖)가 되시었다.
시조는 방지(方智). 자(字)는 천경(千慶), 호(號)는 화천(花川)이시다.
온양방씨대족보 ‘신축보(辛丑譜)’ 세록(世祿)편에 보면, 시조 월봉 방지는 중국 하남성 출신으로 신라 문무왕 9년 대당한림학사(大唐翰林學士)로 우리나라에 와 설총(薛聰)을 통하여 육례(六禮)와 구경(九經)을 이두문자(吏讀文字)로 강론하고 선교(宣敎)와 학업(學業)을 가르쳐, ‘동방문교(東方文敎)의 종(宗)’ 즉 문조(文祖)라 일컬어졌다고 한다.
2세인 아들 방헌주(方軒柱)는 가유현주(嘉猷縣主)가 되었고 3세인 손자 방길정(方吉正)은 전경부경(典京府卿), 4세인 증손자 방동량(方東亮)은 대광(大匡), 5세인 고손 방보혁(方甫赫)은 평안군(平安君)에 봉해지는 등 대대로 현달(顯達)하였다고 한다. 6세손 방공요(方公瑤)는 화령군(化寧君)의 작위(爵位)를 받았다.
중시조 온수군 휘운
신라 경애왕(景哀王) 3년(서기 926년) 신라의 농민출신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복수흥병(復讐興兵)으로 내습(來襲)하여 국도(國都)를 함락시키고 왕족과 귀족들을 시살(弑殺)하는 동시에 방씨 전문(全門)을 포위 학살하여 거의 전멸(全滅)하였으나 하늘이 도와 오직 한사람 휘운(諱雲)이 10세의 어린나이로 행면(幸免) 탈출하시어 방랑(放浪)중에 천재(天才)를 발휘하여 문무쌍전(文武雙全)의 재덕(才德)을 겸비하여 약관 17세때 고려 태조 왕건의 친위군에 뽑히고 후백제 견훤군을 대파하여 고려왕조 창건에 있어 큰 공헌을 쌓으신바 고려 광종 14년(963년)에 정승자리인 좌복야(左僕射)(정2품, 이조시대 좌의정 현 부총리격)의 관위(官位)에 승(昇)하시고 성종13년(992년)에는 거란군(契丹軍)과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을 물리친 군공(軍功)으로 정1품(正1品)의 특별 관작(官爵)인 온수군(溫水君)의 봉호(封號)와 아울러 충남일대의 3읍 (온양<溫陽>, 아산<牙山), 신창<新昌>)을 사패지(賜牌地)로 받아 과안산(過雁山)에 복거(卜居)하시니 그 산명(山名)이 배방산(拜方山)으로 명명되었다. 그 후 자손들이 온양에 세거하게 되었으므로 온양이 방성(方姓)의 본관(本官)이 되었고 그로부터 온수군의 후손은 고려조에 있어 세습(世襲)의 공신(功臣)으로 이어져 왔다.
그런 환난으로 소목(昭穆)을 잃어 계대(系代)가 분명치 않자 방운(方雲)을 기세조(起世祖)로 하게 되었는 바 온양방씨(溫陽方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온양(溫陽)을 관향(貫鄕)으로 삼기는 방운(方雲) 이후부터 이지만, 그 이전까지는 상주(尙州)에 세거하여 상주(尙州)를 관향(貫鄕)으로 하였었다.
‘신축보’(辛丑譜) 세록(世錄)에 6대 방공요(方公瑤)까지 상주(尙州)에 세거했다는 기록이 이것을 말한다.
본관지(本貫地)의 연혁
온양(溫陽)은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인데, 신라 문무왕 때 주(州)로 승격, 총관(摠管)을 두었고 고려 초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쳤으며 명종 때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조 태종 14년 신창(新昌)과 병합, 온창(溫昌)이라 고쳤으나 동(同)16년 각각 복구시켰고 세종 24년에는 지금 이름으로 개칭,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1914년 아산군(牙山郡)에 합쳐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로는 방(方)․정(鄭)․이(李)․윤(尹)․강(康)씨 등이 있었다.
파명록(派名錄)
중시조 이후 13세부터 판서공파(判書公派)․간의공파(諫議公派)․안염사공파(按廉使公派)․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상락부원군파(上洛府院君派)․광록대부공파(光祿大夫公派)로 구분하여 연면(連綿)히 이어져 내려오다 안염사공파와 상락부원군파는 절손(絶孫)되여 현재 5개파가 존재(存在)한다.
주요 세거지(世居地)와 변천
‘경신보(庚申譜)’에 보면, 1세 방운(方雲) 이래로 관향(貫鄕)이 충남 아산(牙山)의 온양(溫陽)에 살았던 사실이 나타나 있다.
대체로 9세 방희진(方曦進)의 代이래로 양주(楊州)․광주(廣州)․양평(楊平)∙ 풍덕(豊德)∙여주(驪州)∙고양(高陽)등 경기지역에 온양방씨(溫陽方氏)의 묘영(墓塋)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무렵부터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 일대에 자손들이 살게 되었던 것 같다.
판서공파(判書公派)는 17세 방강(方綱)이 황해도 연안(延安)으로 유배되어 그 후계(後系)가 연안(延安)에서 살다가 대체로 19세기 방득정(方得正)․방치정(方致正)의 대부터 양주(楊州)․양평(楊平) ∙ 강화(江華)․광주(廣州)․개성(開城)등 경기지역과 황해도 백천(白川)으로 옮겨가 터를 굳혔고, 그 중 일부는 방득정(方得正)의 6세손 방복산(方福山)의 대에 황해도 황주(黃州)․충남 공주(公州)․평남 박천(博川) 등지로 가 살았다.
17세 방룡(方龍)의 후계(後系)는 23세 방세정(方世貞)의 代 이후에 함북 복령(福寧)에 정착했으며 19세기 방효정(方孝精)의 후계(後系)는 관향(貫鄕)인 온양(溫陽)에 많이 살았다.
또한 16세 방유량(方有良)의 자손들 중에서 일부는 방유량(方有良)의 손자(孫子)인 방천록(方天祿)의 대를 전후한 때부터 평남 순천(順天)에 정착하였으며, 19세 방득림(方得林)이 만년(晩年)에 두 아들을 데리고 정착지를 물색하던 끝에 맏아들 방보래(方甫來)는 평남 맹산(孟山)의 동면(東面)에, 둘째아들 방장연(方長連)은 원남면(元南面) 상계리(上界里)에 자리잡아 그들의 자손들이 맹산(孟山)․영원(寧遠)․덕천(德川)․함남 정평(定平)∙정주(定洲) 등지에 산거(散居)하게 되었다.
18세 방련(方鍊)이 성종조에 북으로 옮겨간 뒤 그 후계(後系)가 서천(瑞川)에 정착했고 17세 방숙(方淑)의 자손들은 평북 철산(鐵山)과 19세 방휘(方徽) 이래로 용천(龍川)에 나뉘어 살았다. 일부는 방련(方鍊)의 5대손 방영휘(方榮輝) 이래로 경북 영일(迎日)에 세거하였던 것 같다.
간의공파(諫議公派)는 19세 방식(方軾)의 후계(後系)가 원주(原州)에 많이 살았고, 20세 방호인(方好仁)의 후계(後系)는 24세 방이복(方以福)이 상관(上官)의 비위(非違)를 직언(直言)하였다가 해직(解職) 당하여 동생 방이영(方以榮)을 데리고 낙향(落鄕), 경북 영천(永川) 등지에 정착한 것을 비롯하여 경북과 충남 각지에 산거(散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0세 방호의(方好義)의 후계(後系)는 경기지역에 세거하였으며, 방호의(方好義)의 동생 방호례(方好禮)의 후계(後系)는대체로 평택(平澤)에 터를 잡아 세거하였고 22세 방량(方良)의 자손들이 공주(公州)를 비롯하여 대체로 충남 일원에 세거하였다.
또한 19세 방연(方軟)이 연산조에 북청(北靑)에 유배(流配)된 이후 그곳에도 일부 자손들이 살게 되었던 것 같다.
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는 16세 방윤용(方允龍)이래로 경남 합천(陜川)에서 살다가 일부가 22세 방 체의 대부터 2대에 걸쳐 성주(星州)․삼가(三嘉)․달성(達城)․함양(咸陽)등지로 옮겨가 살았으며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는 경남에,
광록대부공파(光祿大夫公派)는 원주(原州)와 평남 강서(江西)에 많이 살았다.
온양방씨(溫陽方氏)는 1930년경 경남 의창군(義昌郡) 대산면(大山面), 합천군(陜川郡) 적중면(赤中面)․봉산면(鳳山面), 경북 달성군(達城郡) 구지면(求智面), 고령군(高靈郡) 쌍림면(雙林面), 성주군(星州郡) 금수면(金水面), 평남 순천군(順天郡) 순천읍(順天邑), 함남 북청군(北靑郡) 덕성면(德城面), 함북 부령군(富寧郡) 부거면(富居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씨족사(氏族史)의 개요
“가난하고 의지할 수 없는 이 겨레 어린이들아,
눈물을 함빡 내게로 넘겨다오.
너희를 대신하여 울어주마.”
일제(日帝)하 민족의 암흑기에 이 나라 어린이들에게 횃불을 쥐어 준 소년문화 운동의 선구 방정환(方定煥)은 방씨(方氏) 가문(家門)이 낳은 큰 별이자 그의 이름처럼 사라질 수 없는 ‘어린이’라는 낱말과 함께 이 민족의 정신 속에 항상 살아 숨쉬는 혼이다. 33세의 짧은 인생 역정 속에 시대를 앞서 걸으며 봉건구조의 가족관계에 억눌려 있던 여성과 어린이를 해방시킨 사상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아동문학가이기도 했다.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지내이더니…(중략)”
일제 압박하의 암흑상을 암시적으로 표현, 당시 우리네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던 눈물겨운 이 동요는 그의 민족사상을 대표적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10세때 이미 동네 친구들과 ‘소년입지회(少年立志會)’를 조직했을 만큼 일찍 깬 그는 19세에 천도교주(天道敎主)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의 사위가 됐다. 의암(義庵)은 “옆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며 사람 가리는 법으로 써 왔다는데, 소파(小波) 방정환의 무사(無邪) 원만한 옆얼굴을 감정보고는 두말없이 셋째 딸 용화(溶嬅)를 맡겼다고 한다.
소파(小波)는 서울토박이로 서울 한복판 ‘야주개’(지금의 당주동(唐株洞))에서 1899년 11월9일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는 방경수(方慶洙)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온양방씨 재 조명
시조 방지(方智)는 중국 하남(河南) 사람으로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9년(서기 669년)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당(唐) 고종(高宗)의 문화사절(文化史節)이 되어 신라(新羅)에 왔다. 당시 신라는 북쪽의 고구려 및 백제와 빈번하게 충돌, 친당(親唐)정책을 쓰면서 당(唐)의 문화를 수입하기에 열을 올렸고 이것이 이 땅에 방(方)씨를 뿌리 내리게 하는 계기가 됐다. 신라에 들어온 그는 설총(薛聰)과 더불어 동방(東方)유학과 예교(禮敎)의 진흥에 힘써 오다 신라국왕과 귀족들의 권유로 張씨를 부인으로 맞아 경상도 상주(尙州)에서 결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약 1335년전 이다. 그의 선대, 그러니까 방(方)씨의 원(元) 비조(鼻祖)는 중국(中國) 신화시대(神話時代)의 제왕(帝王)으로 전하는 염제신농(炎帝神農)씨의 11세손 뇌(雷)이다. (약 4,700년전)
그가 하남(河南)의 방산(方山)을 봉토(封土)로 받은 연유로 방(方)씨 성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신라(新羅)에 온 방지(方智)는 뇌(雷)의 1백 33세손인 군강(君講)의 차남이라고 방(方)씨 족보는 적고 있다.
온양(溫陽) 방씨(方氏)는 시조(始祖) 방지(方智) 이후 중간대의 실기(失記)로 방지(方智)의 후손(後孫) 온수군(溫水君) 방운(方雲)을 중시조 1세로 세계를 잇는다. 온양(溫陽) 외에 상주(尙州)․신창(新昌)․군위(軍威)로 본관을 따로 쓰기도 했으나 근래 모두 온양(溫陽)으로 합본(合本)했다. 어쩌다 아직 합본하지 않은 방(方)씨가 눈에 띄지만 모두 한 시조의 후예다.
중시조 방운(方雲)은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2차 견훤(甄萱)(후백제) 정벌에서 큰 공을 세워 고려 광종(光宗)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의 벼슬에까지 이르렀다. 왕은 만년의 그를 지금의 온양(溫陽)(당시의 지명은 온수(溫水))의 과안산(過雁山)에 살게 하고는 온수군(溫水君)으로 봉하고 온양군, 아산군, 신창군 3개군을 사패지로 내려 과안산에 복거하시니 이 산의 이름을 방씨를 숭배한다는 뜻에서 배방산(拜方山)이라 고쳐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방(方)씨는 온양(溫陽)을 세거지로 삼았다. 시조의 아들 방헌주(方軒柱) 이후 관향(貫鄕)으로 삼아온 상주(尙州)를 버리고 온양(溫陽)을 관향(貫鄕)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방운(方雲) 이후 후손들은 선대의 후광에 힘입어 고려조에서 대대로 벼슬길에 해질 날이 없었던 명문(名門)으로 등장한다. 무예(武藝)에도 뛰어나 온수군(溫水君)의 손자 방휴(方休)는 고려 현종(顯宗) 9년(서기 1018) 거란의 장수 소배압(蕭排押)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강감찬(姜邯贊) 장군과 함께 귀주(龜州)대첩의 명장으로 기록됐고, 공민왕(恭愍王) 10년(서기 1361년)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해 개경(開京) 수복에 공을 세워 1등 공신으로 올랐던 방절(方節)등 숱한 맹장들이 나왔다.
숙종(肅宗) 때 문하성(門下省) 평장사(平章事)와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올랐던 6세손 방유(方裕)와 희종(熙宗)때 상서령(尙書令)과 상서랑성찬성(尙書郞省贊成)을 지냈던 11세손 방만년(方萬年) 등은 명재상으로 당대를 휘어잡던 인물들이었다.
방(方)씨는 당시 중국과도 깊은 인연을 맺어 12세손 방신우(方臣佑)는 충렬왕 때 원(元)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평장사(平章事)등 요직을 지내고 그 후 충선-충숙왕대에 걸쳐 원(元)나라를 왕래하며 대원(對元) 외교에 탁월한 외교가이기도 했다. 그는 안평공주(安平公主)를 따라 원(元)나라에 가서 망고태(忙古台)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으며 수원황태후(壽元皇太后)의 시중을 들어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충선왕 때 홍중희(洪重喜)가 고려왕의 비행을 원제(元帝)에게 상소하자 무고임을 밝혀 그를 귀양 보냈다. 1310년, 태후(太后)의 명으로 고려에 파견된 그는 승속(僧俗) 3백여명으로써 <금자장경(金字藏經)>의 사서(寫書)를 완성, 이를 신효사(神孝寺)로 옮겨 태후(太后)의 복(福)을 빌었다. 태정황후(泰定皇后) 때에도 총애를 받아 저경사사(儲慶司使)를 지냈는데 때마침 고려를 원나라의 성(省)으로 편입시키려는 논의가 있게 되자 고려는 땅이 협소한데다가 산이 많고 들이 적으므로 불필요하다고 원제(元帝)에게 건의, 그 논의를 철회케 했다. 충숙왕(忠肅王) 때 그 공으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지고 공신(功臣)에 올랐으며 1330년 귀국하여 선흥사(禪興寺)를 중수하였다.
그의 아우 방신제(方臣悌)도 충렬왕 때 원(元)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금자광록대부평장사(金紫光祿大夫平章事)라는 큰 벼슬을 지냈고 그곳에서 다시 귀화 오늘까지 그의 후손들이 번성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조선조 초기 여조(麗朝)의 영화(榮華)속에 가문(家門)의 번성을 이룩해 온 방씨가(方氏家)는 이성계(李成桂) 혁명의 추종을 거부하고 한때 화를 입기도 했다.
여조(麗朝) 절신(節臣) 방순(方恂)은 공민왕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낸 인물로 이조(李朝)가 들어서면서 이태조(李太祖)가 예조참의(禮曹參議)의 벼슬자리를 남겨두고 여러차례 불렀으나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켰다.
15세손 방유정(方有程) 역시 이태조(李太祖)의 부름에 응하지 않자 이태조(李太祖)는 고려 광종(光宗)이 방씨가(方氏家)에 내린 온양(溫陽)의 사패지(賜牌地)(나라에서 내려준 땅<온양, 아산, 신창등 3읍>)를 몰수하는 한편 방씨일문(方氏一門)의 혼이 담긴 배방산(拜方山)을 방(方)씨를 배척한다는 뜻에서 배방산(排方山)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고 한다. 배방산(排方山)은 숙종(肅宗)에 이르러 ‘방(方)’자 위에 ‘ꟊ’를 붙여 배방(排芳)으로 고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조에서 방씨가(方氏家)는 14명의 문과(文科) 급제(及第)자를 배출했으나 조선(朝鮮)에서 최초로 문과에 급제한 17세손 방강(方綱)을 비롯해 18세손 방련(方鍊) 등 초기 급제자들이 유배를 당하는 등 빛을 보지 못해 큰 벼슬길에 오른 인물은 흔치 않았다. 그 중 두드러진 인물인 방유녕(方有寧)은 일세의 대유(大儒)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성종(成宗) 20년 과거에 급제, 대사간․대사헌에까지 올랐다. 외교에도 수완이 있어 명(明)에 사절로 다녀오는 공적을 세웠다.
무장으로는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방우정(方禹鼎)이 있다. 홍경래난(洪景來亂)의 평정에 참가했을 때 쓴 ‘서정일기(西征日記)’는 그 방면이 귀중한 연구자료로 쓰인다.
方씨 家의 데릴사위 - 구국(救國)의 명장(名將) 이순신(李舜臣) 장군
중시조의 22세손 방진(方震)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보성군수로 무남독려 외딸 하나만을 자손으로 두고 있었다. 방진은 아산(牙山) 백암리(白岩里) 방화산(芳華山) 기슭에서 부인 오씨(병마우후<兵馬虞侯> 오수억의 딸)와 살림이 넉넉하게 살고 있었다. 이순신은 서울의 남산골 동네에서 4남 1녀중 3남으로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살기가 힘든 일가족은 아산 백암리로 이순신이 20세 되던 해 낙향하게 되었다. 마침 방진의 생가가 있는 아산(지금의 현충사 부근)에서 이순신을 만난 방진은 마침 사위를 고르던 중이었는데 마음에 드는 듬직한 청년 이순신을 만나게 되었으니 천생연분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를 이모조모로 살펴보면서 호감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이순신보다 2살 연하인 외동딸을 결혼시키게 되었다. 결혼 후 이순신은 방진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방진의 사위겸 아들로서 살게 된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병법(兵法)을 공부하기에 이르렀고 장인 방진의 장서(藏書)를 두루 읽었고 특히 병서를 다 구해서 읽기도 하였다. 책뿐 아니라 또래들과 어울리어 말을 타고 궁술, 검술등 무술을 닦는 데도 열심을 하였다. 총명한 아내를 맞이하고 문(文)에서 무인(武人)으로 이순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대로 유유자적하던 이 시기가 이순신으로서는 생애의 제일 복된 시절이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무과의 과거 시험을 보려고 서울에 올라와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때 나이가 28세 적은 나이는 아니었으나 준비를 제대로 하느라 다소 늦게 응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험 도중에 달리던 말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 지는 바람에 땅에 떨어져 골절상을 입고 결국에는 과거에 떨어지게 된다. 4년 후 32세에 병과(丙科) 4등으로 과거(科擧) 시험에 급제(及第)하였다. 두만강 경비대장으로 가있던 이순신은 인품이 출중한지라 좌의정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례가 없는 8계급 승진과 동시에 전라수군통제사로 임명된 후 임진왜란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워 구국의 성웅으로 불멸의 이순신이란 칭호를 얻게 된다.
이순신의 사위로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처숙(妻叔)뻘인 방덕룡(方德龍)을 비롯, 방응원(方應元)등 방씨가(方氏家)의 남아(男兒)들이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선봉장으로 노량해전에서 함께 싸우다 전사를 하기도 했다. 특히 방덕룡(方德龍)은 정유재란 때 낙안군수(樂安郡守)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선봉장이 되어 분투하다 1598년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순절했다.
현재 아산 현충사터가 바로 이순신의 장인인 방진의 집이었다. 당시의 집은 정유재란때 불타고 지금의 건물은 후대에 지어진 것이다. 한때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방소녀란 이름으로 이순신의 안해가 소개되기도 하였다.
문(文)․무(武)의 인맥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방(方)씨가의 효자 인맥으로 방득정(方得正)․ 방치정(方致正)․ 방희설(方希說)․ 방국형(方國亨)․ 방맹(方萌)․ 방계종(方繼宗)․ 방애의(方愛義)․ 방후영(方厚永)․ 방태유(方鮐維)․ 방숭립(方崇立)․ 방수간(方秀幹)∙ 방두선(方斗善)등이 있다. 그 중에도 ‘하늘이 낸 효자’로 방수간(方秀幹)의 설화가 전한다. 중시조의 24세손인 그는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는데 어느 해 엄동설한, 병석에 누운 노모가 “수박이 먹고 싶다”고 찾았다. 한겨울에 수박을 구할 길이 없어 애타는 마음으로 하늘에 빌던 중 그 정성에 하늘이 감응했던지 밖에서 돌연 “수박사려!” 외치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먹음직스런 수박 한 덩이가 문간에 놓여 있었다는 효행담이 있다.
방태유(方鮐維)․ 방원필(方元弼)․ 방시중(方時中) 등이 모두 방(方)씨가의 효자들로 기록돼 있다. 방씨일문(方氏一門)은 근세에서 특히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일제때는 대한민국의 국권을 회복하려는 방씨 일가 독립유공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여성독립운동가 방순희(方順熙)씨를 비롯하여 방한상(方漢相), 방한민(方漢旻), 방치성(方致成), 방찬선(方贊善), 방 준(方 俊), 방정환(方定渙), 방일진(方一鎭), 방인수(方仁洙), 방윤격(方允格), 방원성(方遠成), 방애율(方哀律), 방성준(方成俊), 방서일(方瑞一), 방사일(方仕日), 방병찬(方炳贊), 방병걸(方炳傑), 방 길(方 吉), 방기전(方基典), 방학련(方學連), 방하영(方夏永), 방승현(方承絃), 방사필(方士必), 방관일(方觀一), 방경한(方景漢), 방경모(方敬模), 방봉순(方鳳淳), 방 렬(方 烈), 방경호(方敬鎬), 방창근(方昌根), 방성도(方聖道)씨등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방기전(方基典)은 1910년 망국(亡國) 후 만주(滿洲)로 이주, 은양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과 인재양성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이 나자 한족회(韓族會)에 가담하여 유서(柳西)지방 총관으로 무력항쟁에 나섰다가 전사한 항일운동의 숨은 별이다.
방한민(方漢旻)은 조선일보 창간 초기의 항일 민중기자로서 글로서 일제에 항거하였으며 일본 유학생들의 반일사상 고취를 위해 문화신문을 창간하고 북간도 만주 용정에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우리 동포의 지식을 깨우쳐주면서 민족의 자주 찾기, 조국의 광복을 위한 투쟁방법을 모색하였으며 1923년 5월 개산툰-용정 사이의 철도개통식에 참석하려는 일본총독 살해직전 발각되어 23명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10년 징역형을 비롯하여 두차례 도합 17년이란 오랜 기간동안 영어의 몸이 되었었다.
방응모(方應謨)는 1932년 운영란에 빠진 ‘조선일보(朝鮮日報)’에 거액을 투자, 인수 운영해 오다 1940년 8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자 출판사인 조광사(朝光社)를 경영하기도 했다. 8․15광복과 동시에 ‘조선일보(朝鮮日報)’를 복간, 민족언론문화 창달에 노력해오다 1950년 납북되어 생사를 알 길이 없다.
방인근(方仁根)은 소설가로 명성을 떨치신 분이시다.
구한말 방씨(方氏) 여류(女流)활동도 우리나라 여성운동에 큰 자취로 남아 있다.
여성 독립운동가였던 방순희(方順熙)씨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1904년 출생하여 경성으로와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대한애국부인회에서 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의 군자금으로 지원하는데 앞장을 섰고, 일제(日帝)시대 상해(上海)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의 유일한 여성의원이다. 당시 중경(重慶)방송을 통해 국내외의 항일운동과 독립정신을 고취한 여걸(女傑)이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
1931년 전주(全州) 기전(紀全)여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신앙 동지들의 기부금을 모아 고아원을 설립, 불우한 학생을 도운 여류(女流)사회 사업가 방애인(方愛仁)은 숙명(淑明)여고를 졸업하였고,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5회에 걸쳐 입상한 서화가(書畵家) 방무길(方戊吉) 등이 모두 방씨(方氏)여류, 해방 후 서울대(大) 교수로 국어국문학 연구에 공적을 남긴 방종현(方鍾鉉)씨는 일제(日帝)하 한글학회(조선(朝鮮)어학회) 회원으로 우리말을 통해 민족혼을 지키는 독립투쟁에 숨은 공을 세웠다. ‘훈민정음통사(訓民正音通史)’ ‘조선(朝鮮)민요집성’ 등 저서는 그의 애국적 우리말․문학 연구의 결정이다.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은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신청년> <신여자> <녹성> 등의 잡지 편집을 하였고 3․1운동 때는 오일철(吳一澈) 등과 함께 집에서 등사판으로 <독립신문>을 찍어 돌리다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 해에 일본에 건너가 일본동양대학문학과(日本東洋大學文學科)에서 아동문학에 전심하였던 그는, 1922년 <어린이>를 발간, 어린이란 말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손진태(孫晋泰)․윤극영(尹克榮)등과 <색동회>를 조직하고 5월 1일을 첫 <어린이날>로 정했다. 어른들에게는 어린이들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하고, 어린이에게는 앞날의 주인공임을 강조해주는 뜻깊은 명절로 그때 소파(小波)는 ‘어린이날 노래’를 짓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문학가로서 일생동안 어린이를 위해 헌신한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 소파상(小波賞)이 제정되었다.
종문행례(宗門行禮)
향사(享祀) : 시조(始祖): 월봉선생(月峯先生)매년 음력 10월 3일
중시조(中始祖): 방 운(方 雲) 매년 음력 10월 5일
9세 대제학(大提學) 방희진(方曦進) 음력 10월 6일
15세 문의공(文毅公) 방 순(方 恂) 음력 10월 7일
17세 승지공(承旨公) 방 강(方 綱) 음력 10월 8일
외 많은 선조(先祖) 시향(時享)이 있음
첫댓글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방대한 자료를 간결하게 정리하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후손들이 조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군요!
수고하셨어요 ^^ 이젠 홀로 인터넷을 찾지 않아도 되겠네요^^
대단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