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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왕릉지구에서 발견된 목걸이의 유리구슬에 그려진 흰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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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에 가면 작은 유리구슬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박물관에서는 구슬에 상감된 그림을 잘 볼 수 있도록 구슬 앞에 돋보기를 설치해 놓았다. 오늘은 이 유리구슬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어보기로 하자.
많은 사람이 이 구슬의 아름다움이나 제작상 고도의 기술이 동원되었다는 점에 관심을 가질 뿐 정작 그림의 내용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구슬에는 흰 닭과 황금색 나무 그리고 인물이 컬러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알지의 탄생 신화를 그린 것이다.
알지 탄생신화를 보자. '탈해왕 9년에 왕이 금성 서쪽에 있는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신하를 보내어 살피게 하였더니, 나뭇가지에 황금 궤짝이 걸려 있고 그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 궤를 가져다 열어 보니, 그 속에 조그만 사내아이가 들어 있어 왕이 거두어 길렀다. 차차 자람에 총명하고 지략이 많으므로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해서 성을 김(金) 씨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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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구슬의 다른 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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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탄생신화에 보이는 나무는 천상의 신성한 존재가 내려오는 생명의 나무이고, 흰 닭은 신성한 생명을 낳는 태양새이다. '삼국유사' 중 '천축으로 간 여러 법사들'편에는 '신라인들이 닭의 신(鷄神)을 섬겨 머리에 날개깃을 꽂아 꾸미개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신라인들이 알지 탄생신화의 흰닭을 신성시했음을 말한다. 알지 탄생신화에 나오는 기본 요소를 모자에 반영한 것이 신라금관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라금관에 나타나는 요소들이 유리구슬에 그대로 보인다. 학계에서는 이 상감옥이 수입품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유리구슬은 누가 어디에서 만들었으며, 어떻게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묻히게 되었을까?
당시 신라왕족과 연결되면서 천산 너머의 정보나 물자를 신라에 전했을 가능성이 높은 집단으로 국제무역상이었던 소그드인을 들 수 있다. 이들 소그드 상인이 유리구슬을 신라의 왕이나 왕족에게 선물했을 것이다. 이러한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소그드 왕의 궁전 벽화에 보이는 그림이 있다.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묘사된 신라 사절은 유리구슬에 묘사된 인물이 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머리꾸미개를 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신라인의 풍습을 알고 있었음을 말한다.
고미술사학자 요시미즈 츠네오는 이 유리구슬이 고도의 기술을 익힌 기술자에 의해서 주문생산된 것으로 보았다. 그 생산지로는 흑해의 서쪽 지방이 유력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라 왕족의 시조신화를 흑해 서쪽 지방의 장인이 생산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프라시 앞 궁전에 그려진 신라사절의 모습이나 소그드인이 당시 국제상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그드인들은 신라에 대한 정보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정보 중에는 알지 탄생신화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정보를 가지고 있던 소그드 상인들이 신라 왕실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서 알지신화를 담은 상감옥을 주문제작하여 신라왕에게 바쳤을 것으로 추론하는 것은 무리일까? 경주에 있는 대형 고분에서 서역계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 상황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갈 것이다.
'천년왕국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