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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큰믿음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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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자는 깨달을 찐저!(책 전문)
| 강순방 지음 |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뇌의약연구단 책임연구원/이학박사
대한화학회(KCS) 종신회원 | 한국창조과학회(KACR) 정회원 | 통합교단소속 교회 안수집사
목차
한국 교회의 존경하는 목사님과 성도님들에게!5
통합의 “큰믿음교회(변승우 목사)에 대한 연구보고서”의 실체!13
1소재지와 조직, 연혁과 변천에 대하여 29
2 교리적 차이에 대한 왜곡33
3 교회론에 대한 왜곡39
4 자신을 우상화 한다구요?47
5 계시론과 성경론에 대한 무지51
6 구원론에 대한 음해67
7 목사들의 90%가 거짓 선지자라는 거짓 주장에 대하여77
8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음해에 대하여81
9 성령사역이 신비주의적인 사역이라니요?93
10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101
부록 113
1. 많은 신학자들이 변승우 목사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2. 예언이란 무엇인가 (강금성 교수)
3. “큰믿음교회와 변 목사님의 이단성을 조사한다는 자체가 정말 잘못된 일이었습니다.”(한기총 이대위 임원)
4. 모 장로교단 총무이며 한장총 이대위 위원 목사님의 전화
5. ‘큰믿음교회 이단 이래’ 라는 거짓말에 속고 있는 분들에게
6. 큰믿음교회는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한기총 이대위 소위원회에서 여러 달 조사를 받은 결과 이단이 아님이 밝혀졌고, 한기총 이대위 전체모임에서 이것이 받아들여졌고, 한기총 임원회까지 통과되어 적법한 절차를 밟아 이단이 아님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기총에서 이단이 아니라는 공식문서를 떼어주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존경하는 목사님과 성도님들에게!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저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근무하는 강순방입니다. 저는 명확한 사실에 대한 관찰로부터 과학지식을 탐구하는 과학자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의 말씀 안에 바로 세워지기를 소망하는 신앙인으로서 양심적으로 보고 들은 진실을 알리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저는 큰믿음교회의 성도가 아닙니다. 반세기의 오랜 역사를 가진 통합교단 소속 장로교회의 안수집사입니다.
그러나 저는 큰믿음교회를 적극 지지하며 변승우 목사님을 존경하고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님은 2009년 통합교단 제94차 총회에서 이단으로 결의되었으며 그 외의 다수 교단에서 참여/교류금지 등의 판정을 받았습니다.
만약 제가 큰믿음교회나 변승우 목사님을 몰랐었다면 저 또한 교단들의 결정을 존중하여 어느 누구 못지않게 변승우 목사님을 배척하고 큰믿음교회가 이단임을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 알리고 주의시켰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단에 빠지면 패가망신을 넘어서 영원히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신앙양심으로 말씀드리면 큰믿음교회는 불의하게 매도당하고 있습니다. 통합교단에서 발표한 「통합이대위 보고서」가 사실이라면 변승우 목사님은 이단이 맞습니다. 그 내용이 참되고 거짓이 없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 보고서는 인터넷에 떠다니는 수많은 거짓말을 수집한 것이고,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왜곡되었으며, 무지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형편없는 자료를 근거로 통합교단총회에 참석한 목사님들이 변승우 목사님을 이단으로 결의해 주었고 지금까지 많은 교회에서 덩달아 매도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죄악이고 지극히 불의한 일이기에 처절한 공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2007년 말부터 지금까지 큰믿음교회 집회와 기도회 등에 참석하고 변승우 목사님의 저서들을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아서, 그 교회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저이기에 통합이대위의 보고서가 완전히 거짓이요 날조된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이것은 너무나 불의하고 하나님 앞에 큰 죄악입니다.
잘못된 이단정죄는 명백한 영적 살인행위입니다. 그로인해 너무나 많은 큰믿음교회 성도들과 가족들이 억울하게 파혼당하고, 퇴학당하고, 퇴직당하고, 입학을 거부당하고, 구타당하고, 이혼협박에 시달리며, 자녀도 만나지 못하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큰믿음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들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전체로 볼 때 얼마나 큰 손해인지요! 이런 현실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거짓은 진실이 되고 진실은 거짓 취급을 당하는 불법이 판치는 교계의 현실을 보면서 더 이상 신앙양심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평신도지만 이 책자를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법정에서도, 검사가 기소입증에 필요한 합리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거나 제출된 증거가 거짓으로 밝혀지면 재판관은 피고를 무죄로 봅니다. 그것이 공정한 판결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검사가 악의적으로 왜곡된 거짓증거를 만들어서 변승우 목사님을 피고로 기소할 때, 재판관은 피고에게 반론이나 변호사의 변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검사의 의도대로 일방적으로 불의한 판정을 내렸습니다. 거짓된 검사 못지않게 그 재판관은 분명 양심에 화인 맞은 자입니다. 그 검사와 재판관은 누구입니까? 그들의 실체가 바로 통합교단의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통합이대위)이며, 통합교단총회도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 세상에 본이 되어야 할 교단에서, 그것도 한국교회의 장자 위치임을 자부하는 거대 교단에서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성경적으로 바르게 사역하고 있는 교회를 불의하게 이단으로 정죄해서 한국교계에서 치명적인 영적 살인을 당하게 하면서도 대다수의 복음주의 교회들이 반대하고 있는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서서, 구원관이 서로 다를 수 있는 모든 기독교 교파와의 연합과 일치를 위하고 타종교와의 대화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통합교단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통합이대위가 제출한 기소장, 즉 「큰믿음교회(변승우목사)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자세히 살펴봐주십시오. 그리고 명확한 진실과 성경말씀에 비추어 그 기소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임을 증명하는 저의 변론을 읽어보시고, 여러분들이 양심이 있는 재판관이 되어서 진실이 무엇인지를 판결해 주시길 간절히 호소합니다. 그래서 진리에 눈을 뜨시고 비겁하게 침묵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정의로운 목소리를 발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타 교회 성도로서, 그리고 단순히 떠도는 소문이 아니라 큰믿음교회의 실체를 아는 한 사람으로서 양심적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인터넷이나 시중에 떠다니는 근거 없는 정보들을 통한 선입견은 내려놓으시고 공정한 마음으로 이 글을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한국 교회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 안에 바로 서있는 양심이 있는 목사님들과 성도님들이 많이 계심을 믿기에, 진리가 바로 세워져서 모든 성도님들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같이 참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전서 2장 4절)
2012년 3월 26일
강순방 올림
통합의
“큰믿음교회(변승우 목사)에 대한
연구보고서”의 실체!
저는 큰믿음교회 성도가 아닙니다. 통합 교단 소속의 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장로 교회의 안수집사입니다. 목회자도 아닌 제가 이렇게 펜을 든 것은 큰믿음교회에 대한 통합을 위시한 몇몇 교단들과 현대종교의 참으로 불의한 음해와 매도에 참기 힘든 의분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리 알려둘 것은, 이 글을 쓰는데 다음카페 회원 ID “마지막 군대”님이 큰믿음교회를 불의하게 정죄한 「통합교단 제94회 총회결의」 내용과 이 내용을 지속적으로 홍보하는 「현대종교」 기사에 대한 허구성 분석과 반박 글을 자신의 싸이 미니 홈피와 큰믿음교회 카페에 올려놓았는데, 그 글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글은 제가 알고 있는 사실과 제 양심에 100% 동의되는 내용들이어서, 진실을 알리고자 그 글 중 일부를 가져와서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최소한의 양식과 신앙양심(믿음)이 있는 신앙인이라면 타인을 이단으로 정죄(고의든 실수이든, 잘못된 이단정죄는 명백한 영적 살인행위라고 저는 믿습니다)하기 전에, 분명히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싸이트의 「이단사이비 총회 주요 결의」 번호 81에 ‘큰믿음교회(변승우 목사)에 대한 연구보고서(94회)’ 자료가 있는데 그것은 악의적인 왜곡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이없게도 그것을 근거로 통합교단이 2009년 94회 총회에서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를 이단으로 결의’하였고 「통합교단」과 「현대종교」가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큰믿음교회를 불의하게 이단으로 매도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장자교단이라는 통합(사실, 모든 결정은 한기총과 합동에서 이단으로 판정된 최삼경 목사의 주도하에 통합이대위가 결정하였고 더구나 통합 내부 인사의 제보에 의하면 정족수 미달의 불법적인 결정이었음)에 계신 훌륭하시고 저명하신 신학자들과 목사님들이 결정하셨기에 이유를 묻거나, 따져보거나,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이 무조건 통합교단의 결정이 옳기 때문에 큰믿음교회에 대한 이단정죄는 옳다고 판단하느냐” 아니면, “사실이 아닌 왜곡된 정보와 음해성 자료만 가지고 통합교단이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인가”를 명백히 하기 위해서는 이 자료를 끝까지 읽어 보시고 판단하시는 게 공의로운 자세라 생각합니다.
이 글은 「통합이대위」와 「현대종교」가 어떻게 거짓으로 왜곡하고 있으며, 어떤 부분에 있어서 성경에 무지한가? 그리고 칼빈주의와 다른 견해를 가지는 타 교단과의 신학적 견해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얼마나 독선적으로 중세마녀사냥식 판단과 정죄를 일삼고 있는가?를 밝히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동안 큰믿음교회를 오해하고 이단이라고 성토해왔던 분들은 예수님께서 피 값으로 세우시고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시는 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큰 죄악을 범하지 말고, 이 글을 통해 하루 속히 하나님께 회개하고 큰믿음교회 담임목사님과 성도님들 앞에 정중히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글의 순서는, 먼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의 2009년도 제94회 총회결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그 내용 중 잘못이 있는 부분에 밑줄을 그었으며, 두 번째는 밑줄 친 부분을 다시 기울임 글꼴 바탕색으로 인용하면서 반박하는 글을 실었습니다.
큰믿음교회(변승우 목사)에 대한 연구보고서(94회)
1. 연구 경위
큰믿음교회(변승우 목사)의 이단성 여부에 대한 서울강남노회의 질의(서강남, 제 43-112호)가 총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로 이첩(예장총 제 93-287호)됨에 따라 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다.
2. 연구 보고
1) 변승우씨 문제의 개요
변승우씨의 신학적 배경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울산에서 큰믿음교회를 목회하다가 현재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 111-13 노벨 빌딩에 큰믿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울산을 비롯하여 대전, 대구, 창원, 부산은 물론 해외까지 지교회를 세우고 무서운 속도로 교세가 성장하고 있다. 특히 그는 인터넷 카페와 인터넷 방송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상을 유포시키고 자신들의 추종자들의 댓글을 확대 재생산하여 젊은이들에게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나아가 자신의 주장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 많은 외국인 강사들을 초청하여 집회를 인도한다. 이들 외국 강사들의 메시지는 변승우씨에 대한 예언과 찬양 일색으로 이루어져 있다(가령,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의 토마스 주남의 “추천의 글”과「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의 밥 존스의 “추천의 글”을 보라).
변승우씨는 최근 물의를 많이 일으키는 소위 <신사도 운동>의 영향을 받은 자로 직통계시를 강조한다. 또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는 입신, 예언과 방언 등 신비적인 사상을 강조하고 심지어 이를 훈련시키는 학교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2) 교회론의 문제점
변승우씨는 기성교회를 비판하고 그 반사적 이득을 통해 자신의 교회를 성장시킨다. 그는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이란 저서를 시작으로 「진짜 구원받은 사람도 진짜 버림받을 수 있다」 「하늘에서 온 이메일」등 많은 저서에서 기성교회를 비판하고 역으로 자신의 교회는 온전한 교회임을 암시한다.
변승우씨는 ‘크리스천이 지옥에 가며,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나아가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단 사냥꾼”, “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 “바리새파 사람들” 심지어 “영적 기생충”이라고 공격한다.
반면, 자기 자신은 존 웨슬레, 조나단 에드워드, 찰스 피니, 등 부흥을 이끈 교회의 위대한 목회자들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다(「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p103-111).
“저는 찰스 피니의 이러한 고백을 읽으면서 감동으로 몸을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임할 때의 저의 체험과 너무나도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피니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p.107)
이처럼 변승우씨가 기성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자신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 기성교회 교인들을 자신의 교회로 오게 하려는 의도, 그리고 다른 이단들과 같이 본인이 목회하는 교회만이 참 교회라고 주장하려는 의도이다.
3) 계시론과 성경론의 문제점
변승우씨는 자신의 저서 여러 곳에서 성령이 직접 자신에게 책을 저술하라든지 또 어떠어떠한 내용으로 설교하라고 지시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듣지 않으면 설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 설교의 좌우명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p.9). 이러한 그의 주장은 세 가지 효과를 겨냥한 것이다.
첫째, 자신의 저서나 설교에 대해 초월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효과이다. 즉 자신의 책을 마치 직접 계시를 받아 저술한 것처럼 오도하기 위함이다(가령, 그는 「명목상의 교인인가? 미성숙한 신자인가?」 p.11에서도 “저는 성령께서 저에게 설교하라고 레마로 주시는 말씀들을 설교합니다. 제가 설교의 주제나 내용을 자의로 선택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또한 외국의 사역자들의 추천사를 책 앞에 배치시키는데, 그 추천사에는 거의 예외 없이 변승우씨가 받은 계시가 성령의 계시라고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둘째, 그의 직접 계시성은 기성 교회에 대한 강한 비판과 자기 교회를 특수화하는 효과가 있다. 변 씨가 성령의 계시를 받았음을 선전하는 것은 기성교회는 성령의 계시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기성교회는 잘못 내지 무능하다는 암시를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주고 있다.
셋째, 변 씨의 직접계시 주장은 결과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자신이 받은 직접 계시나 꿈을 위해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재편하여 자신의 설교나 성경해석에 적용함으로 성경을 자신의 계시나 꿈을 제시하고 해석하기 위한 보조물로 전락시킨다. 또한 그는 자신이 받은 직접 계시를 성경과 동일하거나 혹은 성경의 권위 위에 둔다. 나아가 변 씨는 자신이 사도들과 똑같은 영감을 받았으며 따라서 자신의 성경해석이나 설교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는 식으로 암시한다. 심지어 변 씨는 자신이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다림줄”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그의 저서「다림줄」을 보라).
변 씨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 충분한 계시 내용을 담고 있어 성경 이외 더 이상 직접적인 계시는 없다는 우리 교단의 교리에 반하는 것임은<본 교단 「헌법」 제 1편, 교리의 4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제 1장 “성경에 관하여”를 보라. 1조“…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해 주시던 이전 방법은 현재 중지되어 버렸다(히 1:12).” 또 6조. “…이 성경에 대하여 어느 때를 막론하고 성령의 새로운 계시로서나, 인간의 전통으로서도 더 첨가할 수 없다(딤후 3:15-17, 갈 1:8-9, 살후 2:2).”>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처럼 변 씨의 성경관과 계시관은, 비 성경적임은 물론 본 교단의 계시관과 성경관과 배치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킨다.
4) 구원론의 문제점
변 씨의 기성교회 비판과 자신의 차별화 또는 우상화는 그의 구원론에서도 잘 나타난다. 「지옥에 가는 크리스찬들」,「진짜 구원받은 사람도 진짜 버림받을 수 있다」란 그의 핵심적인 저서들을 살펴볼 때, 그의 모순점들이 잘 나타난다.
“그래서 ‘예수 믿고’ 지옥 가지 말고 ‘제대로 예수 믿고’ 꼭 천국에 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p.9).
“예수를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본래 이단 사설입니다.”
(변승우 설교,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2006.5.26)
“많은 사람들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죽기 직전 하나님이 억지로라도 회개시켜서 천국에 데리고 간다’는 맹신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이중으로 속는 것입니다.”
(변승우 [주여], pp. 152-156).
‘구약시대 때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았는데,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구원 못 받았는데, 신약시대 때는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이렇게 설교하는 목사들이 많았습니다. 무지하게 무식한 이야기입니다.”
(변승우. 설교,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2009, 5월 14일 설교)
“신약시대에도 90%이상이 거짓선지자들은 목사들입니다.”
(변승우. 설교,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2006.5.26 설교)
변 씨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주장과(엡2: 8) 정통 교회의 주장과 달리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한다.
“보통 사람들은 십자가 외에 다른 소리를 하면 모두 잘못된 것인 양 얘기합니다. 구원에 대해서 말할 때 오직 십자가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편협하고 비성경적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변승우, [주 달려 죽은 십자가], pp. 54-55).
“…마치 십자가를 신뢰하기만 하면 죄에서 돌아서는 회개나 행함이 따르는 참 믿음이나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로 지음 받는 거듭남이 없이도 죄 용서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양 가르치고, 자신들만이 정통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변승우, [주 달려 죽은 십자가], p. 59).
이렇게 변 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도 회개와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고 하며, 구원받은 사람도 헌신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 성령의 선물로 인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반대하고 행위와 공덕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다. 이러한 구원관은 성경적 구원관이나 우리 개혁교회의 구원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본 교단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위험한 구원론이다.
5) 신비주의적인 사역의 문제점
변승우는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등의 저서와 설교들 통하여 천국을 갔다 온 입신의 경험, 개인의 미래에 대한 예언, 방언, 쓰러지는 현상 등 신비주의 형태의 목회를 활발히 펼치고 있다. 그의 저서에는 천국을 갔다 온 사람들의 간증이 많이 실려 있다. (가령, 「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 p223-289를 보라.). 그는 집회 시간에 방언을 훈련시키고 있으며, <큰믿음교회> 내에는 예언 사역 팀, 방언 통변 팀, 신유 축사 팀 등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목회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가 지난 2009년 7월 23일 150명의 죽은 자를 살렸다는 조세프 과지마의 집회광고 게재 문제로 국민일보, CBS를 비난한 것도 한 예이다.
이러한 변 씨의 신비주의적인 사역은 우리 주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16:4)고 하신 말씀과 배치된다. 또한 본 교단에서 엄히 경계하는 극단적인 신비주의 사역이라는 점에서 마땅히 배척되어야 한다.
3. 연구 결론
이상에서 보듯이 <큰믿음교회> 변승우씨는 기성교회를 심하게 비판하여 교인들을 자신의 교회로 인도하는 부도덕한 목회행위, 직통계시에 근거하여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잘못된 성경관과 계시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정통 구원관과 다른 구원론, 입신, 예언, 방언 등 극단적인 신비주의 신앙 형태 등을 갖고 있는 비성경적 기독교 이단이다. 따라서 본 교단 교인들은 변 씨의 집회에 참석을 엄히 금하는 것은 물론 그가 운영하는 인터넷 동영상이나 카페에 참여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4. 참고 자료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______, 「진짜 구원받은 사람도 진짜 버림받을 수 있다」.
______,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______,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______, 「다림줄」.
______, 「구원에 이르는 지혜」.
______, 「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
기타, 변승우 설교 동영상, 인터넷 방송 http://www.gfctv.org/ 및
큰믿음교회 인터넷 카페, http://cafe.daum.net/Bigchurch
<인용자료>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의 2009년도 제94회 총회결의내용 :
(http://www.pck.or.kr/PckCommunity/NoticeView.asp?TC_Board=19053&ArticleId=60&page=2&Depth=1)
* 「현대종교」 자료목록 :
(http://www.hdjongkyo.co.kr/html/sup01_1.html?Hid=135&Hpopage=1&Hponowblock=1&Hponumperpage=10&Hpogroups=&Hposelect=2&Hposearch=변승우)
여기까지가 「통합이대위 보고서」 결의 내용이고 이후부터는 본인이 낱낱이 이 보고서의 주장들의 잘못된 부분을 분석한 내용입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본인은 위의 보고서의 거의 모든 부분에 밑줄을 쳤습니다. 처음에 밝혔듯이, 거의 모든 부분이 왜곡되었고 사실과는 다르게 보이도록 통합이대위에서 의도적으로 글을 쓰거나, 이들이 철저히 성경에 무지하다는 것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불의함을 밝힐 것이고 설명할 것입니다. 이후부터는 어떤 편도 아닌 중립적 입장에서 글을 쓰기 위해 높임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 글은 특정한 상대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큰믿음교회를 오해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쓰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1
소재지와 조직, 연혁과 변천에 대하여
「통합이대위 보고서」는 먼저 소재지와 조직, 연혁과 변천에 대해서 다룬다. (통합이대위보고서의 내용을 인용할 때는 기울임글꼴 바탕색 을 사용했다.)
변승우씨의 신학적 배경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울산에서 큰믿음교회를 목회하다가 현재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 111-13 노벨 빌딩에 큰믿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울산을 비롯하여 대전, 대구, 창원, 부산은 물론 해외까지 지교회를 세우고 무서운 속도로 교세가 성장하고 있다.
참고로, 변승우 목사는 보수적인 정통 신학교인 성결대학교 신학과 82학번이며 울산에서 1995년 개척했고, 서울에서 2005년 3월 6일 개척예배를 드렸다. 개척 7년이 갓 넘은 현재 큰믿음교회의 교세는 재적성도 1만 2천 5백 명에 출석성도 약 8,000명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각종 치유의 기적이 매주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900억 원을 넘게 들여서 본당만 7,000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교회를 건축하고 있다.
서론이랄 수 있는 부분부터 보면 우선 명백한 사이비 이단 교주로 낙인을 찍은 상태에서 다분히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그는 인터넷 카페와 인터넷 방송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상을 유포시키고 자신들의 추종자들의 댓글을 확대 재생산화여 젊은이들에게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나아가 자신의 주장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 많은 외국인 강사들을 초청하여 집회를 인도한다. 이들 외국 강사들의 메시지는 변승우씨에 대한 예언과 찬양 일색으로 이루어져 있다(가령,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의 토마스 주남의 “추천의 글”과「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의 밥 존스의 “추천의 글”을 보라).
「통합이대위 보고서」는 ‘~자신의 사상을 유포시키고 자신들의 추종자들의 댓글을 확대 재생산화여 젊은이들에게 영향력을 확대하고~’라는 표현을 썼는데, 변승우 목사의 설교 핵심은 성경에 있는 그대로 회개와 행함이 따르는 산 믿음을 갖고, 성령 충만과 권능을 받아 복음의 증인이 되고, 예수님을 깊이 알고 사랑하는 주님의 신부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변승우 목사의 설교나 책을 한 번이라도 듣거나 정독해 봤다면 이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사상이라면 ‘자신의 사상을 유포’라는 부정적인 표현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성경대로 널리 알리고 있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순종이 따르지 않는 입술만의 ‘믿음고백’으로 구원받는다고 믿고 있는가? 존 비비어 목사의 「순종」이란 책을 읽어 본 적이 있는가? 변승우 목사는 여러 번 설교 중에 자신의 설교 핵심이 존 비비어 목사와 100% 일치하며, 기회가 되면 존 비비어 목사를 초청강사로 모시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미 존 비비어 목사는 큰믿음교회의 집회를 수락한 상태다.
또한 ‘자신의 주장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 많은 외국인 강사들을 초청하여 집회를 인도한다. 이들 외국 강사들의 메시지는 변승우씨에 대한 예언과 찬양 일색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심히 왜곡된 표현을 썼는데, 외국 부흥강사 집회를 자주하는 것은 영성운동하는 교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성령 충만한 강사들을 통해 계속 배우고 발전해 나아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절감하고 국제적인 강사들의 장점을 인정하여 배우고자 집회를 여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자기의 권위를 더하기 위한 것인가?
그리고 변승우 목사에 대한 예언과 찬양 일색이라니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리다. 왜냐하면 영성 집회의 국제적인 강사들은 대부분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고 그들이 방문하는 교회마다 담임목사나 그 교회에 대한 예언을 해주는 것은 관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성도들과 비전을 공유하고 중보기도의 제목으로 삼기 위해 그 예언을 교회의 홈페이지나 카페에 올리는 것도 흔한 일이다. 큰믿음교회가 처음 시작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그렇게 비정상적인 것처럼 기술하는가? 그 의도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또한,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의 토마스 주남의 “추천의 글”과 「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의 밥 존스의 “추천의 글”을 보라.’라고 했는데, 제발 부탁한다. 이왕이면 추천의 글 다음 몇 장이라도 책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고 판단하길 바란다.
2
교리적 차이에 대한 왜곡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교리적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부터 하나씩 집어보겠다. 정말로 그러한지 말이다.
변승우씨는 최근 물의를 많이 일으키는 소위 <신사도 운동>의 영향을 받은 자로 직통계시를 강조한다. 또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는 입신, 예언과 방언 등 신비적인 사상을 강조하고 심지어 이를 훈련시키는 학교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부터 보겠다.
신사도운동의 영향을 받은 자라고 말하지만 변승우 목사는 신사도운동에 동참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님을 설교를 통해 분명히 강조한다. 또한 신사도운동의 바르게 가는 부분과 바르지 않게 가는 부분을 성경 말씀들을 기반으로 설명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신사도운동에서 주장하는 “전략적인 수준의 영적 전쟁”에 대한 가르침이 비성경적인 것임을 지적하는 책까지 저술했다. 그래서 그 진영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다. 더구나 실제로 신사도운동을 하고 있는 홍 모 목사는 그의 배경을 인식하여 내버려두면서 왜 애꿎은 변승우 목사를 물고 늘어지는가? 유전무죄요 무전유죄인가? (2010.10.24 ‘사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신사도운동’이라는 설교를 참고하라.)
또한 직통계시를 강조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변승우 목사가 무슨 특별한 계시를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비성경적인 은사중단론을 거절하고 예언의 은사를 포함한 성령의 은사들을 인정하고 사용할 뿐이다. 그것을 왜 그렇게 별나게 표현하는가? 여의도순복음교회도 예수전도단도, 심지어 주안장로교회 나겸일 목사도 그렇게 믿고 있지 않은가? 그런 목사들이 수없이 많지 않은가? 그렇다고 그분들이 직통계시 이단인가?
직통계시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해서 본인이 신학자들이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확실한 것은 변승우 목사가 자기가 직통계시를 받는다고 말한 적도 없고, 이단사냥꾼들이 변승우 목사를 이단으로 몰기 위해서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일반적인 계시를 직통계시라는 극단적인 말로 표현하여 이상하게 보이게 하여 매도하기 위한 악의적인 용어라는 것이다. 만약 이 의미가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런 계시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변승우 목사가 말하는 계시도 이런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의미의 계시를 인정하는 것이 이단정죄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만약 통합이대위가 말하는 직통계시가 성경을 기록했던 것과 같은 계시를 의미한다면 변승우 목사는 이와 전혀 무관하다. 이것은 그가 쓴 책을 통해 명백하게 확인이 된다.
“하지만 큰믿음교회는 직통 계시와 전혀 무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시에서 교리를 끌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성경에서 나오는 것이지 계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에서 깨닫고 끌어낸 교리를 계시적인 간증으로 설명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계시에서 교리를 끌어내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계시를 성경의 권위 아래 두며 성경 말씀으로 모든 계시를 분별합니다. 그리고 비성경적인 것은 과감하게 버립니다. 우리가 받는 계시는 교회의 소명과 성도들의 소명에 대해 부분적으로 보여 주시는 것을 포함하여 대부분은 바울이 말한 대로 교회의 덕을 세우며 권면하고 안위하는 내용들입니다.(고전 14:3).”
바로 이런 주관이 뚜렷하기 때문에 큰믿음교회가 계시를 인정하나 비성경적인 주장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큰믿음교회는 직통계시 이단이 아니라 은사중단론을 거부하고 여전히 예언의 은사가 존재함을 인정하고 성경적으로 그리고 지혜있고 덕스럽게 예언사역을 하고 있는 교회일 뿐이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계속해서 「통합이대위 보고서」는 큰믿음교회를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는 입신, 예언과 방언 등 신비적인 사상을 강조하고 심지어 이를 훈련시키는 학교까지 운영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정상적인 성령사역을 이렇게 비아냥댄다고 어느 교회가 이단이 되는가? 그것은 아니지 않은가.
먼저 묻겠다. 입신은 잘못된 것인가? 물론 잘못된 입신간증들이 있을 수 있다. 입신이란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실제로 성경에서 입신으로 보이는 많은 증거들이 존재한다. 신약에서는 대표적으로 바울의 삼층천 체험과 사도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쓸 때 계시를 받은 경험, 구약시대에서는 에스겔의 환상경험이 그것이다. 결국 성경은 입신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입신에 대해서 긍정하고 있다. 그런데 통합교단은 입신경험이 매우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것인 듯한 뉘앙스를 보이며 그것을 인정하는 변승우 목사와 큰믿음교회를 문제시 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시중에 입신을 통한 간증 책들도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것들을 출판하는 출판사와 그 경험들을 한 사람들과, 그 사람들과 그 책들을 인정하는 모든 목회자들과 교회도 문제 삼아야 한다. (예를 들면, 신성종 목사의 「내가 본 지옥과 천국」,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사두 썬다싱 전집」, 박영문 장로의 「두고 보리라」 등이다.) 물론 실제로는 이러한 것들을 인정하는 교회나 사람들을 모두 문제 삼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통합을 비롯한 대부분의 교단 이대위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게다가 입신이 그렇게 문제라면 거의 모든 입신 간증자들을 불러서 단골로 입신 간증을 시키는 나겸일 목사는 왜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는가? 교회가 크기 때문에? 아니면 같은 통합교단이라서? 도무지 형평성에 맞지 않는 말이다.
결정적으로 변승우 목사는 스스로 입신을 경험한 적이 없고 그뿐 아니라 입신을 다 믿지 않는다고 말하며 다 믿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극소수의 입신만 믿을 수 있는 것이므로 성경을 기준으로 신중하게 분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입신 중에 비성경적인 것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005.8.21 설교를 참고하라.) 더 중요한 것은 큰믿음교회는 통합교단이 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미 부정확함에 회의를 느껴서 입신에 대한 책(「하늘나라에서 온 이메일」)을 절판시키고 입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자발적으로 그만 두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통합이대위 보고서」는 ‘큰믿음교회가 예언과 방언 등 신비적인 사상을 강조하고 그것을 훈련시킨다.’고 했는데… 방언과 예언은 잘못된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고전 14:1, 5 / 고전 14:39, 40). 그리고 성경은 ‘질서 있게 하라’고 가르치고, 방언과 예언을 권장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언전도학교나 능력전도학교에서 은사사역을 바르게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 성경에도 사무엘과 엘리사가 운영했던 선지자학교가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은사에 대해 성도들에게 가르치지 아니했는가? 그렇다고 바울이 신비주의자이거나 이단은 아니지 않은가? 큰믿음교회도 마찬가지다.
3
교회론에 대한 왜곡
계속해서 「통합이대위 보고서」는 교회론에 대해서 문제점을 제시한다.
변승우씨는 기성교회를 비판하고 그 반사적 이득을 통해 자신의 교회를 성장시킨다. 그는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이란 저서를 시작으로 「진짜 구원받은 사람도 진짜 버림받을 수 있다」 「하늘에서 온 이메일」 등 많은 저서에서 기성교회를 비판하고 역으로 자신의 교회는 온전한 교회임을 암시한다.
통합이대위는 큰믿음교회가 ‘기성교회를 비판하고 반사적 이득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킨다’고 말하는데, 먼저 성경에서는 비판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성경은 비판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고 하나는 금지하고 있고 하나는 권장하고 있다.
첫 번째, 정죄를 위한 비판이다. 이것은 사단이 하는 행위로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동기가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두 번째, 그 사람이나 교회의 현재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문제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결국 그것을 통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비판이 있다. 이것은 세례요한과 예수님도 하셨던 것이고 사도들도 했던 행동이다. 당연히 후자의 것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자연인(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성도(거듭난 형제)들을 판단(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비판)하라고 명령한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고린도전서 5:8~13)
심지어는 내쫓으라고까지 명령한다.
현재 한국 교회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옥한흠 목사의 ‘2007년 평양대부흥 설교’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부록에 설교 내용 일부 첨부) 교회의 열매가 좋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도 기독교를 개독교라 비웃으며 교회를 비판하고 있고 성도 수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 자녀를 정말 사랑하면 잘못 행할 때 책망하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의 편지내용)과 같이 책망의 필요성이 있을 때 성령의 감동에 따라 책망하고 지적하는 것은 오히려 필요한 것이다. 또한 변승우 목사는 성경대로 자연인들을 대상으로 책망의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된 성도들과 같은 부르심을 받았지만 바르게 가고 있지 않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했던 것과 같이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성도들끼리도 서로 권면하고 책망하라고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사역자들 사이에 책망도 동기가 바르다면 잘못된 것이 아니며 성도들 사이의 책망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갈라디아서 2: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에베소서 5:11)
심지어는 거듭나지 않은 자들에게도 회개를 하게 하기 위한 책망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으로서 사단의 자식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고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다. 이런 자들에게는 세례요한과 예수님도 강하게 비판하셨다. 당연히 이것은 이 시대에도 필요한 것이다. 더구나 통합이대위처럼 거짓과 왜곡으로 멀쩡한 교회를 이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비판보다 7배는 더 큰 영적인 살인죄가 아닌가?
계속해서 보자.
변승우씨는 ‘크리스천이 지옥에 가며,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나아가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단 사냥꾼’, ‘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 ‘바리새파 사람들’ 심지어 ‘영적 기생충’이라고 공격한다.
통합이대위는 변승우 목사가 ‘크리스천이 지옥에 가고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을 받는다.’고 주장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문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후 문맥과 말의 의도를 완전히 무시하고 변승우 목사를 상식도 없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 통합이대위가 한 부분만을 뽑아서 쓴 말이다. 또한 통합이대위는 강한 단어들을 사용한 것을 언급함으로써 변승우 목사가 굉장히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듯한 뉘앙스를 주고자 한다. 그러나 책망을 할 때는 듣는 이의 마음에 효과적인 충격을 주어 회개하게 하기 위해 강한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지금도 그렇게 한다. 그리고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그들의 현재 하는 행동과 마음이 사탄과 같았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표현하셨다.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담과 평토장한 무덤 등등. 마치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었을 때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하신 것처럼 말이다(막 8:33). 결국, 그런 표현이 상대의 실제 영적 상태와 동일하다면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는가?
예수님은 예수님과 훗날에는 바울을 이단으로 매도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뱀들과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칭했다. 그런데 오늘날 거짓과 음해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직업적인 이단사냥꾼들에게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그들의 거짓됨과 교만 그리고 악독함을 생각할 때 그것은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또한 통합이대위는 문맥을 통해서 변승우 목사의 글을 읽고 이해하거나 변승우 목사의 설교의 흐름을 통해서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단들처럼 몇몇 문장들만 끄집어내서 짜 맞추어 그것을 자신의 상황에 맞게 끼워 맞추는 식으로 하여 문제 삼고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이단들이 이단의 교리를 만들 때 쓰는 방법이다. 그런데 정직하고 또한 철저하면서도 신중하게 이단을 분별해야 할 단체(통합이대위)가 이런 방법으로 상식이하의 글을 쓰다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실제로 변승우 목사는 위의 내용을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참된 믿음을 가져야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그 믿음을 버리면 버림받을 수 있다는 맥락에서 가르친다. 아래 변승우 목사의 저서가 그 예이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 13:5)
여기서 바울은 ‘너희가 믿음이 있는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즉 바울의 질문은 ‘우리가 계속 믿음에 거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우리가 계속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 내가 믿음이 있었더라도 지금 내게 믿음이 없다면 즉 내가 믿음에 거하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버리운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뒤로 물러서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변승우 목사는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증거로써 여러 성경구절들을 제시하고 있다(히 6:4~6, 고전 9:27, 마 7:21, 약 2:14, 빌 2:12, 갈 5:19~21, 겔 18:24, 롬 11:17~22, 마 3:7~10 등등).
또한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거듭남을 경험한 크리스천이라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했고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교리는 감리교와 성결교 그리고 순복음교회에서 인정하고 있는 교리이다. 심지어 변승우 목사 저서에 추천서를 썼던 통합교단의 나겸일 목사도 인정하고 있는 교리이다. 그리고 변승우 목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수많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주장을 인용하며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들이 새로운 것도 아니며 이미 역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왔던 내용임을 강조한다. 그런데도 어이없게 그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이유로 이단시하려고 한다면 감리교와 성결교 전체를 이단시해야 하고 존 웨슬리, 윌리암 씨무어, 디 엘 무디, 조용기 목사, 케네스 해긴 등을 모두 이단이라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통합교단 내부의 상당수의 목사들도 이단이 될 것이다. 그들 중에도 적지 않은 수가 같은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왜 변승우 목사만 그 교리 때문에 이단이 되어야 하는가? 참고로, 어이없게도 백석교단 이대위는 변승우 목사를 조사하면서 ‘존 웨슬리도 이단’이라고 했다고 한다. 당신도 존 웨슬리가 이단이라는데 동의하는가?
4
자신을 우상화 한다구요?
그리고 통합이대위는, ‘변승우 목사가 자기 자신은 존 웨슬레, 조나단 에드워드, 찰스 피니, 등 부흥을 이끈 교회의 위대한 목회자들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다(「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p103-111).’고 주장한다. 그 증거자료로 이런 글을 인용했다.
저는 찰스 피니의 이러한 고백을 읽으면서 감동으로 몸을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임할 때의 저의 체험과 너무나도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피니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p107)
하지만 자기를 하나님이나 재림주라고 주장한 것도 아니고 이것은 이단성이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통합이대위에서 인용한 글의 아래의 내용까지 조금 더 인용하면 변승우 목사가 어떤 의도로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 있다(여기서 통합이대위의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저는 찰스 피니의 이러한 고백을 읽으면서 감동으로 몸을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임할 때의 저의 체험과 너무나도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피니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제껏 구원론에 대한 참 진리를 알기 위해 책을 읽었지만 실망만 하였다. 대부분의 설교자들과 저자들은 내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하여 해답을 주기는커녕 그것을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여기 내가 하나님께 말씀을 받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이 있구나. 더구나 그는 한 시대에 대표적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인물로 나와 비교할 수도 없는 영적 고지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는 내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틀림없이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기독교서점에 가서 제목도 보지 않고 찰스 피니의 책을 닥치는 대로 사서 읽었습니다. 나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나는 찰스 피니의 책을 읽으면서 궁금해 하던 것에 대한 만족할만한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눈이 밝아지고 이해력이 증진되었고, 성경의 의미들을 보다 명백하게 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할 수만 있으면 찰스 피니의 모든 책을 읽으라고 여러분께 권하고 싶습니다.”
보면 알겠지만 변승우 목사는, 찰스 피니를 ‘자신과 비교할 수도 없는 영적 고지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하고 있다. 통합이대위에서 인용한 글 바로 뒤에 이런 고백을 하고 있음에도 어떻게 이 글을 일부만 인용하며 위와 같이 통합이대위가 주장할 수 있는지 황당할 따름이다. 또한 본인도 변승우 목사의 설교 중에 자주 들었다. 변승우 목사가 ‘찰스 피니를 따라가길 원하지만 너무 부족해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통합이대위의 주장은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매우 양심불량이고 심히 악한 것이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변승우 목사를 매도하기 위해 건성으로 조사했다는 증거이다.
5
계시론과 성경론에 대한 무지
계속하겠다.
통합이대위는 계시론과 성경론에 대한 문제점을 제시한다.
변승우씨는 자신의 저서 여러 곳에서 성령이 직접 자신에게 책을 저술하라든지 또 어떠어떠한 내용으로 설교하라고 지시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듣지 않으면 설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 설교의 좌우명입니다’(「지혜와 계시의 영」, p9). 이러한 그의 주장은 세 가지 효과를 겨냥한 것이다.
첫째, 자신의 저서나 설교에 대해 초월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효과이다. 즉 자신의 책을 마치 직접 계시를 받아 저술한 것처럼 오도하기 위함이다(가령, 그는 「명목상의 교인인가? 미성숙한 신자인가?」 p11에서도 ‘저는 성령께서 저에게 설교하라고 레마로 주시는 말씀들을 설교합니다. 제가 설교의 주제나 내용을 자의로 선택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또한 외국의 사역자들의 추천사를 책 앞에 배치시키는데, 그 추천사에는 거의 예외 없이 변승우씨가 받은 계시가 성령의 계시라고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둘째, 그의 직접 계시성은 기성 교회에 대한 강한 비판과 자기 교회를 특수화하는 효과가 있다. 변 씨가 성령의 계시를 받았음을 선전하는 것은 기성교회는 성령의 계시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기성교회는 잘못 내지 무능하다는 암시를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주고 있다.
셋째, 변 씨의 직접계시 주장은 결과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자신이 받은 직접 계시나 꿈을 위해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재편하여 자신의 설교나 성경해석에 적용함으로 성경을 자신의 계시나 꿈을 제시하고 해석하기 위한 보조물로 전락시킨다. 또한 그는 자신이 받은 직접 계시를 성경과 동일하거나 혹은 성경의 권위 위에 둔다. 나아가 변 씨는 자신이 사도들과 똑같은 영감을 받았으며 따라서 자신의 성경해석이나 설교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는 식으로 암시한다. 심지어 변 씨는 자신이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다림줄’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그의 저서「다림줄」을 보라).
변 씨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 충분한 계시 내용을 담고 있어 성경 이외 더 이상 직접적인 계시는 없다는 우리 교단의 교리에 반하는 것임은<본 교단 「헌법」 제 1편, 교리의 4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제 1장 ‘성경에 관하여’를 보라. 1조’…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해 주시던 이전 방법은 현재 중지되어 버렸다(히 1:1-2).’ 또 6조. ‘…이 성경에 대하여 어느 때를 막론하고 성령의 새로운 계시로서나, 인간의 전통으로서도 더 첨가할 수 없다(딤후 3:15-17, 갈 1:8-9, 살후 2:2).’>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처럼 변 씨의 성경관과 계시관은, 비 성경적임은 물론 본 교단의 계시관과 성경관과 배치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킨다.
인용하다보니 통합이대위에서 계시론과 성경론에 있어서 문제점이라고 여긴 내용의 전문을 인용하게 되었다. 길지만 자를 수가 없었다. 하나씩 알아보자.
먼저, ‘변승우 목사가 성령께서 자신에게 설교나 책의 저술을 하라고 지시한다고 말한 것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변승우씨는 자신의 저서 여러 곳에서 성령이 직접 자신에게 책을 저술하라든지 또 어떠어떠한 내용으로 설교하라고 지시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듣지 않으면 설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 설교의 좌우명입니다’(「지혜와 계시의 영」 p.9)
한 마디로 어이가 없다. 이것을 문제 삼다니 놀라울 뿐이다. 장로교의 여러 신학교에서 설교학의 교재 내지는 필수적인 참고 도서로 삼고 있는 로이드 존즈의 「목사와 설교」라는 유명한 책이 있다. 그 책에 보면 변승우 목사의 경험과 같은 경험을 로이드 존즈도 여러 번 했으며 그것을 설교자들에게 중요한 요소로 가르치고 있다.
“설교자는 본문을 찾기 위해 성경을 읽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아까와 같이 성경을 읽을 때- 모든 신자가 그래야 함- 그가 읽고 있는 말씀이 부딪쳐 오고 그를 때리고 그에게 말하는 것을 갑자기 발견하게 하고 그에게 하나의 설교를 제시해 주는 것을 알게 됩니다.”
“19세기에 가장 위대했던 설교자들 중 한 사람인 스펄전은 이 문제에 있어서 아주 강한 노선을 취했습니다… 본문들은 설교자에게 주어지게 되어있다고 주장하고, 자기는 이 일로 주님을 찾으며 인도해 주실 것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집하기를 설교자는 결정해서는 안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도해야 하며, 이 일에 자신을 굴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는 어느 특정 부분이나 진술에 인도함을 받아서 그것을 설교형태로 발전시킨다는 것입니다. 그 견해는 스펄전과 다른 많은 이들이 주장한 것입니다.”
“나는 성령께서 한때는 따로 떨어진 본문에 입각해 설교하게도 하시고 어떤 경우에는 연속된 설교를 하게도 하신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나는 내 체험에서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었음을 겸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영적 침체」 (Spiritual Depression)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내 설교집 한 권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 연속설교를 하게 되었는지를 들어보시면 이 일을 예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나는 실제로 에베소서를 가지고 연속설교를 시작해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인도함을 받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내 자신의 결정이었습니다. - 그것이야 어쨌든, 어느 날 아침, 옷을 차려입고 있는데 갑자기 무엇이 짓누르듯이 하나님의 성령이 나에게 ‘영적 침체’에 대해 연속된 설교를 하라고 명하는 것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정말 글자 그대로 내가 옷을 입고 있는 동안 내 심중에 설교순서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나는 재빨리 메모 용지에다 여러 개의 본문과 그런 식으로 떠오른 순서를 적어 놓았습니다. ‘영적 침체’에 대해서 일련의 설교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이러한 일도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처럼 왔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렇게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크게 집중시킵니다. 그것은 다른 것과는 달리 매우 놀랍고 영광스러운 체험입니다. 그리고 나는 감히 그런 식으로 내게 오는 아주 뚜렷한 주입이라고 느끼는 것을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 연속설교가 성령님 자신에 의해 지시된 것으로 확신합니다.”
“나는 설교본문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는 나쁜 버릇에 대해 경고했고, 우리 자신의 선과 덕성 함양을 위해서 늘 성경을 읽어야 함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떤 말씀이 여러분에게 부딪쳐 오게 될 것을 지적했습니다. 누구든지 그 실제를 따라가는 자는 결코 설교 본문이 모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요, 자기의 신앙을 위해서 성경을 읽는 동안에 준비한 설교 안들을 한 묶음 비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덧붙여서 한 편의 설교가 사실상 주어진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설교들이 여러분에게 직접 왔기에 여러분은 그 설교들에 관해 조금만 일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초기에는 자비하시고 매우 은혜로우셔서 설교분문을 주시고 설교내용을 주실 것이고 때로는 완전한 설교내용까지 주실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훌륭한 처방 중 하나는 몇 년 전 「창조사역」(The Act of Creation)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아서 케슬러(Arthur Koestler)의 책입니다. 케슬러는 물론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분야에서의 위대한 과학적, 시적 발견들이 이루어지는 방법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대요점 중 하나는 가장 주목할 만한 과학적 발견들은 순전한 논리적 사고과정의 결과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과정의 일익을 담당하나 보다 큰 것들이 거의 갑작스레 예기치 않게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과학자가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가 급기야는 궁극적인 지점에 이르는 것이 아닌 것을 보여줍니다. 결정적인 흔히, 일종의 계시가 번뜩이는 가운데서 왔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체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내가 한 본문과 씨름하느라고 오전 시간을 다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어떻게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내 아내가 점심을 먹으라고 했을 때까지 계속 씨름했습니다. 그 당시-지금은 꼭 오래 전이지만-크리스토퍼 스톤(Christopher Stone)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매주 새 레코드를 소개하는 라디오프로를 맡고 있었습니다. 점심 먹을 때 우린 그 프로그램을 즐겨들었습니다. 그때도 그 프로그램을 듣기 시작했지요. 내게는 전혀 흥미도 없는 두세 곡을 들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말하기를 이제 유명한 두 가수가 아주 잘 아는 이중창곡을 들려주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둘 중의 한 사람이 베냐미노 기글리(Beniamino Gigli)라고 믿습니다. 나는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훌륭한 두 목소리가 아주 감동적인 음악을 노래하는 것을 들으면서 즐거웠을 뿐 아니라 깊이 감동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긴 시간 동안 내내 씨름하고 있었던 그 문제가 완전히 풀린 것입니다. 그 모든 것, 순서, 대지, 틀(shape) 등 모든 것이 단번에 생각난 것입니다. 그 음악이 끝나자마자 내 서재로 달려가서 할 수 있는 한 빨리 그것을 종이 위에다 옮겨 놓았습니다.”
“모든 설교자의 체험에서 분명한 일, 즉 어떤 메시지는 설교자에게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그 점은 언급한 바 있습니다. 어떤 설교 내용들은 비상한 명확성을 가지고 설교자에게 임합니다. 설교자는 요점들을 표현할 순서까지 부여받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설교자는 이 메시지가 성령에 의해 어떤 이의 회개나 어떤 이들에 대한 특별한 축복의 수단으로 쓰여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변승우 목사의 주장은 로이드 존즈가 설명한 것과 같은 경험을 가리킨 것이다. 또한 조용기 목사가 말한 것과 같은 경험을 가리킨 것이다.
“많은 분들이 목사님께서 그렇게 바쁜 사역 가운데에서도 메시지를 전하시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설교를 준비하실까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메시지를 준비하는 목사님만의 어떤 방법이 있으십니까?
조용기 목사: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24시간 계속해서 메시지를 위해서 기도하고 살아갑니다. 메시지를 남의 책에서 읽는다든지 남이 설교한 것을 하면 힘이 없습니다. 구성은 잘하고 지적으로는 흠이 없을지 모르지만 내가 마음에 받지 않은 메시지는 그 메시지에 따르는 힘이 없습니다. 앵무새처럼 반복은 할 수 있지만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께 직접 메시지를 받아, 이것이야 말로 이 때 이 장소에 이 사람들에게 준 메시지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서 나갑니다.
많은 사람이 저에게 집회 강사로, 부흥 강사로 미리 메시지를 적어달라고 한 달 전에 열흘 전에 요청해 오는데 저는 메시지를 적어주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가서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미 메시지를 적어놓고 나면 성령이 주시는 살아있는 말씀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힘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언제나 현장에 가서 기도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메시지를 마음속에 받아서 설교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늘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메시지를 주십니다. 저는 메신저이기 때문에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주인이 제게 말씀을 주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이 ‘메시지를 받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느냐?’라고 물으면 저는 40년이 걸렸다고 말합니다. 저는 목회를 시작한 그 날로부터 매일 하나님께 메시지를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그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이 메시지를 주실 때에는 걸어가다가 주실 때도 있고, 남의 설교를 듣다가 주시기도 하고, 성경 읽다가 자다가 메시지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포켓에 수첩과 연필을 들고 어느 순간 하나님의 영감이 오면 그것을 적습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그 때 잡아놓지 않고 놓쳐 버리면 나중에는 잡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고 나면 이제는 제가 신학적으로 배운 방법대로 서론, 본론, 결론 이런 구성으로 귀납법적으로나 혹은 연역법적으로나 성도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요리를 해서 설교를 합니다. 아무리 요리를 잘한다고 해도 메시지가 내용이 없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에 내용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용을 받고 난 다음에는 가장 쉬운 말로 가장 이해가 잘 되도록 설교를 해야 합니다.”
변승우 목사가 고백한 것은 정확히 이런 경험이다. 즉 환상이나 천사의 방문 혹은 다른 계시로 이런 설교를 하라 혹은 책을 쓰라고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계시적으로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주어질 때 설교를 준비하고 책을 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인가? 이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아니며 이단성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설교자로서 모범적인 것이며 바람직한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자 사역자로서 성령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설교나 책을 저술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는가? 오히려 성령 하나님의 인도도 없는데 자기 생각대로 설교하고 책을 저술하는 것이 더욱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통합이대위는 어이없게도 변승우 목사의 지극히 정상적인 이런 고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소설을 쓴다.
‘첫째, ‘초월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신이 말씀을 받아 그것을 기초로 설교를 준비해서 설교한다는 것이 왜 자신에게 초월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인가? 이것은 어째 성경 말씀과 달라 보인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베드로전서 4:11)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은혜로 설교한다고 말하지 않고 자기의 지혜와 지식으로 설교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더 교만한 것 아닌가? 실제로 변승우 목사는 자신은 공부를 잘 하지도 못했고 기억력도 없고 머리가 좋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자주 말한다. 그래서 배고픈 걸인처럼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더니 하나님께서 말씀의 은사를 주시고 성령께서 진리를 깨닫게 해주셔서 설교하고 책을 쓰는 게 가능하다며,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입버릇처럼 고백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자기를 낮추고 다른 부교역자와 성도들을 높인다. 변승우 목사는 자기가 받는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사용하여 자기에게 초월적인 권위를 부여하기는커녕 항상 자신을 낮춘다. 그리고 항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그래서 변 목사를 잘 아는 사람들이 가장 도전받는 부분이 바로 그의 겸손함이라는 것을 아는가?
두 번째로, 통합이대위는 ‘그의 직접 계시성은 기성 교회에 대한 강한 비판과 자기 교회를 특수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억지 주장을 한다.
앞서 비판과 책망의 차이를 충분히 언급했기에 비판에 대한 부분은 넘어가겠다. 자기 교회 특수화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 직접 계시 주장을 한다고 부분만 살펴보겠다. 이미 말했듯이 변승우 목사가 말하고 있는 계시는 환상이나 예언, 천사의 방문과 같은 극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경을 명확하게 깨닫는 것을 가리킨다. 즉 여러분이 동의하든 말든 어떤 이들이 레마라고 부르는 그런 현상을 지칭한다. 이것은 통합이대위가 인용한 글에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저는 성령께서 저에게 설교하라고 레마로 주시는 말씀들을 설교합니다. 제가 설교의 주제나 내용을 자의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변 목사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특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적인 것이다.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태복음 10:18-20)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마가복음 13:11)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11-12)
변승우 목사가 설교나 책을 쓰기 위해 말씀을 받는 방법은 이 구절들에 나타난 것과 같은 방식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책 「주의 음성을 네가 들으니」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제목 자체가 “네가 들으니”다. 자신뿐 아니라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거나 적거나 간에 이미 어느 정도는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위의 성경구절이 약속한 체험은 목회자뿐 아니라 평신도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보편적인 경험을 주장하는 것을 가지고 자기 교회를 특수화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이것은 통합이대위가 상대방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와 의도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꼬투리를 잡아 매도하려고 했다는 증거이다.
세 번째로, 더 기가 막힌 것은 통합이대위가 ‘직접계시의 주장이 성경과 동일하거나 성경의 권위 위에 두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악의적으로 음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거짓 증거이며 범죄행위이다. 변승우 목사는 절대 자신이나 타인이 받는 어떤 유형의 계시도 성경과 동등시 하거나 더구나 성경위에 올려놓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그 증거로, 변승우 목사가 기성 이대위에 한 답변이나 그가 쓴 책에 보면, 에베소서 3장 4-5절에 근거하여 ‘토대적인 사도’ 즉 교회의 기초가 되는 성경을 기록하는 일에 쓰임 받은 사도는 예수님과 12제자 그리고 바울 등 신약성경의 저자들뿐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에베소서 3:4-5)
그래서 그 후로는 토대적인 사도가 존재하지 아니하므로 항상 성경이 기준이 되어야 하며, 계시나 개인의 의견으로 성경에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빼면 이단이라고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모든 계시와 주장을 오직 성경을 통해 분별하고 성경적인 것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항상 힘주어 역설한다. 그리고 이 원리를 실제로 자신의 목회에 철저하게 적용하고 있다. 그래서 큰믿음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고 많은 성도들이 요엘이 예언한 꿈과 환상과 예언을 체험하지만 이렇다 할 비성경적인 주장이 단 한 가지도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변 목사를 매도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직업적인 이단사냥꾼들이 통합이대위처럼 이런 새빨간 거짓말이나 지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정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역겨울 정도로 악의적인 음해이며 사악한 거짓말이다.
6
구원론에 대한 음해
계속해서 제일 중요한 구원론에 대해서 통합이대위가 문제 삼은 부분이다. 아래가 그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변 씨의 기성교회 비판과 자신의 차별화 또는 우상화는 그의 구원론에서도 잘 나타난다. 「지옥에 가는 크리스찬들」, 「진짜 구원받은 사람도 진짜 버림받을 수 있다」란 그의 핵심적인 저서들을 살펴볼 때, 그의 모순점들이 잘 나타난다.
통합이대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성교회의 비판이라는 한 가지 이유를 문제로 교회론과 계시론과 성경론과 구원론을 문제 삼는다. 비판과 책망을 분별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한 개인의 성격적인 부족일 수도 있는, 그래서 개혁과 회복을 목적으로 바른 소리를 다소 비판적으로 한다고 하여 이단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통합이대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한 가지 이유를 중심으로 큰믿음교회와 변승우 목사가 이단이라는 것이다.
마땅히 이단시 되어야 할 결정적인 내용은 완전히 다른 복음을 전한다든지 아니면 자신을 재림예수라고 하거나 혹은 그와 동등하게 여긴다고 보일 때 등이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요한이서 1:7)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 1:8)
그러나 그런 문제들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통합이대위의 보고서 내용이 날조된 것임이 백일하에 분명히 드러날 뿐이다.
계속해서 통합이대위에서 ‘큰믿음교회의 구원론에 모순’이라고 말하는 증거자료들을 하나씩 분석해보겠다.
그래서 ‘예수 믿고’ 지옥 가지 말고 ‘제대로 예수 믿고’ 꼭 천국에 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옥에 가는 크리스찬들」 p.9).
여러분은 이 글이 정말 모순으로 보이는가? 그렇다면 다음 성경말씀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17~26)
이 말씀은 명백하게 죽은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통합이대위가 인용한 변승우 목사의 글의 첫 부분인 ‘예수 믿고 지옥 가지 말고’는 이런 거짓 믿음을 일컬어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순되는 부분도 없고 전혀 잘못된 부분이 없다.
그 다음으로 “예수를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본래 이단사설입니다.” 이 말을 변승우 목사의 설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2006.5.26)에서 인용했다. 이것은 마틴 로이드 존즈의 로마서 강해 시리즈에도 3번 이상 나오는 내용이다.
“여러분들은 소위 ‘산데마니안주의’라는 이단이 18세기 교회를 괴롭혔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산데마니안주의’는 무엇입니까? ‘예수는 주님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떠들어대는 교훈입니다. 그 교훈은 모든 감정과 확신을 배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것이고 이단입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일종의 ‘신앙주의’가 아닙니다. 신앙주의가 흔히 교회를 황폐화시키곤 했습니다. 이 점은 우리 마음속에 언제나 고수하고 있어야 하는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제가 방금 인용한 구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70여 년 전에 교회 안에 산데만주의(Sandemanism)라 불리는 무서운 이단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것에 대해서 많이 듣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그저 자기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느 것을 느끼든지 간에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의 삶이 어떠하든지 그것도 문제가 아니다. 그가 일단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만’ 하면 된다.’ -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것이 그들이 들고 나오는 성경 본문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신앙주의’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거니와 그 이단이 교회를 무섭게 황폐화시켰습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성격에 관한 이 거짓된 개념이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을 자주 괴롭혔습니다. 18세기에 매우 주목할 만한 한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가르침은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것인데, 존 그래스(John Gras)라고 불리는 유능한 사람이 먼저 가르쳤습니다. 그 사람의 딸이 로버트 산데만(Robert Sandeman)이라 불리는 남자와 결혼하였습니다. 산데만이라는 사람이 잉글랜드에 와서 이 교훈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교훈이 ‘산데마니아니즘’(Sandernanianism)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그 가르침을 제안한 자들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라는 말씀에 큰 강조점을 둡니다. 아무런 느낌을 갖지 않거나 자신 속에 어떠한 변화도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그 가르침을 지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렇다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것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운동이 되어서 무서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 교훈이 스코틀랜드 교회에 ‘온건주의’(Moderatism)로 알려진 조건을 불러왔습니다. 그들이 모두 다 그래스의 추종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는 않으면서도 그의 교훈을 다소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전적으로 생명력을 잃게 되었으며 한동안 그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로이드 존즈 역시 이런 가르침을 “산데만주의”라 부르고 이단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변승우 목사의 말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파적인 신앙주의”를 경고한 말일뿐이다. 그런데 이게 왜 이상한가? 이게 왜 이단인가?
계속해서 통합이대위에서 인용한 글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죽기 직전 하나님이 억지로라도 회개시켜서 천국에 데리고 간다’는 맹신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이중으로 속는 것입니다. (변승우. 「주여」, pp152-156).
하나님이 사람을 억지로 회개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찰스 스펄전의 「칼빈의 5대 교리 설교」라는 책에도 나오는 말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웨슬리가 주장했던 견인의 교리와 일치한다. 성경에는 웨슬리가 주장할 때 사용했던 증거들이 많이 있고(히 6:4~6, 고전 9:27, 마 7:21, 약 2:14, 빌 2:12, 갈 5:19~21, 겔 18:24, 롬 11:17~22, 마 3:7~10 등등) 이런 구절들을 근거로 감리교와 성결교가 교리를 세우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이단을 삼을 만한 잘못된 교리가 아니다.
아래는 기독교성결교회 헌법 유권해석집에서 견인의 교리에 대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 기독교대한성결교회 <헌법 유권해석집>에서 발췌 -
1. 헌법 제16조 자유의지에 대하여, ‘일차의 은혜를 받은 자라도 타락할 수 있은즉’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1987/p115-116, 1988/p131-132)
가. 타락이란 구원의 상실을 뜻하는 것인지요?
해석 : 그렇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므로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죄의 삯인 사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타락은 곧 구원의 상실을 뜻합니다.
나. 타락과 구원을 별개로 보는지요?
해석 :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회개)하면 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요일 1:9, 2:1-2) 타락한 자도 회개하면 언제나 용서받고 사망의 죄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헌법 제19조 ‘칭의 후 범죄’ 참조).
다. 아니면 타락과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인지요?
해석 :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타락이 구원의 상실을 의미할 때는 타락한 후 돌아서지 않고 계속 범죄하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마음이 강퍅해져서 신앙을 완전히 져버린 경우입니다. 이 때에 타락한 자란 바로 배교자를 의미합니다(히브리서 6:6).
라.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은 무슨 죄를 범하고 타락해도 구원을 결코 잃지 않는지요?
해석 : 잃게 됩니다. 한번 구원받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져버리고 범죄하고 타락하면, 다시 회개하고 용서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통합이대위가 인용한 글이다.
‘구약시대 때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았는데,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구원 못 받았는데, 신약시대 때는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이렇게 설교하는 목사들이 많았습니다. 무지하게 무식한 이야기입니다. (변승우. 설교,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2009. 5월 14일 설교)
참으로 사람들이 오해하기 딱 좋게 기술적으로 부분만 인용했다. 이 말은 구약처럼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구약이나 신약이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설명한 설교이다. 그리고 참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설교한 것이다. 그 증거로 그 설교의 문제의 부분의 전후에 나오는 설명을 받아서 써보겠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거는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그 얘기지요. 그죠? 구약시대에도 마찬가지예요. 저도 어렸을 때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런 얘기 많이 들었는데, 구약시대 때에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받았는데,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구원 못 받았는데, 신약시대 때에는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이렇게 설교하는 목사님들이 많았어요. 그거 무지하게 무식한 얘깁니다.
구약시대 때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받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 때도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구약의 인물이잖아요. 또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라합도 구약의 인물이잖아요. 구약시대 때에는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 예표 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입니다. 신약시대 때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고, 구약시대 때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 거지, 뭐 구약시대 때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고 신약시대 때는 이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니 얼마나 간편하고 좋아졌나? 감사하다. 이렇게 설교하는 목사님들이 무척 많았어요. 이거는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그래요. 구약시대도 믿음으로 구원받고 신약시대도 믿음으로 구원받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명백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런 설교를 기술적으로 편집하여 율법주의 이단처럼 보이게 하다니… 이것이 한 교단의 이대위가 할 일인가? 이것이 목사의 양심으로 할 일인가? 어쩌면 이렇게 거짓되고 악한가? 참으로 탄식이 절로 나온다!
7
목사들의 90%가 거짓 선지자라는
거짓 주장에 대하여
계속해서 통합이대위가 인용한 글이다.
신약시대에도 90% 이상이 거짓선지자들은 목사들입니다.
이 말을 왜 인용했는지 의도가 훤히 보인다. 이것은 변승우 목사가 대관식을 했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퍼트린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카페의 이인규 권사와 그 외 권성수 교수 그리고 기성 이대위가 이를 왜곡하고 확대해석해서 거짓 주장한대로 “목사들의 90%가 거짓 선지자”라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보이게 하여 매도하기 위함이다. 한마디로 비열한 꼼수다. 기성 이대위의 악의적인 질문에 변승우 목사는 이렇게 대답한 일이 있다.
“질문 : 현대 한국 교회의 목회자 90%가 거짓 목사라는 말을 하셨는데 변 목사님도 정통 한국교회의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으셨으니 자신도 거짓 목사라고 스스로 자인한 셈이 됩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 이것은 오해입니다.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양심에 화인 맞은 이단사냥꾼들이 꾸며내어 퍼트린 말을 그대로 믿고 질문을 하셨군요. 유감입니다. 전에 이단사냥꾼들의 하수인 이인규 권사가 저에 대한 터무니없는 상식이하의 음해성 글을 인터넷에 올려 그 글에 답변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답변한 것에서 이와 관련된 것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인용 : 신약시대에도 90% 이상의 거짓 선지자들은 목사들이다.(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2006. 5.26 설교)
이 권사 왈 : 배타적 교회론이다. 목사가 거짓 선지자라고 한다.
저의 반론: 나는 권성수 교수가 ‘변 목사는 목사의 90%가 거짓 선지자라 했으므로 이단이다.’라고 주장해서 의아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목사들의 90%가 거짓 선지자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래서 교회 직원을 시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라는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보라고 했지만 그런 말이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이제야 왜 그런 억지 주장이 떠도는지 이해가 간다.
권 교수를 포함해서, 그래서 내가 헬라어나 히브리어 그만 배우고 한글부터 배우라고 하는 것이다. 이게 목사의 90%가 거짓 선지자라는 말인가? 거짓 선지자들의 90% 이상이 목사들 중에 있다는 말이지! 그 말의 차이를 모르겠는가? 과거 거짓 선지자들이 어디에 있었는가? 당연히 유대교의 선지자들 중에 있었다. 거의 90-100%의 거짓 선지자들이 유대교의 선지자들 중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이단 단체에도 있지만 대부분 기독교의 목사들 안에 있다.>
그리고, 그때 제가 사용한 ‘거짓 선지자’라는 표현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거짓 선지자들이 아닙니다. 존 웨슬리와 로이드 존즈가 산상수훈을 강해하면서 설교에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자들을 그 자신은 구원받았고 진실한 목회자일지라도 메시지에 있어서 거짓 선지자라고 말했는데, 그런 의미로 거짓 선지자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즉 옥한흠 목사님이 상암경기장에서 “한국 교회의 지도자 여러분! 복음을 변질시켰다는 주님의 질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몇이나 됩니까? ‘입만 살았고 행위가 죽어버린 교회를 만든 책임은 너에게 있어.’ 하고 따지신다면 ‘나는 아니오.’ 하고 발을 뺄 수 있는 목회자가 몇 사람이나 됩니까?”라고 담대히 지적한 것처럼 복음진리를 희석시키고 타협한 설교자들이 많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요점을 말하면, 이 말은 과거 구약에서처럼 거짓 선지자의 90%가 목사들 안에 있다는 의미로, 절대로 목사의 90%가 거짓 선지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단시 할 수 있는 발언이 아니다.
8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음해에 대하여
계속해서 통합이대위가 인용한 글이다.
변 씨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주장과(엡 2:8) 정통 교회의 주장과 달리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한다.
‘보통 사람들은 십자가 외에 다른 소리를 하면 모두 잘못된 것인 양 얘기합니다. 구원에 대해서 말할 때 오직 십자가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편협하고 비성경적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변승우, 「주 달려 죽은 십자가」, pp. 54-55).
이것 역시 기술적으로 아주 부정직하고 야비하게 핵심이 되는 내용을 제거하고 짜집기하여 인용한 것이다. 이것만 읽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십자가만으로는 구원받기에 부족하고 이들이 의도한 대로 선행이나 율법의 행위가 더해져야 구원받는다고 변승우 목사가 주장한다고 오해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그들이 악의적으로 생략한 부분에 밑줄을 쳐서 원래대로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보통 사람들은 이 구절의 전반부인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는 부분만 인용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외에 다른 소리를 하면 모두 잘못된 것인양 얘기합니다. 구원에 대해서 말할 때 오직 십자가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에 대해서 말할 때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 말해야지 죄를 끊어버리는 회개를 말하거나,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말하거나,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하거나 이런 것은 모두 복음진리에서 벗어난 것이며 잘못된 것인양 취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편협하고 비성경적인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
이처럼 변승우 목사의 의도는 십자가 외에 선행이나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십자가 공로로 구원을 받지만 구원파적인 신앙주의에 빠져선 안 된다는 것이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요구하신 제자의 대가를 지불하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눅 14:25-33). 그런 자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성경적인 당연한 주장이다. 그런데 악의적이고 기술적으로 짜집기하여 율법주의 이단으로 매도한 것이다.
도대체 통합이대위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들이 목사가 맞는가? 요즘 한국 사회 곳곳에서 꼼수와 불의가 판을 치는 마당에, 하나님의 공의로 본을 보여야 할 교단에서, 그것도 장자교단임을 자부하는 통합교단총회에서 이런 거짓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변승우 목사에 대한 이단결의를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 아니 믿고 싶지도 않다. 본인이 확신하건대 통합교단총회에 참석한 총회장을 비롯한 많은 목사들도 이들에게 농락을 당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통합교단총회는 하루속히 통합이대위의 악행을 밝혀내고,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는 것은 물론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 앞에 정중히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다.
계속해서 통합이대위가 인용한 글이다.
‘…마치 십자가를 신뢰하기만 하면 죄에서 돌아서는 회개나 행함이 따르는 참 믿음이나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로 지음 받는 거듭남이 없이도 죄 용서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양 가르치고, 자신들만이 정통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변승우, 「주 달려 죽은 십자가」, p59).
이렇게 변 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도 회개와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고 하며, 구원받은 사람도 헌신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 성령의 선물로 인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반대하고 행위와 공덕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다. 이러한 구원관은 성경적 구원관이나 우리 개혁교회의 구원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본 교단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위험한 구원론이다.
이 글을 읽어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 (ㅎㅎㅎ)
죄에서 돌아서는 회개나 행함이 따르는 참 믿음이나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는 거듭남이 없이도 죄 용서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양 가르치고 자신들만이 정통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변승우 「주 달려 죽은 십자가」, p.59)
이 부분을 왜 인용했을까? 오히려 본인이 궁금하다. 성경말씀대로 옳은 말 아닌가? 또한 통합이대위는, 원문에는 분명히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는 거듭남(엡 2:10)이 없이도 죄 용서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양 가르치고, …”처럼 분명히 삽입되어 있는 “엡 2:10”을 의도적으로 생략해서 변승우 목사를 행위구원 이단자로 몰아가려는 꼼수를 부렸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감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0)
통합이대위는 마지막 부분에 ‘본 교단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위험한 구원론이다.’라고 했는데 이런 내용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면, 통합교단은 도대체 어떤 구원론을 믿고 있는 것인가 ??????
그냥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귀신도 믿고 떤다는 그런 사변적인 믿음으로도 구원 받을 것이라고 믿고 그것이 바른 구원론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야고보가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인가? 예수님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통합이대위가 “율법의 행위” 혹은 “선행”과 칼빈주의자들인 청교도들이 그토록 외쳐온 “복음적인 순종”(참 믿음에 따르는)의 차이도 모르는 심각한 성경적인 무지에서 기인한 억지이다.
변승우 목사는 단 한 번도 선행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공로로 구원을 받되, 참 믿음을 가진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성경적이고 당연한 주장이 아닌가? 그런데 이토록 성경적인 주장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왜곡시켜서 한 목사와 교회를 난도질한다는 말인가?
통합이대위는 행함과 믿음에 대해서 변승우 목사가 쓴 책들을 주도면밀하게 조사해보고 이단판정을 내린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마녀사냥하듯이 한 사람의 목회자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내용들이 통합이대위가 분석해보았다는 책 목록에 있는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이라는 책에 나온다. 먼저, 로마서 4:1~3과 야고보서 2:21~24 본문을 비교하며 말하고 있는 부분을 인용하고자 한다.
<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로마서 4:1~3)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야고보서 2:21~24)
이 말씀을 얼핏 보면 서로 정면충돌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하고 있는 ‘믿음’이라는 단어와 ‘행위’와 ‘행함’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중략)
간단히 말해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행함의 원인이 되며 따라서 행함을 수반하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런 의미로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기독교의 복음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확신하는 것을 믿음이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믿음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아닙니다…(중략) 이것은 거짓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이런 거짓 믿음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행위’ 혹은 ‘행함’의 차이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기독교 중심」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사도 바울의 빈번한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 것처럼, 복음적 순종이 칭의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도 바울의 빈번한 주장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로 보건대 조나단 에드워드도 행위와 행함의 차이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행위와 행함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면 이 둘이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바울이 비판적으로 사용한 ‘행위’라는 단어는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 즉 ‘율법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롬 3:20). 그러므로 이것은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하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율법의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믿음의 행함’입니다. 전자는 구원받기 전에 나타나는 행위이고 후자는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행함이고, 전자는 실현 불가능하고 후자는 실현 가능하며, 전자는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있으나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와 같이 ‘행위’와 ‘행함’은 단어는 같으나 그 의미가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해하고 아브라함의 칭의에 대한 두 부분을 읽으면 충돌하는 것이 전혀 없고,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며, 상호 보완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로마서나 야고보서에 아브라함에 대해 언급된 내용이 하나에 의해서 다른 하나가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문자 그대로 온전히 진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단순히 상급이 아니라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태복음 7장 21절이나 야고보서 2장 14절 말씀을 액면 그대로의 의미로 붙잡아야 합니다. >
같은 책에서 하나만 더 인용하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무명의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을 통해 많이 알려졌습니다. 이 책은 구원론을 재조명하고 성경대로 돌려놓으려는 저의 작은 노력입니다.
현재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진리에 눈을 뜨고 회개하고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그동안 잘못 가르침 받은 것이 쌓인 결과 고정관념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서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대구에 있는 교회의 수련회 때 주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이 양약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첫째, 구원의 공로적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때문입니다. 다른 무엇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100% 믿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보혈은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만 효과가 있습니다.
구원의 공로는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전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렇다고 전 인류가 천국에 갑니까? 아닙니다. 회개하고 믿는 사람만 천국에 갑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공로적인 기초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지만 그 구원을 내 것으로 만드는 구원의 수단은 회개와 믿음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믿어도 그 공로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보혈 공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구원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회개하고 믿어야 합니다(막 1:15).
셋째, 이것이 중요한데 우리의 회개와 믿음이 참된 것이라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공로를 의지하고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위조지폐는 가치가 없는 것처럼 가짜 회개와 믿음 역시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중략)
저는 일부 사람들이 저의 설교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처럼 믿음에 행함을 더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만으로 충분하나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상 세 가지를 여러분이 꼭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저의 가르침으로 인해 걸려 넘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지극히 성경적인 메시지임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
다소 길지만 신뢰를 주기 위해 그리고 꼭 필요한 내용이기에 인용했다. 이것을 읽어보면 구원론에 전혀 문제가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이런 변승우 목사의 구원론에 대한 주장을 문제 삼는다면 그 사람이 오히려 위험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누군가를 가르칠 자격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 잘못된 구원론으로 교인들에게 거짓 믿음을 심어주고 거짓 평안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록에 구원론에 관한 김세윤 박사, 김경규 목사, 권연경 교수의 글을 첨부했다. 꼭 읽어보길 바란다.)
9
성령사역이 신비주의적인 사역이라니요?
마지막으로, 신비주의적인 사역의 문제점을 통합이대위는 제시한다.
변승우는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등의 저서와 설교들 통하여 천국을 갔다 온 입신의 경험, 개인의 미래에 대한 예언, 방언, 쓰러지는 현상 등 신비주의 형태의 목회를 활발히 펼치고 있다. 그의 저서에는 천국을 갔다 온 사람들의 간증이 많이 실려 있다. (가령, 「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p.223-289를 보라.). 그는 집회 시간에 방언을 훈련시키고 있으며, <큰믿음교회> 내에는 예언 사역 팀, 방언 통변 팀, 신유 축사 팀 등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목회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가 지난 2009년 7월 23일 150명의 죽은 자를 살렸다는 조세프 과지마의 집회광고 게재 문제로 국민일보, CBS를 비난한 것도 한 예이다.
이러한 변 씨의 신비주의적인 사역은 우리 주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16:4)고 하신 말씀과 배치된다. 또한 본 교단에서 엄히 경계하는 극단적인 신비주의 사역이라는 점에서 마땅히 배척되어야 한다.
입신에 대한 것은 초반부에 충분히 언급했기 때문에 넘어가겠다. 이미 말했듯이 큰믿음교회는 입신사역을 그만 둔지 여러 해 되었다. 그리고 방언을 훈련시킨다는 것도 사실무근이다. 어떻게 이런 무지한 주장을 하는가? 방언을 어떻게 훈련시키는가? 방언은 그냥 성령께로부터 받는 것이다.
또, 쓰러지는 현상(삼상 19:23-24, 대하 5:13-14, 단 10:9, 요 18:6, 행 9:3-4, 계 1:17)은 조나단 에드워드,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 찰스 피니, 제임스 맥그레디, 바톤 스톤, 마리아 우드워스 에터, 캐더린 쿨만, 라인하르트 본케, 까를로스 아나콘디아, 베니 힌… 등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의 사역에 일어난 현상이다. 이것은 부흥이 일어날 때 항상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로이드 존즈는 이 현상에 대해 이렇게 썼다.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때때로 사람들이 기절하거나 바닥에 넘어지는 것 같은 성령의 권능을 느끼는 것이 부흥의 규칙처럼 되어가고 있다. 때때로 웃음의 발작, 신체적 경련이 있기도 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입신과 같은 무의식의 상태가 되어 몇 시간이고 그 상태로 있기도 한다. 이런 현상들이 부흥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부흥이 있는 곳에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찰스 스펄전도 “하나님께서 한 지역에서 부흥을 일으키실 때, 사람들이 넘어지고 크게 소리 지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잘못된 현상이 아니다.
더구나 이런 현상이 변승우 목사의 사역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여러 해 전 통합교단의 민경설 목사가 양수리수양관에서 주최한 찰스 프란시스 헌터 부부 집회에 갔다 온 직후부터였다. 그러므로 이런 현상이 큰믿음교회에 나타나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통합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변승우 목사는 영성운동 안의 흔한 목사들처럼 쓰러지는 현상에 집착하고 있는 목사가 아니다. 이것은 그의 책에 잘 나타나 있다.
“미국에서 4,000명 이상 모이는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프레드 울프 목사님은 심지어 ‘하나님을 구하는 대신 표적(쓰러지는 현상을 지칭함)을 구하는 것은 우상숭배다.’라고 경계하기까지 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쓰러지는 현상을 유발시키고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이 자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인양 생각합니다. 그리고 굉장한 현상이 일어나면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직접 체험하고 그리고 다른 분들이 사역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알아낸 것은 현상에 초점을 맞추면 현상이 더 빈번하고 요란하게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속은 없어지고 공허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현상을 성령의 역사의 하나로 존중하고 수용하되 우리는 현상이 아니라 회개와 거룩과 말씀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요란한 현상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사람들이 변화되고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변 목사는 쓰러지는 현상을 남용하는 사역들을 보고 회의를 느껴 사람을 세워놓고 기도하지 않은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제4장 “쓰러지는 현상”을 읽어보라. 그러면 변승우 목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건전하고 균형 잡힌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조잡한 매도를 부끄럽게 여기게 될 것이다.
또한, 방언, 예언, 치유, 축사에 대해서는 정말 어이가 없다. 지금 현재 큰믿음교회에서는 암환자와 각종 중환자들이 매주 치유되고 있다. 그래서 불신자는 물론 불교신자와 스님까지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다.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 그것이 왜 극단적인 신비주의이며 이단인가?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예수님이나 바울도 그렇게 사역하지 않으셨는가? 예수님은 열두 제자와 70인 제자들에게 그런 능력을 나누어주셨고,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런 사역을 할뿐 아니라 고린도전서에서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자세히 소개했고, 그 은사를 어떻게 지혜롭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가르치지 않았는가?(고전 12-14장) 그리고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 14:5),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3), “그것이(성령의 은사들을 의미함)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살전 5:20),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안수하므로 성령의 은사를 불일듯 하게 하지 않았는가?(딤후 1:6). 그러므로 통합의 잣대에 의하면 바울도 극단적인 신비주의자요, 이단이다.
생각 좀 해보라. 통합은 맞고 바울은 틀렸는가? 통합의 교리가 성경 위에 있는가? 그리고 세상에 교단이 통합 하나인가? 순복음이나 구세군, 포스퀘어 등 성령운동을 하는 교단과 예수전도단처럼 성령의 역사가 강한 선교단체도 얼마든지 있다. 그들이 모두 신비주의자요 이단인가? 그리고 한국영성총연합회에 속해 있는 수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그들은 위에서 지적한 큰믿음교회에서 하는 모든 은사 사역을 다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교회들이 극단적인 신비주의에 빠진 것이며 이단인가? 그렇다면 왜 그들을 모두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는가? 왜 유독 큰믿음교회만 이단시하는가? 이단은 모두 반대하고 드러내야 하는 것이 이대위의 소명 아닌가? 그러므로 통합이대위는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억지를 그만 부려야 한다.
이제 두 번째 단락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것과 배치되기 때문에 큰믿음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사역은 잘못된 것이며 그래서 큰믿음교회는 배척되어야 한다.”는 내용에 대해서 분석해보겠다.
먼저, 통합이대위에서 인용한 구절의 문맥을 통해서 그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말 그대로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표적만을 구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이지 않을 것이란 뜻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표적을 전혀 보여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실로 엄청난 표적들을 보여주셨다. 오히려 다 기록할 수 없고 다 기록한다면 이 지구에 쌓아두지 못할 정도라고 요한은 말한다(요 20:30~31). 또한 믿는 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고 그보다 큰일도 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약속하셨다(막 16:17~18, 요 14:12). 그러므로 큰믿음교회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을 사모하고 그 은사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고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 그것은 성경이 명하고 있는 것이므로 신비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성경주의다. 오히려 그것을 극단주의 신비주의와 이단으로 매도하는 통합이대위가 비성경적임을 깨달아야 한다.
10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끝으로, 아래는 통합이대위가 결론 내린 부분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큰믿음교회> 변승우씨는 기성교회를 심하게 비판하여 교인들을 자신의 교회로 인도하는 부도덕한 목회행위, 직통계시에 근거하여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잘못된 성경관과 계시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정통 구원관과 다른 구원론, 입신, 예언, 방언 등 극단적인 신비주의 신앙형태 등을 갖고 있는 비성경적 기독교 이단이다. 따라서 본 교단 교인들은 변 씨의 집회에 참석을 엄히 금하는 것은 물론 그가 운영하는 인터넷 동영상이나 카페에 참여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방적이고 불의한 주장이나 결론과 달리 앞에서 설명했듯이 큰믿음교회는 비판의 문제, 직통계시에 대한 문제, 성경의 권위 훼손 문제, 구원관에 대한 문제, 은사에 대한 문제 어떤 것 하나 비성경적인 것이 없다. 오히려 통합이대위의 주장들이 매우 비양심적이고 비성경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본인이 이런 과정을 통해 결론내리는 것은, 큰믿음교회는 바른 교회일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진정한 모델교회이며 완전한 교회는 아닐지라도 성경적으로 바르게 나가기를 원하며 본을 보이고 있는 올바른 교회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나 사람을 볼 때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7:20).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태복음 7:16-18)
영분별은 무엇보다도 열매로 해야 한다. 좋은 나무는 절대로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는 절대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큰믿음교회 성도들은 놀랍게 변화되었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교회적으로 초교파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일들을 앞장서서 하고 있다. 그래서 그 교회에 오는 세계적인 강사들이 모두 큰믿음교회에 대해 감탄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이단이 맺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대로 나쁜 나무는 절대로 그런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 론
필자는, 본 교회는 아니지만 2007년 8월부터 지금까지 은혜를 사모하며 틈틈이 큰믿음교회의 예배, 집회, 예언전도학교, 중보기도학교, 치유전도성회 등에 참석하고, 인터넷 자료와 변승우 목사님의 저서와 추천도서 등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제가 체험한 바에 의하면, 큰믿음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변승우 목사님은 매우 순수하고, 선한 양심을 가졌으며, 거짓이 없는 겸손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과 전체 교회를 위한 사랑 때문에 타협하지 않고 담대하게 진리를 외치는 너무 귀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저는 그런 큰믿음교회의 성경적이고 은혜로운 사역들을 배워서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겸손히 섬기며 충성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거짓말과 왜곡된 자료로 이런 아름다운 교회가 불의하게 매도당하고 유린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괴이한 현실에 저는 말할 수 없는 의분을 느꼈고 그리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은 참고 있을 수가 없어서 결단하고 이 책을 썼습니다.
성경에 보면 놀랍게도, 예수님도 바울도 이단이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사도행전 24:5)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사도행전 24:14)
그런데 이것은 단지 성경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실을 보면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메시아를 그토록 기다리면서 성경을 연구하고 준비했던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그들 앞에 서 있는 예수님께 무엇이라 했나요?
“나사렛에서,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들은 왜 예수님에 관한 사실관계를 직접 확인하지 않았을까요?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하려면 들리는 거짓 소문이나 왜곡된 정보를 무턱대로 믿을 게 아니라 당사자에게 직접 확인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최소한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토록 성경을 연구하며 학수고대하던 메시아라는 예수를 만났다면 그 형색이 예상 밖이라도, 최소한 다음 사실은 확인해 봤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네가 메시아라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느냐?”,“네 아버지 요셉이 다윗의 후손이냐?” 라는 가장 기초적인 사실 확인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기심과 질투가 앞서서 사실을 확인하고 진리를 깨닫기보다는 들리는 소문, 즉 자기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었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우리 교회는, 우리 교단은, 아니 한국 교회는 “절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속해 있는 교단에서 결정했기 때문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옳습니까? 처음에 언급했듯이 “한국의 장자교단이라는 통합에 계신 훌륭하시고 저명하신 신학자들과 목사님들이 결정하셨기에 이유를 묻거나, 따져보거나,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이 무조건 따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총회에서 결정되면 다 옳은 것입니까? 무조건 공의로운 것입니까?
1938년 평양에서 개최된 제27회 장로회총회가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하였고 그런 불의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님에게 평양노회가 목사직 파면과 출교를 명한 것에 대해서, 그것이 의로운 결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빌라도 법정에서 거짓 증인을 내세우고 고발하던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충동으로 “바라바를 내놓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유대군중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만약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현명하신 종교지도자들께서 결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따랐을 뿐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무관합니다.”라고 항변한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통하겠습니까? 더구나 통합교단의 결정은 최근 한기총과 합동교단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최삼경 목사의 주도하에 벌어진 범죄행위입니다. 통합교단의 한 인사에 의하면 정족수도 채우지 않고 불법으로 처리해서 통합감사위로부터도 지적을 받은 바 있는 불의하기 짝이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그들은 변승우 목사님을 조사할 때 서면질의나 소환을 통한 조사는 물론 전화 한통 한 적이 없습니다. 중세암흑시대처럼 자신들이 검사가 되고 판사가 되어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외 몇몇 교단들의 흠집내기도 최삼경 목사를 포함한 이단사냥꾼 4인방이 배후에서 조종하여 거짓과 왜곡으로 만들어낸 작품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장단에 계속 놀아나면 되겠습니까?
성경진리나 신앙양심에 있어서 누구보다 바르고, 도덕적인 면에서도 가장 깨끗해야 할 한국 교회의 이대위위원들이, 성경에 무지하고 신앙양심도 없고 학력위조 등 불신자들조차 혐오하는 가증한 모습을 감춘 채, 성경적으로 바르게 사역하는 큰믿음교회를 억울하게 매도했고 한국 교계를 선동했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성도들과 가족들, 나아가서 큰믿음교회를 지지하고 배워나가기를 원하던 많은 타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과 가족들에게까지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신앙인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비열하고 파렴치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해당 교단은 물론 관련 단체에서 이 문제에 대한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서, 직업적인 이단사냥꾼들을 단죄하고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줄 뿐만이 아니라 교계에서 영원히 추방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큰믿음교회에 대한 오해를 푸십시오. 그리고 불의한 결정과 자료를 그대로 믿고 강대상에서 큰믿음교회가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변승우 목사님을 비난한 목사님들이 계시다면 신앙양심을 걸고 이를 바로 잡아 주십시오. 더 이상 하나님께 범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고 진리의 말씀가운데 바로서서, 예수님께만 초점을 맞추고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모두가 같이 참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부 록
여러분이 진실에 눈을 뜨는데 도움이 될까하여 몇 편의 글을 첨부합니다. 끝까지 열린 마음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1. 많은 신학자들이 변승우 목사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2. 예언이란 무엇인가(강금성 목사)
3. “큰믿음교회와 변 목사님의 이단성을 조사한다는 자체가 정말 잘못된 일이었습니다.”(한기총 이대위 임원)
4. 모 장로교단 총무이며 한장총 이대위 위원 목사님의 전화
5. “큰믿음교회는 이단이래”라는 거짓말에 속고 있는 분들에게
6. 큰믿음교회는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한기총 이대위 소위원회에서 여러 달 조사를 받은 결과 이단이 아님이 밝혀졌고, 한기총 이대위 전체모임에서 이것이 받아들여졌고, 한기총 임원회까지 통과되어 적법한 절차를 밟아 이단이 아님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기총에서 이단이 아니라는 공식문서를 떼어주었습니다.
1. 많은 신학자들이 변승우 목사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변승우 목사는 항상 자기가 전하는 복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성경적인 것이며 어거스틴, 조나단 에드워즈, 존 웨슬리, 찰스 피니, 찰스 스펄전, 존 라일, 에이든 토저 그리고 로이드 존즈와 존 스토트가 외치고 있는 바로 그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는 그 책들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현재 변승우 목사와 같은 구원관을 가지고 있는 목회자나 신학자는 어디에나 있다. 그 중 몇 가지 예를 들어보고자 한다.
먼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 김세윤 박사가 우리나라에서 연 사경회에 대한 기사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 김세윤 박사(미국 풀러신학대 신약학 교수·교회개혁실천연대 고문)는 한국교회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2011년 11월 7일 오후 7시 서울 명동 청어람에서 열린 교회개혁실천연대(개혁연대·공동대표 박종운·백종국·오세택·정은숙) 가을 사경회 자리였다. 3시간 동안 진행된 사경회에서 그는 많은 시간을 일어서서 강의했다. 부드러운 말투에는 한국교회 개혁을 위한 날카로운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한국교회 부패의 원인이 되어 버린 바울의 ‘칭의론’
494년 전 10월 31일 마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바울의 칭의론(롬 1:17)을 근거로 비판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바울의 칭의론, ‘이신칭의(以信稱義)’(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는 종교개혁 후 개신교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교리였다.
김세윤 박사에 따르면, 아이러니하게도 종교개혁의 근거가 되었던 바울의 칭의론이 한국교회가 부패하는 원인이 되었다. 한국교회가 바울의 칭의론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교인들에게 믿으면 무조건 구원받는다고 강조했고, 이는 행위 없는 믿음을 갖게 했다. 김 박사는 ‘기독교인들은 사기를 치거나, 탈세해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독교인들은 ‘개독’ 이니 ‘먹사’라는 소리를 들어도 싸다’고 했다.
김세윤 박사는 한국교회가 왜곡한 칭의론은 잘못된 구원론을 가져왔다고 했다. 김 박사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구원론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은 ‘사영리’다. 사영리를 보면 예수와 인격적인 만남이나 스스로 믿겠다는 의지가 없이 그리스도라고 말만 하면 그 순간 구원받는다고 하고 있다. 김 박사는 ‘사영리는 구원을 왜곡하고 있다. 이런 구원론을 가진 한국교회는 사실상 구원파와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김 박사는 ‘행위 없이 믿음으로 구원받거나, 한 번 받은 구원은 바뀌지 않는다고 하면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겠느냐’며 반문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교회가 교인들에게 요구하는 신앙생활은 주일성수, 헌금, 전도다. 이 세 가지를 강요하기 위해 ‘사후 상급’ 교리를 만들었다. 그는 ‘교인들에게 신앙생활을 잘하면 천국에서 큰 상을 받고, 잘못하면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강요했다. 이것은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파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다음으로, 기하성 총회 목회신학대학원 교수(조직신학)였던 김경규 목사(51)는 「너희가 그러고도 천국 갈 줄 아느냐」(라이프비전)라는 책을 출간했다. 다음은 그 책에 관한 기사다!
“기하성 총회 목회신학대학원 교수(조직신학)로 재직 중인 김경규 목사(51)가 신간 ‘너희가 그러고도 천국 갈 줄 아느냐’(라이프비전)를 출간했다.
미국 LA Cohen신학대학원(M.Div), 탈봇 신학대학원(MA), Biola 대학(Ph.D), 풀러선교대학원(MA) 등에서 조직신학, 성경해석학, 선교학, 리더십을 전공한 김 목사는 구원론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제공하고자 이 책을 집필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오늘날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전투구의 싸움터로 비춰지고 있다’면서 ‘그 이유는 구원의 확신만 있으면 어떻게 살아도 천국 갈 수 있다는 잘못된 구원론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예수 믿는 자는 죄를 회개한 자인데, 삶을 들여다보면 정작 회개의 열매는 전혀 없다. 열매가 없음에도 열매를 맺으려 하지 않고 ‘자신은 구원받았다’며 자만에 빠져 있는 실정이다.
김 목사는 ‘세상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그대로, 죄와 단절하지도 않고 세상과 전혀 구별되지 않은 무늬만 크리스천인 경우가 많다’면서 ‘열매 없는 무늬만 크리스천들이 교회에 넘쳐난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구원 얻는 참된 믿음과 구원론에 대한 오해가 바로 잡히지 않는 한 교회는 더욱 어두워져갈 뿐 아니라 수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김 목사의 주장이다.
김 목사는 자신이 집필한 저서 ‘너희가 그러고도 천국 갈 줄 아느냐’를 통해 잘못된 구원론과 그릇된 믿음으로 지옥으로 가고 있는 영혼을 회개시켜 천국가게 하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김 목사가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잘못된 구원론은 다음과 같다.
▶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하기만 하면 열매 맺지 못해도 결국은 천국에 간다.
▶ 구원의 확신만 있으면 불순종하고 살아도 죄와 상관없이 결국은 구원받는다.
▶ 거룩함이 없어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헌금과 기도 많이 하면 천국 간다.
▶ 순간적으로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이 보장된다.
김 목사는 ‘구원은 어느 한 순간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끝나는 날까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계속적으로 이루어가는 과정’이라며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리고, 숭실대에서 신약학을 강의하고 있는 권연경 교수가 목회자포럼에서 강의한 내용이다. 그 기사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바른교회아카데미는 2011년 3월 15일 오후 7시, 목회자포럼을 열고, 믿음만을 강조하며 행함을 소홀히 하는 한국 교회의 구원론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날 포럼에서 권연경 교수(숭실대, 신약학)는 ‘한국 교회의 도덕적 무기력과 구원론적 혼란’이란 주제로 강의를 하며, 행위가 아닌 믿음이라는 이원론적 사고 안에 갇혀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한국 교회에 마태복음과 바울서신, 그리고 야고보서를 통해, 신학적 구원관을 제시했다.
권 교수는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천국 간다는 말에는 아무 부담이 없는데, 우리가 잘살아야 된다는 말에는 부담을 갖게 된다.’며 ‘큰 교회의 분위기가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만드는 희한한 이들이다.’라며 대형교회의 반쪽짜리 구원론을 비판했다.
권 교수는 “흔히 우리가 이야기 하는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라고 이야기한다. 오직 믿음이라는 말과, 오직 은혜라는 말은 실재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오직 믿음이라고 말하건 오직 은혜라고 말하건 받아들이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사실 똑같다.”라며 “오직이라는 말의 효과 때문에 ‘다른 건 다 필요 없어’라며, ‘우리 행위가 필요없다’라는 말로 순간적으로 번역을 많이 하는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권 교수는 지금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도덕적 실패를 구원론의 오해로 분석했다.
권 교수는 “성경을 읽을 때 무수하게 만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무시하는 것이 우리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다. ‘구원받았으니까 잘살아야지’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올바르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이 논리가 사실 성경전체에 퍼져있다.”라고 말하며 권 교수는 성경에 나와 있는 구원론에 대해 설명했다.
권 교수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알게 모르게 바울서신의 관념으로 신학의 다른 모든 부분을 다림질한다.’며 사람들이 이로 인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설교하시는 부분에서 ‘천국에 들어가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소유해야 한다(5:20)’라는 말씀을 인용해 예를 들었다.
권 교수는 “내가 주일학교에 다닐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자기들이 지켜서 천국에 가려고 하는 의다. 하지만 율법은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라며 배웠다.”며 “이는 조금 심하게 이야기해서 사기를 친거다.”라고 표현했다.
권 교수는 “먼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가 뭔지를 알아야한다. 예수님은 이들을 위선자들이라고 표현했다.”라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들이(바리새인) 행하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다. 즉 하나님을 의식한 것이 아닌 사람들을 의식한 행동이었다.”며 지금까지의 성경에 대한 해석이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야고보서를 예로 들며 “‘그 믿음이 너를 구원하겠느냐’ 이게 (야고보서에서 말하는)구원론이다. 이 의미는 ‘구원받은 사람이 그런 믿음으로 살아선 되겠냐?’ 이런 말이 아니라 ‘그런 믿음이 너희를 구원하겠냐?’하는 구원 받는 믿음에 대해 하는 이야기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권 교수는 “나보고 행위구원론자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야고보를 보고 행위구원론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 이름이 있기 때문에 놔두는 것이지, 내가 말하면 행위구원론자가 된다.”라며 이런 주장을 하는 자신에 대한 공격에 변호를 했다.
또한 그는 “구원의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이다.”라며 행위 뿐 아니라, 믿음으로 받은 성령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임을 밝혔다.
그는 특히 “안해도 된다는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신약도 아니고 구약도 아니고 마약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라며 “이는 당장 듣기는 굉장히 좋지만, 그 결과는 죽음이다.”라며 믿음과 행위 둘중에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을 지적했다.
권 교수는 “복음의 도전은 살아계신 하나님, 부활의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이 부르시는 길로 나서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좁은 문, 힘든 문이라고 표현하셨다. 그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믿음”이라고 강조하고 “그 믿음의 공동체가 이루어질 때 어느 정도 이 세상에 제자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뿐 아니다. 얼마 전 소천하신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은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아 상암경기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교하셨다. 다음은 그 내용 중 일부이다.
< 저는 사데교회를 보면서 오늘의 한국 교회를 보는 것 같다는 불안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한국 교회를 보시고 뭐라고 하실까요? 이름은 살았으나 행위가 죽었다고 책망 하시지 않으실까요? 누가 아니요 하고 변명할 목사가 있습니까? 누가 아니요 하고 변명할 장로가 있습니까?…
수십 년 목회를 하면서 목자의 목사의 입장에 서면 이름은 요란 하지만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을 저는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여러분 아시고 싶습니까? 이렇게 하면 됩니다. 목사가 말씀을 가르치거나 설교를 하면서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키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복음이 얼마나 변질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로 둔감해지면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름만 살았고 행위는 죽어지고 죽어질 수 있습니다…
청중은 원래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모두가 아멘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도 받고, 땅의 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면 할렐루야 하고 열광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면은 얼굴이 금방 굳어져 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거나 책망하면 예배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져 버립니다. 듣기가 싫고 몹시 거북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사역할 때 저는 비슷한 반응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청중의 반응에 예민해지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일부러 골라서 설교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신 죄라든지, 회개라든지, 순종이라든지, 거룩이라든지 하는 듣기 피곤한 말씀은 할 수 있으면 피하거나 꼭 말을 해야 할 때에는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하고 싶어 하는 유혹에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절대로 바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절대로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이 강단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그 결과 저도 모르게 복음을 조금씩 조금씩 변질시키는 설교자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믿음만 가지고 떠드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기 좋아하는 무리들이 자꾸만 늘어가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를 여러분 기억하실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고 하는 놀라운 복음을 재발견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의로운 행위는 아무런 공로가 되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비텐부르크에서 34년간 4천 번 이상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루터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를 곡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순종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데, 죄 좀 지었다고 해서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거냐 하면서 자기 욕심대로 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도시는 믿음의 방용이 난무하는 타락한 사회가 되어갔습니다. 이런 기막힌 상황을 지켜보면서 루터는 자기 설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설교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목사라면 설교하기보다 차라리 수레를 끌고 돌을 운반하는 편이 낫겠다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루터가 우리에게 주는 아주 값진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교회의 지도자가 복음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믿음만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믿음의 열매가 되는 행함을 등한히 다루던지 무시하면 입만 살고 행위가 죽어버리는 사데교회가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0절을 보면 바울은 유익한 말씀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전하고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을 포함하여 한국 교회 많은 지도자들은 바울처럼 무엇이든지 거리낌 없이 전하는 용기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 것은 먹이고, 쓴 것은 할 수 있으면 먹이지 않으려는 나쁜 설교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설교자는 청중에게 인기가 있어서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으는 데는 성공할지 모르나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의 지도자 여러분! 복음을 변질시켰다는 주님의 질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몇이나 됩니까? “입만 살았고 행위가 죽어버린 교회를 만든 책임은 너에게 있어.” 하고 따지신다면 “나는 아니오.” 하고 발을 뺄 수 있는 목회자가 몇 사람이나 됩니까?
평양대부흥의 진정한 기념은 복음을 변질시키고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든 죄를 놓고 가슴을 치는 목회자들의 회개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를 향하신 간절한 주님의 소원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주님은 행위가 죽은 사데교회를 향해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회개만이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향해서도 똑같은 명령을 하고 계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
2. 예언이란 무엇인가?
(강금성 교수)
예언이란 무엇인가?
강금성 목사입니다. 이 글이 예언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 교단 총회 자유게시판의 4941번에 올린 “예언 사역에 대한 스케치”란 글에 대해 이○민 목사가 4951번의 “예언 사역의 정당성을 경계하며…”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 글을 읽으며 느낀 점은 교회 안에 ‘예언’에 대한 오해가 너무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오해를 뿌리 뽑고 바른 이해를 갖게 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볼 수만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에서 세 가지 일, 즉 이○민 목사가 갖고 있는 오해를 지적하고, 예언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원적인 설명과 더불어, 성경에서 예언 사역의 실례를 말씀드림으로써 예언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1. 이○민 목사의 오해
저는 앞서 “예언 사역의 스케치”라는 글에서 계 22:18-19절과 신 18:10-11절이 예언 사역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참고>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요한계시록 22:18-19)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신명기 18:10-11)
이에 이 목사는 예언 사역의 부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성경의 근거로 다음의 구절을 추가 인용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이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예레미야 23:16-20, 18-20절은 생략)
그러나 이 말씀은 여호와를 멸시하며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자에게 평안을 빌어주는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말라는 의미이지, 예언 사역을 부정하며 예언 사역자의 말을 듣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시 유다의 왕과 백성들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 나라가 망하고 죽거나 사로잡히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민 목사가 예언 사역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성경 해석에 근거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 구절은 예언 사역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민 목사의 글에는 성경 구절에 대한 잘못된 해석보다 더 큰 문제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언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릇된 이해입니다. 이 목사는 ‘예언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언의 역사를 살펴보면…
창세기 6장에서 노아에게 찾아오셔서 홍수가 일어날 것을 예언하시며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고향을 떠나게 하시고 장차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겠다고 예언해 주셨다. 출애굽기 3장에서는 모세를 찾아오셔서 가나안 땅으로 보내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실 것을 말씀해 주셨다…하나님의 첫 예언은 창세기 2장 17절에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 여인의 후손이 오셔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 한다. 구약시대에는 계속해서 여인의 후손으로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했다.”
이 언급 가운데서 우리는 이○민 목사가 생각하는 예언의 개념은 ‘장래 일을 말하는 것’ 혹은 ‘미래의 길흉을 점치는 것’이란 생각이 깊이 배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위에 ‘예언의 역사’라고 언급된 내용들은 예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구약성경에 처음 나오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비롯해 신명기에 이르는 다섯 권을 ‘토라’, 즉 ‘율법’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목사가 예언이라고 한 구절들은 율법이지 예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그리고 예수님도 이 목사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언급한 구절들을 율법(토라)이라고 하셨지 예언이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목사가 이 구절들을 예언이라고 한 것은 ‘예언이 장래사를 말하고 길흉을 점치는 것’이란 기본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교회에 다음과 같은 심각한 몇 가지 악영향을 초래합니다.
첫째, 예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이들로 하여금, 성령께서 은사를 주어 사역케 하시는 예언 사역을 기를 쓰고 이단으로 정죄하려 한다. 이로써 그들은 예언 사역의 폐해를 막고자하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일했으나 결과적으로 성령을 거스리고 대적한다.
둘째, 예언이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임을 인정하는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예언 사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예언 사역의 도입을 꺼리게 만든다. 이로써 성령께서 예언 사역을 통해서 교회에 부어주시려는 은총을 막아버린다.
셋째, 예언에 대한 이 같은 오해는 기왕에 예언 사역을 하는 이들로 그 사역을 쉽게 부패케 한다. 예언이 ‘장래사를 말하며 길흉을 점치는 것’이란 뿌리 깊은 오해는 예언 사역자를 타락하게 하고, 예언의 본질에서 이탈하게 함으로써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할 예언 사역이 오히려 교회에 해를 끼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예언이란 무엇입니까?
2. 예언의 어원적 의미
언어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상징’ 혹은 ‘기호’입니다. 어떤 사회이든지 어떤 단어에 대해서, 이 단어는 ‘이러이러한 의미이다’고 암묵적인 합의를 하고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예언’이란 단어는 ‘장래 일을 말하는 것’ 혹은 ‘길흉을 점치는 것’이란 암묵적인 합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이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 말 ‘예언’이란 단어로 설명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혹 올바른 설명을 했고, 이해를 했다 할지라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우리말 ‘예언’의 의미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예언 사역을 하는 교회의 지도자는 성경적인 예언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귀가 따갑도록 말해줘야 하고, 그것도 수시로 언급해서 예언 사역자와 예언 사역을 받는 대상자 모두의 주의를 환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이○민 목사가 성경의 ‘예언’은 히브리어로는 ‘네부아’이고, 헬라어로는 ‘프로페테이아’라고 한 것은 옳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프로페테이아’는 히브리어 ‘네부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그 의미가 변질된 것이 거의 확실시되므로 논의에서 제외합니다. ‘네부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말씀을 듣거나 이상을 통해 본 사실을 말해주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네부아’의 의미를 해석할 때 우리말 ‘예언’이라는 단어보다 ‘대변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옳다고 여겨집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변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한 말, 이것이 네부아, 즉 예언입니다.
예언에 대한 히브리어 어원을 논하는 요점은 ‘네부아’가 시간의 개념을 전혀 고려치 않고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우리말 ‘예언’으로 번역되면 꼭 시간의 개념이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장래사를 말해주는 것’이나 ‘길흉을 점치는 행위’가 예언이라고 오해를 합니다. 문제는 성령께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의 ‘예언’의 은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사용된 ‘네부아’의 의미를 가진 예언의 은사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성경에 사용된 네부아의 의미로 예언 사역에 대해 논하고, 성경적 예언 사역을 하도록 권장하고 지도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물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예언 사역을 자꾸 장래사를 말하는 것이나 길흉을 점쳐주는 점쟁이나 무당의 행위로 비하하는데 그것은 오해에 기인한 망령된 짓입니다. 예언 사역은 사람들로 하나님의 행사와 관심에 눈뜨게 만들고, 자기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로 하나님의 일에 뛰어들게 하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성경에 언급된 예언 사역의 실제를 소개함으로 예언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3. 성경에 언급된 예언 사역
1)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예언 사역(삼상 9:1-10:9)
사울은 아버지의 명을 좇아 사환과 함께 잃어버린 나귀를 찾지만 찾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찾아야 할지, 이제 아버지가 잃어버린 나귀보다 자기들을 더 걱정할까 싶어 돌아가야 할지를 결정해야 할 때였습니다. 이에 그들은 사무엘을 찾아 ‘우리의 갈 길’에 대해 묻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오기 전 사무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고, 오면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라는 지시를 받아놓은 상태였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고 말을 한 뒤,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사무엘은 두 가지 징조를 말하는데, 하나는 가는 도중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 찾던 나귀들을 찾았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며, 다른 하나는 더 나아가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들이 떡 두 덩이를 줄 것임을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나귀들을 계속 찾아야 할 지 돌아가야 할 지…그런 일에 대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없습니다. 저는 지금 성경의 완전성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은 선지자를 찾아 우리의 갈 길에 대해 물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는 이 사건이 예언 사역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사울은 순전히 개인적 관심사로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그 사울에게 하나님의 경영에 대해 말하고, 그로 그 일에 뛰어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언 사역이 활성화 되어 있는 교회의 신자는 대부분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탈피해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주님을 경배합니다. 눈빛들이 살아 있고, 그들의 심장은 열방을 향해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 품기를 열망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환상)을 그들은 자신의 꿈으로 취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질이 다릅니다.
사무엘의 예언 사역에 장래사에 대한 언급들이 들어있지만, 그것은 예언 사역의 중심이 아닙니다. 장래 일은 사울로 하나님의 경영에 참여하도록 확신을 주기 위한 하나의 ‘징조’일 뿐입니다. 만일 이 예언 사역이 없었다면 사울이 하나님의 일에 뛰어들었을까요? 뛰어들었다 할지라도 확신 없이 많은 망설임 가운데서 행했을 것입니다.
2) 다윗에 대한 나단의 예언 사역(삼하 12:1-17)
선견자 나단이 다윗에 대해 예언 사역을 한 것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술수를 쓰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우리아를 죽인 사건이 있은 후입니다(삼하 11장). 나단은 다윗을 찾아가 한 부자가 손님을 위해 자기 집에 양과 소가 많은데도, 가난한 자가 자식처럼 기르는 한 마리뿐인 양을 잡았다는 악질적인 행위를 고발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다윗은 사 배를 갚도록 명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단은 그 못된 부자가 바로 왕 당신임을 지적하고, ‘칼이 영영히 네 집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단의 이 사역을 통해 다윗은 크게 회개합니다.
나단은 이 예언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다윗의 은밀한 행동에 대한 ‘지식의 말씀’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이키게 하는 ‘지혜의 말씀’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펼친 예언 사역이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돌이키도록 했습니다.
이 사역의 초점 역시 다윗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장래사를 말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나단은 다윗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이 분노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해준 것입니다. 그로 인해 다윗으로 회개케 하고, 다시는 권력을 이용해 탐욕을 채우는 악을 행치 말 것을 주의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연합된 길을 걷도록 했습니다.
3)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엘리야의 예언 사역(왕상 18장)
엘리야의 예언 사역 대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는 다음 구절이 잘 보여줍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왕상 18:21) 이에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850명과 대결해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함으로써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신 것을 증명합니다. 이에 모든 백성이 고백합니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왕상 18:39) 그리고 백성들은 바알의 제사장들을 모두 죽이고 여호와께 돌아왔습니다.
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언 사역은 반드시 계시로 들은 말씀이나 본 환상에 기초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신유나 축사, 혹은 능력 행함을 통해서 사역하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여호와만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이나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합니다. 예언 사역을 ‘무당이나 점쟁이처럼 장래사나 길흉을 점친다는 것’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억지입니다. 장래사나 길흉을 말하는 내용이 언급될 수 있지만 그것들은 하나의 징조일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언 사역은 때때로 개인의 관심사나 궁금증을 풀어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예언 사역은 하나님의 관심사를 대변해주는 것이고, 그로 그 하나님의 일과 경영에 참여토록 하는 것입니다.
4) 포로 후기의 유다에 대한 말라기의 예언 사역(말라기서)
말라기서는 4장으로 된 책으로 말라기가 활동한 때는 스룹바벨 성전이 완성되고 제사를 드리던 때, 그리고 바사의 총독이 예루살렘을 통치할 때인 주전 450-400년경입니다. 성전이 완성된 후 성전 재건 때 보인 열심은 사라지고 종교적 나태와 형식주의가 팽배해졌으며, 제사장들도 긴장이 풀리고 게을러졌고, 백성들은 제물에 대하여 불성실했으며, 이혼과 잡혼을 일삼았습니다. 말라기는 아래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법정에서 송사하는 것 같은 형식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모든 단락은 세 가지 단계로 진행되는데, 첫째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잘못을 제기하고, 둘째는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항변이 나오고, 셋째는 그에 대한 여호와의 대답이 나옵니다.
“나는 너희를 사랑했다. 어떻게 당신이 우리를 사랑했습니까? 나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 (말라기 1:1-5 참조)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어떻게 우리가 당신을 경멸했습니까? 너희는 내게 드리는 제사를 번폐스러워했고, 토색한 것, 병든 것을 제물로 가져왔다. (말라기 1:6-14 참조)
너희(제사장들)는 내게 신실하지 않았다. 우리가 신실하지 않았다고요? 그래, 너희가 소시의 짝을 버림으로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게 하였다. (말라기 2:10-16 참조)
너희는 나를 괴롭게 하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게 한단 말입니까? 너희가 말하기를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께 기쁨이 된다 하며,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는도다. (말라기 2:17-3:5 참조)
내게로 돌아오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께 돌아갑니까?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하라. (말라기 3:6-12 참조)
너희는 나를 대적한다.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 하며,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 유익한가 하고 말하지 않느냐? (말라기 3:13-4:3 참조)”
말라기는 당시 유다 백성들의 영적 현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들추어내고, 형식주의적 신앙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언의 진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말라기서에 장래사에 대한 구절이 종종 언급되지만(3:1-6, 16-18, 4:1-6), 말라기의 메시지는 당시 유다 백성의 형식주의적 신앙생활을 지적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합니다. 이것이 예언의 주목적입니다.
5) 세례 요한의 예언 사역(눅 3:1-17)
어떤 이들은 성경의 예언은 국가나 민족 단위로 하는 것이지 개인에게 하는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현재 몇몇 교회에서 번호표를 뽑아 순서를 기다렸다가 개인을 대상을 하는 예언은 예언이 아니며, 예수 이름을 빙자한 점쟁이나 무당의 짓이라고 폄하합니다. 누가 어떤 근거를 가지고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 의아합니다. 예언 사역을 반대하는 이들은 성경 묵상을 통해 ‘과연 그러한가?’하고 숙고해 봄도 없이 모범답안지를 받아든 학생처럼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예언은 이단들이 하는 것이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비난합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말 2:7-8)라고 했는데, 이를 보는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세례 요한의 예언 사역은 ‘무리’를 대상으로 하기도 했고, ‘개인’을 대상으로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세리들과 군병들을 대상으로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무리나 개인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어디에 예언은 개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고, 나라나 민족을 대상으로 했다는 말이 나옵니까? 예언자들은 사역 대상에서 민족과 개인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아래 구절을 보시면 사무엘 시대에도 개인들이 선견자에게 가서 행할 길을 묻는 것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읍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가 갈 길을 가르쳐 줄까 하나이다…(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 (사무엘상 9:6,9)
우리 교회에서도 예언 사역팀은 한정되어 있고, 사역 받기를 원하는 분들은 많아서 번호표를 미리 배부하고, 순서를 좇아 사역을 받습니다. 질서가 있고 좋던데요. 예언 사역을 부정하는 분들의 주장에는 뭐 하나라도 성경에 맞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특별히 예언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예언 사역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이들은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이 구절도 작위적으로 해석하여 ‘특별히 성경을 앞서서 말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더군요. 고전 14:1절과 5절에서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에서 예언은 하나의 은사로서 성령의 다른 은사 중 하나인 방언과 비교해 말하는 중에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예언’은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인 예언을 말하는 것이지, 그 예언이 ‘성경’을 의미하고 그래서 성경을 앞장서 말하는 것이 예언 사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 해석의 ABC를 무시한 것입니다.
예언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언이란 용어 자체에는 시간 개념이 없으며, 장래사를 말하거나 길흉을 점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언은 개인이나 특정한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혹 예언 사역자 가운데 계시가 깊고 정확해서 사람의 은밀한 것을 알아내고 장래사를 말하는 이가 있지만 사역할 때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거나 대상자를 하나님께 붙여주지 못한다면 그는 예언 사역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그런 사역자는 당장에 회개하도록 하거나 사역을 내려놓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임함은 사람에게 권능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근본 목적은 예수님/하나님을 증거함에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로 인한 사역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이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5:26)
앞서 예언 사역의 실례들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선지자들은 항상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그것이 예언 사역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진리의 빛을 비추사 예언에 대해 올바른 이해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미 예언 사역을 하시는 분들도 이 글을 통해 예언 사역의 초점이 올바른지 재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끝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만일 예언 사역을 시작해서 나타나는 선악의 열매는 고스란히 그 교회가 감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언 사역에 대해서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는 그 교회 담임목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언 사역을 그 교회 담임목사에게 맡겨두십시오.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이고, 성령께서 은사를 주어 사역케 하는 것이므로 두려워할 것이 뭐겠습니까? 해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면서 외부에서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혹 잘못된 예언 사역자로 인한 교회의 혼란을 염려해서 예언 사역 자체를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한 동기를 가졌다고 해서 진리를 거스리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다만 분별하십시오.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그러했던 것처럼, 또 주님도 말세에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 24장). 예언 사역 자체를 부정하지 말고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십시오. 그것이 진리 안에 거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과거에 예언 사역으로 인해 교회가 입은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어서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러는 줄은 알지만 예언 사역을 시행하는 교회의 목회자들도 과거에(1970-80년대) 그런 피해를 겪어보지 않은 분이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시행하는 것은 예언 사역의 진수를 맛보아 알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교회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언 사역자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예언 사역은 성령에 의존하지 않고는 잠시도 할 수 없는 사역입니다. 만일 계시를 통해 사역 대상자에 대한 지식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사역 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역자들은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늘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시각이 무엇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그런 수고와 경건 훈련을 하고 있지만 오해와 그로 인한 온갖 비난을 받고 계신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힘내십시오. 여러분의 수고가 큰 열매로 나타나 이 땅에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3. “큰믿음교회와 변 목사님의 이단성을 조사한다는
자체가 정말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한기총 이대위 임원)
존경하는 변승우 목사님께
주님께서 세우시고 인도하시는 큰믿음교회와 변 목사님께 성령님의 위로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큰믿음교회와 변 목사님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대위 일을 하면서 매일 매순간 결심을 했지만 용기가 부족했던 점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큰믿음교회와 변 목사님의 이단성을 조사한다는 자체가 정말 잘못되었던 일이었습니다.
‘이단은 아니다’ 라는 소위원회 보고서는 하나님이 주신 결론이었습니다.
이대위 전체회의에서 다룰 때에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양보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전체회의에서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너무나 악질적인 반대가 있었고 잘못된 결정을 했습니다.
지나간 일이지만 저의 마음이 이렇게 후회스럽고 쓰린데 변 목사님의 심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해합니다.
임원회와 실행위, 그리고 총회에 이르기까지 저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들이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하느라고 했지만 하나님께 부끄럽고 변 목사님과 큰믿음교회 교우들께 죄송합니다.
그동안 저에게 계속 되었던 언론기자들과 이대위원들, 수많은 사람들의 공격과 비난들 앞에서 저는 담담했고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고 변 목사님께는 아무런 잘못된 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일 다시 비상 정회한 한기총 총회가 오후 2시에 속회 된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 이대로는 안 됩니다.
변 목사님의 비난을 겸손하게 받아야 할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변 목사님을 만난 것이 저에게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동안 교리적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특히 목사님의 깨끗하고 정직한 모습을 보면서 저 자신을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부흥의 진정한 부흥의 모델로 큰믿음교회와 변 목사님을 사용하시는 주님을 믿고 찬양합니다.
변 목사님, 강건하시고 승리하세요.
주 안에서 함께 동역자 된 ○○○ 목사 드림
4. “변 목사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모 장로교단 총무이며 한장총 이대위 위원 목사님의 전화)
저는 오늘 모 장로교단의 총무이며 한장총 이대위 위원중의 한분과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그분이 먼저 저희 교회로 전화를 해서 통화를 원한다고 하셔서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성함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한국 교회가 누구를 거짓말로 악질적으로 이단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되나, 이단이 아닌 자를 양심대로 이단이 아니라고 하면 같이 이단으로 매도하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서요.
그런데 그분 말에 의하면 한장총에서 김학수, 최삼경, 최병규 등이 중심이 되어 저를 이단으로 정죄하려고 작심을 하고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도 이대위 위원이라서 불러서 갔는데 저에 대해서 충분히 연구를 했으니 이단으로 결정하자고 해서 자료를 달라고 하니 자료는 하나도 주지 않고 두 가지 때문에 이단이라고 하더랍니다.
하나는,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니 이단이다.
다른 하나는, 입신을 말하니 이단이다.(입신을 인정하면 이단이라면 왜 나겸일 목사님은 이단으로 안 잡나? 그분 입신 간증 무척 좋아하시던데… 최근 신성종 목사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입신간증자들을 불러서 간증시키신 분이 그분 아니신가? 주안장로교회 홈페이지를 참고해보라. 솔직히 나는 나겸일 목사님이 인정하는 입신간증의 10분의 1도 인정 안하는데… 도대체 한국 교회법은 어떻게 된 게 누구는 해도 괜찮고 누구는 하면 이단이고… 법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때는 그분도 분위기에 휘둘리고 잘 몰라서 동의했는데 양심에 찔림이 되고 아무래도 이단이 아닌데 이단으로 억지로 모는 것 같아서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들이 말하는 두 가지 이유는 둘 다 이단 사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감리교 성결교의 교리이기 때문이고 입신은 있을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데 감리교와 성결교는 뭘 하느냐고 묻더군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한술 더 떠서, 어이없어 하면서 하는 말이 오히려 예성에서도 저를 이단으로 몰려는 움직임이 있다면서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저도 최근에 한기총 이대위의 한 인사가 기성과 예성이 다음 총회 때 저를 이단으로 몰려고 한다며, 만나자고 하는데 만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누차 말했듯이 이단시비에 관한한 한국 교회는 중세 암흑시대와 방불하며 마귀적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죽인 산헤드린과 같아 도무지 공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통합, 백석, 기성, 한기총을 상대로 이단 시비를 겪으면서 실제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경험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중략하고, 기성과 예성은 존 웨슬리의 후예로서 정통성을 잃었으며 이제는 근본 없고 지조도 없는 ‘장로교 2중대’일 뿐입니다. 두 교단은 아예 이 기회에 장로교로 기어 들어가는 게 어떠실지…
존 웨슬리와 거의 100% 일치하는 교리를 갖고 있는 저를, 그것도 한장총에서 다시 재론되듯이 백석에서 이단성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구원 받은 사람도 버림 받을 수 있다는 주장 때문에 제명 출교 당한 저를 공격하는 그 공격에 어리석게도 동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존 웨슬리와 그분의 후예인 기성과 예성 교단 스스로가 이단이라고 자인하는 어리석은 꼴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백석 이대위에서 저를 조사하면서 존 웨슬리도 이단이라고 한 말에 동의하는 모양입니다.
하긴 예성의 한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얘긴데, 예성의 이대위위원장이 변 목사는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고 하니 이단이라고 말했다더군요.
자기 교단의 교리가 그건데 이건 무슨 코미디같은 소리인지… 이런 엉터리가 이대위위원장이고 이런 기본도 안 된 자들이 모여서 내린 결정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지…
그런데도 이런 무식한 자들의 주장과 결정에 너무나도 잘 휘둘리는 국민일보와 수많은 목사들과 신자들이 우스울 뿐입니다.
오죽하면 제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한 예성 교단의 목사님이 도저히 예성의 이런 불의한 결정과 움직임들을 더 두고 볼 수 없다. 예성의 작태를 볼 때 희망이 없다고 하며 예성을 탈퇴하고 이단으로 몰린 우리 부흥 교단에 가입하겠다는 연락을 다해왔겠습니까?
앞으로 한장총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리고 비겁하고 줏대 없는 기성과 예성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 교회는 이미 불의한 여러 장로교단들로부터 악질적으로 매도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울 것도 없고 특별히 더 불리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글을 올리는 것은, 적어도 우리 교회 성도님들과 우리 교회를 지지하는 분들은 최소한의 진실이라고 알아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 다듬지 않는 짧은 글을 두서없이 올립니다. 이런 글 쓰는 것 참 귀찮거든요.
끝으로, 오늘 통화한 장로교의 한 교단 총무요 한장총 이대위 위원인 그 목사님이 제게 그러시더군요.
“변 목사님, 제가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변 목사님을 이단으로 매도하는데 동의하고 제 이름도 거기에 들어가 있는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변 목사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기회가 되면 바른 소리를 하겠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추신 : 현 한장총 회장 양병희는 백석교단에서 성도 1명이 우리 교회로 옮겼다고 이대위에 이단조사해 달라고 요청하고, 이단성이 없다고 조사결과가 나왔는데도 총회에서 정치력을 이용해 제대로 절차도 밟지 않고 불법적으로 저를 제명 출교하는 일을 주도한 장본인입니다.
그런 자가 수장으로 있는 단체의 결정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제게 전화 준 목사님이 제게 말해준 대로 최삼경은 통합교단에서 현재 이단성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인데 어떻게 한장총에서 다른 교회를 이단으로 매도하는 일에 당당히 주도할 수 있는 것인지…
이거 하나만 생각해보아도 한국 교회의 이단시비, 정말 너무 엉터리 아닙니까?
법정에서 판사가 아니라 재판중인 피고가 다른 재판의 판사질이라…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정말 제 정신들인지.
5. “큰믿음교회는 이단이래”라는
거짓말에 속고 있는 분들에게!
(큰믿음교회에서 낸 신문광고)
저는 불의하고 억울하게 이단으로 매도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기총이나 한장총 혹은 교단들을 상대로 더 이상 저 자신을 변호할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이 시대의 산헤드린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썩었고, 돈과 명예만 알고, 정치적이어서 공의를 기대할 수 없는 집단들이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그들은 진실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진실을 알아도 눈치나 보고 옳은 것을 옳다할 용기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들을 상대로 시간을 낭비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개개의 목사님과 성도님들에게는 진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야 성도님들이 받는 핍박도 줄고 그들이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제공하기 원하시는 참된 진리와 성령의 능력과 역사 그리고 예수님께 대한 바른 초점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래 만에 펜을 들었습니다.
1. 거짓말로 매도당하는 것은 이미 성경이 예고한 것입니다.
어떤 목사와 신자들은 저를 가리켜 어이없게도 이단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양심에 화인 맞은 이단사냥꾼들과 우리 교회를 시기하는 정○○목사를 비롯하여 극히 질 나쁜 목사들이 지어내어 조직적으로 퍼트린 거짓말들을 분별없이 믿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그것이 사실이 아닌 거짓말이라고 알려주어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 하며 뾰족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속단합니다. 그러나 속담이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10-12)
예수님에 의하면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 예수님도 그리고 순교자 스데반도 거짓 증언에 의해 희생되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마태복음 26:59-6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사도행전 6:10-13)
그러니 오늘날도 여전히 거짓말에 의해 공격당하는 목사와 교회가 있지 않을까요? 그것이 성경에 입각한 바른 추론입니다. 더구나 사탄은 주님이 지적하신 대로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요 8:44). 그러므로 자기에게 특히 위협이 되는 부흥하는 교회와 목사를 주특기인 거짓으로 이단으로 몰아 죽이려 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요?
제발 현실을 제대로 보십시오. 큰믿음교회가 많은 교단들에게 집중공격을 당한 것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한국 교회의 악의 축이요 거짓말쟁이들인 이단사냥꾼들을 감히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참소하는 자인 사탄의 하수인인 그들의 정체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똘똘 뭉쳐 저와 큰믿음교회를 죽이려고 기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단들이 무분별하게 그들의 거짓된 참소에 놀아났기 때문입니다.
2. 이단사냥꾼들과 교단들의 발표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만약 최○○과 탁○○을 비롯한 이단사냥꾼들과 통합과 합동, 백석을 비롯해서 저를 매도하는 교단들의 지적과 주장이 맞다면 저는 이단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악의적인 거짓말 혹은 말을 짜집기하여 교묘하게 왜곡시킨 것 일색입니다.
지난주 한 분이 “영혼의 사냥꾼 사이비 이단”이라는 책자를 하나 가져다주었습니다. 거기에는 누가 만들었는지 비겁하게 밝히지도 않고, 다른 심각한 이단들과 함께 의도적으로 큰믿음교회가 이단이라는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우리를 타켓으로 만든 것이 분명해보였습니다. 그런데 저를 이단이라고 제시한 근거들을 보니 모두 거짓말 아니면 의도적인 왜곡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이가 없어서 대응할 가치를 못 느꼈고, 오히려 그 내용을 그대로 카페에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설명 없이 올려도 우리 교회 성도님들과 우리를 아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장이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새빨간 거짓말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자와 우리 교회를 공격하는 교단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고요? 그것은 저의 50여권의 책들과 카페에 올려져 있는 수많은 설교들을 보시면 됩니다. 우리는 이중 교리가 없습니다. 교회 내의 진리 회복을 위해 담대히 드러내놓고 외치는 교회입니다. 저의 설교와 주장은 모두 카페에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보시면 교계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사악한 거짓말인지 누구나 아실 수 있습니다.
저는 목사들과 교단들이 이토록 거짓말을 너무나도 잘 하고, 수많은 목사와 신자들은 그 거짓말을 그래도 받아들여 같은 형제를 이단으로 매도하여 죽이지 못해 안달을 떠는 것을 볼 때 참으로 당혹스럽습니다. 이게 교회가 맞나? 마귀도 아니고 교회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은 교회가 어찌 이렇게 까지 양심 없고 사악해질 수가 있는지 망연자실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큰믿음교회 인터넷 카페(http://cafe.daum.net/Bigchurch) 증언 란에 보면 통합과 합동을 위시한 여러 교단의 약 300명의 목사님들이 큰믿음교회는 이단이 아니며 한국 교회가 배우고 본받아야 모범적인 교회라고 양심선언성 글들을 올리셨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그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많은 타교단 목사님들이 이단을 지지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큰믿음교회는 절대 이단이 아닙니다.
3. 한기총과 각 교단들은 왜 거짓말쟁이들을 처단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면 그 논쟁하는 쌍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신명기 19:15-20)
거짓말은 죄이며, 더구나 남을 해하려고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배로 악한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모두 지옥에 던져지게 됩니다.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요한계시록 21:27)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8)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요한계시록 22:15)
그런데 우리나라의 법정에서는 아무리 이단사냥꾼들이 그들이 발행하는 잡지에서 거짓말을 해도, 인터넷에 거짓말을 뿌려대도 그리고 그것이 거짓임을 증명해도 처벌하지 않습니다. 법에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단사냥꾼들이 그 틈을 이용하여 더욱 겁 없이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법이 범죄를 조장하고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헌법소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의 법에만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기총과 교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조용기 목사님과 윤석전 목사님도 이단으로 매도되었었지만 그분들에 대하여 거짓증거한 사람이나 교단에 대한 책임 추궁이 있었습니까? 사과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종교 마피아 같은 교단과 이단사냥꾼들은 여전히 같은 악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큰믿음교회에 대하여 이단사냥꾼들과 일부 악질적인 목사들이 수없이 거짓말들을 만들어서 유포시켜 왔습니다. 다 기억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얼핏 기억나는 것만 적어보아도 “선행이나 율법의 행위로 구원 받는다고 주장한다.”, “환상을 보지 못하거나 예언을 하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문선명이처럼 대관식을 거행했다.”, “무당이나 점쟁이가 가지고 있는 것도 성령의 은사라 했다.”, “자기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고 했다.”, “성경보다 예언이나 환상을 더 높인다.”, “돈을 받고 예언해준다.”, “자기 교회로 옮기라고 예언해준다.”, “돈을 주어서 간증을 거짓으로 쓰게 한다.”, “다른 교회 성도들을 데려오면 돈을 준다.”, “부자들만 좋아하고 부자들에게 헌금을 강요한다.”… 등등 수백 가지가 넘습니다.
이것은 모두 사실무근이고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짓말을 지어내고 조직적으로 유포한 이단사냥꾼들과 악질적인 목사들을 조사하고 책임을 묻는 기독교단체나 교단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말이 드러나도 뻔뻔하게 다시 끊임없이 거짓말을 지어내고 유포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치외법권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거꾸로 교단들과 교회들은 그들의 지어낸 거짓말을 근거로 결정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제가 한기총과 백석, 기성 등 몇몇 곳에서 조사를 받아보았지만 그들의 연구라는 게 직접 내 설교나 책을 진지하게 연구 조사한 것이 아니라 이단사냥꾼들이 만들어 퍼트린 거짓말들을 읽고 그것으로 몰아붙이는 식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통합과 합동 등 대부분의 교단들은 저에게 질문이나 사실 확인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네들이 검사가 되고 자기네들이 판사가 되어 제 멋대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도 없는 불의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방법으로 여러 교단이 우리 교회에 대해 천인공노할 불의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현대○○’는 중세 암흑시대를 방불케 하는 교단들의 이런 추악한 결정에 무슨 대단한 권위라도 있는 것처럼 전도지처럼 만들어 교회들에게 제공하고 있고, 수많은 교회와 목사와 신자들은 순진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그것을 그대로 맹신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대형교회 목사님 중에도 이단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은 옳게 판단하지 않았겠느냐?”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분들이 직접 조사한 것이 아니고 부목사들을 시켜서 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목사들이 제 책이나 설교를 직접 조사한 것이 아니고, 이단사냥꾼들과 악질적인 목사들이 만들어서 유포한 거짓말들을 수집해서 무책임하게 보고를 올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인 중 일부가 자발적으로 우리 교회로 옮긴 것에 앙심을 품고 그 보고를 그대로 믿고 대교회 목사들 중의 일부도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이 꾸밈없는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교회를 보면 초기에 핍박을 받을 때는 순수하다가 콘스탄틴 대제 이후 부흥하면서 타락하여 중세 암흑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한국 교회도 기독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부흥을 경험한 이후 언제부터인가 같은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빛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 자기 일 아니라고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이러고도 교단입니까? 이러고도 목사입니까? 이러고도 그리스도인입니까? 어쩌다 교회가 이렇게 흉물스러운 모습이 되었는지… 참으로 통탄이 절로 나오고 억장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끝으로, 어떤 분은 “왜 이런 내용을 일반 신문에 내느냐?”라고 할 것입니다. 진실을 밝혀야 할 책임이 있는 ○○일보를 비롯해서 기독교신문들이 비겁해서 내주어야지요. 그래서 일방적으로 매도만 당하고 있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통해 큰믿음교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이단사냥꾼들과 교단들의 거짓말에 속아 함부로 판단한 죄를 회개하시고 다시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일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인터넷에 올린 이 게시물에 타 교단 목사님들이 답글을 올려주신 것인데 제 말만 하면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그래서 올려드립니다.
사랑과 임재 “저는 통합교단 목사입니다. 4년 동안 큰믿음교회를 보아왔지만 점점 신뢰할 만한 메시지와 사역만 보았습니다. 잘 알지 못하면서 큰믿음교회에 대해서 오해하신 분들은 다시 정직하게 큰믿음교회를 보고 실상을 보는 눈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사랑의 불꽃 “저는 순복음교회 목사입니다. 변 목사님 책 40여권과 즉흥설교를 인터넷으로 2005년부터 2010년까지 듣고 지금도 듣고 있습니다. 서울 큰믿음교회 집회에도 여러 번 갔습니다. 큰믿음교회를 잘 알지 못해서 이단이라고 하는 목사님들과 명목상의 신자들이여! 함부로 이단이라고 말하는 죄악에 빠지지 마십시오. ”
온전한 순종 “저는 성결교(기성) 목사입니다. 큰믿음교회가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변승우 목사님의 설교를 마음을 열고 단 한편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든지 아니면, 아니면 양심에 화인 맞아 진실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악을 거짓말쟁이들의 말을 따르는 자입니다. 벌써 5년간 들어본 설교 중 단 한 편도 진리를 벗어나거나 위험해 보이는 것은 없었고, 한편 한편이 주옥같고 회개에 이르게 하며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설교였습니다. 여러분도 마음을 열고 설교를 단 한편이라도 들어보십시요.”
6. 큰믿음교회는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한기총 이대위 소위원회에서 여러 달 조사를 받은 결과 이단이 아님이 밝혀졌고, 한기총 이대위 전체모임에서 이것이 받아들여졌고, 한기총 임원회까지 통과되어 적법한 절차를 밟아 이단이 아님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기총에서 이단이 아니라는 공식문서까지 떼어주었습니다.
저는 다시는 이런 글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이단사냥꾼들의 거짓말에 속아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있고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고 성도들이 은혜 받는 일을 방해하고 있어 부득이 이 글을 올립니다.
과거 제가 백석 교단에 속해 있을 때 이대위가 두 해 동안 저에 대해 조사하고, 총회장이 교단 총무를 여러 번 몰래 파견시켜 예배를 드리게 했지만 전혀 이단성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단 하나, “구원 받은 사람도 버림 받을 수 있다”는 교단 간의 교리 차이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총회장이 저와 만나 이 모든 사실을 전해주고 이단성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백석 이대위에서도 저에게 요구한 것은 “구원 받은 사람도 버림 받을 수 있다”는 견해를 포기하라는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는 일인데 성도 하나가 옮긴 것에 앙심을 품은 증경 총회장 양병희 목사가 적법한 절차도 밟지 않고 총회 때 자기 사람들과 짜고 불법적으로 제명출교를 시켰습니다. 주님, 백석 교단의 불의를 용서하소서!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지금은 도리어 그 자신이 이단으로 밝혀진 이단사냥꾼들의 괴수 최삼경이 통합 교단에서 저에게 서면, 전화, 출석 등 사실 확인이나 해명을 위한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거짓으로 도배한 자료들을 가지고, 게다가 이대위 출석위원이 정족수 미달임에도 불구하고 불법으로 이단으로 매도했습니다. 이것은 통합감사위에서도 불법이라고 지적한 바 있고, 통합 부총회장급 인사가 통합의 결정이 불법이었음을 저에게 증거자료와 함께 직접 제보해주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 외 몇몇 교단이 최삼경과 한 통속인 이단사냥꾼 4인방들의 작업에 놀아나 들러리를 서기 시작했는데, 합동은 성경대로 회개를 강조하고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강조하는 것을 ‘신율법주의’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흠집을 내고, 고신은 밥 존스 목사님의 사후체험 간증에 나오는 인류의 2%를 믿는 자의 2%로 악의적으로 바꾸어(그것도 사실을 가르쳐 주어도 고치지 않고) 극단적으로 보이게 만들어 교류금지를 끌어내고, 합신은 학력위조자이며 “바나바도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등 성경적으로 지극히 무지한 자인 최삼경의 하수인 박형택이 나서서 매도를 하고, 기성은 자체 조사에서 이단성이 없다는 결론이 나고 다시는 다루지 않기로 한 것이 신문에까지 나왔는데, 압력을 받고 말을 바꾸어 역시 이단자 최삼경과 손이 닿아 있는 박문수 교수의 주도로 교류금지 결정을 내리고, 예성 역시 장로교의 압력에 굴복하고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는 장로교의 교리가 자기 교단의 교리인 줄 알고 자기 교단의 교리인 “구원받은 자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저의 주장을 문제 삼은 어이없는 이대위 위원장과 이단자 최삼경의 하수인들의 작업으로 교류금지를 시키고, 1년 조사 후 이단으로 매도하려 했다가 자신이 없자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습니다.
이런 수많은 이단시비의 과정 중 저를 실제로 불러서 조사한 곳은 백석과 한기총 뿐입니다. 그런데 상기한 대로 백석 교단은 이단성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고, 한기총은 “교단 간에 있을 수 있는 교리적인 차이일 뿐 이단이라고 할 수 없다” 즉 이단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모든 과정을 적법하게 밟아서 내려진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이단자 최삼경과 이단사냥꾼 4인방이 여기에 승복하지 않고 장로교 교단들을 격동시켜 실행위에서 재조사 결정을 끌어냈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법적으로 불법이며 무효입니다. 실행위는 이대위 소위원회, 전체모임, 그리고 임원회까지 통과한 결정에 대해 뒤집을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기총은 이대위 구성을 보류하고 사실상 재조사를 하지 않기로 하였고 이대위 조사 결과를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한기총의 여러 인사들로부터 직접 들었고, 이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로 얼마 전 한기총 회장 길자연 목사님 명의로 떼어 준 다음과 같은 증서를 제시하는 바입니다.
이 증명서는 제가 소속되어 있는 부흥교단에서 한기총에 저에 대한 조사결과를 문의했을 때 한기총에서 보내온 공식적인 문서입니다. 이것을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저 들쑤시고 선동하고 매도하려는 들개와 같은 이단사냥꾼들과 그들에게 영향 받는 분별력 없는 목사들이 한국 교회 안에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끄럽게 하지 않으려고 공개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교회를 거짓으로 악질적으로 매도했던 최삼경은 한기총에 이어 합동 교단에서도 이단으로 판정이 났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거짓말을 근거로, 그리고 불법으로 이단으로 매도한 것을 당연히 푸는 것이 상식이고 정의 아니겠습니까? 교단들과 교회들에 양심이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종교는 지금 이 순간도 전국의 각 교회 세미나에서 큰믿음교회를 이단이라고 음해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현대종교의 주장은 당연히 거짓입니다. 제가 그 증거를 제시하지요. 전에 한기총 이대위에서 조사 받을 때 조사 결과 이단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자 늘 우리 교회를 음해하는 쓰레기 같은 기사를 써왔던 현대종교가 당황하여 조사 결과를 뒤집으려고, 그동안 여러 차례 써 온 음해성 기사들을 모두 모아 이대위에 제출했습니다. 분량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어 저는 그 쓰레기 같은 기사들에 대해 해명하는 긴 글을 힘들게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해명 글들로 인해 현대종교의 그 동안의 기사들이 사실무근이고 기술적으로 짜집기하여 저의 의도와 다르게 악의적으로 작성한 파렴치한 음해성 기사들임이 모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종교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단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결정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종교에 양심이 있다면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지 지금처럼 뻔뻔하게 그러고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그리고 목회자들과 신자들도 더 이상 이런 거짓된 현대종교의 주장에 속아서, 같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은 형제를 이단이라고 매도하며 핍박하면서 흡혈귀처럼 그 피를 마시며 즐거워해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지만, 요즘 학교 안에서의 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따와 집단 린치는 학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 안에도 존재하며 학교보다 더 심했으면 심했지 그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왕따를 당하고 집단린치를 당하고 있는 곳이 바로 큰믿음교회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단시비에 있어서 이처럼 중세암흑시대와 같이 된 것은 목회자들 가운데 이기주의와 보신주의가 팽배하여 거짓된 악인들은 큰 소리를 내고 계속 짖어대며 거짓말을 퍼트리는데, 바르고 양심적인 목사님들은 진실을 알아도 그들의 눈치나 보며 비겁하게 침묵으로 일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많고 인격적이며 성숙한 척하며 거짓으로 음해하고 박해하는 자들에게는 한 마디 책망도 못하면서, 음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용서와 사랑과 겸손과 침묵을 강요하는 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짐승도 동족끼리는 잡아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교회를 잡아먹고 목사가 목사를 잡아먹는 것이 불의한 이단시비입니다. 이제 이런 사악하고 악마적인 이단시비는 교회 내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대종교의 거짓 주장에 속아 오셨던 분들은 이제라도 진실에 눈을 뜨시고 앞으로는 용기 있게 바른 목소리를 내주시기 바랍니다.
p. s. 위 글에서 저는 “이 증명서는 제가 소속되어 있는 부흥교단에서 한기총에 저에 대한 조사결과를 문의했을 때 한기총이 보내온 공식적인 문서입니다. 이것을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저 들쑤시고 선동하고 매도하려는 들개와 같은 이단사냥꾼들과 그들에게 영향 받는 분별력 없는 목사들이 한국 교회 안에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끄럽게 하지 않으려고 공개하지 않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역시나 제 예상이 맞았습니다.
일의 시작부터 한 사람의 목사로서 신앙양심을 걸고 정직하게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한기총에서 우리를 이단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는 그때부터 이미 그것은 양심적인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양심적으로 결정을 내리면 깨끗하게 “절대 이단이 아니다. 오히려 본받아야 될 교회이다. 각 교단들은 사과하라.” 이런 결정을 내리고 음해한 자들을 징벌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공의입니다.
그러나 제가 한기총에서 조사를 받을 때 엄청난 압력이 한기총에 가해졌습니다. 이단사냥꾼들에게 휘둘리는 한장총과 통합과 합동과 백석에서 엄청난 압력을 가해왔습니다. 분별력을 잃은 C. C. C에서도 압력을 가해왔습니다. 그 압력들 때문에 한기총 이대위위원장과 일부 인사들은 조사 결과 이단성이 전혀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서 저에게 수없이 시인하고 인정하고도 정치적으로 타협하여 지저분한 단서들을 달아놓았습니다. 심지어 조사한 결과를 비겁하게 여러 차례 임원회에 회부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저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압력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참다못해 한기총 이대위위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이 시대의 본디오 빌라도 아무개 목사”라는 글을 인터넷에 게재한 것입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우리 교회 건이 정말 어렵게 이대위 소위원회와 전체 위원회를 거쳐 임원회까지 통과되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종료된 것입니다. 다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단사냥꾼 4인방과 일부 장로교 교단들이 합세하여 한기총 실행위에서 재조사 결정을 끌어내었습니다. 그 전 날 모 신문의 기자로부터 그 정보를 제가 받고 기성 총회장과 한기총 회장을 지낸 이용규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때 이용규 목사님은 그 얘기를 들으시고 “그것은 법에도 맞지 않고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그럴 수는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니 안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누구보다 한기총의 법을 잘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불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단시비는 절대 정치적으로 다룰 사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하무인으로 불의하게 재조사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저는 또다시 기가 막힌 뉴스를 전해 들었습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홍재철 목사)가 2일 제23회기 첫 임원회를 열고 주요안건들을 처리했는데, “변승우 목사(예장 부흥총회)에 대해서는 그의 본 소속 교단인 예장 백석 측의 입장을 존중해 해당교단으로 사안을 돌려보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정치목사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게 목사라는 자들이 모여서 할 짓입니까?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백석은 두 해 동안 조사하여 이단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교단 총회장과 총무가 직접 인정하고도, 정치적으로 불의하게 저를 제명 출교한 불의한 집단입니다. 그리고 문서까지 위조해가며, 한기총에 저를 조사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단으로 만들어달라고 주문하며 제소했던 불의한 집단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저의 문제를 돌려보내다니요? 이것은 뻔히 고문당하고 죽을 것을 알면서도 탈북자들을 북송한 중국의 행위만큼이나 악하고 불의한 것입니다. 이 뉴스를 밤에 보고 저는 마음이 상해서 새벽 5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결정들은 큰믿음교회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교계가 심각하게 썩었다는 반증일 뿐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과연 정의가 있습니까? 목사님들도 개교회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이단사냥꾼들이 지어낸 거짓말에 놀아나고, 교단들의 불의한 결정에 동조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또 진실을 아는 목사님들도 불이익이 두려워 바른 말 한 마디 못하는 벙어리 행세를 했습니다. 수많은 신문사 국장들과 목사님들이 몰래 찾아와 저에게 제가 이단이 아니며 불의하게 매도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공식 석상에서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일부는 사랑의 가면을 쓰고 인격적이고 성숙한 척하며, 불의에는 침묵하고 무책임하게 사랑과 용서타령만 했습니다. 이것은 가짜 인격이고 가짜 성숙입니다. 정의감을 상실한 인격, 불의에 분노하지 못하는 인격, 의분조차도 없는 이상한 온유! 저는 이런 것들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바울과 사랑의 사도 요한이 성경에서 보여준 인격과 종류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제외하고 사랑만 가지고 유지되고 번성할 수 있는 단체나 국가는 없습니다. 반드시 질서유지를 위한 법과 경찰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단과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도 민법을 주셨고, 예수님과 바울도 사랑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징계나 출교에 대해서 말씀한 것입니다(마 18:15-17, 고전 5:1-5, 11-13). 그러므로 교회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랑과 용서타령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교계가 불법천지가 됩니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일삼는 악한 자들을 책망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징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법이 물 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아모스 5: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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