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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절강성(浙江省/저장성)이야기를 제13편까지 연재하다가 중단하였다.
오늘 다시 계속하면서 계구박물관(溪口博物館) 관람기를 끝냈으니, 이번 회
에서는 장개석(蔣介石)과 그의 부인에 얽힌 이야기로 연재를 계속한다. 장개
석의 표기를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이전에는 “장개석(蔣介石)”이라고 하다
가, 그 이후에는 공식으로 중국 한어(中國漢語)표기의 보통화(普通話)평음으
로 “장졔스(蔣介石 : Jiǎngjièshí)”라고 하고 있지만, 그는 절강성(浙江省)출신
이라 절강성(浙江省)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어인 월어(粵語)로 “치앙카
이섹”이라고 발음하고, 영어표기도 대개 월어(粵語)의 음역(音譯)인 Chiang
Kai-shek이라고 한다.
그리고 1949년이후 그의 정치적인 활동무대이던 대만(臺灣)에 우리가 가보면
장개석(蔣介石)의 표기는 Chiang Kai-shek이나 그의 본명인 장중정(蔣中正)
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도원공항(桃園機場/ 타오위안공항)으로
변경된 장개석공항(蔣介石機場/ Chiang Kai-shek Airport)이라든지 중정기
념당(中正紀念堂) 등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장개석(蔣介石)의 아버지는 장조총
(蔣肇聪)이고、어머니는 왕채옥(王采玉)이고, 그에게는 4명의 부인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장경국(蔣經國)이 유
일하고 장위국(蔣緯國)을 양자로 들여놓았다고 기술하였다
.
장개석(蔣介石)의 배우자(配偶者)에 대한 이야기는 첫부인인 모복매(毛福梅 :
1901~1921)로부터 측실인 요야성(姚冶誠 : 1912~1927)、진결여(陳潔如 :
1921~1927)、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평생을 바쳐 사랑했던 송미령(宋美齡 :
1927~1975))을 포함해 4명의 부인들과 풍류사를 기록하였다. 오늘은 장개석
(蔣介石)의 유일한 혈육 아들인 장경국(蔣經國)의 어머니이면서, 첫 부인인 모
복매(毛福梅)와의 관계 이야기를 써본다
.
● 모복매(毛福梅/ Máofúméi : 마오푸메이 / 1882.11.9~1939.12.12)
1901년 당시 14살이던 장개석(蔣介石)은 부모의 의사대로 절강성(浙江省) 봉
화현(奉化縣)에서 자신보다 4살 연상인 모복매(毛福梅)와 혼인을 맺었다. 농사
일에 상업을 곁들여 한 모복매(毛福梅)의 부모는 봉화현(奉化縣)일대에서 소문
난 부자였고 모복매(毛福梅)의 두 오빠들도 모두 고학력자였지만 “여인들은 모
르는 것이 복”이라는 당시의 전통에 따라 모복매(毛福梅)는 학교대문에도 들어
가 보지 못한 사람으로, 전형적인 중국의 전족(小脚)여인이었다.
혼례식 날, 신부를 실은 꽃가마가 대문에 들어서자 폭죽이 요란스레 터지기 시
작했다. 마을 조무래기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폭죽 꼬투리를 줍느라 법석을 떨자
장개석(蔣介石)도 얼른 달려 나가서 조무래기들 속에 끼여 폭죽꼬투리잡기에 열
을 올렸다. 새신랑의 철없는 행동에 주위에서는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다.
2년 후, 장개석(蔣介石)이 학업을 위해 녕파(宁波←寧波/닝보)로 가게 되자 모복
매(毛福梅)는 남편을 따라나섰다. 녕파(寧波)에서 학습하는 동안 부부는 일생 중
가장 뜻 깊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1905년, 장개석(蔣介石)은 일본유학길에 올
랐고 그때부터 모복매(毛福梅)와도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1910년에 큰아들
장경국(蔣經國)이 태어났지만 장개석(蔣介石)은 여전히 모복매(毛福梅)를 냉대하
였다.
아들 장경국(蔣經國)이 3살 되던 해, 장개석(蔣介石)은 상해(上海/상하이)에서 한
여인을 데려왔다. 그녀가 바로 장개석(蔣介石)의 둘째 부인인 요야성(姚冶誠 : 야
오예청 / Yáoyěchéng)이다.
1921년 6월,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친 장개석(蔣介石)은 가족들 앞에서 모복매
(毛福梅)와의 결혼생활을 끝내겠다고 선포했다. 그렇게 시작된 모복매(毛福梅)와
의 이혼전쟁은 네번째 부인 송미령(宋美齡)과의 결혼을 앞둔 1927년에야 끝을 맺
었다. 결혼26년만에 결국 장개석(蔣介石)과 이혼한 모복매(毛福梅)였지만 오래토
록 장개석(蔣介石)의 가족들에게 충성을 다했던 까닭에 가족들 모두가 모복매(毛
福梅)를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복매(毛福梅)는 이혼후에도 계속 장씨집
(蔣氏家)에 눌러살면서 유명무실한 며느리가 되었다.
1939년 12월 12일, 일본침략자들이 장개석(蔣介石)의 고향집을 폭격하여 모복매
(毛福梅)는 결국 57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감한 뒤, 장씨가(蔣氏家) 선산묘지에 안
치되었다.
▶ 장개석(蔣介石)의 본부인이며 장경국(蔣經國)의 모친인 모복매(毛福梅)는
1882년 11월 9일에 절강성(浙江省)의 봉화현(奉化縣)에서 출생하였다.
장개석(蔣介石)과 모복매(毛福梅)는 1901년에 부모의 명과 중매를 거쳐
결혼했다. 두 집안은 모두 사업을 자그마하게 꾸리는 집안이어서 가문이
서로 맞았다. 그해에 장개석(蔣介石)은 14살이고 모복매(毛福梅)는 18세
였다. 당시 절강성(浙江省)지역의 민속으로는 여자가 나이 많은 것이 일반
적이었으며 “4년 차이가 가장 좋은 짝이며 아주 길하고 이롭다”고 했다.
결혼식 때 장난꾸러기였던 장개석(蔣介石)은 웃음꺼리를 만들어냈다. 원래 신부의
꽃가마가 남편의 집안에 도착하면 폭죽을 터뜨린다. 그때 놀이를 즐기던 아이나 결
혼식에 참가한 아이들은 모두 몰려나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폭죽을 줍곤 하였다. 신
랑인 장개석(蔣介石)은 원래 집안에서 결혼식을 준비해야 했는데 이 광경을 보고는
자기가 지금 무슨 입장인지도 모르고 곧 아이들 틈으로 달려 나가서 땅바닥에 떨어
지는 폭죽을 줍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친구들과 손님들이 이를 보고 모두 박장대소
를 했다고 한다. 봉화현(奉化縣)에는 “신랑이 폭죽을 주우면 그 부부는 끝까지 가지
못 한다” 는 속설이 있었으므로 이런 행위는 금기에 해당되는 일이었다. 장개석(蔣
介石)의 모친 왕채옥(王采玉)은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면서 욕을 했다. 신부도 가마속
에서 그 말을 듣고 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최종결과는 역시 이 말대로 되었다.
첫날밤에 장개석(蔣介石)은 신방에서 달아나 어머니의 침대에서 잠을 잤다. 그 말을
들은 모복매(毛福梅)는 서럽게 울다가 새벽이 되여 수탉이 울고나서야 잠들었다. 봉
화(奉化)지역의 풍속에 따르면 남녀가 결혼 후 정월 초이틀이 되면 신랑은 처갓집에
가서 세배를 드려야 한다. 왕채옥(王采玉)이 몇번이나 타이르고 나서야 장개석(蔣介
石)은 선물을 꾸려가지고 처갓집으로 갔다. 그날에 장개석(蔣介石)의 장인과 장모도
닭을 잡는다, 오리를 잡는다, 탕원(汤圆)을 만든다 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반
나절이 지나도 사위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장개석(蔣介石)의 집에서 처가까지
는 걸어서 3시간이면 닿을만한 거리이지만 해가 서산에 질 때까지 기다려도 사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손님들이 돌아가겠다고 하자 장개석(蔣介石)의 처가에서는 난처
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때 모복매(毛福梅)의 사촌동생 모홍방(毛鸿芳)이 숨을 헐
떡거리며 달려와서 사위가 왔는데 모가사당(毛家祠堂)에서 등불놀이를 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들은 장개석(蔣介石)의 장인인 모정화(毛鼎和)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9년 동안이나 글을 읽은 사람이 가문과 향리의 규율도 모르다니?
모정화(毛鼎和)는 급히 곁에 있는 큰아들을 보고 말했다.
“무보(武寶)야, 빨리 가보아라. 정말 너의 매제라면 그 보고 돌아가라고 해라. 오늘
은 찾아오지 말라고 해라.”
모무보(毛武寶)가 달려가려고 했지만 한발 늦었다. 문밖에서 징소리와 폭죽소리가
울리면서 등불대오가 다가오고 있었다. 제일 앞에 선 소년이 바로 장개석(蔣介石)
이였는데 신이 나서 폭죽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모정화(毛鼎和)는 화
가나서 사위인 장개석(蔣介石)을 막아서서 대통으로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너, 너 변변치 못한 놈아! 무슨 낯짝으로 찾아와서 이런 꼴을 보이느냐? 장씨(蔣家)
와 모씨 (毛家) 두 가문을 네놈이 더럽히는구나!”
장인에게 욕을 얻어먹은 장개석(蔣介石)은 난처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몸을 돌려 아
무렇지도 않은 듯이 달아났다.
결혼 후 처음 몇년간은 장개석(蔣介石)이 현소재지(縣城)와 녕파(寧波)에 가서 공부
를 하였는데 모두 모복매(毛福梅)가 동행했다. 두 사람은 수년을 함께 생활했다. 그
때 장개석(蔣介石)은 10여세여서 이미 다 컸지만 모복매(毛福梅)가 모든 것을 돌봐
주었다. 모복매(毛福梅)에게 있어서 장개석(蔣介石)은 남편이라기보다는 성질이 나
쁜 동생과 같았다. 한번은 두 사람이 싸워서 장개석(蔣介石)이 부인의 배를 발로 걷
어찼기에 그녀는 유산을 했다.
장개석(蔣介石)은 18세가 되자 우국우민(憂國憂民)의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으로 건너가서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장개석(蔣介石)은 귀국하여 여름방학을 보내
고 있었는데 상해(上海)에 머물렀다. 장개석(蔣介石)의 모친은 모복매(毛福梅)를 보
내서 장개석(蔣介石)을 돌봐주게 하였다. 모복매(毛福梅)는 신교육을 받지 못하고
전족(纏足)을 한 중국의 전통여인인지라 때로는 장개석(蔣介石)의 체면을 구기는 일
도 많았다. 장개석(蔣介石)은 여러 번이나 모복매(毛福梅)에게 크게 화를 낸 적이 있
었으며 오랫동안 그녀를 본체만체하기도 했다. 하늘의 뜻인지는 몰라도 모복매(毛福
梅)는 집으로 돌아간 후에야 임신한 것을 깨달았고 다음해 봄에 장경국(蔣經國)을 낳
았다.
모복매(毛福梅)는 그때부터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생겼다. 그녀는 전력을 다해서
아들을 돌보았다. 그때 장개석(蔣介石)의 풍류는 점차 장개석(蔣介石)의 모친의 귀
에도 들려왔다. 장개석(蔣介石)의 모친은 아들에게 자신이 죽은후에라도 모복매(毛
福梅)를 잘 대해주라고 엄명했다. 장개석(蔣介石)은 모친의 말을 잘 따라서 하나 하
나 모두 응낙했다.
모복매(毛福梅)가 장씨(蔣氏)집안에 시집온 지 20년이 지난 1921년에 그녀가 친어
머니처럼 따르던 시어머니인 장개석(蔣介石)의 모친 왕씨(王采玉)가 갑자기 돌아가
셨다. 모복매(毛福梅)는 의지할 곳을 잃었다. 장례식을 끝낸 후 반년도 되지 않아 장
개석(蔣介石)은 모복매(毛福梅)의 오빠에게 편지를 보내어 모복매(毛福梅)와 이혼하
겠다는 뜻을 밝혔다. 편지내용은 대개 이러했다.
“10년 동안 발걸음소리만 듣거나 사람그림자만 보아도 자극을 받았다. 내가 이제 결
심을 했는데 이는 10년의 고통이다. 10년 동안의 자극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침통하고 비감한 심정이다.”
이런 내용을 살펴볼 때 이혼할 생각을 가진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장개석(蔣介石)은 먼저 상해(上海)에서 요야성(姚冶诚)을 품었고 나중에 진결
여(陳潔如)를 취했다. 그리고 원래의 부인에게 이혼요구서를 보낸 것이다. 모복매
(毛福梅)에게 있어서 이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그와 아들은 함께 끌어안고 눈물
을 흘렸고,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게다가 또 하나의
타격이 뒤를 이었다. 장개석(蔣介石)이 아들에게 상해(上海)로 와서 공부하라고 한
것이다. 계구(溪口)의 옛날 집에는 모복매(毛福梅)만이 홀로 남았다.
3년 후인 1925년에 장경국(蔣經國)이 소련으로 유학을 가게 되어 모자간은 그 후
12년간을 떨어져서 지낸다. 첫2년간은 서신왕래가 있었지만 나중에 장경국(蔣經國)
이 소련신문에 “장개석(蔣介石)을 성토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후 집안으로부터의 모
든 서신연락이 두절되었다. 1927년이 되여 장개석(蔣介石)은 송미령(宋美齡)에게 청
혼했는데 송씨(宋氏) 집안에서는 반드시 원부인과 공개적으로 이혼을 선포하도록 요
구했다. 장개석(蔣介石)은 계구(溪口)로 돌아가서 모씨(毛氏) 집안에 자기의 뜻을 밝
혔다. 모씨(毛氏) 집안에서는 관례에 의하여 “모복매(毛福梅)는 이미 장씨(蔣氏)집안
에 시집갔으니 살아도 장씨(蔣氏)문중의 사람이요, 죽어도 장씨(蔣氏)의 귀신”이라고
답변했다. 장개석(蔣介石)은 이 말을 듣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잘못 처리하면 사람
의 목숨이 달린 일이였다.
어느 날 장개석(蔣介石)은 몰래 옛집으로 모복매(毛福梅)를 찾아갔다. 모복매(毛福
梅)는 마침 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장개석(蔣介石)은 그
녀의 눈빛이 멍하고 비통해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영 언짢았다. 그는 그녀에게 이
혼 후에도 그녀가 여전히 옛집의 안주인으로 남게 해줄 것이며 주변사람들에게 그녀
를 “대사모(大师母)”로 부르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생활의 모든 필요한 것
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하였다. 모복매(毛福梅)는 어쩔 수 없이 이혼합의문서에 서
명하였다.
10년 후에 장경국(蔣經國)은 러시아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모복매(毛福梅)
는 마침내 아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모복매(毛福梅)가 며느리의 중국이름을 묻자 장
경국(蔣經國)은 부친이 중국이름을 “방랑(方娘)”으로 지어주었다고 말했다. 모복매
(毛福梅)는 “랑(娘)”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하였다. 그녀보다 배분이 높은 사람들마저
그녀를 모두 “랑(娘)”이고 부르면 복이 달아날 것이니 “방량(方良)”으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 량(良)은 어질고 현명하다는 뜻이니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후
장방량(蔣方良)이란 이름을 계속 쓰게 되었다.
아들, 며느리, 손자와 함께 한 기간이 모복매(毛福梅)에게는 결혼 후의 여러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기간이었다. 그녀는 아들과 손자를 데리고 있으면서 그들이 좋
아하는 고향음식을 많이 만들어 먹였다. 아들도 생활이 안정되면서 모친을 모시고 함
께 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들과의 이 만남이 그녀와
아들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는 점이다. 반년 후에 일본군의 비행기가 계구(溪口)를
폭격했고 모복매(毛福梅)는 불행히도 총알을 맞고 무너진 담장에 깔려 죽고 말았다.
그녀의 나이는 그때 58세였다.
1947년에 장개석(蔣介石)이 고향집으로 돌아와 성묘를 했다. 아침에 그는 홀로 모복
매(毛福梅)의 묘에 가서 묵묵히 3번 절을 했다. 이것이 그녀에 대한 그리움인지 미안
함인지 작별인사인지 장개석(蔣介石)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모복매(毛福梅)는 어려서부터 여러 사람들이 그녀의 명을 점쳐 주었다. 그녀의 남편
과 아들은 모두 크게 부귀하고 높으면서 소중한 위치에 서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
였는데, 이 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다만 점쟁이는 남편과 아들의 부귀가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일생은 더 할 수 없
이 외롭고 처량하였다.
▲ 모복매(毛福梅 : 1882~1939)
▲ 모복매(毛福梅) 왼쪽、蔣經國을 안고있는 蔣介石母 - 가운데、오른쪽 - 蔣介石
▲ 가운데 손자 蔣孝文을 안고있는 모복매、오른쪽 소련며느리 蔣方良、왼쪽 - 蔣經國
▲ 일본비행기 폭격으로 죽은 모친 毛福梅를 생각하며 蔣經國은 "以血洗血"비석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