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알리는 플래카드를 보고
이원을 가다가 “개교40주년 기념 가을운동회”란 플래카드를 보았다. 물론 양 끝에 ‘경축’이란 문구도 들어있는 산뜻한 하얀 바탕의 플래카드이다. 비록 사지가 묶인 채지만 플래카드는 알리는 사실이 자랑스러운지 가을바람 타고 연실 창공에 펄럭펄럭 소리쳐 나부낀다.
몇 글자 얹은 천 조각으로 만국기 휘날리며 한동안 떠들썩할 소읍동네가 스르르 떠오르는 것은 참으로 용한 일이 아닌가. 나는 내 글이 플래카드를 닮기를 바란다. 어제도 그러했다. 떠오른 착상의 전개가 속 시원하지 않더니만 결국 경착륙을 하고 말았다.
플래카드처럼 몇 마디 추슬러 속을 알차게 전하자는 의도지만 막상 쓰자면 그리 되지 않는다. 짧게 쓰자고 하면 할수록 길어지고 오히려 그로 경직하여 낙망하고 만다. 잘 쓴 글은 짧지만 플래카드처럼 눈에 확 들어온다. 요즘 플래카드는 무척 흔하다.
흔하니 우습게볼지 몰라도 나름 현수막은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하겠다든지 혹은 언제 어디서 누가 왜 이 현수막을 올린 것인지가 또박또박 박혀있다. 기사보다 선명하고 웬만한 글보다 형식이 충실하다. 이를 가까이 들여다보면 어떻게 라는 사항은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점이 매력적이다 싶다. 펄럭이는 현수막이 바디액션을 하며 때론 기분을 전하기도 하지만 누가 무엇을 또는 누가 왜 란 사실에서 당연 알아차려줄 것이라 믿는 속셈이 있는 것이다. 유명 가수 누가 온다는 사실로서 벌어질 상황이 상상되고 대변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글도 적나라하지 아니하면서 은근하게 알아서 상상해주기를 바라는 여운있는 글이 제 맛이고 멋진 글이 많다.
나는 신문기사의 어떻게 하여 이 상황인지의 내용이 싫어 건너 띈 적이 종종 있다. 간판처럼 늘 한자리 고정 출연 없이 늘 색다른 알릴 거리를 제공하는 현수막은 너무 흔하여 이제 가격도 고작 일 만원이다. 나는 꾹 참고 견디다 쓴 큰 한 획의 묵직한 글도 괜찮겠지만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선 촐랑거리는 값싼 글이라 하여도 괜찮다 싶고 오히려 위태한 내 성미에는 맞다 싶다.
때론 플래카드는 알찬 내용으로 많은 관중을 모으기도 하고 아픈 사실을 많이 알려 많은 호응을 받기도 한다. 역사의 현장엔 늘 플래카드가 함께 한다. 나 역시도 내 글로 많은 독자가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고작 책을 내봐야 내가 나를 알리는 정도에 불과한 처지로서는 천 조각에 몇 글자 실린 허술함이지만 결코 우습게 보이지가 않는다.
현수막은 내용이 몇 자 크게 차지하고 이를 게재한 주체가 작게 모서리에 차지한다. 나 역시도 나는 누군지 몰라도 아 그런 글을 누군가가 썼는데 하는 내용만이라도 사랑해준다면 나는 꽤 행복할거다. 아니 그보다는 현수막은 늘 미래를 말하기에 더없이 좋다. 과거를 들추자는 목적이 전혀 없기 때문 기대가 크거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고 언제지 하는 사항을 다시 확인하게도 된다.
이쯤에 이르러선 말도 안 되는 경우일테지만 내 글 집이 언제나 나오지 하는 기대를 갖는 상황이 연출된다면 나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제는 아쉬운 노릇이지만 나는 박완서 선생이나 법정스님의 글이 언제 나오나 하는 기대를 늘 갖고 있었다. 돌아오면서 그 현수막에 내 뜻을 남모르게 달아 부쳤다.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의 저자 40주년 기념 가을 산책” 물론 양 끝에 경축을 매달고.(2012 1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