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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진원지를 찾아서
―화제작가, 시인 이은봉
김선희 정리
한바탕 바람이 분다. 달리는 바람 치솟는 바람 휘몰아치는 바람이 분분하게 돌아다니며 날아오른다. 빠르게 틈을 파고들다가 골짜기에 팍 나자빠진다. 쌈지 공원 벤치 위에 널브러지거나 폴짝폴짝 언덕을 뛰어다닌다. 붉은 이빨로 하늘을 물어뜯다가 지치면 날카로운 발톱을 서둘러 감춘다. 숨결처럼 생명을 키우기도 하지만 성이 나면 살아있는 것을 모조리 먹어치운다. 바람은 먹고 고뇌하고 사랑하고 일한다.
그러니 바람은 움직임이고 사람이고 생명이다. 자연은 바람을 타고 운동하며 수많은 생명을 생성한다. 운동하고 생성하는 곳 어디든 편재하는 변화무쌍의 바람을 잡을 수 있을까. 사람과 생명, 우주와 자연의 신비에 천착해온 시인 이은봉의 최근 시집 ≪봄바람, 은여우≫를 열면 생령의 바람들이 화악 얼굴로 불어온다. 지구 위 모든 바람이 이 한 공간에 오롯이 모인 듯하다. 생기 충만한 바람을 한 곳에 잡아놓은 바람의 진원지를 찾아 이은봉 시인을 만났다. 그는 실제로 직장인 광주에서 집이 있는 서울로 20여 년을 바람처럼 움직여 왔다. 부처님 오신 날이 낀 주말, 서울로 올라온 그를 만났다. 지금은 세종시가 된 그의 고향 공주에서 어머니를 뵙고 온 길이라고 한다.
생명
앞서 얘기한대로 시인 이은봉의 시집 『봄바람, 은여우』는 바람의 시집이다. 바람에 대한 시인의 사유가 삶의 이야기들을 품은 채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는 오래전부터 생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고 자연과 인간, 우리 삶의 연관성에 예민하게 주목해왔다. 이번에는 바람이 그의 사유 대상이 되었다.
“바람은 생명의 상징이다. 생명은 자유롭고 대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된다. 지금 우리는 생명과 생명끼리 억압하려 하고, 특히 인간 생명이 자연 생명을 억압하고 있다. 그런 현상을 바람의 이미지를 통해 얘기하고자 했다. 또 바람은 변혁의 이미지이다. 생명 자체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인데 바람을 통해 생명의 본원적인 특성을 얘기한 것이다. 바람의 시들은 바람의 속성인 생명성이 자연스럽게 개화되는 세상에 대한 꿈에서 나온 것이다.”
시인만이 이토록 변화 많은 바람의 개성을 다 이해하고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그는 자연의 대상들을 객체로만 보지 않기 때문이다. 대상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이야기를 하게 한다. 자연 현상과 시인이 일체가 되는 불이(不二)의 경지이다. 주체가 투영된 많은 바람 중에서도 특별히 시인 자신의 모습과 닮은 바람이 있을 것이다.
“내 삶도 어떤 때는 훈풍으로 자연스럽게 떠돌기도 하지만 어떤 국면에서는 골짜기에 처박히거나 공원에 누워 있기도 한다. 바람은 글자가 비슷한 ‘사람’이기도 하다. <금요일의 바람>이라는 시도 있는데 금요일의 바람은 금요일의 사람이라는 뜻이고 그것은 바로 나다. 나는 금요일이면 역마살이 낀 것처럼 움직인다. 가족들은 서울, 난 광주에 있으니까. 금요일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금요일의 바람이다.”
이은봉 시인은 1996년 시집 『무엇이 너를 키우니』를 간행하면서부터 생태 환경에 관심을 갖고 생태시를 쓰기 시작했다. 특히 시집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2002년)와 『걸레옷을 입은 구름』(2013년)에 생태환경에 대한 관심이 집중적으로 담겨 있다.
“전에는 자본주의 모순으로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만 생각했다. 계급과 민족 문제의 해결을 모색한 것은 더 좋은 세상에 대한 꿈, ‘근대의 바깥’에 대한 꿈이 있기 때문이다. 이후 한 가지 더 중요한 모순으로 인식한 것이 생태환경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마음에 대한 관심과도 연결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중요한 가치인 자유와 평등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실현이 어렵다. 나는 그와 관련한 시 작업을 쭉 해오고 있다.”
생태시를 써 오며 그가 또 하나 생명의 원천으로 본 것은 돌이다. 그의 시집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에 돌에 관한 시가 몇 편 들어 있다.
돌덩어리 속 침팬지들, 안으로 끌어들인 산 기운, 파랗게 키우고 있다 生靈들, 그렇게 주춤주춤 커가고 있다 차마 깨뜨릴 수 없는 우주다// … 저 바윗덩어리들, 그렇게 나다 아버지다 할아버지다 누구도 제 손자들, 여기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제석산 오랜 소나무들처럼… –「침팬지의 집」 부분
아침 산책길, 돌멩이 하나 문득 발길에 채인다 또르르 산비탈 아래 굴러 떨어진다 저런저런… 내 발길이 그만 세상을 바꾸다니! – 「돌멩이 하나」 부분
시인은 돌 속에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생명이 들어있음을 발견한다. 돌은 생명이 태어나고 이어지는 탄생의 자리이다.
“돌에 대한 시는 근원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근원에 대한 관심은 진보적일 수밖에 없는데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은 내게 늘 있어온 것이다. 과학자들도 물질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예술가들도 존재의 근원에 대해서 모색한다. 바슐라르가 주목한 물 불 공기 흙과 같은 사원소가 그렇다. 돌의 한 형태가 흙이다. 흙이 중요한 것은 사물의 구체적 모습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구체적인 모습이 흙이다. 흙에서 풀과 나무가 나오고 그걸 먹고 동물이 살고, 이렇게 광물에서 식물이 나오고 식물에서 동물이 나오는 순환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 지구이다. 생명의 순환 고리 중에서 선행하는 것을 흙으로 생각한 것이다.”
늘 생명을 중심에 놓고 자연과 세상을 사고해온 시인이라면 죽음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과 죽음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정말 어려운 문제다. 죽음은 시에서 중요한 화두이다. 한국의 시인들 중에서 죽음의 문제에 가장 깊이 천착한 사람은 김수영이다. 대학 입학해서 여러 시인들 섭렵했지만 4학년까지도 나를 사로잡은 시인이 김수영이다. 석사학위 논문이 「김수영 시에 나타난 ‘죽음’ 연구」였다. 생명과 죽음에 대한 관심은 김수영의 영향이다. 김수영에게 죽음은 사랑과 생명으로 나가는 죽음이고, 새로움으로 나가는 죽음이다. 나도 거기 동의하면서 한걸음 나가보려고 많은 생각을 했는데 결론은 ‘삶과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삶 속에 죽음이 들어있고 죽음 속에 삶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삶은 몸을 통해 구현되는데 몸에는 죽음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그 증거로 매일 머리카락이 빠지고 살비듬도 떨어져내린다. 죽음과 살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지만 죽음의 종착역을 향해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는 삶과 죽음, 대상과 주체와 같은 대립되고 모순되는 것들을 함께 품는 통합의 능력을 지녔다. 시적 대상의 독립성은 인정하면서도, 자아를 대상화해온 자기 성찰의 지난한 노력의 결과이다. 공감이라는 추상이 그의 시 속에서 실체를 얻는다.
“공감이라는 게 민주적 가치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으면 양가성이라는 건 불가능하다. 상대를 무시하면 사랑 또한 실현될 수 없다. 사랑은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불이(不二)라고 한다. 색즉시공, 현상과 본질이 하나이면서 둘이고, 성속불이(聖俗不二), 성인과 세속이 둘이면서 하나라는 것이다.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이런 양가적 의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탈근대, 근대 밖으로 나가기 위해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마음이다.”
자꾸 써지는 시
이은봉은 자신을 생래적으로 시인이라고 표현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돗자리>라는 시를 썼는데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돗자리가 벽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쓴 시라고 한다. 그 당시 시골 학교에서는 시가 뭔지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문학의 ‘문’자도 몰랐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나도 모르게 썼다. 중학교 때 시의 길로 들어서는데 도움을 준 두 명의 여자가 있는데 하나는 하숙집 딸. 그 아이를 내가 좋아했다. 그 아이의 언니가 있었는데 내가 여동생을 좋아하니 질투를 했다. 갈등이 생겨 하숙집을 옮기고 그 아이와 편지질을 시작했다. 이름으로 연꽃 연(蓮) 자에 꽃 화(花) 자를 썼는데, 편지를 쓰기 위해 시를 많이 읽었다. 『영시 100선』 같은 걸 사다가 베끼곤 했다. 또 책을 좋아하는 막내 고모가 있었다. 파독 간호사로 떠나기 전에 자기가 사놨던 한국문학전집과 다른 책을 주고 갔다. 김형석 선생의 『운명도 허무도 아니라는 이야기』, 안병욱 선생이 쓴 에세이들과 김소월 시집을 주고 갔는데 시집이 닳도록 읽었다. 소월을 좋아해서 소월 전집을 사서 읽고 열 번 스무 번 베껴 쓰기도 하며 김소월처럼 시를 써보곤 했다. 김소월 시의 품사를 분류해 노트를 만들기도 하면서 자연스레 시의 길로 들어섰다.”
대학 입학 때만 해도 시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안했다. 시인은 여자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고 작가보단 고전 시가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고 싶었다. 재수를 안했으면 작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두 번씩이나 대학을 떨어져서 슬프고 자기혐오도 생겼는데 시는 계속 쓰고 있었다.
“시는 쓰려고 해서가 아니라 자꾸 써졌다. 심각한 문제였다. 시가 자꾸 써져 공부를 못했다. 원하던 대학에 떨어지고 지방대 다니면서 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시인의 길을 택했다.”
그는 어린 시절 비교적 유복하게 자란 편이었지만 시인의 길이 평탄치만은 않았다. 그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굴곡과 투쟁, 좌절도 있었다.
“아버지는 사범학교를 나와 교사를 했지만 부잣집 도련님이라 집에 월급을 가져온 적이 없었다. 살림은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알아서 했다. 아버지가 처음 집에 돈을 가져온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인 것 같다. 그때 한번 가져오고 한동안 안 가져오다가 다시 돈을 가져오신 게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였다. 어머니 말로 저축이라는 걸 해본 건 아버지가 교감 선생님이 되고 나서인 50대 중반 쯤이라고 한다. 우리가 오남매인데 시골에서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오남매가 다 대학을 다니기 힘들다. 아버지가 동생들을 대학 보내며 달라지셨다.”
“석사 마치고 산업체 부설학교인 혜천여고에 부임했다. 1981년 3월에 갔는데 4월에 공장 노동자이기도 한 학생들이 파업을 했다. 아이들이 회사에서 쫓겨나면 자동적으로 학교에서 퇴학이다. 교육청 가서 싸우고 여기저기 도움을 청해 다른 산업체 부설학교로 옮겨 졸업시켰다. 대학 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이십여 명 있었는데 다 대학에 보냈다. 그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주동자로 몰리게 되고 산업체 부설학교에서 해직되었다. 3년 후인 85년 민중교육 사건이 터졌다. 대전 지역 운동권인 ‘삶의 문학’, 서울의 ‘오월시’ 동인, YMCA교사협의회 멤버들과 같이 《민중교육》이라는 무크지를 만들었다. 그때 나는 혜천여고에서 해직되고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고 있었다. 그 사건에 연루돼 대학강사도 쫓겨났다. 충청도 지역에서는 빨갱이라고 몰려서 교직에 갈 수가 없었다. 힘든 시기였다. 포기하고 서울에 올라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활동하며 90년대 중반까지 시간강사로 살았다. 그러다 95년에 광주대학교로 가게 됐다. 그동안 아내가 중학교 선생을 하며 살림을 꾸려나갔다.”
광주에 가족과 같이 내려가지 않고 오랫동안 주말부부로 지내온 이유가 무엇인지 당연히 궁금했다.
“처음에 집사람이 날 못 믿어서 그랬다. 저 사람이 얼마나 오래 있을까 했다. 지금처럼 오래 있을지 몰랐다. 여러 번 해직의 경험이 있어서 광주대로 갈 때는 학교문제에 대해선 일체 관여 안하기로 했다. 국가나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얘기를 하고, 학내문제는 세 군데서 쫓겨날 정도로 할 만큼 했으니까 그만해야지 했다. 근데 우리 학교가 괜찮은 학교다. 사립학교지만 큰 비리가 있거나 교수들을 억압하는 학교는 아니다.”
젊었을 때는 혼자 있는 것도 괜찮았지만 이제 나이 들어서 힘들기도 하다고 한다. 그래도 혼자 있으니까 공부도 많이 하고 글 많이 쓰고 생각도 많이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는 참 공부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문인과 닮았다.
마을 공동체와 희망
이은봉 시인의 고향은 공주군 장기면 당암리 막은골(杜谷)이라는 곳이다. 고향은 시인에게 중요한 시적 매개체이다. 영감의 원천이 되어 연작시 「막은골 이야기」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에게 막은골은 시가 지닌 꿈의 원형이고, 서정주에게 ‘질마재’, 백석에게 ‘여우난골’이 가지는 의미와 유사한 곳이다. 그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는 그의 고향처럼 마을 문화가 살아 있는 공동체이다. 그런 고향이 세종시가 들어서며 다 파괴되었다. 무차별적인 자본주의 개발로 인해 그곳에 깃들어 살던 생명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도 무너졌다. 세종시로 갈아엎어진 마을을 보며 그가 느낀 절망은 컸다.
“내 고향인 막은골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세종시가 들어섰다. 건축과 건설은 자본주의 근대 사회의 특징이다. 건축과 건설이 오염문제도 만들고 자연 파괴를 불러온다.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건설이 불가피하다면 도시를 건설하면서도 옛날 공동체 시절의 가치를 살려가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공동체의 복원이라고 하면 마을 문화의 복원이다. 윤리나 사람살이의 근본 도리는 다 마을에서 나온 것이다. 마을은 또 언어의 보고다. 조그만 모퉁이, 논이나 밭도 다 이름이 있었다. 이름이 있었다는 것은 존귀하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도시 건설로 이름들이 사라지면서 존재들이 사라지고 동시에 그것들이 지닌 가치들도 사라지는 것이다.”
그가 가슴에 품고 있는 가치는 모두가 동의하는 보편적 가치인 자유, 평등, 사랑, 평화, 정의이다. 그가 시에서 표현하고 싶은 가치도 그 다섯 단어로 표현될 수 있겠다. 생명들이 가진 이런 가치들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시로 표현하는 것이다.
“바람은 동사로 하면 ‘바라다’이다. 희망이라는 말과 같다. 바람에는 윈드(wind)와 호프(hope)의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생명의 가치가 실현되는 세상에 대한 희망, 그걸 나 자신이 실현하려고 하는 각오와 의지를 바람에 담으려고 했다.”
2년 후면 재직하고 있는 광주대학교에서 정년을 맞는다. 이후의 계획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늘 꿈을 잃지 않는 시인은 이제 고향에서 시작할 새로운 삶을 꿈꾼다. 공동체가 사라진 절망 속에서도 시인은 희망을 품는다. 고통 속에서도 마음속의 황금나무를 키운다. 생명들이 서로 존중하는 세상을 꿈꾼다. 그는 다른 모든 것이 질려도 시는 질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에게 여전히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시, 그가 이 시를 통해 깨달은 지혜와 지식으로 고향의 마을 문화를 복원하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한국산문》, 2016년 0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