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흘구곡(武屹九曲詩)/한강 정구
武 屹 九 曲 詩 /寒岡 鄭逑
序詞 (서사)
天下山誰最著靈 천하의 산에서 어느 곳이 가장 신령스러울까?
(천하산수최저령)
人間無似此幽淸 인간 세상에서 이처럼 그윽하고 맑은 곳이 없다네.
(인간무사차유청)
紫陽況復曾棲息 주희 선생께서 일찍이 깃들었던 곳 같아
(자양황복증서식)
萬古長流道德聲 만고에 길이 도덕과 명성이 흐르네.
(만고장류도덕성)
견도루-회연서원의 문루(門樓)
~~~~무흘구곡~~~~
경북 성주 출신으로 성리학적 세계관을 실천한 도학자 한강 정구(1543~1620)의 자취가
서린 무흘구곡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 성주 대가천을 거슬러 오르며 풍광이
빼어난 아홉 곳을 골라 차례로 이름 붙이고 노래를 남긴 그의 풍류가 깃든 곳이다.
제1곡 봉비암에서 제9곡 용소까지 그 전체 길이는 장장 35km에 이른다.
안내판
제1곡은 회연서원이 있는 봉비암으로 성주 수륜면 신정동, 소위 양정소가
있는 바위 언덕이며,
제2곡은 한강대로 수륜면 수성동 갓말마을 서쪽에 있는 갓말소의 절벽이고,
제3곡은 금수면 무학동 배바위(선암:무학정),
제4곡은 금수면 영천동 선바위(입암),
제5곡은 금수면 영천동 은지의 사인암으로 이상 5곡은 성주군에 있다.
제6곡은 김천시 증산면 유성리의 옥류동,
제7곡은 증산면 평촌리 만월담,
제8곡은 증산면 평촌리 와룡암,
제9곡은 증산면 수도리의 용소로 이상 6곡에서 9곡은 김천시에 있다.
향현사-사당
===회연서원===
회연서원은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제자들을 교육하던 교육도장인데, 성주 수륜면
양정마을 봉비암 아래 회연서원(檜淵書院)이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회연은
봉비암 절벽에 있는 소(沼)로 지금은 속칭 양정소라고 한다. 이 회연서원은 1690년
(숙종 16)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숙종의 친필인 회연서원 편액이 달린 강당과 한호
(韓濩, 호는 石峰) 글씨의 현판이 달린 지경재(持敬齋), 명의재(明義齋),
양현청(養賢廳)등의 건물이 있었다.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될 때 강당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졌다.
보호수 느티나무
1974년 지방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어 보수하고 1976년 동재와 서재를 새로 지었다.
회연서원은 비교적 좌우가 길고 평평하여 서원의 일반적인 형태인 전학후묘 또는
전묘후학의 배치가 아니라 좌우로 나란히 제향공간과 강학공간이 놓여있다.
도를 본다는 뜻의 문루인 견도루를 들어서면 회연서원 앞뜰에는 큰 노송들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이 뜰은 옛 백매원이라는 정원으로 이곳의 동쪽에 담장
안에는 신도비가 서있다.
진입로에서 본 회연서원
서원의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의 건물로 숙종의 어필인 회연서원
편액이 있으며 강당마루 안쪽에는 가운데에 경회원 좌우로 제자인 미수 허목의 전서체
글씨인 망운암과 옥설헌 편액이 있다.
강당의 좌우에는 동재(명의재)와 서재(지경재)가 위치하고 있다.
경회당-중앙 강당
===한강 정구===
한강은 13세(1555년)에 성주향교에 교수로 와 있던 덕계 오건(德溪 吳健)에게서
수학하고 21세(1563년)에 퇴계 이황(退溪李滉)에게, 24세(1566년)에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제자가 되어 그 학문의 진수를 전승, 31세(1573년)에 그의
선영이 있는 창평산(蒼坪山) 기슭에 한강정사(寒岡精舍)를 지어 후진을 교육하고,
41세(1583년)에 한강정사를 확장하여 다시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이룩하여 제자들을
교육했다. 그의 사후 1627년 (인조 5년), 회연초당자리에 회연서원을 지어 한강을
주향으로 하는 서원이 되었다.
명의재-동재
한강의 제자는 퇴계 이황의 제자와 버금간다고 할 정도 많은 3백 30여명에 이른다.
특히 낙동강 상류에서 일어난 퇴계학을 낙동강 중류 지역에다 퍼뜨린 것과 더불어
그의 학맥을 서울의 미수 허목과 안산의 성호 이익에게 이어지게 하여 근기
지역에서 일어난 경세치용의 실학 연원을 퇴계학에 닿게 한 점에서 그의 위치는
중요하다. 또 한강은 한국철학사에서 예학(禮學)을 연 인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 등 예와 관련된 여러 저술을 남겼는데, 영남 남인의
예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김장생의 기호 노론 예학과 함께 늘 거론되고 있다.
지경재-서재
한강의 학문은 그 범위가 너무도 넓어 성리학, 예학, 역사전기, 지지, 의학, 문학
등 각 부문에 걸쳐 31세 때부터 75세에 이르기까지 후진교육과 아울러 저술에
힘썼으나 한강의 이러한 방대한 저술, 편찬물들을 지금은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한강이 통천군수로 있을 당시 임진왜란 때에는 고향에 두었던 각종 장서(장서)
와 원고(원고)가 성주인사들의 노력으로 해인사(海印寺)에 옮겨져서 난리를 피해
잘 보존하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1614년(광해군 6년) 한강이 노곡으로 피신하여 살
때에 큰 화재를 입어 책들이 하루저녁에 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회연서원 편액-글씨는 숙종 임금의 친필
이 때 한강은 “하늘이 나를 장례하는 도다” 하고 통탄했지만 이미 72세의 노경에
이른 근력으로 그 전부를 다시 편찬할 수 없었고 오직 몇몇 종류만 다시 집필하여
복원된 모습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강정서에 수록된 된 내용을 가지고 선생의
저서 중 오늘에 전하는 것은 문집속집(일반문집의 형태로 시, 소, 차, 서, 서, 기,
발등), 심경발휘, 수사언인, 오선생예설분류, 하무지, 봉산욕행록, 언행록,
회연급문제현록, 역대기년등이다.
대청마루의 편액들
1620년(광해군 12년) 1월, 한강이 세상을 떠나자 문목의 시호를 내리고 인조반정
후에 이조판서, 효종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사림들이 한강의 문묘종사를 청하는
글에 그를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에 이어 교남(영남)
오현으로 꼽았으며,
망운암-글씨는 한강 선생의 제자인 미수 허목이 씀
숙종보감에“중국의 사신이 와서 동방심학의종이 누구냐?”고 묻거든 정 한강의
심경발위가 동방심학의종이라고 답하자고 조정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는
기록은 한강의 학행에 대한 그 시대의 존경을 단적으로 나타내준다.
경회당
옥설헌-글씨는 한강 선생의 제자인 미수 허목이 씀
정료대-강당을 밝히는 불을 얹는 곳
한강 선생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