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학엔 음양합이란 것이 있다. 천간합이라고도 한다.
동양 철학 일반도 같은 이치를 말하는데
서로 정반대의 물과 불이 서로 하나가 되어 합의를 이루어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이야기 한다.
정임합은 화와 수가 서로 만나 합이 된 것을 말한다.
부부는 서로 결핍된 상대에게 끌려서 배우자를 선택한다.
현실주의자는 이상주의자를, 앞날을 보며 바쁘게 사는 사람은
과거를 돌아보며 정체성을 유지하는 배우자를 선택한다.
서로가 하나 된다는 것은 먼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이치이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 서로 합의를 이루어 살아감은 그 전에 서로 다름을 반드시 전제로 한다.
서로 만나 하나가됨은 신적 과정이다.
민주주의적 과정이 다라고 생각하면 아직 사람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부부간에 할 일을 정해 놓고 약속을 깨는 상대에게 스트레스를 받고 주는 일이 빈번하다.
육아를 놓고 너와 내가 아기를 얼마나 돌볼 것인지를 놓고 갈등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모든 합의의 시작이긴 하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른다면 문제일 수 있다.
나의 할당량을 놓고 몇 퍼센트를 가져갈 것인지를 줄 다리기 하는 합의는
서로 간에 만족이 없는 합의이다.
시니어 교인들에게 설문을 돌렸더니 기성 교회가 의사를 수렴하는 곳이 없어서 불만이었다.
합의를 이룰 수 있는 의결 기구가 없는 것이 교회의 문제라고 한다.
그것만 되면 정말 만족스러운 교회 생활이 될 것이라고 의견을 전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이 제대로 해 보자고 만든 교회에서 스스로 의견 개진하고 수평적으로
절차를 밟아 모인 공동체형 교회에서는 어떨까?
그 절차가운데 만족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상당히 많은 교회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헤어짐을 선택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느슨한 공동체(?)라는 것이다.
내 몫이 얼마인지를 분명히 하겠다는 합의는 길거리나 시장 질서의 합의다.
줄것 주고 받을 것 받으면 만족되는 가장 기초적인 합의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관계를 깊이 하고자 하면 그런 수준의 합의는 서로에게 만족도 기쁨도 없다.
사람의 영혼은 내 할당을 줄다리기 하는데서 기쁨을 얻지 못한다.
서로 다른 상대와 내가 이미 합의된 것이 있다
사랑의 언어가 무엇인지 아는 상대가 서로에게 100%의 만족을 주는
사건이 반복되는 것이 합의의 수준을 높여 간다. 서로간의 신뢰가 분명해 지면 더이상 투표도
다수결도 필요 없다.
암묵적 관계의 약속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관계는 이미 합을 이룰 수 없다.
상대의 만족이 무엇인지를 아는 그 마음이 없이
서로 다르지만 합을 이루는 음양합은 가능하지 않다.
배우자가 뭐 좋아하는 지 아는 것이고 그것을 향한 행동을 서로 하는 것이다.
설겆이 해 놓는 걸 좋아해. 설겆이를 해 놓자.
술먹고 12시 넘어 들어가는 것을 싫어해. 술자리에서 그래도 먼저 일어서야지. 늦게 들어가면 안돼.
내 할 일 네 할일 적어 놓고 합의 하고
다수결로 투표하는 것은 서로 간의 신뢰가 없다면 조직에서 필수다.
신뢰가 형성된 부부와 공동체에서 그것은 2차적인 것이다.
육합이란 것이 있다.
정 반대의 계절이 만나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묘술합이란 어린 아이와 인생 다 산 할아버지가 만나서 한 동네에서
어린 재롱과 어르신의 잔잔한 미소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된 다는 것은 언제나 위아래가 있고, 가짐과 못가짐이 있다.
선행과 후행이 있다. 서로 협력하면서도 언제나 경쟁한다.
사람을 끌어주려고 하고 반대로 끌어주는 사람이 없이는 발전이 어려운 사람도 있다.
내가 온갖 고민을 안고 가정의 경제를 위해 동분 서주하며 투잡,쓰리잡을 뛰고
통장을 5~6개를 만들어 관리를 하고 긴장하면
상대 배우자와 자녀는 반드시 뒤로 빠지게 되어 있다.
내가 들어가면 상대는 뒤로 빠진다.
그러나 내가 빠지면 나머지는 들어 오게 된다.
그것이 세상에서 같이 살아가는 이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