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륵 뜻?, 삼고초려 뜻, 읍참마속 뜻,
도원결의 뜻,괄목상대 뜻
https://blog.naver.com/jydecor/223249652938
✿계륵(鷄肋)
[鷄 닭 계 肋 갈빗대 륵(늑)]
「닭의 갈빗대」라는 뜻으로, 먹기에는
너무 양(量)이 적고 버리기에는 아까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形便).
✧출전 :후한서(後漢書)의 양수전(楊修傳)
✧유래 :
유비(劉備)가 익주(益州)를 점령(占領)하고
한중(漢中)을 평정(平定)한 다음 위나라(魏--)
조조(曹操)의 군대(軍隊)를 맞아
쟁탈전(爭奪戰)을 벌이고 있었다. 싸움은
여러 달에 걸쳐 장기간(長期間) 양상(樣相)을
띠고 있었다. 유비(劉備)의 병참(兵站)은
제갈량(諸葛亮)의 용의주도(用意周到)한
확보(確保)로 넉넉했다. 조조(曹操)는
병참(兵站)을 소홀(疏忽)히 하여, 내부(內部)
질서(秩序)가 문란(紊亂)하고 탈영병(脫營兵)도
많아서 공격(功擊)도 수비(守備)도
불가능(不可能)한 상태(狀態)에 있었다.
참모(參謀) 한 사람이 후퇴(後退) 여부(與否)를
묻자, 닭고기를 뜯고 있던 조조(曹操)는 닭갈비
(鷄肋)를 들었다 놓았다만 했다.
그가 어리둥절해서 나오는데 주부(主簿)인
양수(楊脩)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장안(長安)으로
귀환(歸還)할 준비(準備)를 서두르기
시작(始作)했다. 다른 참모(參謀)들이 놀라
그 까닭을 묻자 양수(楊脩)는 「닭의 갈비는
먹으려 하면 먹을 것이 없고, 그렇다고
내버리기도 아까운 것이오. 한중(漢中)을
여기에 비유(比喩ㆍ譬喩)한 것은
승상(丞相)께서 군대(軍隊)를 철수(撤收)하기로
결정(決定)하신 것이오.」 라고 대답(對答)했다.
과연 양수(楊脩)의 예상(豫想)대로 조조(曹操)는
그 이튿날 철수(撤收) 명령(命令)을 내렸다.
---
✿삼고초려(三顧草廬)
[三 석 삼 顧 돌아볼 고
草 풀 초 廬 농막집 려(여)]
1.「유비(劉備)가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세 번이나 찾아가 군사(軍師)로 초빙(招聘)한
데서 유래(由來)」한 말로,
a.윗사람이나 임금에게 특별(特別)한
신임(信任)이나 우대(優待)를 받는 일.
b.인재(人材)를 맞기 위(爲)해 참을성 있게 힘씀.
✧출전 :삼국지(三國志)의 촉지(蜀志)
✧유래 :
후한(後漢) 말엽(末葉), 유비(劉備)는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의형제(義兄弟)를 맺고
한(漢) 왕조(王朝)의 부흥(復興)을 위해
군사(軍士)를 일으켰다. 그러나 군기(軍紀)를
잡고 계책(計策)을 세워 전군(全郡)을
통솔(統率)할 군사(軍師)가 없어 늘 조조(曹操)
군(軍)에게 고전(苦戰)을 면(免)치 못했다.
어느 날 유비(劉備)가 은사(恩師)인
사마휘(司馬徽)에게 군사(軍師)를 천거(薦擧)해
달라고 청(請)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룡(伏龍)이나 봉추(鳳雛) 중(中) 한
사람만 얻으시오.」 그 후 제갈량(諸葛亮)의
별명(別名)이 복룡(伏龍)이란 것을 안
유비(劉備)는 즉시(卽時) 수레에 예물(禮物)을
싣고 제갈량(諸葛亮)의 초가집(草家-)을
찾아 갔다. 그러나 제갈량(諸葛亮)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出他)하고 없었다. 마침내 동행(同行)했던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의 불평(不平)이
터지고 말았다. 관우(關羽)와 장비(張飛)가
극구(極口) 만류(挽留)하는데도, 유비(劉備)는
단념(斷念)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길(訪問-)에
나섰다. 그 열의(熱意)에 감동(感動)한
제갈량(諸葛亮)은 마침내 유비(劉備)의
군사(軍師)가 되어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曹操)의 100만 대군(大軍)을 격파
(擊破)하는 등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그 후 유비(劉備)는 제갈량(諸葛亮)의
헌책(獻策)에 따라 위나라(魏--)의 조조(曹操),
오나라(吳--)의 손권(孫權)과 더불어 천하(天下)를
삼분(三分)하고 한(漢) 왕조(王朝)의 맥(脈)을
잇는 촉한(蜀漢)을 세워 황제(皇帝)를 일컬었으며,
지략(智略)과 식견(識見)이 뛰어나고
충의(忠義)가 강(強)한 제갈량(諸葛亮)은
재상(宰相)이 되었다.
---
✿읍참마속(泣斬馬謖)
[泣 울 읍 斬 벨 참
馬 말 마 謖 일어날 속]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벤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신하(臣下)를 법(法)대로 처단(處斷)하여
질서(秩序)를 바로잡음을 이르는 말.
✧출전 :십팔사략(十八史略)
✧제1차 북벌(北伐) 때 가정(街亭)의 전투(戰鬪)
책임자(責任者)로 임명(任命)한 마속(馬謖)이
제갈량(諸葛亮)의 지시(指示)를 어기고
자기(自己)의 얕은 생각으로 전투(戰鬪)를 하다
참패(慘敗)를 가져왔다. 마속(馬謖)은 뛰어난
장수(將帥)요, 제갈량(諸葛亮)과는 문경지교
(刎頸之交)를 맺은 마량(馬良)의 아우였지만,
제갈량(諸葛亮)은 한중(漢中)으로 돌아오자
눈물을 머금고 마속(馬謖)의 목을 벤 뒤
(≒泣斬馬謖) 장병(將兵)들에게 사과를
한 것이다. 장관(長官)이 제갈량(諸葛亮)을 보고
「앞으로 천하(天下)를 평정(平定)하려 하는
이때에 마속(馬謖) 같은 유능(有能)한 인재
(人材)를 없앴다는 것은 참으로 아까운 일입니다.」
하고 말하자 제갈량(諸葛亮)이 눈물을 흘리며
「손무(孫武)가 싸워 항상(恒常)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군율(軍律)을 분명(分明)히 했기 때문이다.
이같이 어지러운 세상(世上)에 전쟁(戰爭)을
시작(始作)한 처음부터 군율(軍律)을 무시
(無視)하게 되면 어떻게 적(敵)을 평정(平定)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對答)했다는 것이다.
---
✿도원결의(桃園結義)
[桃 복숭아 도 園 동산 원
結 맺을 결 義 옳을 의]
1.「도원(桃園)에서 의형제(義兄弟)를 맺다.」는
뜻으로,
a.의형제(義兄弟)를 맺음.
b.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욕(私慾)을 버리고
목적(目的)을 향(向)해 합심(合心)할 것을
결의(結義)함.
✧출전 :한서(漢書)
✧유래 :
중국(中國) 원나라(元--)와 명나라(明--)의
교체기(交替期) 때의 사람인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비롯되었다. 이야기의 전승(傳承) 과정(過程)
에서 허구(虛構)로 재구성(再構成)된 것이다.
후한(後漢) 때 일어난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으로 만나게 된 유비(劉備)ㆍ관우(關羽)ㆍ
장비(張飛)가 유비(劉備)의 집에 모여서
군사(軍士)를 일으킬 것을 의논(議論)하고,
복숭아밭에서 맹세(盟誓)했다 한다.
---
✿괄목상대(刮目相對)
[刮 긁을 괄 目 눈 목
相 서로 상 對 대할 대]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며 상대(相對)를
대(對)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학식
(學識)이나 업적(業績)이 크게 진보(進步)
한 것을 말함.
✧유래 :
삼국(三國)이 서로 대립(對立)하고 있을 당시
오나라(吳--) 손권(孫權)의 부하(部下) 중에
여몽(呂蒙)이라는 장수(將帥)가 있었다.
병졸(兵卒)에서 전쟁(戰爭)의 공(功)으로 장군
(將軍)까지 된 여몽(呂蒙)이었으나 무식(無識)했다.
그러나 손권(孫權)은 그가 이론적(理論的)인
병법(兵法)까지 알기를 원해서 학문(學問)을
깨우치도록 충고(忠告)를 했다. 이때부터 그는
전장(戰場)에서도 손에서 책(冊)을 놓지 않고
공부(工夫)했다. 얼마 후 뛰어난 학식(學識)을
가진 노숙(魯肅)이 여몽(呂蒙)과 의논(議論)할
일이 있어 찾아갔다. 노숙(魯肅)은 여몽(呂蒙)과
막역(莫逆)한 친구(親舊)여서 여몽(呂蒙)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그의 박식(博識)함에 깜짝 놀라면서
「이 사람 언제 그렇게 공부(工夫)했나?
이제 오나라(吳--) 있을 때 여몽(呂蒙)이 아닐세.」
그러자 여몽(呂蒙)은 이렇게 대꾸했다.
「선비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해야 할 정도로 달라져 있어야 하는
법이라네.」라고 했다.
***************
Ref.https://cafe.daum.net/4fcl/G4L4/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