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보고싶다.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늘 건강하셔서 웃으며 전화하셨는게 엇그제 같은데.....나는 다섯살 때까지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내게 가장 오래된 기억이 할머니가 떠먹여 주시던 흰죽이다. 숫가락에 묻은 그 짭자로우면서 깊은 국간장 맛, 그리고 따뜻한 고소함... 엄마는 일찍 병원에 갔다가 늦게 돌아와 잠간씩 만나니 할머니와의 정이 훨씬 컸다. 할머니는 볼일이 있으면 나를 업고 다니셨다. "할머니 저 걸어서 갈래요" 해도 늘 업고 다니셨다.할머니들이 모여서 놀 때, 나는 혼자 웟목에 앉아 있었다. 좀 심심했지만 참았다. 그런 나를 보고 "하이고 저 어린 것이 혼자 얌전하게 가만히 앉아있네. 참 착하기도 하지."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더 옴짝 않고 앉아 있었다. 좀 지겨웠지만 참고 있었다.내가 네살때 어린이집에 갔다. 할머니가, "여기 어린이들과 같이 잘 놀아라." 하면서 할머니가 돌아가시려고 하면 나는 싫다고 울면서 할머니와 같이 있자고 했다. 할머니는 "그럼 나도 여기 있을께 하면서 기다리셨다. 나는 할머니만 있으면 애들하고 놀다가도 할머니가 보이지 않으면 또 할머니를 찾으며 울었다. 할머니가 옆에 있어야 마음이 놓였다.다섯살 때, 엄마와 아빠가 사는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 말 듣고 할머니는 며칠 전부터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미국으로 가는 날은 엉 엉 큰소리로 우셨다. 비행장까지 따라오셔서 내가 들어가는 걸 보시고는 더 큰 소리로 엉 엉 우셨다. 외할머니가 옆에서 "지 애미 애비 함께 살로 가는데, 뭐가 서운하다고 우는교?" 하셨지만 할머니는 그치지 않고 우셨다. 나도 할머니와 떨어지는게 슬퍼서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울었다.며칠 뒤 아빠가 할머니께 전화를 했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안하시고 엉 엉 울기만 하신다고 아빠가 "저희들은 잘 살거니까 아무 걱정 마십시오." 해도 그냥 엉엉 울기만 하고 아무 말도 못하셨다고.미국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던 아빠가 내가 우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창문으로 몰래 날 지켜보곤했다. 하루는 데리러가는데 일찍 도착했던니 반이 모두 낮잠을 자는 시간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잠이 들었는데, 나 혼자 이불 속에서 꼼지락꼼지락 작은 움직임을 만들며 깨어 있는 걸 보고 아빠가 내게 물었다고 한다, “안자고 무슨 생각했어?” 내가 대답하기를 “할머니 생각.” 뉴욕에 살면서 자연사 박물관에 자주간 기억이 많다. 거기에 차만큼 큰 지구본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빠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자, 그럼 할머니는 어디에 있는지 보여 달라고 했다.세월이 좀 지난 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미국으로 오시어 석달이나 함께 살았다. 이민을 온지 5년이 흘러 미국 생활에 적응은 했지만 엄마와 아빠는 매일같이 싸워서 집은 편안한 곳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커져가는 불안감 때문에 학교를 가러 일어나는 아침마다 배가 아팠다. 학교 마치고 집에 와서는 엄마의 다그침 때문에 서럽기만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미국으로 오신 그여름, 첫날밤이 생각난다. 시간이 많이 지나 할머니가 낯설수도 있는데 방 바닥 이불 위에 누워 같이 자고 내가 눈을 스르르 감자 내 볼을 쓰다듬는 할머니의 손결이 너무 편안했다. 내가 13살때 아빠가 드디어 박사과정을 졸업해서 우리가 한국으로 다시 이사를 왔다. 2년 동안 할머니 할아버지집에서 같이 살면서 나는 대명여자중학교 그리고 동호는 남명초등학교를 다녔다. 언어, 문화, 그리고 한국 학교 생활에 적응한다고 엄청 힘들었다. 처음에는 친구도 못 사귀어 따돌림을 당했고, 미국에선 공부를 늘 1등이나 2등을 해온 모범생이었던 내가 갑자기 꼴지를 하는 바보가 되었다. 그렇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다. 다 같이 사니까 엄마와 아빠도 더 이상 큰소리로 싸우지 않았고 큰 가족이 늘 함께라서 든든했다. 점점 한국생활에 적응이 되어가자 공부도 전교 11등까지 올랐고 친구들도 사귀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시원한 마루에 앉아 명절 음식을 만드시던 할머니의 모습 그리고 아침마다 나랑 같이 학교로 걸어가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할머니는 늘 음식을 주실때 항상 한 숫갈 더 얹어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건 내 정이다”.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을에 있는 대일외국어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우리는 서을로 이사를 갔다. 고등학교 일년을 다니고 아빠의 직장 때문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셨다. 날 보채던 친구집에 놀러간 탓에 그 마지막 밤을 할머니와 같이 못 보낸 내가 너무 밉고 아직도 떠오르면 죄송해서 가슴이 아프다. 미국으로 돌아와 그전에 살던 에덴스에 집을 사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아빠가 IMF탓으로 한국에서 자리를 못 잡아 미국 와서도 일을 구한다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엄마 아빠는 또 다시 심하게 싸워서 집은 정말 지옥같다고 느껴지는 날이 많았다.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졸업하고 텍사스에 취직을 했는데 우울증과 불안증이 더욱 심해져서 일을 그만둬야 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한국으로 돌아와 있는 동안 대전에 살면서 영어를 가르쳤다. 거기에서 머문 2년동안 나도 할머니집으로 내려가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내집으로 자주 오셨다. 할머니가 삼계탕같은 음식들을 만드셔서 두분이 그 무거운걸 들고 대구에서 대전까지 그리고 내 아파트까지 오시곤 했다. 한번은 할머니 생신때라 내가 사온 케익에 불을 키고 셋이서 손뼉 치며 노래했다. 그 촛불에 빛난 할머니의 미소진 얼굴 그리고 동그란 볼이 지금도 눈 감으면 보인다. 또 세월이 지나 미국에 사는 내가 결혼한다는 소리를 듣고 할아버지와 같이 오신다 해서 참 좋았다. 결혼식을 성당에서 하는데, 신자와 비신자 차별이 쬐끔 있다는 말을 듣고, 할머니는 오래 다니시던 절에 연락하여 이름을 빼고, 성당에 나가셨다.결혼식에 참석한 할머니는 손수 색실로 짠 예쁜 한복을 입었다. 그게 어찌나 보기 좋든지 미국 사람들도 “원드풀, 원드풀” 했다. 그러는 걸 보니 내가 칭송을 듣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고 너무 자랑스러웠다. 우리 할머니만큼 고웃신 분이 없었다. 파티장으로 가서 흥겨운 음악이 나오자 할머니가 춤을 추니까 사람들이 또 보기 좋다며 따라서 춤을 추었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할머니가 크게 돋보였다. 내가 첫째를 낳아 한창 재롱 부릴 때, 할머니가 보고싶어서 아기를 데리고 할머니댁으로 갔을 때, 할머니가 아기를 업고 좋아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 사진을 찍었더니 할머니 핸드폰 바탕화면에 올려 친구들에게 자랑한다고 하셨다.내가 둘째, 셋째를 낳아 기르면서 화상통화를 할 때마다 참 좋아하시면서, 나는 이렇게 애들 크는 거 보는 게 제일 즐겁다 하셨다.그러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달려왔다. 워낙 먼 길이라 할머니는 이미 관 속에 숨어계셨다. 두 고모님 말을 들으니 할머니는 잠자듯 편안한 모습이었다고 하셨다. 그 관을 앞세우고 미사를 올린 다음 영구차에 실려가 한 줌의 재로 남았다.그 재가 든 상자는 할머니가 68년 전에 시집 온 마을 뒷산, 할머니를 무척 사랑하셨던 시아버님 산소 아래 묻혔다. 그걸 보면서 나는 찢어지는 가슴을 참느라 무척 힘들었다. 할아버지도 같이 보시면서 얼마나 괴로우실까? 평생을 다정스레 손잡고 다니시다가. 혼자 어찌 사실까? 걱정이 되었다.할머니의 삶은 젊었을 때 고생은 하셨지만 남들이 하지 못하는 여러가지를 하셨다. 뇌성마비 장애인을 돕는 봉사를 오래 하셨는데 나도 할머니 따라 여를 켐프에 참가해서 조금 도우기도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같이 500리, 1300리도 걸어셨고, 어릴 때 같이 자란 친구들을 사방으로 연락하여 친정 마을로 모아 사흘씩 합숙을 하며 놀게했고, 아침마다 산에서 에어로빅을 무료로 지도하는 아가씨가 회원 중에 맞는 짝이 생겨, 결혼식 걱정 하는 것을 "이 산에서 하면 더 빛이 날거라 설득했다. 주례는 국회의원이 하고 하객들 대접은 할머니 주선으로 회원들이 협조해서 잘 치루었다. 이 색다른 행사를 할아버지는 방송국에 알려 텔레비전에 나왔고 그로 인해 더 나은 길도 열렸다. 또 할아버지는 꽹과리를 치고 할머니는 무당이 되어 펄쩍펄쩍 뛰며 춤추는 굿놀이를 신나게 하여. 많은 관중들의 박수를 받았다.이렇게 좋은 할머니를 이제 영영 볼 수 없으니 가슴이 아프다. 내가 이런데 할아버지는 오죽할까? 걱정이 돼서 전화를 드렸더니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할머니가 나를 두고 갑자기 먼저 간 것은 나를 불쌍한 영감으로 만들려는 게 아니고, 이제 당신 하고픈 거 맘대로 하면서 더 즐겁게 사세요 하는 거다. 하신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했더니 다시 설명을 하신다. “나는 걷는 여행을 좋아해. 그래서 친구 다섯과 그 부인들 합쳐 12명이 동해안 걷는 여행을 11년, 봄과 가을마다 한 건 너도 알지. 그러다 병이 나고 죽고 해서 끝났는데 그게 아쉬워서 ‘우리 둘이라도 가자’ 했더니, ‘여럿이 갈 때는 윷놀이도 하고, 둘러앉아 먹는 재미도 있었지만 둘이는 재미없다’ 하기에 ‘그럼 나 혼자 갈까?’ 했더니 ‘나는 겁이 많아서 혼자 무서워서 못 잔다.’ 그래서 포기했지. ‘이제 내가 없으니 당신 맘 내키는 대로 살아봐요.’ 하면서 가신 거야. 그래서 지난 6월 혼자 동해안 80키로를 걸었고, 가을에도 또 나설 거야."듣고보니 그 말이 맞을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속 고여있는 그리움이 조금 가벼워지는듯 하다. "그럼 저도 너무 슬프게 생각하지 말고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볼께요" 말을 하고 대화가 끝났다.옛날에 할머니를 따라서 방앗간에 가면 고소한 냄새둘로 가득했다. 미숫가루를 거기서 만드시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몇달 전까지만해도 비싼 소포로 그것을 미국까지 보내셨다. 우유랑 꿀로 태우면 제일 맛있다고 가르쳐주셔서 우리 아이들도 좋다고 자주 즐겨 먹었다. 지난 1년동안 새 미숫가루를 보내실때 마다 말씀하셨다, “이번 미숫가루가 아마 마지막 일끼다. 녹두하고 밤이 마이 들어가서 맛있다. 할머니 정성이라 생각하고 맛있게 무라.” 그 할머니의 정성이 담긴 미숫가루가 이제 우리 냉장고 속에 숨어있고 한 줌 밖에 안 남았다. 손이 자주 가던 그 통에 이제 손도 댈 수도 꺼내지도 못하겠다. 지금도 할머니께서 "보람아~" 하시면서 방으로 걸어 들어와 볼을 내볼에 누르시며 내 얼굴을 마주치실것 같다. 할머니 보드라운 살도, 머릿결도, 옷에 묻은 피부의 향기까지도 아직 너무 생생하다.또 다시 마음이 아프고 할머니가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