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동을 피하기 위해, 역사상의 촉한은 대다수 ‘촉한’이라 기술하였으며, 모전상의 촉은 ‘촉국’이라 기술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0. 서언(序言)
[장완은 과거 제갈양이 진천(秦川)을 자주 엿보았으므로, 길이 험난하고 운반하기 어려워 결국에는 성공할 수 없으므로 물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 많은 배를 만들어 한수와 면수로부터 위흥(魏興)과 상용(上庸)을 습격하려고 했다. <정사 촉서 장완전 中>]
장완의 상용 급습계. 제갈량의 진천 장악을 위한 정공(正攻) 북벌에 대한 한계를 실감하고 기습을 통해 중원을 노려보려던 원대한 장완의 계책에 대해 이제까지 양군은 이틀간 심도있게 논의를 해 보았다.
논의 중에는 다소 논지를 벗어난 바가 없지 않았으나 대체로 장완이 제안한 기습전 자체의 가치 여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물론 기습이라는 것은 성공하면 적의 전술에 타격을 가할 수 있으나, 실패할 경우에는 그 결과가 매우 참담하다. 하지만 이제까지 진, 오 연합군이 내세운 근거들에 의하면 장완의 기습전은 계책을 내세운 전후 대비책이 매우 견실했고, 전황 또한 기습을 하기에 적합한 시기였기 때문에 장완의 계책은 시의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진 셈이다.
간혹 촉국은 기습 자체를 두고 부질없는 짓이라고 논하고 있지만, 필자가 2일차에 밝혔던 바와 같이 기습전술은 병서에서도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전투란, 먼저 정공법으로 적군과 부딪쳐서 주력 부대를 멈춘 다음, 기습 전술로 옆이나 등 뒤에서 적의 약점을 습격하여 승리를 결정짓는다. 그러므로 기습 전술에 뛰어난 장수의 전법은 변화가 하늘과 땅의 움직임처럼 무궁무진하고, 강과 바다의 흐름처럼 넘쳐나도 끊이지 않는 지혜다. <손자병법 병세편 중(中)>]
이번 3일차 마지막 공격에서 필자는 이제까지 다뤄 온 논의를 총정리하고 부가사항을 첨부하여 논의를 해 보고자 한다.
1. 촉한에서 거론되었던 북벌의 세 가지 유형
유비가 처음 제갈량과 대면하였을 때, 제갈량은 저 유명한 융중대를 이야기하며 유비에게,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여 내부를 견실히 한 후 동오와 협력하여 익주와 형주에서 북벌을 감행한다면 가히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보여진 제갈량의 북벌은 형주 북부에서 양양과 번성을 확보하고 이어 남양을 확보함과 아울러 한중에서 진천을 노리고 나아가는, 두 방면으로 일시에 치고 올라가 중원을 공략하여 장안, 낙양을 한꺼번에 떨어뜨리는 것이 기본 계책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헌데 관우가 행동을 경솔히 하여 형주를 동오에게 빼앗기고 아울러 관우가 참살당하자, 촉한은 이후 영토가 익주 한 곳에 한정되어 형주를 통한 북벌은 감행할 수 없게 된다.
이후 제갈량이 융중대 전략에 수정을 기하여 동오가 형, 양주 일대에서 동시에 치고 올라가면서 자신이 진천을 공략하여 중원을 도모하자는 쪽으로 촉한의 전략방침이 수정되었는데, 촉한이 생각할 수 있었던 북벌은 세 가지 유형이 있었다.
첫 번째 유형은 위연을 중심으로 한 장수들이 내세운 급진책이다.
[하후무(夏侯楙)가 안서장군으로 임명되어 장안 수비를 맡았다. 제갈량이 남정(南鄭)에서 부하들과 전략을 논의할 때, 위연은 이렇게 말했다. "듣건대 하후무는 젊고, 조조의 사위이며 겁장이이고 지모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 저에게 정예 5천명과 휴대할 식량 5천 석을 주신다면, 곧장 포중(褒中)을 뚫고 나가 진령산(秦嶺山)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자오곡(子午谷)에 당동하여 북쪽으로 간다면 열흘이 지나지 않아 장안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하후무는 저 위연이 갑자기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틀림없이 배를 타고 도주할 것입니다. 장안성 안에는 단지 어사와 경조태수만이 있을 뿐이므로, 횡문(橫門)에 있는 식량 저장 창고와 흩어지는 백성들의 곡물로 군사의 식량은 충분할 것입니다. 동쪽(위)이 병력을 모으는 데는 20일은 걸릴 것이므로 공이 사곡(斜谷)을 뚫고 나오면 반드시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한 번의 행동으로 함양(咸陽) 서쪽 지역을 평정할 수 있습니다." <정사 촉서 위연전 주석 중(中)>]
상기와 같이 위연은 자오도를 통해 장안을 확보하고 바로 낙양을 공략하는 방법을 택하려 하였다. 이 방법은 매우 기습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병법에서도 정공(正攻)과 기공(奇功)을 아울러 헤아리라고 언급한 바가 있고, 제갈량이 ~~ 쪽으로 나아가 적군을 교란하면 위군이 그 곳에 신경을 쓰는 동안 자오도로 빠져서 장안을 습격하여 취한다는 계책으로, 아직까지 논란이 많지만 대체로 장안까지는 취할 수 있었다는 견해도 상당수 있다. 다만 이 계책은 지나친 급진책으로, 아직 옹, 양주 일대를 완전히 확보하지 않아 민심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장안을 과연 사수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이후의 전략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을지는 사실 미지수이므로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따라서 제갈량은 그 계책이 안고 있는 위험성을 크게 걱정하여 계책을 기각하고 만다.
두 번째 유형은 제갈량을 위시한 점진책이다.
[제갈량이 이 계책은 많은 위험을 안고 있어 안전하게 대로를 따라 위로 올라가 농우지역을 평정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십전필극(十全必克)을 하면서도 전혀 후환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위연의 계책을 쓰지 않았다. <자치통감 태화 2년(228)조 기사 중(中)>]
제갈량이 감행한 북벌의 기본적인 전략방침은, 옹주를 침탈해서 양주와 옹주를 끊어 양주를 촉나라 제어권에 들어오게 한 다음, 장안으로 진격해서 안전하게 확보한 뒤 낙양을 노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다면 위연의 급진책과는 달리, 장안 후방에 있는 옹, 양주에서 오는 습격 내지는 구원을 차단할 수 있고, 장안의 민심도 확보하여 옹, 양 일대 전체를 장악함으로써, 촉한은 옹, 양주 일대와 한중에서 동시에 중원을 노리는 것이 가능해지고, 위군은 촉한군을 막을 최전방의 거성 장안을 빼앗기는 만큼 낙양수비는 물론 여러 곳의 수비가 불가능해진다.
다만 이러한 점진책의 약점은 패배를 해도 치명적이지는 않으나 승리 또한 보장할 수 없고, 결실이 매우 적다.
[제갈량이 죽은 후에 장완, 비의가 국정을 장악하였는데 이 두 사람은 제갈량이 죽을 때 추천한 이들이었다. 강유는 여러 차례 북벌을 생각하였으나 장완, 비의 두 사람이 보경안민(保境安民)만을 주장하고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갈량이 죽은 후부터 촉한은 20여년 동안이나 북벌을 못 하였다. <부낙성, 중국통사 중(中)>]
게다가 정공법은 촉한군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일단 공략로 자체가 협소하다. 이는 제갈량이 제갈근에게 당시의 전황을 기술한 편지에서도 알 수가 있다.
[“전에 조자룡이 퇴군할 때 적애 북쪽의 절벽 길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골짜기를 따라 백여 리에 걸쳐 길을 냈던 난간은 한쪽은 산허리에 묻히고 한 쪽은 물 속 기둥 위에 걸렸습니다. 지금 물이 불은 데다 급하여 기둥을 바로 세울 수 없으니 이런 형편에서는 억지로 수리할 수 없습니다." < 수경주(水經注) 27권, 면수주(沔水注)>]
["수양이라는 작은 계곡은 비록 깎아지른 절벽의 험로로서 계곡의 물이 종횡으로 흘러 행군하기 힘든 곳이나, 전에 아군의 순라병이 오가던 통로가 있습니다. 지금 전초 부대로 하여금 이 길을 닦아 진창으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 수경주, 위수주(渭水注)>]
게다가 공략하려는 곳이 모두 험지로 가로막혀 있어서 병참선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실로 제갈량은 북벌을 5번이나 감행했는데 그 중 두 번을 식량이 떨어져서 회군하게 된다. 특히 장무 9년에 식량이 떨어져 회군한 것은 승승장구했던 당시 북벌군의 기세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결정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다시 회군함에 따라 위군에게 3년이라는 정비기간을 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장무 6년(228) 겨울, 제갈양은 또 산관(散關)을 나와 진창(陳倉)을 포위했는데, 조진이 이것을 막았으며, 제갈양은 식량이 다 떨어졌으므로 돌아왔다. <정사 촉서 제갈량전 중(中)>]
[9년(231), 제갈양은 다시 기산으로 출격하였으며, 목우(木牛)를 이용하여 군수물자를 운반했는데, 식량이 다 떨어졌으므로 군대를 퇴각시켰다. <정사 촉서 제갈량전 중(中)>]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은 장완과 같은 급진적, 점진적 혼용 전술이다. 장완은 상기의 두 사례를 비교, 검토하여 마지막 유형을 선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장완은 제갈량이 병사한 234년 이후 상용 급습계를 내놓는 241년까지, 대장군, 녹상서사를 겸임한 국가 최고의 통수로서 한중에 주둔한 지 매우 오래 된 상황이었다. 그 동안 장완은 한중에서 상주하면서 이제까지의 선례들을 비교, 검토하였던 것이다.
제갈량의 정공법은 이미 다섯 차례의 북벌이 모두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승산 없는 전투라는 것이 판명났고, 실제로 장완은 제갈량의 유지를 이었음에도 자신이 제갈량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섯 차례나 북벌을 감행하고도 국내에 불만을 일으키지 않은 제갈량과 같은 탁월한 정책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그리고 어차피 촉한과 같은 약소국에서 위국과 같은 강대국과 정면으로 맞대결을 한다는 자체가 승산이 없는 전술이었다. 반대로 위연의 급진책은 생각해 볼만한 전술이기는 하나 위험성이 너무 컸다. 당시 장안은 촉한군에 대항하고 옹, 양 일대를 지키는 최고 통수가 거하고 있는 성으로, 이미 조조가 관중의 호인들을 제압하려 할 때부터 수비거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던 성이었다. 가능성은 있어도 확신은 못하는 장안 점거에, 옹, 양 일대가 서막, 곽회 등의 선동 아래 거세게 항거한다면 일껏 장안을 제압하더라도 지키지 못할 공산이 컸다. 그러므로 장완은 정공술보다는 기습 전술을 구사하되, 목표는 장안보다도 훨씬 탈취하기가 쉽고, 후방으로부터의 급습이 없어야 하며, 아울러 그 곳을 확보한 뒤 장안과 낙양을 노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장완의 눈에 들어온 결정적인 후보지가 바로 상용, 위흥 일대였던 것이다. 면수, 한수를 통한 급습이 가능했고, 강유가 한중에서 나아가 호인들을 규합하여 양주를 교란한다면 한중을 튼튼히 수비할 경우 후방으로부터의 급습 내지는 구원을 조기에 방지할 수 있었으며, 상용, 위흥 일대를 장악하면 무관을 통해 장안이나 낙양을 급습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지역은 지난날 맹달이 모반을 일으킨 이래 근 20년간 전투가 발발하지 않았던 지역으로, 군현이 자주 바뀌면서 수비체제 또한 용이하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장완은 상용 일대를 급습하여 그 곳을 지키고, 때를 보아 무관을 점령, 장안과 낙양을 점거하려는 급진적인 점진책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2. 장완이 상용급습계를 내세운 까닭 - 위국 공략이 불가피했던 내부 상황
장완이 이와 같은 급습계를 내세운 이유는 이미 전일 언급한 바가 있으나 총정리를 기하여 다시 한 번 언급해 보도록 하겠다. 당시 장완이 이러한 급진책을 내세우자 조정에서는 상당한 반발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의론은 성공가능성도 희박하고 퇴로도 용이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촉한의 사람들은 모두 장완의 계책이 성공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회군하기도 쉽지 않아 양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치통감 정시 2년(241)조 기사 중(中)>]
장완은 물론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칠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비의, 강유를 통해 상주문을 올리고, 이를 후주가 가납하게 된다.
[그러자 장완이 상소하여 말했다.
“지금 위나라는 9주를 차지하여 그 뿌리가 더욱 뻗어가니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만일 오나라와 합심해 앞뒤로 호응하면 비록 일거에 뜻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응당 위지를 쪼개 점차 잠식할 수 있으니 우선 위나라의 변경을 훼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오나라가 세 번 접촉에 두 번 합동 작전키로 약정하고도 출병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신이 비의등과 상의한 결과 양주(凉州)는 호인들이 사는 중요한 관새(關塞)이므로 진퇴의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강족과 호인은 지금 모두 한나라를 애타게 생각하고 있으니 응당 강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해야 합니다. 만일 강유가 출정해 황하 이서를 견제하면 신 역시 응당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강유의 뒤를 이어 진주할 것입니다.
지금 부현(涪縣)의 수륙 양쪽으로 사통팔달하니 긴급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능히 대응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오나라와 싸우게 될지라도 여기서 출발하여 접응하면 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대군영을 부현으로 옮겨 주둔토록 허락해 줄 것을 청합니다.”
한주가 이를 좇았다. <자치통감 정시 2년(241)조 기사 중(中)>]
충분한 준비와 의논을 거친 후 이를 상세히 설명하는 상주문을 올려 후주와 조정을 납득시켰던 장완, 당시 장완은 병색이 짙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급진적인 계책을 올려 조정을 동요시킨다. 병이 깊었음에도 극구 장완이 정공법도 아닌 기습전을 수행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촉한의 사람들은 모두 장완의 계책이 성공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회군하기도 쉽지 않아’라는 대목을 주시하자. 대체 '촉한의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을까. 애당초 촉한이 수행한 모든 전쟁은 ’성공하기도 어렵고, 회군하기도 쉽지 않았던‘ 전쟁이었다. 위연의 급진적인 전술은 말할 것도 없고, 제갈량의 정공법도 번번히 위군에게 가로막혀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회군 문제는 더 심각하다. 위연의 급진적인 전술은 자오도가 끊기거나 점령한 장안이 포위될 경우 회군이 불가하며, 제갈량 또한 앞서 수경지의 기록처럼 나아가는 길 자체가 험로(險路)였기 떄문에 회군이 쉽지 않았다.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촉한 사람들이 만일 저러한 태도로 일관한다면, 촉한에서는 차라리 전쟁을 벌이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촉한은 모든 길이 험로로 ‘천혜의 요새’라 불리는 곳, 반대로 나아가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국경에 있는 적군들 중 쉽게 승리할 수 있는 곳이란 없다. 그렇다면 그 자들이 벌인 의론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같은 양자강 유역이지만 상류에서 촉나라가 건국된 사정은 하류의 오나라와는 약간 경우가 다르다. 촉나라는 한 왕실의 일족이란 일컬어지는 유비가 중원에서 조조와 패권을 다투다 패한 뒤 부하를 이끌고 떠돌다가 촉 지역을 점령하여 수립했기 때문에 말하자면 유랑정권이다. 유비는 어디까지나 유씨에 의한 중국통일을 염원하고 스스로 중국 정통의 주권자로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계속 주장하였다. 그가 촉이라는 지방 정권으로 얽매여 있었던 것은 결코 그의 본의가 아니며 조조가 지배하는 중원에서도 자기에게 편드는 동조자가 당연히 있을 것이라 예상하였다. 따라서 통일은 곧 한나라이며, 한이 곧 통일이라는 정식을 다시 실현시키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다만 현실적으로 이 지방 정권 역시 촉 지방 호족의 지원 아래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촉 지방의 호족들은 유비 정권의 수립에 의해 지방적 호족의 지위에서 조정의 귀족으로 승격한 것에 만족하였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유씨 등 유랑 귀족이 중원회복을 꿈꾸고 위험한 대외 전쟁에 종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구품관인법의 연구 중(中)>]
애초에 촉인들은 대외 전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형주에서 유입된 인사들이 대개 진취적이고 호전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반면, 익주의 인사들은 대개가 익주의 세력에 안주하고 무리한 대외전쟁으로 기력을 소모하지 말기를 바랐다.
[촉인들은 유비를 위시하여 새로 영입된 형주파들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진취적인 성향에는 동조할 수 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제갈량의 후임인 장완과 비의의 차이이다. 장완은 비록 잦은 질병이 있어 출병하지는 못했으나, 지금 논하는 급류계책을 제안할 정도로 진취적이었고, 강유를 양주자사로 삼아 양주 일대를 교란하려는 등 전략적으로도 위나라를 제압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보이나, 비의는 수비 위주의 출병 이외에는 출병하지 않았고, 도리어 강유의 출병을 저지했다. 이렇게 형주인사로서 제갈량의 후임이 된 장완은 진취적 성향을 보이는 반면, 익주의 인사인 비의는 수세적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장완이 집권할 무렵에는 형주의 주요 인사였던 방통, 마량, 윤묵, 진진, 마량, 황충, 장완, 마속, 요립, 위연 등 중 대부분이 숙청 혹은 병사하였고, 장완을 따라 한중으로 간 장수들 이외의 조정의 인사들은 대부분이 익주의 인사들이었다. 익주의 인사들은 유언, 유장으로부터 이어온 수세적, 방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특히 제갈량과 같은 유능한 명재상이 병사한 직후 위나라를 토벌하는 일에 두려움을 표출하게 된다. 장완에서부터 강유의 북벌에 이르기까지, 조정의 반대에 부딪치지 않은 정벌이 없는 것이다. <8월 28일 필자가 올린 공격글 중(中)>]
물론 익주 자체가 풍요로운 땅으로 제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일컬어져 왔으며, 실제로 그 곳에서 제업을 일으키고자 했던 사례는 결코 적지 않았다. 춘추전국시대 진(秦)이 근거하던 땅이고, 한 고조 유방이 일어난 땅이다. 후세에도 물자와 인재가 풍부한 익주의 중요성은 매우 높다. 천혜의 요새에 자급자족까지 가능한 천부지토의 땅. 하지만 이는 일반적인 경우에만 성립하는 말이다.
자급자족은 상주한 인구를 충당할 만한 식량을 일굴 수 있을 때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다음의 기록을 보자.
[촉나라 정권의 중핵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은 원래 대개가 촉의 사람들이 아니고, 선주 유비를 따라 익주에 들어온 소위 외성인(外省人)이다...(중략) 유비 정권의 중추 간부 중 3분의 2가 익주 바깥에서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당시 호족이나 권문은 “부곡(部曲)”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사병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보통 부곡민은 그 가족을 이끌고 호족 문하에 몸을 의탁해 온다. 위나라의 이전(李典)은 부곡 3천여 호 1만 3천 명을 거느렸고...(중략)그러한 권문 호족이 촉나라로 가면, 그들 부곡민은 가족들을 대동하고 주인을 따라서 이동하게 된다. 그 때문에 익주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부곡의 증가는 생산력의 향상이나 국가의 세수 증대로는 연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 부곡민은 유력자의 사병이고 사노비였기 때문에, 국가에 대해서 납세의 의무가 없고 또한 생산에도 종사하지 않았다.
당연히 외성인으로 이루어진 촉나라의 정권이 커지면 커질수록 노동하지 않는 인구가 증가하게 되고, 익주 경제가 압박 받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되는 일이다. 형주를 잃은 것을 계기로 하여 그토록 부와 풍요를 자랑하던 익주도 먹을 것을 비롯한 물자의 만성적인 부족 상태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중략)
제갈공명은 자신이 범한 오산에서 생기는 국가적 손실을 냉정히 계산하고, 그것을 보전할 새로운 국가 전략을 구상했음에 틀림없다...(중략) 공명이 새롭게 채택한 촉나라의 국가 전략은 “이공위수(以攻爲守)”이었다. <사상으로 읽는 삼국지 중(中)>]
유비를 위시한 형주파 인사들이 대거 유입될 때부터 이미 경제파탄이 예고되고 있었다. 게다가 유비의 무리한 대오(對吳)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물자와 병력이 손실되었고, 이후 익주는 불어난 인구 덕으로 경제력이 서서히 낮아지게 된다. 실제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삼국지 통치학 참조) 만일 익주 하나에 안주한다면 경제력이 바닥을 드러내어 황무지로 변하게 될 마당이었다. 실제로 장완의 상용급습계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 별다른 땅을 확보하지 못했던 촉한은 경제력이 바닥나기 시작한다.
[후주 유선이 위나라에 보낸 항복 문서에 의하면, 당시 촉나라는 인구 94만 명, 호구 수 28만 호, 장병 10만 2천 명, 관리 4만 명, 쌀 40만 석, 금은 각 2천 근, 견직물 등 각 20만 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의 학자 하작은 이 기사에 대해 “촉나라의 궁핍이 이렇게까지 진행되었으니 국가를 지탱해 나갈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라고 논평을 붙이고 있다. <사상으로 읽는 삼국지 중(中)>]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장완은 병색이 짙었음에도 기습전을 구상하여 어떻게 해서든 촉한이 직면한 잠정적인 문제를 타계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장완이 후계자에게 그 일을 맡기지 않고 몸에 병이 있는 자신이 하고자 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앞서 말했던 촉인들의 전형적인 성향 때문이다. 제갈량이 죽을 때 자신의 후임으로 장완을 임명했는데, 장완의 후임으로는 비의를 천거했다. 사실 장완이 죽을 무렵에도 비의 이외에는 촉한의 국정을 올바로 처리해 나갈 인물이 없었다. 아니, 애시당초 촉인들 외에는 후임자가 없었다고 보아도 좋겠다. 앞서 말했듯 비의가 집정을 맡은 이후 촉한은 지극히 수세적인 입장을 고수하게 된다. 이러한 일을 내다볼만한 혜안이 있었던 장완은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이 죽기 전에 북벌을 감행하여 한 치의 땅이라도 넓혀두고, 중원을 공략하고자 하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나는 점이 있다. 대체 장완은 왜 굳이 북벌로로써 이제까지 고수해 오던 양주로 나아가지 않고 굳이 상용을 급습하려 한 것일까. 이것은 후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양주는 이미 말했듯 이제까지 촉한이 고수해 왔던 전형적인 북벌로이다. 이 곳은 지난번 설명했듯 정서장군, 도독옹양제군사(都督雍涼諸軍事)로 임명된 조엄이 지키고 있었다. 위서 조엄전에는 조엄의 여러 공적이 기술되어 있으며, 특히 양주 지역에서의 공이 컸으며, 훗날 표기장군, 사공까지 되는 인물이다. 당대뿐만 아니라 옹, 양주는 장기, 서막, 곽회 등 당시에 양주 일대를 안정시킨, 혁혁한 공이 있는 명장들이 연이어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위나라에서는 촉한이 양주로 진출할 것을 경계하여 명장을 배치하여 수비하게 했다.
이와는 다소 대조적으로 상용의 경우는 양주보다 비교적 진출이 용이했고, 확보한다면 그 곳을 지키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으며, 양주보다도 위군을 공략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이러한 이유로 장완은 상용을 택하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 자세한 것은 뒤에 기술하도록 하겠다.
자, 그렇다면 이 파트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보자. 촉국은 끊임없이 여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전날 이미 방대한 언급을 했던 바가 있다. 다만 이것을 그냥 지나친 이들을 위해 다시 언급을 해 보도록 하겠다.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승리하지 못하면 돌아가는 길이 매우 험난하므로 훌륭한 계책이 못된다고 했다. <정사 촉서 장완전 中>]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특히 촉국의 조운 장군은 이를 두고 ‘촉인의 일부도 아닌 모두가 이 의견에 반대했다. 그런데도 계책을 수용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사료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논지에 오류가 발생한다. 사료를 해석할 때는 한 쪽만을 살펴서는 안 되고 방대한 사료를 다 점검하면서 주장에 맞게끔 접근해가야 하는 것이다. 만일 조운 장군의 논지와 같이 ‘모든 사람의 의견이라면 그 의견을 따라야 한다’는 식이라면 역사적으로 패망할 뻔한 사례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아는가. 지난번에 무려 9개의 사료를 제시했는데, 이는 전일의 것을 살펴보도록 하고, 그와는 또 다른 4개의 사료를 제시해 볼까 한다.
[흉노의 선우가 평양(平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종요는 병사들을 인솔하여 그를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는데, 원상이 임명한 하동 태수 관원(郭援)이 하동으로 오자 군세가 매우 강성해졌다. 장수들은 상의하여 하동지역을 버리고 떠나려고 했는데, 종요가 말했다.
“원씨는 방금 강해졌고, 곽원이 왔으므로 관중에는 그와 은밀히 내통하는 자가 있을 것이오. 그들이 전부 배반하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위세와 명성이 있음을 돌아보았기 때문이오. 만일 하동을 버리고 떠난다면 우리들의 적이 되지 않겠소! 설령 내가 관중으로 돌아가려고 하더라도 갈 수 있겠소? 이것은 싸우지 않고 먼저 스스로 패배하는 것이요. 하물며 곽원은 성질이 강퍅하고 이기기를 좋아하므로 반드시 우리 군을 가볍게 여길 것이요. 만일 우리가 먼저 분수(汾水)를 건너 진영을 만들고 관원의 군사가 건널 대 공격한다면 크게 이길 수 있을 것이오.”
장기(張旣)가 마등을 설득하여 곽원을 공격하도록 하자 마등은 아들 마초(馬超)를 보내 정예 병사를 인솔하여 곽원을 맞아 공격하도록 했다. 곽원은 도착하여 과연 경솔하게 분수(汾水)를 건너려고 했다. 대부분이 그렇게 하지 말 것을 권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분수를 절반도 채 건너지 못했는데, 마초가 공격하여 크게 무찌르고 곽원을 죽이고 선우를 항복시켰다. <정사 위서 종요전 중(中)>]
이 때 종요의 말을 듣지 않고 장수들이 상의한 대로 하동지역을 버리고 갔다면, 퇴각시에도 큰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하동지역을 회복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번성은 물에 잠겨 자주 붕괴되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안색을 잃었다. 어떤 사람이 조인에게 말했다.
“지금의 위험은 우리들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관우의 포위진이 합쳐지지 않은 틈을 타서 가벼운 배를 타고 밤에 달아나십시오. 비록 성은 잃을지라도, 생명은 보존할 수 있습니다.”
만총이 말했다.
“산으로부터 흐르는 물은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관우가 파견한 다른 군대는 이미 업성 아래에 주둔해 있으며 허성 남쪽 지역의 백성들은 불안해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관우가 지금 감히 즉시 진격하지 않는 까닭은 우리 군대가 그들의 뒤를 끊을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만일 도주한다면, 홍하(洪河) 이남 지역은 다시는 위나라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잠시 기다려야만 합니다.”
조인이 말했다.
“알겠소!”
만총은 백마를 물속 깊숙이 잠기게 하여 제품(祭品)으로 삼고는 군사들과 함께 맹세했다. 마침 서황 등의 구원병이 도착했으므로 만총은 전력을 다해 싸워서 공을 세웠다. 관우는 곧 물러났다. <정사 위서 만총전 중(中)>]
이 때 만총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위나라는 병가필쟁(兵家必爭)의 땅 양양이라는 거대한 거점을 지니고 촉, 오를 견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비가 한수를 건너 공격해 오려고 했다. 각 장수들은 의논한 결과, 중과부적이고 유비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있는 이상 물에 의지하여 진을 만들고 유비에 대항하려고 했다. 곽회가 말했다.
‘이것은 우리들의 연약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적을 꺾기에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쳐서 적을 유인하여 반쯤 건넌 후에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유비를 무찌를 수 있습니다.“
진을 친 후, 유비는 의심스럽게 여겨 건너지 않았다. 곽회는 고수하고, 돌아올 마음이 없음을 나타냈다. <정사 위서 곽회전 중(中)>]
장수들의 의논에 따르지 않고 곽회의 말을 따름으로써 싸움을 안전하게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갈량은 병력을 과시하며 서쪽으로 진군하였는데, 장수들은 모두 서위(西圍 : 진영 이름)를 공격하려고 한다고 말했지만, 오직 곽회만은 제갈량이 서쪽에서 형체를 드러내는 것은 관병으로 하여금 중병(重兵)을 서쪽에서 대응하게 하려는 것으로, 실제로는 틀림없이 양수(陽遂)를 공격할 뿐이라고 했다. 그 날 밤, 과연 양수를 공격하였는데,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성을 공략할 수는 없었다. <정사 위서 곽회전 중(中)>]
만일 이 때 장수들의 말을 듣고 양수를 지키지 않고 서위를 공격했다면 아마도 대패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도합 13개를 들었음에도 아직도 많다. 중국사 전반을 통해 이런 예를 살핀다면 책 몇 권에 이를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리고 전일 언급했듯, ‘현자(賢者) 한 사람의 생각이 우부(愚夫) 만 명의 생각보다 낫다.’ 그러므로 조운 장군의 ‘다수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논리적 비약 내지는 사실의 왜곡이 될 것이다.
2. 장완이 내세운 작전의 역사적 전례
전례는 이미 전일 다 설명한 바가 있지만, 총정리의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한다. 아울러 새로이 ‘주아부가 오초 칠국의 난 당시 이용했던 경로’를 살펴보기로 한다.
상용을 점거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상용 지역의 수비 자체가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안 24년(219)에 맹달에게 명하여 자귀( 歸)로부터 북쪽으로 방릉(房陵)을 공격하도록 했다. 방릉태수 괴기( 祺)가 맹달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맹달이 장차 진군하여 상용(上庸)을 공격하려고 하자, 유비는 맹달이 독자적으로는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은근히 걱정했다. 유비는 곧 유봉을 보내 한중으로부터 면수를 따라 내려가 맹달의 군대를 통솔하도록 하여 맹달과 함께 상용에서 결합하도록 했다. 상용태수 신탐(申眈)은 사람들을 인솔하여 투항하고 처자와 종족 사람들을 성도로 보내 인사하도록 했다. 유비는 신탐에게 정북장군의 지위를 주고, 상용태수 원향후(員鄕侯)를 이전처럼 겸임시켰으며, 신탐의 동생 신의(申儀)를 건신장군(建信將軍)서성태수(西城太守)로 임명하고, 유봉을 부군장군으로 승진시켰다. <정사 촉서 유봉전 중(中)>]
상용은 사실 여러 지역과는 달리 전쟁이 많이 일어난 땅은 아니다. 맹달이 신성에 있을 때 주인을 여러 번 바꾸는 바람에 잠시 쟁란이 일어났었지만, 그 전후로는 비교적 전쟁이 적은 땅이었다. 그래서 맹달, 유봉이 상용을 뺏을 때도 비교적 쉽게 전쟁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신탐이 항전하지 않고 순순히 항복한 것을 봐서라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게다가 상용 땅은 어떻게 보면 대부분 별다른 항전 없이 뺏고 뺏기는 곳이었다. 처음 유비군이 습격할 때 신탐이 항복했고, 하후상 등이 습격했을 때도 맹달 등이 위나라에 항복했으며, 다시 맹달이 촉한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도 신의 등의 항복이 이어졌다. 그만큼 상용 땅은 쉽게 뺏고 쉽게 뺏기는 땅이었는데, 전쟁이 없어서 그랬는지, 혹은 민심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인지는 상세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그 곳의 수비체제도 사실 전일 언급한 대로 그렇게 견고한 편도 아니었다. 군현이 자주 바뀌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건안 24년(219)> 위문제 조비는 맹달의 자태와 재능을 칭찬하며 산기상시, 건무장군으로 임명하고 평양정후(平陽亭侯)로 봉했다. 방릉, 상용, 서성 세 군을 합쳐 신성군(新城郡)이라 하고, 맹달에게 신성태수를 맡겼다. <정사 촉서 유봉전 中>]
[태화 2년(228) 봄 정월 사마선왕은 신성을 공격하여 토벌하고, 맹달을 참수하여 그의 머리를 보내왔다. 본래 신성군에 속했던 상용(上庸),무릉(武陵),무현(巫縣)을 떼어 내어 새로 상용군을 설치하고, 석현(錫縣)을 새로 석군이라 했다. <정사 위서 명제기 中>]
[<태화 4년(230)> 봄 2월 19일 상용군을 군에서 없앴다. <정사 위서 명제기 中>]
[경초 원년(237) 6월 12일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3일, 상서령 진교(陳矯)를 사도로, 상서우박사 위진(衛臻)을 사공으로 삼았다. 11일, 위흥군(魏興郡)에서 위양현(魏陽縣)을, 석군(錫郡)에서 안부현(安富縣)ㆍ상용현(上庸縣)을 분할하여 상용군(上庸郡)이라고 했다. 석군을 없애고 석현을 위흥군에 귀속시켰다. <정사 위서 명제기 中>]
그리고 맹달의 모반 당시 사마의가 맹달을 참수하고 난 후, 위흥태수 신의가 관직을 함부로 내렸다 하여 낙양으로 소환시켰다는 기록이 자치통감에 있다. 그 후 상용태수와 위흥태수 등 이 일대의 관리자 임명에 대해 기록에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는 바가 없다. 다만 형주자사로 호질(胡質)이 임명되어 있다는 기록은 있지만, 형주자사라면 양양, 번성 부근에 상주하고 있을 것이고, 상용, 위흥 일대를 친히 수비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래에 오초칠국의 난 당시 주아부의 진입 경로를 설명하기 위한 지도를 보면, 상용, 위흥 일대와 양양, 번성 부근도 장안, 낙양 사이의 거리만큼 상당히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용을 점거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수군을 통한 습격이다.
[청나라의 학자 전진굉(餞振鍠)은 촉나라 군의 패배 원인(이릉전)을 유비의 용병술이 서툰 점에서 찾고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수군을 이용하는 경우, 장강의 흐름을 타고 상류에서 진군하여 공격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일단 전투가 불리하게 전개되면 되면 강 상류로 퇴각하기가 어려워진다. 단지 이 점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비가 일부러 유리한 수군을 버리고, 삼협의 험준한 산길로 먼 길을 행군하여 쓸데없이 병사를 피로하게 만든 것이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사상으로 읽는 삼국지 중(中)>]
[여기서도 역류의 위험성을 말하고 있지만, 상기의 학자 전진굉(餞振鍠)이 이를 언급하면서 더 중시한 것은 전술의 요체이다. 당최 유비는 수군의 위험성만을 생각하고 우회하여 병가에서 꺼리는 오랜 진군을 감행함으로써 병사들을 지치게 만들어, 결국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선례(先例)를 장완은 매우 신중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상기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미 한수의 급류를 이용하는 것은 회군이 어렵다는 것을 촉군이 안다면, 위나라는 어찌 모르겠나. 그러므로 이 쪽으로 기습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고, 맹달의 반란 이후 근 20년 동안 상용이 기습당한 적이 없으니, 당시 가뜩이나 동오와의 싸움으로 지쳐있던 위나라에게 상용, 위흥이라는 곳은 촉군의 기습이라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 땅이었다. <8월 28일 필자가 올린 공격글 중(中)>]
촉한은 오나라를 공격할 때도 거의 수군을 이용하지 않았고, 제갈량이 진천을 공략하려고 북벌을 감행할 때도 보기(步騎) 위주로 나아갔다. 위군과는 거의 산지나 평지에서 부딪치게 되기 때문에, 대부분은 보기(步騎) 중심이다. 그러므로 위나라로서도 촉한이 수군을 위주로 공격을 해 온다는 것은 거의 출기불의(出期不意)의 전략에 가깝다.
단, 여기서 촉군이 비판을 하는 부분이 있는데, 수군을 당시 훈련하지 않았는데도 수군을 이용한 기습작전을 이용하려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깝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것은 제갈량의 북벌군이 나아가는 경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이다. 아무리 지역 자체가 산지, 평지로 둘러싸여 있어 보기(步騎) 위주로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수군을 쓰지 않을래야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제갈량이 양주 일대 내지는 장안을 점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지역이 있는데, 바로 위수(渭水)이다. 제갈량이 진출한 기산 일대 내지는 북벌군이 처음 점거한 농서 3군도 다 위수를 끼고 있고, 훗날 제갈량이 나아간 무공(武功)과 오장원도 전부 위수가의 남북으로 있는 지역이다. 촉한군은 보기(步騎) 위주의 전쟁을 한 것이지, 수군을 쓰지 않은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상용, 위흥 일대는 충분히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계산이 장완의 머리 속에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장완이 상용, 위흥 일대를 손에 넣은 뒤 나아가야 할 경로에 대한 전례를 살펴보겠다.
한(漢) 경제(景帝) 시대 기원전 154년, 오왕(吳王) 유비(劉 )가 오초(吳楚) 칠국의 난을 일으켰다. 칠국이란 오왕 외에 초왕(楚王) 유무(劉戊), 교서왕(膠西王) 유앙(劉 ), 교동왕(膠東王) 유웅거(劉熊渠), 치천왕(淄川王) 유현(劉賢),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 光), 조왕(趙王) 유수(劉遂) 등이었다. 경제가 즉위한 후 조착( 錯)을 기용하여 제후들의 봉지를 줄이려고 하자 칠왕이 이 명에 따르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한나라 조정은 주아부(周亞夫), 란포(欒布), 두영(竇 ) 등의 장군을 보내어 진압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경제는 조착에게 책임을 물어 처형하고 칠국의 제후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그 마저 성과가 없었다. 오히려 오초(吳楚) 연합군은 공세를 강화하여 극벽(棘壁)이란 곳에서 양나라 군사를 대파했다. 그러나 오초 반란군도 양나라의 도성인 수양성( 陽城)은 함락시키지 못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했다. 오초 연합군이 양나라의 수양성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한나라 조정은 주아부를 태위로 삼아 토벌군을 출동시켰다. 이 때 주아부는 한 경제에게 반란군이 공격하고 있는 양나라를 미끼로 내어주고, 그 틈을 틈타 자신은 병참선을 끊겠다는 전략을 내세우고 윤허를 받아낸다. 이 때 주아부가 장안(서한 당시의 수도였음)을 출발하여 무사히 낙양에 도착한 후 창읍을 점거하여 적군의 병참선을 끊어 마침내 오초 칠국의 난을 평정하는데, 이 때 주아부가 사용한 경로를 살펴보자.
[주아부가 형양에 가서 군사를 집합시킬 계획으로 역참의 수레 여섯 대를 타고 패상에 도착했다. 이 때 조섭(趙涉)이 주아부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오나라 왕은 원래 부유하여 오래 전부터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려는 군사를 모아왔습니다. 이들이 장군께서 가시려는 길도 알고 있으니, 효산(殽山)과 면지(㴐池)의 험하고 좁은 사잇길(함곡관을 통과하는 길)에 사람을 매복시켜 놓을 것입니다. 군사에 관한 일은 신비스럽고 기밀을 지켜야 하는 것인데,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아 남전(藍田)으로 달려가서 무관(武關)을 나와 낙양에 이르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두 길 사이의 차이는 하루이틀에 불과합니다. 낙양에서 바로 무고(武庫)로 가서 전고(戰鼓)를 크게 울리십시오. 제후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장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알 것입니다.”
태위가 그 계책대로 낙양에 이르러 기뻐하며 말했다.
“7국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나는 역참의 수레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 나 자신도 이렇게 안전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제 내가 형양에 근거를 잡았으니, 형양의 동쪽 지역은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런 뒤 관리들에게 효산과 면지 사이를 수색하게 하니, 과연 오나라의 복병을 잡을 수가 있었다. 이리하여 조섭을 호군(護軍)으로 삼았다. <자치통감 효경황제(孝景皇帝) 전 3년 기사 중(中)>] (연호는 한 무제 건원(建元) 원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함)
조섭의 계책을 들음으로 인하여 주아부는 장안, 낙양 사이의 매복병에 걸리지 않고 우회하여 낙양으로 진입할 수 있었는데, 이 길이 바로 무관을 거쳐 낙양으로 가는 길이다. 장완이 이용하려고 했던 길이 바로 이 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섭이 설명한 남전(藍田)은 어디이며, 무관과 상용, 위흥 등 당시의 지리는 어떻게 되는가. 아래 지도를 잠시 살펴보기 바란다. (지도를 클릭해서 확대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출처 : 담기양 저, 중국역사지도집>
위의 지도는 서한 시대 사례 지방의 지도이다. 좌측 상단에 장안(長安)이 있고, 그 바로 아래 남전(藍田)이 있다. 그리고 장안, 남전을 잇는 길을 따라 아래로 계속 내려가다 보면 중앙 하단에 무관(武關)이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무관에서 우측 상단으로 쭈욱 올라가면 낙양(洛陽)이 보인다. 원래 장안에서 낙양으로 가려면 굳이 이런 코스를 지나지 않아도 홍농 땅을 통해 함곡관으로 진입하는 직선 코스가 있고 더 빠르다. 그런데 주아부가 굳이 이런 코스를 선택한 것은 조섭이 설명한 대로, 주아부가 이 곳으로 올 것을 예상한 오초 반란군이 매복을 시켜놓을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있었다. 그래서 주아부는 이렇게 우회하여 낙양에 도착하는 길로, 매우 안전하게 형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장완은 주아부의 선례에 착안, 무관을 통해 낙양으로 들어가는 길을 선택해 보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래의 지도를 보자.
<출처 : 담기양 저, 중국역사지도집>
이 지도는 삼국 시대 당시의 사주 일대 지도인데, 사실상 서한 시대와 거의 달라진 것은 없다. 장안, 남전, 무관, 낙양이 다 보일 것이다. 그리고 참고적으로 좌측 하단에 순수(洵水)가 보이는가. 이것은 이제 다음 지도에서의 지표로 활용할 부분이다.
<출처 : 담기양 저, 중국역사지도집>
중앙 상단에 무관(武關)이 보이고, 좌측 중앙에는 파란색으로 표시한 순수(洵水)가 있다. 빨간색으로 표시한 곳 중 상단이 위흥(魏興), 하단이 상용(上庸)이다. 좌측 끝에 있는 곳은 한중에서 흘러오는 면수(沔水)이고, 지도 정중앙에는 파란색으로 한수(漢水)가 표시되어 있다. 참고로 우측 하단 부근에 갈색으로 표시한 곳은 번성, 양양(襄陽) 부근이다.
이제 대강 지리가 눈에 들어오는가? 장완이 한수를 타고 상용, 위흥 땅을 점거하면, 바로 앞쪽의 무관(武關)을 점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무관을 점거한다면, 장완으로서는 주아부의 선례를 좇아 낙양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고, 거꾸로 주아부가 무관까지 오게 된 경로를 더듬어 올라가 장안을 습격할 수도 있다. 이것은 위군의 군사력이 분산될 수 있다는 뜻이고, 혹은 어느 한 곳으로 군사력이 집중될 경우 나머지 한 곳을 격파할 수 있다.
3. 상용 급습계 작전의 과정 설명
[촉한의 대사마 장완은 제갈량이 수차 진천(秦川 : 관중)으로 출병했다가 도로가 험준하여 운량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끝내 성공치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이에 많은 배를 만들어 한수와 면수를 따라 동하(東下 : 동쪽으로 내려감)하여 위나라의 위흥(魏興)과 상용(上庸)을 습격코자 했다. <자치통감 정시 2년조 기사 중(中)>]
[그러자 장완이 상소하여 말했다.
“지금 위나라는 9주를 차지하여 그 뿌리가 더욱 뻗어가니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만일 오나라와 합심해 앞뒤로 호응하면 비록 일거에 뜻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응당 위지를 쪼개 점차 잠식할 수 있으니 우선 위나라의 변경을 훼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오나라가 세 번 접촉에 두 번 합동작전키로 약정하고도 출병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신이 비의등과 상의한 결과 양주(凉州)는 호인들이 사는 중요한 관새(關塞)이므로 진퇴의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강족과 호인은 지금 모두 한나라를 애타게 생각하고 있으니 응당 강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해야 합니다. 만일 강유가 출정해 황하 이서를 견제하면 신 역시 응당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강유의 뒤를 이어 진주할 것입니다.
지금 부현(涪縣)의 수륙 양쪽으로 사통팔달하니 긴급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능히 대응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오나라와 싸우게 될지라도 여기서 출발하여 접응하면 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대군영을 부현으로 옮겨 주둔토록 허락해 줄 것을 청합니다.”
한주가 이를 좇았다. <자치통감 정시 2년(241)조 기사 중(中)>]
장완이 처음 구상하였던 전략과, 이후 조정의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치면서 비의, 강유를 통해 후주에게 상주한, 상기와 같은 내용을 살펴보면 대략 장완이 구상한 진행방향은 다음과 같다.
우선, 대장군 장완은 한중에서 부현으로 돌아와 군마를 재정비하는 한편으로, 강유를 양주자사로 올려보내 황하 이서를 견제해야 한다. 이것은 성동격서를 이용하려고 한 것으로 강유가 양주를 교란시킬 때 장완은 몰래 한수를 타고 내려가 상용, 위흥 일대를 습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때 강유는 장완이 습격작전을 실행할 때 배후를 방해받지 않도록, 양주 일대를 교란시키면서 한중을 수비할 만한 병력과 물자를 확보해야 했다.
장완이 강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한 데는 물론 그 개인의 탁월한 능력도 있지만, 강유가 양주의 민심을 얻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전일 설명한 바가 있지만, 총정리에 관점을 두고 있는 본글에서 다시 언급하자면 아래와 같다.
상주문 중에는 “강족과 호인은 지금 모두 한나라를 애타게 생각하고 있으니”라는 말이 있다. 이 당시 양주에 있는 호인들이 촉한에 협력할 만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대목이다.
[건흥 14년(236) 여름 4월에 유선은 전현(湔縣)으로 가서 관판(觀阪)에 올라 문수(汶水)의 흐름을 보고, 열흘 후에 성도로 돌아왔다. 무도현의 저족 왕 부건(苻健)과 저족 백성 4백여 호를 광도(廣都)로 이주시켰다. <정사 촉서 후주전 중(中)>]
상기의 기록과 같이 제갈량 사후 촉한은 저족을 촉한의 세력으로 흡수했고, 강족 또한 촉한 정권에 우호적이었다. 해서 장완은 상주하여 강유로 하여금 양주자사로서 이들 호인들로 하여금 호응케 하여 양주 일대를 교란시킬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양주 일대의 명족 강유를 보내 그들 호인들과 양주 지역의 민심을 장악하여 선동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전한 말기부터 있었지만, 후한 말기가 되면 천하 도처에 군의 명가를 나타내는 순위표가 완성된 듯 하다.『삼국위지』권 13 왕숙전 주에서 인용한『위략』설하전을 보자.
‘천수군에 옛 강, 염, 임, 조 네 성이 있다. 항상 군에서 추천받았다.’ <구품관인법의 연구 중(中)>]
상기의 강(姜)씨 성은 곧 강유가 그 일대의 명족임을 알 수 있는 구절이고, 실제로 제갈량이 강유를 조정에 천거하면서 "강백약(姜伯約)은 그 시대의 일을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하며 사려가 정밀하며, 그가 갖고 있는 재능을 살펴보면, 영남 및 계상 등의 사람들도 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양주에서 최고의 인물입니다." 라는 말을 한 것은 당시 양주의 민심을 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양주의 대표적인 명족 강유를 높이 평가함으로써 방금 제갈량에게 점령당한 양주 일대의 민심이 촉한으로 넘어오게끔 유도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아도 강유가 양주 일대에 행사할 수 있었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상주문을 보면, 강유를 양주로 올려보내 양주를 교란시킬 때 ‘신 역시 응당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강유의 뒤를 이어 진주할 것입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그대로 해석하면 강유가 양주를 공략할 때 자신도 접응하겠다는 말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상용 습격과 연계를 시킨다면, 이 말의 의미는 ‘자신도 한중으로 나아가 강유를 돕는 것으로 가장하여, 그 곳에서 몰래 면수(沔水)를 타고 한수(漢水)로 나아가 상용, 위흥 일대를 장악할 것이다’라 파악될 수 있다.
강유가 제갈량의 북벌 당시처럼 진천(秦川)을 노리고 양주 일대의 백성들을 선동시키면서 나아간다면 위군으로서는 촉한군을 양주에서 막는 데 주력하게 된다. 이 때 부현에서 장완이 한중으로 나아온다면 이를 강유를 원조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양주의 수비를 강화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장완이 수를 쓰게 된다면 장완이 동원한 병력도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이 때 장완은 파악되지 않은 병력을 이끌고 면수를 타고 한수로 들어가 그 부근의 위흥, 상용 일대를 점거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위군과 오군도 사실 번성 일대를 놓고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오군이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 장완의 상용 탈취를 도울 수도 있다. 혹은 오군이 위군을 번성에서 잡아두는 동안 기습하는 것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단 오랜 시간 위국의 지배 아래 있었던 상용이 점거되면 장완은 이 곳을 정비하면서 온전히 촉한의 땅으로 만드는 데 시간을 투자하게 될 것이다. 양양으로부터의 습격도 대비해야 할 것이고, 전일처럼 모반이 일어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이 때 위군은 장완이 갑작스레 상용 일대를 탈취하게 되었으므로 세 방면을 방비해야 한다. 바로 강유가 교란시키고 있는 양주와, 장완이 머물고 있는 상용 일대의 전선, 그리고 양양, 번성 일대이다.
위흥, 상용 일대를 점거하면 이제는 무관(武關)이 바로 앞이다. 장완이 상용 일대를 안정시키고 무관을 확보하게 된다면, 이후 취할 경로는 주아부의 선례를 포함해서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주아부의 전례를 본받아 무관에서 바로 낙양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강유가 양양 일대를 교란시키고 있기 때문에, 위군은 낙양만을 수비할 수가 없다. 양주 일대 내지는 오나라의 습격까지 대비를 해야 함으로 낙양의 군대는 자연 분산될 수밖에 없다. 수비 병력이 적어지는 것이다. 이 틈을 이용해 낙양을 취하게 된다면 위국 전체가 진동하게 되고, 촉한으로서는 유비의 건국 이후의 숙원을 푸는 셈이고, 아울러 옹, 양 일대와 산동, 하북 일대를 차단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낙양의 경우는 사통팔달의 거성이기 때문에 수비가 온전해지면 어느 방면으로든 위협을 가할 수가 있게 된다.
두 번째는 주아부의 전례를 거슬러 장안을 취하는 것이다. 주아부의 경로와는 거꾸로 무관에서 남전으로 나아가 장안을 취할 수 있다. 이미 강유가 양주 일대를 교란하고 있기 때문에 장안의 수비가 강화될 수 있겠지만, 장완의 무관 점거로 인해 병력이 분산된 위군이기 때문에 전황을 잘 판단한다면 강유와 함께 장안을 습격할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별다른 계책을 취해서, 한중에서 장안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경로 네 가지, 즉 진창도, 포사도, 당락도, 자오도 중 한두 가지 경로를 취해서 같이 장안을 협공한다면, 장안을 점령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세 번째는 오군과 연계해서 양양을 취하는 것이다. 번성을 공략하려고 주연 등 오군 최고급의 장수를 보낸 손권의 판단을 고려해 본다면, 당시 동오가 번성, 양양 일대 공략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오나라 병력과의 양양을 같이 공격하는 것은 상당히 수월한 일로 판단되며, 그 곳 양번지구가 점령되면 위나라가 다른 전선에서 병력을 빼야 되므로 상대적으로 다른 쪽이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다시 그 곳을 공략하게 된다면 위나라는 사실상 머리와 꼬리를 같이 돌볼 수 없는 지경으로 빠지게 된다.
(지도는 링크 문제로 여기에 참여하지 못함 ㅡ.ㅡ;)
4. 상용 급습계를 감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
언제나 이야기를 했지만, 기습책이라는 것은 결코 위험성 때문에 가볍게 거부할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다. 역대 전쟁들을 다 헤아려보아도 기습으로 인해 전세를 뒤집은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전일 언급했던 병서에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전투란, 먼저 정공법으로 적군과 부딪쳐서 주력 부대를 멈춘 다음, 기습 전술로 옆이나 등 뒤에서 적의 약점을 습격하여 승리를 결정짓는다. 그러므로 기습 전술에 뛰어난 장수의 전법은 변화가 하늘과 땅의 움직임처럼 무궁무진하고, 강과 바다의 흐름처럼 넘쳐나도 끊이지 않는 지혜다. <손자병법 병세편 중(中)>]
[정공법으로 정면에서 부딪치면 적군도 온 힘을 기울여 맞선다. 그러면 옆이나 등 뒤의 주의는 흐트러지게 된다. 이런 기회를 노려서 기습 부대를 매복해 두고 적군이 미처 대비하지 못한 곳을 생각지도 못할 때 습격한다. 하늘과 땅처럼 거침없고 끝나지 않는 자유로움의 경지란 병법에서 정공법과 기습 전술을 무한히 뒤섞어 응용할 수 있음을 비유해서 설명한 것이다. <손자병법 병세편 조조의 주석 중(中)>]
[먼저 정공법으로 주력 부대와 맞서 싸우고, 기습 전술에 따라 움직이는 유격 부대로 승리를 결정짓는다. <풍후/악기경 중(中)>]
장완의 전법을 다시 한 번 살펴본다면, 강유를 양주자사로 삼아 기병(奇兵)이 되게 하고 자신은 스스로 상용을 기습, 취한다는 것인데, 위국의 입장으로 본다면 촉한은 북벌을 감행할 때 지속적으로 한중에서 진천을 점거하기 위해 양주로 나아와 기산을 점거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강유의 군대를 정규군으로 보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장완의 계책은 강유의 기병(奇兵)을 정규군으로 가장하고, 정작 장완이 이끄는 본대는 기습전을 행한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병법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공법과 기습 전술을 무한히 뒤섞어 응용할 수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본대가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습격을 감행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완은 병법의 기본을 따르면서 변칙적인 운용을 함으로써 위나라를 교란시킬 수 있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게 된다.
장완이 일단 상용, 위흥 일대를 점거하게 되면 위나라로서는 방비해야 할 전선지역이 한층 넓어지게 되는 셈이다. 위흥과 맞닿아있는 무관은 전선이 여러곳에 걸친 위군으로서는 사실상 방비가 힘든 거점이다. 무관이 뺏긴다면 위군은 촉한이 공략하려는 양주 일대와 장안 일대, 그리고 촉한군이 무관에서 바로 진격해 올라올 수 있는 낙양 일대와 만일 우측으로 진군한다면 빼앗을 수 있는 남양 일대의 수비를 강화해야 한다. 게다가 양양, 번성의 수비는 촉한군과 동오군의 연계 작전으로 빼앗길 가능성이 한 층 더 높아졌기 때문에 수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여기에 동오군까지 방비를 하려 들게 된다면 위나라는 그야말로 전 국경지대가 위태로워지는 데다가, 낙양 내지는 허도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제갈량은 유비를 처음 만났을 때, 저 유명한 융중대를 제시한 적이 있다.
[“(상략)... 만일 형주와 익주를 점거하여 그 요충지를 지키고 서쪽으로는 각 민족과 조화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이월(夷越)을 위로하며, 밖으로는 손권과 맹약을 맺고, 안으로는 정치를 개혁할 수 있어서 천하에 변화가 생긴다면, 한 명의 상장(上將)에게 명하여 형주의 군대를 완현(宛縣)과 낙양으로 진군하도록 하고, 장군 자신은 익주의 병력을 이끌고 진천(秦川)으로 출격한다면, 백성들이 어찌 감히 대그릇에 담은 밥과 병에 넣은 장으로써 장군을 환영하지 않겠습니까? 실제 상황이 이와 같다면 패업은 성취될 것이고, 한 왕실은 부흥할 것입니다." <정사 촉서 제갈량전 중(中)>]
이 때의 기본적인 전략은 유표의 형주와 유장의 익주를 완전히 점거하고, 유비는 친히 진천으로 나아가고 한 사람의 상장(훗날의 상황을 고려할 때 여기서는 관우를 지적한 듯)이 형주의 군대를 이끌고 남양과 낙양으로 진군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상황은 관우가 죽고 형주를 상실함으로써 좌절되었는데, 만일 장완이 상용을 점거한다면 유비의 죽음 이후 20년만에 이 융중대의 꿈을 실현할 수도 있었다. 원래 위국은 상용 일대와 양양 일대를 아울러 점거함으로써, 오국에게 형주 남부를 넘기는 대신 형주 북부를 취할 수 있었는데, 장완이 상용 일대를 탈환하게 되면 형주 북부의 절반을 촉한군에게 빼앗기는 셈인 것이다. 강유는 이미 군대를 이끌고 진천으로 나아갔고, 장완 자신이 이끄는 본대가 상용과 위흥을 기습, 점령하면 남북으로 한수와 무관을 장악할 수 있게 되고, 이렇게 되면 바로 동쪽은 남양, 무관 위쪽으로 진격하면 낙양이니 제갈량과 유비의 숙원, 이른 바 “패업은 성취될 것이고, 한 왕실은 부흥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당시의 대외적 정세에도 매우 부합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당시 동오는 촉한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전일 여러 장수들이 제시한 보즐, 주연 등의 상소문과, 위, 오가 연맹하여 촉한을 치자는 전갈이 오갔던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리고 장완이 부현을 두고 동오의 예기치 못한 습격에 대비할 수도 있다는 언급을 살펴볼 때 동오와의 관계가 생각만큼 탄탄하지는 않았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장완이 이러한 계책을 수행하면서 동오로 하여금 연계할 것을 요청할 때, 자신의 전략 구상안을 상세히 설명한 뒤 전략안에 대해 동오의 동의안을 얻어낸다면, 위나라 공략은 물론이고 동오와의 연맹도 더욱 탄탄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전일 은례가 내세웠던 계책을 바탕으로 동오와 촉한의 연계 개연성을 살펴보았는 바, 총정리 겸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다.
[봄, 오나라가 위나라를 치려고 하자 영릉태수 은례(殷禮)가 오주에게 간하여 말했다.
“지금 하늘이 조씨를 버려 상주(喪誅)로써 그 징조를 드러내고 있으니 맹호가 상쟁하는 와중에 위나라는 어린애(조방)가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폐하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혼란스런 적국을 취하면 이는 수치이니 응당 형주와 양주 일대를 깨끗이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선 병사들을 가려 강건한 자에게는 무기를 들게 하고 약한 자에게는 운량을 담당케 해야 합니다. 서쪽의 익주에 명해 농우(隴右)로 진출케 하고, 제갈근과 주연에게는 대군을 주어 곧바로 양양(襄陽)으로 가게하고, 육손과 주환에게는 별도로 수춘을 정벌케 하고, 대가(大駕)는 회양(淮陽)으로 진입하여 청주와 서주를 차례로 제압해 나가야 합니다.
양양과 수춘이 포위되어 곤궁하게 되고 장안 이서(以西)가 촉군과 싸우느라 여념이 없게 되면 허창과 낙양의 군사가 반드시 동서 양쪽으로 나뉘게 될 것이니 이 때 아군이 기각지세(掎角之勢)를 만들어 병진하면 중원의 백성들이 반드시 내응할 것입니다.
촉한과 위나라의 장수가 대진하다가 어느 한쪽이 혹 실수라도 하여 패하게 되면 전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아군이 말마지거(秣馬脂車 : 배불리 먹은 말과 충분히 장비를 갖춘 전차)로 성읍을 공략해 도망가는 적을 추격하면 화하를 능히 평정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나라의 전 병력을 동원치 않고 이전과 같이 소수병력만을 출동시키면 대전과를 얻기가 힘들고 누차 패하기 쉽습니다. 그리되면 백성을 지치게 하고 국위를 손상케 하여 시간은 자꾸 가는데 국력을 소진하는 결과를 낳게 되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자치통감 정시 2년(241)조 기사 중(中)>]
손권이 이 계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 계책은 촉한과의 연계작전을 제외하고 거의 이루어진 전략이다. 주연과 제갈근은 양양 일대로 나아갔고, 다만 회남을 공략하는 군대가 전종으로 수정되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제갈각도 육안을 공격하는 등 은례의 진언대로 위나라 국경 거의 전 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동오가 이 싸움에서 패배를 한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로, 만일 장완이 손권과의 연계를 더 일찍 추진했다면 이 계책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보여진다. 잠깐 다음의 기록을 보자.
[보즐과 주연 등이 각각 상소를 오려 이렇게 말했다.
-- 촉나라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촉은 오와의 맹약을 등지고 위와 서로 내통하려고 많은 배를 만들고 성곽을 수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장완은 한중을 수비하면서 사마의가 남쪽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위나라의 후방이 텅 비었는데도 병사를 내어 적을 견제하지 않고, 오히려 한중을 버리고 성도 부근으로 돌아왔습니다. 일은 이미 매우 분명해졌으니 또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응당 방비할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손권은 상황을 추측해 보고는 이와 같지 않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촉을 두텁게 대우하고, 공식적인 사자를 파견하여 맹약을 맺었으며, 촉에게 불성실하게 대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소? 또 사마의는 이전에 서현으로 들어왔다가 열흘이 지나자 곧 물러났소. 촉은 만리 먼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어떻게 형세의 위급함을 알고 곧 바로 병사를 내겠소? 과거 위나라가 한천(漢川)으로 들어오려고 했을 때도, 우리들은 여기에서 삼엄하게 경계하면서 또 거동하지 않고 있었는데, 마침 위나라 군대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어 출병을 멈추었었소. 촉나라가 어찌 또 이 때문에 우리를 의심할 수 있겠소? 또 다른 사람이 자신의 국가를 다스리면서 배나 성곽을 무엇 때문에 수리하여 보호하지 않겠소? 지금 우리가 여기서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이 어찌 또 촉을 방어하려고 하는 것이겠소? 사람들의 말은 매우 믿을 만하지 못하오. 짐은 여러분들을 위해 집을 허물어서 보증하겠소.” <정사 오서 오주전 중(中)>]
상기에서 장수들은 장완이 군대를 한중에서 부현으로 돌렸으니 이는 반드시 동오를 치기 위함이라고 판단했다. 반대로 손권은 촉한과의 결맹을 스스로 친히 보증하였다. 이 상황에서 장완이 자신의 계책을 진술한 것을 촉한의 후주에게만 상주할 것이 아니라 동오에도 알려 맹약을 상기시키고 협공할 것을 부탁했다면, 동오 조정에서도 촉한을 상당히 우호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고, 연계작전 또한 흔쾌히 승낙했을 것이다. ‘옹주에는 강유가 있고, 장완이 이끄는 촉한 본대는 상용 일대를 장악하며, 남군에는 제갈근, 주연 등이 포진하고, 회남에는 육손, 전종 등이 포진하는’, 상당히 이상적인 구도로 성공확률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작전은 동오의 힘을 빌려 중원을 도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오와의 연맹도 더 탄탄해지는 효과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5. 결어(結語)
장완의 상용 급습에 대해, 사료가 부족함에도 양군이 분전하여 이제까지 참으로 질 높은 의론을 거듭해 왔다. 필자는 이러한 의론들에 대해, 동조하는 글에 대해서는 주장에 대한 보강을, 반대하는 글에 대해서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재개하며 이번 글에 총정리를 해 보았다. 그 밖에도 중국역사지도집, 자치통감 중 주아부의 오초칠국의 난 평정 당시 사용했던 길 등을 이용해 주장에 대해 더 보강을 해 보았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논지를 전개해 본 결과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장완의 상용 급습계는 실현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상용 땅 자체가 여러 번 뺏고 뺏기는 선례도 있었고, 병법의 변칙적 활용을 이용해 급습을 노리는 것 또한 아주 우수한 전술이었으며, 동오와의 혈맹 강화와 더불어 중원 공략의 교두보를 세울 수 있을만한 원대한 계책이었다. 게다가 촉한군의 입장으로만 본다면, 상용과 양주를 한꺼번에 공략하는 만큼 위군으로서는 서로를 돌볼 수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되어, 만일 한 쪽이 실패하더라도 다른 쪽이 성공가능성이 높았다. 만일 장완의 병세가 심하지 않아 마땅히 계책대로 감행을 했다면, 여러 가지 면에서 효과를 볼 수 있는 계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용, 위흥 땅을 점거한다면 무관(武關)을 확보하여 주아부의 전례를 좇을 수 있다. 오초칠국의 난 당시 사용하였던 주아부의 경로를 이용하고자 했던 장완의 현명함이 한 층 돋보인다. 이를 이용한다면 이는 단지 제갈량의 북벌처럼 변방만을 교란시키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위국의 목줄기에 비수를 들이대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에 따른 방비로 인해 위군은 더욱 병력을 분산시키게 될 것이고, 중원의 백성들은 한 층 동요하게 되어 그 위세로 여러 곳이 항복하게 될 것이니, 마땅히 중원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장완의 상용 급습계는, 제갈량의 정공법과는 다른, 촉한으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구상안이었으며 그 가능성도 충분했다고 보여지는 바이다.
촉한이 수행한 모든 전쟁은 ’성공하기도 어렵고, 회군하기도 쉽지 않았던‘ 전쟁이란건 아닌듯 싶군요. 공명의 전략은 하나하나 성공해나가며 회군하기 쉬운 안정적인 전략이라 여깁니다. 이것이 바탕이지 위연등의 전략이 촉한의 바탕이라 할순 없다고 여깁니다. 뜻을 이루지 못한것이지 전략이 그런것은 아닌듯 싶군요.
또한 후출사표를 보드라도 독자적으론 관중에서 작전을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촉한의 국력열세를 보였으며 북벌초중기 친촉의 색채가 짙었던 농우지역의 대월씨에 명제는 229년 ‘친위대월씨왕’이란 작호를 주는등의 노력으로 양주공략도 쉽지 않은 시기에 상용과 양주를 한꺼번에 공략한다는것은 무리지 않았나 싶군요..
첫댓글 역시 같은 주제의 글을 세 번이나 쓴다는 건 버거운... 그래도 생각을 거듭 하다보면 새로운 생각이 나기 마련이고, 총정리할 때는 꽤 간편하다는 ^^
주아부 관련 기록을 찾았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했죠 ^^ 점수는 생각보다 낮게 나왔지만... ㅡ.ㅡ;
수고 ㅋㅋ 난 전투 절대 안 나갈거임 =ㅅ=
점수가 왜 생각보다 낮게 나왔을까요. 난 무조건 전투나가사 제갈무후님 깨야지...호호^ㅇ^
전쟁은 어디가 이겼나요? 역시 진이 성도를 획득했나요?
쿨럭;; 지도가 없네요;;; 지도 올려주세요 ㅋ
어차피 진이 이길 전쟁이었던 ;; 지도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ㅜ.ㅜ 삼클하고는 또 태그 먹이는 게 달라서..
촉한이 수행한 모든 전쟁은 ’성공하기도 어렵고, 회군하기도 쉽지 않았던‘ 전쟁이란건 아닌듯 싶군요. 공명의 전략은 하나하나 성공해나가며 회군하기 쉬운 안정적인 전략이라 여깁니다. 이것이 바탕이지 위연등의 전략이 촉한의 바탕이라 할순 없다고 여깁니다. 뜻을 이루지 못한것이지 전략이 그런것은 아닌듯 싶군요.
또한 후출사표를 보드라도 독자적으론 관중에서 작전을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촉한의 국력열세를 보였으며 북벌초중기 친촉의 색채가 짙었던 농우지역의 대월씨에 명제는 229년 ‘친위대월씨왕’이란 작호를 주는등의 노력으로 양주공략도 쉽지 않은 시기에 상용과 양주를 한꺼번에 공략한다는것은 무리지 않았나 싶군요..
특히나 이시기 오랜전쟁으로 황폐해지고 더욱 열약해진 촉군과 민심이 부과적인 문제였기도 한듯합니다. 촉한의 사람들이 반대한 이면에도 장완의 좋은 전략이기 이전에 이런부분이 내포되어 있다고도 보여집니다. 어쩜 촉한은 왕실,국민,전선의 마음이 규합되지 못한것이 한 원인이라 할수 있겠군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