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ZXKHKbdiTvw?si=rm4mQZxsLo9-mN8P
: 프랑스의 견고한 엘리트주의, 계급 사회를 고발하는 영상이다. 1993년 프랑스 총리 베레고부아의 자살사건을 중심으로 프랑스에 묻혀진, 아주 견고한 프랑스 엘리트 집단의 존재를 이끌어낸다.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제 1신분, 제 2신분을 전복시킨 프랑스는, 혁명전쟁 이후 다시 엘리트 중심체제를 내세우게 된다. 군사관련 기술자를 양성하기위한 에콜 폴리테크니크, 과학응용학교 등의 그랑제꼴은 엘리트들의 밀집소가 되었고, 그렇게 또다시 평등주의를 위배하는 계급체계가 양산된다.
프랑스의 평등 정신의 범위
프랑스라는 나라만큼은 평등한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상을 보고 나니 프랑스의 평등은 어디서 기인한것이며 어디까지 존재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견고한 사회 계급의 존재 속에서 어떻게 평등이 존재하는지, 그 사회적 모순의 이미지를 포착해보고자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프랑스의 평등은 사회복지 제도와, 그와 관련된 연대의식에 존재한다. 프랑스에 오랫동안 존재해온 연대의식은, 사회복지 제도를 통해 국민들 간의 경제적/문화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시도로 이어졌다. 실제로 길을 걷던 시민들이, 텐트에서 생활하는 노숙자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주거안전법(국가가 집을 필수적으로 제공해야한다는 제도)의 제정을 이끌어낸 것은 평등정신의 모범이 되는 사례다. 또한 풍부한 육아수당, 실업수당, 취약계층보조금 등은 적어도 국민 간 평등한 삶의 기회를 보장해주는듯이 보인다. 그리고 이런 사회의 모습이 우리에겐 프랑스 사회가 평등한 사회라는 인식을 준 것이다.
하지만 서민들에게 기본적인 생활 조건을 충족해준 엘리트들은 그 이상의 것을 내어주려 하지 않는다. 정치와 기업임원의 영역에서 그랑제꼴을 졸업한 이들은 학연, 지연으로 서로의 입지를 공고히 한다. 다른 정치 인사들과 달랐던 사회적 ‘노동자’ 배경에 큰 소외감을 느낀 베레고부아의 죽음이 그 벽을 실감하게 한다.
왜 이렇게 계급이동이 어려운 사회가 되었을까?(무엇이 엘리트의 세습을 가능하게 하는가?)
첫번째 원인, 고착화된 자본주의 체제. 대출이 까다롭고, 새로 기업을 차리기에 어렵다는 점은 더 이상 서민들이 계급이동을 위한 자본을 취득하기 어려움을 의미한다.
두번째 원인은, 문화자본이다. 문화자본은 일종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적 취향/지식/능력 등을 의미하는데,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경제자본 뿐 아니라 이러한 문화자본 역시 계급의 재생산에 기여한다고 한다. 상류층일수록 질 높은 교육을 받을 확률이 높고, 더 학문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다. 반면 하층 노동자 계급은 고위직에 진출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아비투스를 갖추지 못하게 된다. 고등 교육보다는 전문직이 되기를 선택하고, 학문적인 대화보다는 실용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가 더 많다.
그렇게 계급이 재생산되는 것이다.
‘평등’의 가치를 포기해야하는가? 혹은 끝까지 투쟁해야하는가?
이미 마르크스의 사상은 실현불가능함이 입증되었다. 우리가 가장 평등한 사회일것이라고 여겨오던 프랑스마저 견고한 계급이 존재한다는 점은 한번 더 그것을 확인시켜준다.
나는 평등의 가치를 포기해야한다는 생각보다는, 평등을 다른 방향으로 실현하자는 입장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등은 주로 ‘경제적 평등’에 관해서 논의되는데, 나는 그것보다는 삶의 질적인 관점에서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본다. 엘리트는 엘리트대로 정치/경제에서 큰 축을 담당하고,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얇고 긴 삶을 유지하는 사회기능론적 접근을 유지하면서, 모두 동등한 문화향유의 기회만 주어지면 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프랑스 사람들은 이것을 잘 실천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 현재의 삶만 잘 누리고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돈과 명예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목적이 명확하다. 삶의 여유를 누리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여유를 누릴 회는 계급과 무관하게 모두에게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