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성은 설(薛)이고 이름은 서당(誓幢)이다.
심생즉종종법생 (心生則種種法生)
마음이 나면 모든 법이 나고
심멸즉종종법멸(心滅則種種法滅)
마음이 멸하면 모든 법이 멸한다.
이어 원효는 부처님 말씀에「3계가 오직 마음이라.」 하였는데 어찌 부처님이 나를 속이겠는가.
당나라 구법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불행을 하니 가히 해동의 성자였다
내마(奈麻) 담날의 아들로 29세에 출가하여 영축산 낭지(郎智), 홍륜산 연기(緣起), 반용산 보덕(普德) 등과 수행
대사의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다. 그 때 중국에 있던 현장법사(玄캌法師)는 천축을 다녀 온 이래 삼장법사란 칭호를 들었으며 경, 율, 론 삼학(三學)에 뛰어났고 또 화엄학의 거장인 지엄(智儼)스님도 그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래서 원효스님은 자기보다 10세나 연하인 의상(義湘)과 같이 중국 유학 길을 떠났다. 경주를 떠나 강주(수원) 남양(南陽) 해안에 이르러서 날이 저물었다. 날은 궂어 소낙비가 쏟아지고 더욱 컴컴해 졌다. 그들은 비를 피하기 위하여 어떤 움집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지새기로 하였다. 한 밤중에 원효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행여나 하여 주위를 더듬거려 보니 손 끝에 물이 담긴 그릇이 닿았다. 그는 황급히 물을 마시고는 계속하여 깊은 잠에 빠졌다.
날이 활짝 밝자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움집이라 여겼던 곳은 고총이었고 그릇의 물은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다. 옛날 무덤은 지하실 같이 돌집을 짓고 방을 만들어 관을 넣고, 생시에 사용하던 물건을 넣어 두는 풍속이 있었다. 그가 빗물이 고인 해골을 보니 그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보자 심한 구토를 느껴 전 날 먹은 음식까지 몽땅 토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원효는 이 고통 끝에 크나 큰 진리를 발견하고 참 깨달음을 얻었다. 곧 기신론(起信論)에서 본 법문이 되살아 났다. 그 법문은,
「한 생각이 일어나니 갖가지 마음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니 갖가지 마음이 사라진다. 여래께서 이르시되, 삼계가 허위이니 오직 마음만이 짓는 것이다.(心生卽種種心生 心滅卽種種心滅 如來大師云 三界虛僞 唯心所作)」
라고 한 것이다. 사실 이런 것이 팔만대장경의 요지라 할 수 있다. 곧 마음에 대한 해석이 수 많은 경전을 일관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일체의 사상(事象)이 오직 이 마음의 분별에서 생긴 것이라고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 하겠다.
원효대사는 이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원효대사는 미친 사람처럼 너털웃음을 웃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의상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으나 원효는 빙긋거리기만 할 뿐 대답이 없다가 드디어 의상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에 갈증이 나서, 무척 애쓰는 것을 보았는가?”
“형님이 갈증으로 고생하다가 그릇의 물을 마시는 것을 보았지요.”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그것은 보통 물이 아니고 사람의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다네. 어젯밤 그것을 마실 때는 그토록 시원하여 세상 모르게 잠을 잤는데, 오늘 아침 그것이 해골의 썩은 물이란 것을 발견하니 구토가 나서 큰 고생을 하였다네. 밤중의 마음과 아침의 내 마음이 다르지 않을 터인데 모를 때는 시원하던 것이 알고 나서는 기분이 좋지 않으니 더럽고 깨끗한 것이 사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一切唯心造)이라고 이제 깨달았다네. 화엄경에도,
「온갖 법은 분별에서 생기고 또한 거꾸로 분별을 따라 사라지니, 온갖 분별하는 법을 꺼 버리면 이 법은 생멸이 아니로세.(法從分別性 還從分別滅 滅諸分別法 是法非生滅)」
이라 하지 않았는가. 나는 이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을 이길 길이 없네. 그러니 내 어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의상은 원효의 말이 그럴듯하게는 들려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계기를 통해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사상을 깨달은 원효대사는 굳이 멀리 당나라까지 들어가 법을 물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