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계의 정복자들(1세기~4세기) 모든길은 로마로~~
시작전 인트로로 준비운동으로 채색 조각
언급 잠깐..
왼쪽은 바티칸박물관에 소장 중인 ‘프리마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상’입니다.
서기 20년경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를 조각한 이 작품은 로마 미술의 손꼽히는 걸작!!
폼이 납니다!.
촌스러운 색감으로 시선을 불편하게 하는 오른쪽 조각은?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인 파비오 배리가 남긴 코멘트가 걸작입니다.
“너무 촌스러운데요. 여장남자가 택시를 잡으려는 모습처럼 보여요(like a cross-dresser trying to hail a taxi).”
사실은 2천년전 제작 당시의 재현입니다!
사진 한장더~~
궁금하신 분들을 위하여 기사 전문을 소개하고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https://naver.me/F0zdtEzS
로마가 영토를 확장하는 동안 예술은 그리스 미술에 심취해 있었으며 정치 권력의 변동에 따라 끊임없이 정치적인 과업도 주어진다.
로마의 황제들은 예술을 통하여 존엄성을 부여하고, 제국을 찬양하는 우민정책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권력이 집중되면서 철학은 통치이념 확립을 위한 수단이 되었으며, 문학은 위정자의 메세지를 전하는 창구 역할을 담당한다.
로마는 확장을 통하여 넓은 영토를 통치했기에 정당성과 권위의 시각적인 증명을 위해 건축물, 동상, 개선문, 기념비를 통하여 황제의 권위와 존재를 각인시키는것에 주력했다.
로마의 미술은 그리스를 차용하여 계승하였으나 절대선이었던 이상적 미의 추구나 극적표현보다 세부적 묘사를 통한 충실한 재현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어간다!
건축물, 유명인의 흉상, 기념비가 이런 현실주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어 로마는 조각보다 건축이 앞선 문화를 지녔다고 볼수 있습니다.
아치라는 건축구조로 돔을 만들면서 중세 건축행정의 모태가 되었는데 거대한 건축을 통하여 권력을 보여주는 전시행정과 미적인 모양을 모두 충족하는 현실주의 로마인들에게 적합한 건축 모델로 평가됩니다..
아치공법의 발전으로 수로를 만들고, 돔형 천장을 만들면서 고전시대의 유일한 신전인 판테온은 지금도 로마시내에서 위용을 보이고 있다.
작년 방문시 판테온 전면은 보수공사중~~
로마 전역이 대부분 보수공사중..
*판테온ㆍ
그리스어로 '모든'을 뜻하는 '판(Pan)'과 '신'을 뜻하는 '테온(Theon)'이 합쳐진 말로, 모든 신들을 위한 신전을 의미한다. 2천 년 전, 철근 하나 없이 높이 43.3m의 커다란 돔 형태로 지어져 당시의 미켈란젤로가 '천사의 설계'로 찬양할 정도의 완벽한 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으며, 로마 제국의 건축물 중에서도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과거에는 무료 입장이었으나 로마에 수도 없는 관광객이 몰리니 작년 방문에서는 유료 입장으로 전환~~
그리스의 건축을 참고하여 자신의 취향을 접합하여 돔을 완성한 로마인은 특징은 황제의 초상 조각에도 반영되어 그리스 초상에서 무시되었던 주름이나 개성(성격? 관상?)을 표현하는 사실주의가 성행 실물을 미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그리스 문화의 흡수전 로마의 장례문화였던 "데드 마스크"에서 기원을 찾을수 있는데 조상의 얼굴을 밀랍으로 실감나게 재현한 장례 필수품이었다.
예술성보다 사실주의에 더 입각했던 황제들의 흉상 몇점 참고하시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초상 / 빈미술사박물관
굵고 곱슬곱슬한 머리모양과 비슷한 형태의 수염, 튀어나온 큰 눈 처진 눈꺼풀이 특징이다. 황제의 초상에는 특정한 가치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이 초상은 성찰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강조했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삶을 보면 결코 과장은 아니다.
하드리아 누스 흉상 / 빈미술사 박물관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을 순행하면서 곳곳에 본인의 이름을 단 건축물을 남겼기 때문에 가장 유명한 로마황제 중 한명이다.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대체로 평화로웠고 황제가 특히 그리스 문화를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초상은 수염이 있고 세심하게 치장한 머리가 특징으로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을 선보여 네로시대 (재위 54~68년) 폴리비우스 왕조(69~96년)의 화려한 머리모양을 재유행시켰다.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후로 남성 초상에서 수염이 빠지지 않는 표현요소가 되었다. 이 상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갑옷을 입고 사령관의 망토인 #팔루다멘툼 을 두른 뒤 화려하게 장식한 핀으로 오른쪽 어깨에 고정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흉상 / 빈미술사박물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 193~211)는 아프리카의 로마속주였던 렙티스 마그나 출신으로, 오늘날 이란지역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던 파르티아와 싸워 승리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개선문은 지금도 로마의 중앙광장인 포로 로마노에 남아 있다. 황제의 흉상은 풍성한 곱슬머리와 턱수염이 특징으로 곱슬머리 가닥 하나나가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다.
로마의 위정자들은 예술가에게 승전과 전투이야기를 과거의 오리엔탈 관습을 부활시켜 실감있고 영웅적으로 묘사하기를 원했다.
<트리야누스 황제 기념비>는 이런 요청의 결과물이었다.
*트라야누스 원주(라틴어: COLVMNA·TRAIANI, 이탈리아어: Colonna Traiana)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를 기념하기 위해 원로원의 명령으로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가 건설했다. 이 원주는 퀴리날레 언덕 근처, 포룸 로마눔 북쪽의 트라야누스 포룸에 있다. 113년에 완성된 이 원주는 다키아 전쟁에서 트라야누스 승리를 기념하는 부조로 유명하며 여담으로 기념비의 글씨체는 로마글 활자의 기둥(stem)의 양끝을 맺는 돌출된 형태로, 로마의 트리아누스 황제의 기념비(A.D.124)에 새겨 진 글자 모양을 다듬어 만든 고전적인 글자꼴을 기본으로 쉐리프체가 만들어졌다.
*트리야누스
로마 제국의 13대 황제이자 최전성기를 이룩한 황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두 번째 황제이지만, 사실상 해당 왕조의 실질적 창건자로 볼 수 있다.
최초의 속주 출신 로마 황제로, 로마인들이 미덕으로 여긴 실질강건한 생활을 보여준 황제였다.
그리스의 영토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으며 로마의 문화는 초기에 로마에 종속되기도 하였으나 확대 재생산 재해석 새로운 창조에 능숙한 로마인답게 그들에 기질에 따라 세련미와 조화, 극적인 표현은 희박해지고 세부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으로 중시하는 로마인에 의해 그리스 미술은 로마인에게서 기술적인 화려함을 선물하고 오랜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진다.
고대시절의 예술 발전의 자양분은 집권층의 관심과 지지(후원)에 기반하여 성장하였기에 집권층의 방향성에 종속은 불가항력의 조건이었다.
제국은 예술이 운영과 선전을 위한 실용적인 기능을 담당하기를 원하였기에 예술가의 창의성은 무시되는 가운데 3~4세기 예술의 암흑기로 불리우는 중세로 향하는 극단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313년의 기독교 공인과 정치세력간의 균력다툼으로 야기된 330년의 비잔티움 수도 이전입니다!
두사건의 공통 키워드는 "기독교"였으며 공인전 기독교는 집권층의 구미에 적합한 다신교를 부정하는 일신론적 교리와 배타적인 신앙 체계로 박해을 받아없으나 만인의 평등을 언급하는 교리로 절망적인 현실에서 탈피하려는 사람들이 구원의 수단이 되었다.
도피처였던 카타콤에서 화가에게 명확성과 단순성이 있는 신앙심이 느껴지는 표현이 더 현실성이 다가왔으며 충실한 모방이라는 개념은 어려운 현실에 사치품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콘스탄티누스"는 당시 무시못할 세력이었던 기독교도를 포옹하며 기독교인들이 황제 등극의 결정적 기회를 제공,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습니다.
329년 종교회의를 통하여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며 "유일신" 시대인 중세로 진입하는 길이 열립니다..ㅠㅠ
전성기가 끝나는 3~4세기 로마미술은 그리스~로마로 이어진 사실주의와 고전적 양식을 따랐지만 사회적인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기독교의 영향이 득세를 하면서 현실적인 표현보다는 종교적인 상징과 초월적인 분위기가 지배하기 시작한다.
3세기의 백년동안 35명의 황제가 바뀌는 극혼란기에서 사회는 더 이상 미술가들의 그리스~로마 유산 승계에 관심이 없어집니다..
오늘날의 한반도 현실이 오버랩되네요..ㅠ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거대상>은 전통적인 황제상 이상의 권위를 보여주려 노력했던 허약한 황제들의 절박함의 상징으로 사실주의보다는 로마신화의 신적인 존재처럼 묘사하려 노력한 흔적이 여실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거대상 파편..
312년 추정..
최근 복원된 높이 13m의 거대상
고대 로마제국 제44대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동상이 실제 크기로 재탄생했다.
로마 당국은 2024년 2월6일(현지시간)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에서 높이 13m 크기의 콘스탄티누스 동상 복제품을 공개했다.
서기 4세기경에 제작된 콘스탄티누스 동상은 오늘날 전체 조각 중 얼굴과 손, 발 등 9개의 조각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모두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공개된 콘스탄티누스 동상은 원본이 아니라 남아 있는 대리석 원본 신체 부위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3D 기술을 활용해 유실된 모든 조각을 찾아 조립했을 때의 온전한 모습을 재현한 셈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프라다가 설립한 예술 재단인 폰다치오네 프라다가 자금을 댔고, 팍툼 디지털 기술 재단이 제작했다.
콜로세움 인근의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탈리아어: Arco di Costantino) 콘스탄티누스 1세를 기리기 위해 로마에 세워진 개선문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즉위 10년이 되는 315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원로원이 세운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로마에 진군할 때, 대낮에 십자가와 "이것으로 이겨라"라는 환상을 전군(全軍)과 함께 보고 막센티우스군(軍)을 테베레강 근처에서 격파했는데, 황제의 그때 싸움 장면이 이 문의 부조(浮彫)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 사건은 기독교 공인과 제국의 통일에 획기적인 것이었다.
문은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세 개의 통로가 있으며, 일부는 다른 건축에서 옮긴 것이다. 로마에 있다. 콘스탄티노플에는 대신에 '선량한 양치기의 상(像)'이 놓여 있다.
1960년 하계 올림픽 당시 육상 마라톤의 결승점으로 활용되었다.
개선문에는 건축당시 제작된 유일한 부조가 한점 남아있는데 황제의 모습이 과거 부조와 달리 자연적인 인체감과 달리 비정상적인 비례감을 보여주는데
정형화되고 상징성을 강조하는 표현 방식은 비잔틴을 거쳐 중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웅변한다.
지금까지 이어진 놀라운 사실적인 묘사에 익숙한 사람들은 솜씨가 빈약하고 천박하다고 언급할 것이나 곰브리치는 "전지적인 관점에 있는 우리들은 기독교의 대두와 그것을 수용한 사람들을 알기에 이 작품 또한 나름의 생명력이 보인다."고 언급하며 찬란했던 고전기는 기독교의 대두와 서로마의 붕괴로 예술은 기나긴 중세 암흑기를 진입함을 알립니다!
부조도 고전기의 몰락을 암시하듯 황제의 조각은 파손되고 없습니다..ㅠㅠ
나름 너무 재미있게 기록한 그리스~로마 시대인데 망구 혼자 생각이겠죠..ㅎ
기약없는 다음 글을 약속하며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