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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자료실 스크랩 우리나라의 성씨 유래
박유승(박노동) 추천 0 조회 42 09.03.03 12: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리나라의 성씨 유래

우리 나라 성(姓)은 중국의 한자문화가 유입한 뒤인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산, 강 등을 성으로 삼았다.

     -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강(姜)씨라고,
     -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姬)씨로,
     -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으므로 성을 요(姚)씨로한 것은 이것을 실증한다.

삼국시대

고구려 -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인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賜姓)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 있는 인명의 기록을 보면,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때에 장수왕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 하였으며,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

백제 -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이 기록 되어 있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신라 - 박(朴), 석(昔), 김(金)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북제서"에는 진흥왕(540~576)을 금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라는 성을 사용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7세기 이전 건립된

     - 신라 진흥왕의 네곳의 순수비
     - 신라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 진평왕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볼때 인명에 성을 사용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우리 선조는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예를 들어 추정해보면,

     -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삼국 시대의 성은

     - 고구려: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 백  제 :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국 등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 신  라 :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많았다.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않았다.

고려시대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 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문종9년(1055)에 성이없는 사람은 과거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않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법령으로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민중이 성을 쓰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조선시대, 현대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았졌다.

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 보면
   1486년(성종)에 편찬한 『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영조(21대)에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
   1908년(고종)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숫자가 많은 것은 고문헌에 있는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으로 되어 있으나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개의 성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86개의 성씨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라며 1939년에 시행한 창씨개명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이름을 다시 찾을 때 까지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큰 수난기였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 族譜의 由來(족보의 유래) ]

-♣. 중 국 (中國)

- 족보는 어느 나라나 처음에는 왕가의 계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른바「왕대실록」이니 「원록( 源錄)」이니하여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 각 씨족의 족보가 발달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인가에 대하여는 이를 명백하게 알 길 이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중국의 한나라 시대부터 이것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은 것 같다. 여러 가지 문헌에 의하면, 후한 이후 중앙 또는 지방에서 대대로 고관을 배출하는 우족(右族)·관족(冠族)이 성립됨에 따라 문벌과 가풍을 중요시 하는 사상이 높아져서, 이때부터 족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특히 문벌의 전성기인 위(魏)·진(晉)·남북조(南北朝)에 있어서는 제가의 족보를 수집 심사한 뒤에 이것을 갑·을의 문벌로 구분하여 세족이 아닐 경우에는 높은 벼슬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 수(隨)·당(唐) 에 이르러서는 문벌을 가리지 않고 학력과 인물을 주로 하는 과거 제도가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천거(薦擧)의 표준으로서 문벌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 송대(宋代)에 들어가면서 이제까지 관에서 정한 공적 성격을 띤 족보가 사적인 성격으로 변해 이때부터 족보의 기능의 관리선발의 추천 자료가 됐고, 동족의 「수족(收 族)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송대 이후의 족보는 곧 이와 같은 기능을 중심으로 민간에 널리 발달하게 되었다.



-♣. 고 려 시 대 (高麗時代)

- 권문귀족(權門貴族) 에 있어서는 이른바 족보의 체제를 구비한 세계(世系)·항렬 (行列)의 방식을 취한 것이 적지 않다. 이러한 계도(系圖)에 의하면 같은 行列에 있 는 여러 인물이 같은 자근(字根)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은 당시 이미 계보에 관한 관념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말해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문종(文宗;1047년)때에는 성씨·혈족의 계통을 기록한 부책(簿冊)을 관에 비치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자의 신분 관계를 밝혔으며, 더구나 그 당시는 족보의 유행이 한창이던 송(宋)과의 교류도 빈번하였던 시대여서 족보의 유행은 하나의 필연적인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 당시에는 출판 사정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필사(筆寫)에 의해 족보가 들어졌던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 조 선 시 대 (朝鮮時代)

- 국초(國初) 부터 족보의 편성간행의 필요가 더욱 절실하여 급속히 진전되었다. 왕실 자신이 벌족 정치의 국가형태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유교(儒敎)를 국시로 삼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 성족(姓族)파별가승(家乘)을 명백히 할 필요가 생겨 족보가 없는 집안은 행세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족보가 성행하였고, 그 체제도 현재의 형태와 같이 완성되었다.
당시는
- 원시적 부족사회의 형태와 같은 동족의 집단부락이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과
붕당학파(朋黨學派)의 싸움이 치열하여 배타적 관념으로 인해 자연 동당(同黨)·동파(同派)·동족(同族)의 일치 단결을 공고 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 왕실의 계보록이 중요시되어 ≪원계보( 源系譜)≫≪종실보첩(宗室 譜牒)≫이 그후 여러차례 수보(修補)되었으며, 귀족·권문에서도 수보의 기운이 싹트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最初의 族譜發行 (족보발행)

- 최초에 간행된 족보문화유씨(文化柳氏)의 족보라 알려지고 있다. 문화유씨 족보는 1522-1566(중종 16-명종 21) 가정년간(嘉靖年間) 에 나왔기 때문에 이를 흔히 ≪ 가정보(嘉靖譜)≫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하여 내려온 족보 가운데 문헌적으로 오래된 것으로서 신뢰할만한 것은 안동권씨≪ 성화보(成化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 ≪ 성화보(成譜)≫는 성종(1476)때인 명나라 헌종 성화 12년에 간행 된 것으로, 문화 유씨의≪가정보(嘉靖譜)≫보다 약86년 앞선 셈이다. 안동권씨측의 말에 의하면 안동 권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네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흔히 「사시(四始)」라고 한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가장 먼저 만들었다는 것을 첫째로 꼽고 있다.
그런데 문화유씨
- ≪ 가정보(嘉靖譜)≫서문 가운데는 가정보다 140년 전이 되는 명나라 영락년간(永 樂年間)-세종5년 계묘(癸卯)에 이미 문화유씨보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영락보≫가 과연 간행본인지 혹은 필사에 그치는 정도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 다. 하여간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 족보는 당시 계급사회의 산물안동권씨보, 문화유씨보 등이 오늘날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족보라 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명족의 족보출현이 다른 문중에서 족보를 만드는데 모형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고, 이러한 족보가 나오기 전에는 주로 필사에 의하여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족보보다는 가첩이나 가승이 오히려 많았을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그 후
- 족보는 임진왜란이란 미중유의 전란 때문에 많은 문헌들과 함께 소실되었고, 숙종 이 후 에야 다시 많은 족보가 쏟아져 나왔다. 그 당시의 소위 양반들은 특권층으로 대개 지주들이었는데, 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여러가지 조직을 강화해야만 했다. 예컨대 서원(書院)·향약(鄕約)·향청(鄕廳)·두레계(契)·족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당시에는
-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을 지는등 사회적인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양민이 양반이 되려고 관직을 사기도 하고, 호적이나 족보를 위조하기도 하며, 뇌물을 써 가면서 족보에 끼려고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에 이르렀다.
- 그 후 일제치하에 있어서는 이민족의 지배 때문에 학문이나 일반 사회문제의 연구보다 도 관심이 동족결합에 쏠리게 되어 족보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매년 발행되는 각종 출판물 중 족보발행이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보면 당시 사회에서는 역사를 연구하고 경제를 배우고, 문예를 즐기고, 사상을 연마하는 것보다 일문일가의 기록을 존중하는 것을 훨씬 더 중대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 취락」후편에 의하면, 그 당시 한국에 있어서의 한국 인 발행의 단행본· 출판허가 건수는 1933년에는 861건, 1934년에는 1,090건이 었는데, 족보의 발행 건수가 1932년에 137건, 1933년에는 151건에 달하여 한국인 간행의 출판물 중 족보의 발행이 항상 수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시
- 10개년간(1823~1932)의 족보 발행 회수를 각 본관 성씨별로 따져 본다면, 일족이 가장 번영한 김해김씨는 112회, 연평균 12.5회로서 수위를 차지하며, 밀양박씨가 88회, 경주 김씨가 69회, 전주이씨가 68회, 경주 이씨가 55회, 호산신씨가 42회, 광산김씨가38회, 안동권씨가34회, 수원백씨가 27회의 순위로 되어 있다.
- 족보는 인쇄에 의한 간행 이외에도 필사 또는 등사본(謄寫本) 등의 유포가 적지 않았을 것을 고려할 때, 당시 얼마나 족보 발행이 성행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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