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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에 심은 인술의 빛과 보람
― 조창원 선생의 시세계 ―
리 헌 석
(문학평론가, 대전문인협회 회장)
1. 조창원의 뜰에 들어서기
192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난 오마(五馬) 조창원(趙昌源) 선생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교를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근무한다.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뒤, 첫 번째 임지인 국립소록도병원의 병원장으로 1961년부터 4년간 봉직한다.
그 후 국립 마산병원장, 국립재활원장을 거쳐 다시 1970년 국립소록도병원의 병원장이 되어 봉직할 때, 한하운 시인을 또 만나게 된다. 두 번이나 소록도병원의 원장이 되어 나환자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을 하며,
그들의 애환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가운데, 그들과 같은 마음이 되어 나환자들의 정착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그 첫 번째 일로 오마도 개척을 손꼽을 수 있다. 소록도 건너편에 있는 오마도를 개척하여 음성 나환자들이 정착하도록 하겠다는 숭고한 의지로 시작한 일이다.
흙과 돌로 바다를 막는 대 역사를 환자들의 땀만으로 이루어야 하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병원장의 뜻에 따라 환자들은 열심히 노력한다. 병원장의 의지나 실적 때문이 아니라, 이 사업은 환자들의 소망과 사랑이 담긴 대 역사인 것이다. 손가락이 떨어지는데도 곡괭이질을 쉬지 않는다.
발가락이 떨어지는데도 손수레를 밀며, 바다의 높은 파도를 이긴다. 어떻게든지 개척을 하여 살아야 할 터전을 만들어야겠다는 일념(一念)으로 삽질을 쉬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바다를 막고 음성 나환자들의 정착촌에 대한 꿈이 이루어지는 듯했는데, 일부 정치인과 토호들의 획책으로 꿈이 사라진다. 이 과정은 소설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에 상세하게 드러나 있는데,
조창원 선생은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노래하기도 한다.
기쁜 소식 산울림으로
껑충껑충 마을에 전하고
고향 가는 나그네 길잡이 동무되어
길조라 사랑받는 까치가
감 도둑 누명 쓰고 쫓겨나
마을 동구밖 당산나무엔
빈 둥우리만 처량한데
감나무마다
한두 알씩 남겨 놓고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마이크에 목청 높이는 정치인의 노래
군정(軍政)에 희생된 원한(怨恨)의
오마도(五馬島)의 노래.
― [애한(哀恨)의 오마도(五馬島)] 전문
의사 조창원 선생은 1974년 소록도를 떠나 강화 가톨릭병원, 포항제철 의무실, 강릉 성모병원, 근로복지공사 장성병원 규폐센타 병원장을 역임하다가 1990년 정년 퇴임한다.
이때 대전선병원에서 초청을 하여 유성선병원 원장으로 부임한다.
유성선병원 원장으로, 대전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필자와 자연스럽게 만난다. 유화를 그리는 화백으로, 시와 수필을 쓰는 문인으로, 지방신문의 지면에서 종종 만나게 되고,
그러던 중에 필자가 주간으로 있는 문학잡지《오늘의문학》(2002년에《문학사랑》으로 제호 변경)에 참여한다.
이와 함께 조창원 원장은 대전 지역에서 문인과 화백으로 활동하게 되고, 여러 지면과 모임에서 고문이나 자문위원을 역임하며 봉사한다. 이런 모습을 약 10여 년간 지켜보고, 또한 함께 활동하면서,
선생의 높은 식견과 순수한 인품에 감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품은 선생의 작품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표현의 멋스러움보다 내용의 진솔성에 감동을 받는다.
선생은 1995년 <소록도, 그 빛과 어둠>이라는 유화 전시회를 통해 나환자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이는 시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작품들은 일본의 황실 구라재단의 초청으로 일본에서 전시를 하고, 그 재단에 영구 보관 중이라는 신문의 보도를 접하기도 했다.
선생은 또한 탄광에서 일하다 규폐환자로 생명을 앗긴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검은 영혼과의 만남> 유화전을 롯데대덕호텔 갤러리의 초청으로 가졌고,
이어 석탄공사에서 2차 전시회를 한 뒤, 그 곳에 영구 기증하기도 하며, 불쌍한 영혼들을 위무(慰撫)하기 위해 남다른 애정을 보이고 있다.
그러던 중에 자전적 수필집 {허허, 나이롱의사, 외길도 제길인 걸요}를 발간한다. 자신은 평생을 나환자와 규폐환자들을 돌보았는데, 그들을 완쾌시켜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칠 수 없는 질환에 의해 죽어 가는 환자들을 목격하면서 자조적으로 붙인 이름이 "나이롱의사"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스스로 한 말일 뿐, 환자에 대한 그의 사랑은 형언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다.
죽음의 도시 폐광촌
산더미 같은 폐탄 틈새에
4월의 꽃
진달래는 살아 피어
붉은 꽃잎 뚝뚝 떨어진다.
소쩍새 앞산에 울어
울다 가는 뒷산의 산울림.
살고자 죽어 간 영혼의 조가(弔歌) 같이
밤에도 울고 낮에도 우는구나.
― [폐광촌(廢鑛村)] 일부
이제 그는 마음속에 새겨진 아픔들을 시로 빚어 새롭게 시집을 엮는다. 이 시집에는 소록도병원에 근무할 때에 목격한 환자들의 고통과 슬픔이 자신의 내면으로 환치되어 드러나는 작품이 중심을 이루는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 작품들을 먼저 읽어 본 연유로, 그 작품들에 대해 나름대로 수용된 정서의 일단들을 감상문 형식으로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2. 소록도에 펼쳐진 이야기
"소록도"는 단어의 의미 그대로 "작은 사슴"들이 뛰놀던 평화로운 섬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것이 일제시대부터 나환자들을 격리 수용하는 근거지가 되고, 이로 말미암아 소록도는 세상과 격리된 채 어둔 이미지를 얻게 된다.
그러한 이미지를 씻어내고, 죽음의 땅에 흘러넘치는 생동감을 부여한 것이 소록도 환자의 축구단이었다. 이들은 온갖 박대와 사회의 외면 속에서도 열심히 연습하여 전라남도의 대표 선수가 된다.
이러한 쾌거를 조창원 선생은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공을 차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인권과 자유를 찾으러 왔다.
발가락이 떨어져 없다.
손가락도 떨어져 없다.
솜을 꾹꾹 눌러
축구화 속에 처박고
한(恨)과 원(怨)을 차 부수어라.
겁에 질리지 마라.
전 세계의 Hansen 식구들이
신에게 기도 드리고 있다.
하늘을 믿어라.
정의를 위하여 대도를 달리는 것이다.
만일 이 경기에서 패하면
너희들과 나는 소록도 앞 바다의 귀신이 되자.
[소록도 축구팀] 일부
선생은 소록도 축구팀에게 이렇게 외친다.
<우리는 편견과 차별을 물리치고/ 힘들게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이겨야 한다. 꼭 이겨야 한다.>
이러한 외침과 결연한 의지로 이들은 전국 체육대회 전라남도 대표로 선발되어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승리에 대한 기쁨과 보람에 대한 마음을 [축구 개선가]에 담아내기도 한다.
<활짝 웃으며, 밀려온다./ 황령(荒靈)의 파도가/ 어깨동무하고/ 축배의 잔을 높이 들고/ 하얀 물거품이 승리의 노래가 되어/ 제비선창 부두에 뿌려 놓고 물러간다.>고 환호한다.
<오징어같이 짓눌리고 눌려/ 빼앗긴 자유와 인권을/ 한(恨)의 영혼이 스며든 "공" 하나가/ 꽁꽁 얼어붙은 원(怨)을 녹여줍니다./ 소록도 만세, 축구팀 만세!> 한마음이 되어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나눈다.
승리의 환호성이 폭발하는 순간에도 서러움의 대명사가 등장한다. 이 작품에 나오는 "제비 선창"은 소록도에 있는 부두로, 나환자들은 이 부두만을 이용해야 하는 차별의 대명사이다.
물론 후에는 이러한 차별이 없어지고, 환자도 의료진이나 내방객과 같은 부두를 이용하였다고 하지만, 초기의 소록도 환자들은 차별의 대명사인 "제비 선창"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수만의 황령(荒靈)
비탄의 파도에 울고
밀물 타고 몰려드는 원(怨)
썰물 타고 밀려가는 한(恨)
갈매기 떼지어 대신 우는
한원(恨怨)의 제비 선창
90년의 비운의 역사
구라선에 묻고
천형 원한 울고파
찾아드는 혼령의 선창
제비 선창
[소록도의 제비 선창] 전문
"제비 선창"의 차별도 슬픈 일이지만, 소록도에 한으로 남은 일은 하나둘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독립 직후에 소록도 원생들이 집단 총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1945년 8월 22일 소록도 중앙리 백사장에서 원생 84명이 총살되어 매장된 사건은 그야말로 하늘이 진노할 만행이라 하겠다.
이때 한을 품고 죽은 원생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애한(哀恨)의 추모비(追慕碑)를 세운다. 원생들의 정성어린 성금과 관계자들의 도움,
그리고 주축이 된 강대시씨의 노력으로 2002년 비를 설립하게 된다. 조창원 선생은 고문으로서 뜻과 정성을 다하여 비가 설립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선생은 당시를 추념하며 애절한 시를 남긴다.
<달려온다. 84인의 황령(荒靈)들이/ 푸른 한의 파도를 타고 일어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밀려온다./ 중앙리 백사장을 때리고 부수고/ 오, 하늘이여, 땅이여/ 왜 죽어야 했습니까?
/ 말해 주소서!/ 분통을 터트리며 물거품으로 꺼진다.>고 절절한 심정을 토로한다.
[애한(哀恨)의 추모비(追慕碑)]라는 슬프고 한스런 작품에서는 시인의 정서가 걸러지지 않은 채 직설적으로 드러나지만, 몇 몇 작품들에서는 정서의 미적 형상화를 보이기도 한다.
아름다웠습니다.
얼굴이 예뻤습니다.
네 손가락이 고왔습니다.
발가락으로 밟고 지나간
아름다운 영상들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
허무했던 공상
눈 내리는 섬 소록도에
향기 높은 설중매로
꽃 피우고 싶습니다.
― [설중매(雪中梅)] 전문
일견할 때, 이 작품은 아름다운 여인을 아름다움 그 자체로 노래했거나, 혹은 향기 높은 설중매로 환치된 은유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찬찬하게 정리하면 "네 손가락이 고왔습니다"라는 말에 전율을 느끼게 한다.
소록도에서 손가락이 네 개라면, 이것은 손가락 하나가 나병에 의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또한 <발가락으로 밟고 지나간/ 아름다운 영상들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라는 구절과 연계하여 볼 때, 그 상황은 자명해진다.
그러나 시인은 절망의 나락 속에서도 소망의 촛불을 꺼뜨리지 않는다. 눈 내리는 소록도에서 <향기 높은 설중매>로 꽃 피우고 싶다는 것은 시인의 간절함이 투영된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서 용출하는 뜨거운 시심을 아름다운 여성 나환자에게 의탁하여,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시로 빚은 것이다.
이처럼 슬프고 한스런 상황 속에서 시인은 영혼의 안식처인 어머니를 찾게 마련이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작품은 여러 작품인데,
[소록도에서 불러보는 어머님의 자장가]는 평화와 열락의 매체로 기능한다. 어머니의 자장가는 음악의 여러 요소를 대입해 볼 때, 현대의 음악과는 거리가 먼 노래였겠지만,
시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멋지고 아름답고 행복한 노래로 기억된다.
그 옛날
어머님이 불러 주시던 자장가는
가사도 곡도 음정도
박자도 없었습니다.
염불 같기도 한 긴 자작 노래였지만
신기하게도 그 속에는
언제나 사랑과 꿈과 행복의
아름다운 젖 향내가
묻어 있습니다.
혼곤한 꿈속에 젖은 나를
열락(悅樂)의 환상(幻想)의 세계로
인도해 줍니다.
―[소록도에서 불러보는 어머님의 자장가] 전문
이렇듯 선생은 소록도의 추억을 중심으로 시를 짓고, 수필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소록도의 아픔을 잊지 않고자 한다. 그와 동시에 나환자로서 고통 속에 살다간 불쌍한 영혼들을 위로하고자 한다.
이것이 조창원 선생의 남다른 인생이다. 소록도 병원장으로 부임하고 근무하게 되자마자 그 곳을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것이 일반적인 태도이겠지만, 그는 그 직책에 혼신을 다한다.
또한 그 곳을 벗어나면 뒤돌아 생각하기도 싫을 법한데, 선생은 80세를 바라보는 현재까지도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다.
의료인으로서, 그리고 문인으로서, 또한 화백으로서 자신의 여생과 여력을 모두 바칠 태세를 보인다. 그래서 그는 경외(敬畏)의 대상이 된다.
3. 조창원의 오솔길에서 나오기
조창원 선생은 탄광에서 일하다 고질병을 얻은 환자들을 치료하는데도 온 정성을 다한다. "규폐 환자"들을 치료하는 유성선병원의 원장으로서 10여 년을 봉직하고,
80세를 바라보는 연세에 밀양의료원에서 다시 이들을 치료하면서 여생을 바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선생은 멋을 아는 휴머니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흰 머리칼을 휘날리며 빨간 티셔츠를 입은 멋쟁이 원장을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아 목동아"를 목청껏 노래하면서 젊은이들과 함께 밤을 지새는 모습을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바로 선생의 참모습이다.
그는 하얀 바지에 빨간 티셔츠를 한 채 물감을 들고 유화를 그린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소록도와 탄광촌을 떠올리며 수필을 쓰고 시를 짓는다.
그러다가 뜻이 맞는 젊은이들을 만나면, 목청껏 노래도 하며 춤도 춘다. 봉사와 회생이란 삶의 또 다른 면모를 지닌 그는 보통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멋지고 훌륭한 신사이다.
그러나 선생도 세월의 수레바퀴는 되돌릴 수 없는가 보다. 그러기에 다음과 같은 작품을 빚었을 것이다.
샘물에서 태어나
서로 모여 강이 되고
험준한 산맥 뚫고
기암 절벽 돌아
푸른 초원을 흐른다.
그 길처럼 사연 많은
내 인생도 흐른다.
― [고독, 늙은이의 노래] 전문
자신의 인생을 물에 비유한 절창이다. 그는 암울한 일제시대에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냈다. 조국의 독립으로 기쁨을 표현하기도 전에 동족상잔인 6·25 전쟁이 발발하여 피난민으로서 고향을 그리게 된다.
군의관으로서 승승장구하여 당시는 최고 지위인 대령에까지 진급한다. 그리고 예편하여 소록도와 탄광촌의 불쌍한 영혼들을 치료하는데 일생을 보낸다.
그런 자신의 인생을 그는 <사연 많은 내 인생>이라는 짧은 말로 대신한다. 어쩌면 이보다 더 절실한 표현은 없을지 모른다. 덧붙여 보아야 군더더기나 사족(蛇足)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험준한 산맥을 뚫>는 젊은 날의 기상으로 그는 <푸른 초원>을 흐르며 자신의 인생 역정을 추억하는 것이리라.
이제 선생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이삿짐]에 의탁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이 나이에 어디로 가야 하느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정든 곳 떠나야 하는
아내의 아쉬운 눈빛
낯선 곳 찾아가는
아내의 두려운 눈빛
세월의 강을 건너
어느새 팔십천(八十川)에 이르러
숨겨둔 운명을 찾아
짐을 싸고 짐을 푼다.
이 나이에 어디로 가야 하느냐
― [이삿짐] 전문
<이 나이에 어디로 가야 하느냐>라고 수미상관에 의해 강조한 선생은 스스로 이삿짐이 되기도 한다. 현실의 이삿짐을 의미함과 동시에 자신의 실존(實存)에 대한 자문(自問)의 성격을 지니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이러한 상념에 오래 잠기지 못할 운명을 타고났다.
아직도 규폐 환자들이 선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며, 나환자들의 외로운 영혼을 위무(慰撫)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삼손보다 더 큰 힘과 솔로몬보다 더 빛나는 지혜가 선생에게 축복의 비처럼 임하기를 소망한다.
기행적 감상문 형식을 빌어, 간략하게 작품 소개를 마치며, 선생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 위의 글은 너무나 감동적인 한 인간에 대한 기록이기에 옮깁니다.-
첫댓글 고통속에 살다간 많은 사람들과 조창원 선생님 (의사 시인 화가 사회복지) 의 이사짐이란? 사람은 한번은 가야한다, 사람에게 누가되지않고 후해없이 삶을 살라는 뜻 아닐까요? 휼륭한 분을 만날수있게 해준 등반대장님 감사합니다.
소록도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 합니다.
소록도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전설같은 이야기... 자신을 드러내기는 쉬어도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흔치 않은 세상 ...하얀 머리에 빨간 T샤스라 멋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