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살림이 가난한 것은 우리지역의 몇몇 사찰을 제외하고는 비슷비슷한 상황이다. 주지를 맡아보니 49재가 절 살림을 윤택하게 하는 1등 공신이란 것을 실감하겠다. 49재가 많이 들어오는 절은 풍족하고 불사도 척척 해내지만 그렇지 못한 절은 살림이 쪼들리고 뭐하나 마음먹은 대로 하기가 어렵다.
어슴푸레한 나의 기억에, 이십년 전만해도 49재를 지내는 집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불자들도 49재를 지내는 집이 드물어 졌다. 어떤 이들은 ‘자등명 법등명’을 생명으로 하는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을 보자면 49재는 비불교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더욱이 신도님들에게 부담이 되는 높은 비용을 청구하거나 참석한 대중과 전혀 교감이 안 되는 스님의 원맨쇼처럼 진행되는 49재는 더욱 비판받게 된다. 현재 나의 문제들이 모두 조상 탓이고 49재와 같은 천도재를 지내는 것을 만능 치료약처럼 선전하는 종교들이 나타나게 된 것도 천도재의 어두운 그늘이다.
그러나 대승불교권에서는 49재의 전통이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49재를 지내야하는 논리적 체계도 갖추고 있다. 49재는 영가를 초청해서 삶에 대한 애착과 고통이 무엇 때문에 생기는지를 깨닫게 하는 설법이 중심이지만, 쇳덩이는 물속으로 가라앉지만 배위에 실은 쇳덩이는 가라앉지 않는다는 타력의 원리도 들어있다.
영가의 정신적 허기와 물질적 허기를 모두 해갈시켜주고 현재 살아있는 친척들이 49재를 인연으로 불법을 배우고 가족 간의 유대를 강화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살아있는 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하고 삶의 바른 자세를 갖게 하는 49재라면 적극 장려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예전에, 앉은 자리에서 포교를 잘 하시는 스님이 계셨다. 그 스님은 49재에 일가친척을 많이 참석하게 하면 49재 비용을 깍아주고 반대로 참석인원이 적으면 비용을 다 받았다. 어떻게든 사람을 많이 참석하게 하여 그 참석대중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세히 소개하는 것이 49재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스님의 그러한 노력으로 불법에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어 자연스럽게 절의 살림이 윤택해지게 되었다. 미래를 보고 투자를 하듯 그 스님은 49재 하나로 포교를 한 것이다.
내가 천도재를 지낼 때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영가의 극락왕생을 빌어주는 천도재를 지내놓고 그 영가들이 정말 극락에 갔는지 혹은 극락보다 낮은 단계의 천상으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던 점이다. 아마 대개의 스님들이 그런 찜찜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다가 49재를 지내는 의미를 영가 중심에서 49재를 지내는 살아있는 사람 쪽으로 중심을 옮겨왔다. 죽은 귀신보다는 산 귀신에게 촛첨을 맞춘 것이다. 살아있는 분들이 49재를 통해서 불법에 인연을 맺고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방향을 정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재를 지내는 의미는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치상으로도 49재를 통해 살아있는 자들의 삶의 자세가 더 당당해지고 마음이 더 평안해졌다면 그분들의 조상들이 좋아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요즈음에는 49재 때 이해하기 쉬운 경전을 같이 독송하고 떠나는 조상을 잘 배웅하기 위해서 편지를 한통씩 써오게 하여 읽게 하고 있다. 경전 독송이나 편지는 모두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아버지에게 아내에게 혹은 먼저 떠난 아들에게 주는 편지를 여러 사람 앞에서 읽다보면 눈물이 앞을 가리고 어떤 이는 한동안 말을 못 잇고 울기도 한다.
그러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것, 잘 보내주는 것을 배우는 자리, 그리하여 우리가 순리에 맞게 진실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자리, 그것이 요즘 내가 생각하는 49재를 지내는 의미이다. 무엇 하나 취할 게 없는 것이 불교지만 또한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는 것이 불교라고 하질 않나.
(시골절 주지의 귀사일기/불교포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