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깊은 산 속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가?
한낮에는 햇빛이 마당 가운데 내려와 놀고 숲 속에서는 매미소리만 요란하다.
그 뿐인가, 밤이 되면 하늘의 별빛이 손끝까지 내려와 반짝인다.
그런 곳에 살아본 사람은 그리움이 무언지를 조금 알게 된다.
나는 어린 동자 시절 무주구천동 백암이라는 아주 작은 절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했던 정국 스님과 둘이서만 살았는데
나중에는 나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어린 준연이와 나하고 동갑내기인 성호가 새로 왔다.
그렇게 덕유산 구천동, 우리나라에서 가장 깊은 산속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나는 고향이 덕유산 남쪽인 거창군 북상면이라는 곳이고 준연이와 성호는 전라도 어느 농촌에서 왔다.
그러나 모두가 촌놈으로 산골에 사는 것이 익숙해져 있었다.
그 중에서 그래도 서울을 구경해 본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정국 스님도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한 훌륭한 스님이고,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분이지만 서울 구경은 못했다고 했다.
그 때는 1960년대 말인데 모두가 가난했다.
백련암은 그 중에도 더욱 가난해서 정국 스님이 행기라고 하는 약초를 재배해서 먹고살았다.
가끔 스님은 설촌이라는 마을에 장날이 돌아오면 우리 동자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했다.
장날 때 양식도 사고 신발도 사고 하는 것이다.
스님은 잡숫지도 않으면서 우리에게는 시장에서 파는 국밥도 사주셨다.
그 때 그 국밥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한가한 오후에는 준연이와 성호를 앞에 앉혀 놓고 서울 구경했던 이야기며
영화관에서 영화를 구경한 이야기 등을 했다.
준연이와 성호는 모두 얼굴이 맑고 깨끗했는데
내 이야기에 흠뻑 빠져서 맑고 고운 눈동자를 내 입에다가 맞추고는 열심히 들었다.
정국 스님도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입가에 웃음을 가득 담고 내 얘기를 듣기도 하셨다.
나는 그러면 더욱 신명이 나서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이야기를 하곤 했다.
특히 어린 준연이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다녀본 터라 매우 신기하게 세상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얼굴이 예쁜 것으로는 세상에서 준연이만한 아이가 없을 것이다.
그 중에도 눈이 제일 맑았는데 정국 스님은 항상,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것은 아마 준연이 눈일 것이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천진불이다.”
그렇게 우리들은 깊고 깊은 산중에서 정국 스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나는 나무였다.
여름이면 개울에서 발가벗고 목욕도 하고 숲 속으로 돌아다니면서 놀았다.
지금 어른이 된 후에 생각해 보니 그 한때가 내 인생에서 장 행복했던 것 같다.
정국 스님은 우리 어린 동자들의 마음을 아주 잘 아는 분이었다.
훌륭한 스승님에다가 부모님 역할까지 해주신 것이다.
가끔은 등산객이 지나가는 때도 있었다.
한번은 서울에서 아가씨들 다섯 명이 등산을 왔다.
그들은 학생인 듯 했는데 우리에게 매우 친절하게 했다.
라면이라는 것을 주어 끓여 먹었는데 그 때 처음 맛 본 것이었다.
성호는 라면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고 했다.
그 후 정국 스님은 장날 설촌에 가면 라면을 사다가 주시곤 했다.
그 때는 라면이 매우 귀한 것일 뿐 아니라, 라면 자체를 고기로 생각할 정도였다.
아가씨들의 몸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가 좋다고 준연이는 내게 말하기도 했다.
밤이 되자 아가씨들은 절 아래 개울가에 텐트를 쳤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놀았다.
항상 소쩍새 우는 소리만 듣던 우리는 아가씨들의 노래 소리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가씨들을 놀래주기로 했다.
얼굴에 보자기를 하나씩 쓰고 텐트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개울에 돌을 던지고 귀신 우는 소리를 냈다.
아가씨들은 놀래서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 났다.
그래도 우리는 재미있어서 계속해서 개울에 돌을 던졌다.
급기야 아가씨들은 놀라서 절 안으로 도망을 가고 정국 스님이 나오셨다.
결국 장난을 한 것이 우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때도 정국 스님은 아가씨들을 우리 방에서 자게 해주셨다.
그 날 저녁 우리는 아가씨들의 향긋한 냄새도 맡고 밤새도록 마당에서 별을 보면서 아가씨들의 노래를 들을 수 가 있었다.
이런 작은 일 하나에도 지금 생각해 보면 아름다운 추억 뿐 아니라 정국 스님의 마음씀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산중에서는 저녁이면 방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군불을 땐다.
연기가 굴뚝을 타고 올라갈 때 나는 냄새는 사람의 마음을 참 편안하게 한다.
그 냄새와 장작이 타는 모양을 보면서 불을 쬐는 것이 좋아 나는 항상 군불 때는 일을 맡아 했다.
어느 날 군불을 때는데 누가 뒤에서 내 궁둥이를 툭툭 치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니 누런 개가 한 마리 서 있었다.
나는 이 산중에 못 보던 개가 다 있는가? 하고 생각하면서 개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했다.
그러면 개는 한 발 뒤로 물러서고, 그렇게 하다가 텃밭을 가로질러 숲 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때 뒤에서 정국 스님이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얘야! 따라가지 말아라. 그것은 개가 아니고 늑대란다“ 하시는 것이었다.
그 때서야 나는 머리끝이 쭈뼛하게 서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뒤에 들은 이야기인데 늑대는 그렇게 사람,
그 중에서도 어린 아이들을 유인해 가서 잡아먹는다고 한다. 물론 나는 그 때 어린아이는 아니었지만.
그 해 여름이 다 갈 무렵, 백련암에 새로 주지 스님이 오셨다.
그 동안은 너무 가난하고 작은 절이라 정국 스님은 주지 임명장도 없이 사신 것이다.
그런데 새로 정식 주지 스님이 오시게 되자 정국 스님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절이 너무 작아 여러 식구가 다 살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도 각기 헤어지게 되었다.
얼마 전에 나는 옛날이 그리워서 오랜만에 무주구천동 백련암에 가 보았다.
아직도 그 울창한 숲과 개울은 있었지만 옛날 같지는 않았다.
국립공원으로 관광지가 되어서 사람들이 서울 거리보다 더 많았다.
절도 작은 암자 토굴이 아니었다.
아주 큰절이 들어서 있었다.
그 때 같이 동자로 있던 동갑내기 성호는 그 후 동국대학을 졸업하고 현재는 군인이 되었다.
가장 막내였던 준연이는 그때도 몸이 약해서 정국 스님이 항상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동국대학을 졸업하고 스님이 되어 공부를 하다가 25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듣고 대구 파계사로 찾아갔을 때였다.
그는 그 때 이미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는지,
헤어질 때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스님, 부디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의 목탁이 되십시오. 그래서 내 몸까지 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착하고 천진한 스님.
너무 어려서 출가를 했기 때문에 세상의 때라고는 조금도 묻지 않은 준연 스님은 불행하게도 그렇게 일찍 죽고 말았다.
정국 스님은 덕유산에서도 사람이 오지 않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셨는데 그 후로는 만나지 못했다.
가끔 풍문으로 안부를 들었는데 그것도 잠시 뿐이었고, 지금은 어떻게 되셨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지금도 소쩍새가 우는 밤이면 깊고 깊은 무주구천동을 생각한다.
정국 스님을 생각하고 일찍 죽은 준연 스님을 그리워한다.
눈을 감으면 해맑은 그의 미소가 눈에 보인다.
효림 스님 /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