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도시, 태양의 도시, 달의 도시. 그리고 잃어버린 도시. 장구한 세월동안 세속과 격리돼 유유자적함을 고이 간직한 곳. 그래서 신비하고 풀리지 않는 영원의 수수께끼가 발에 채이는 곳. 그 기원과 신비함으로 인해 우주적 차원의 예술품으로 불리는 곳. 그러나 분명 잉카의 땅이며, 잉카의 도시인 곳. 제국의 마지막 성전이 벌어지고 그 숨통이 끊어지는 순간을 함께한 곳. 잉카 최후의 요새 마추피추다.
‘세계의 배꼽' 쿠스코에서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훼절된 잉카문명과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면면히 이어진 눈부심을 가슴에 품고 이제 공중도시 마추피추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추피추로 가는 방법은 대략 세 가지. 우선 쿠스코에서 피삭이나 친데로스를 지나 우루밤바까지 관광버스를 이용하고 기차로 갈아타는 방법과 쿠스코에서 70km 안팎 떨어진 오얀타이탐보, 칠카 등까지 기차로 이동한 후 잉카로드를 따라 두 발로 등정하는 방법이 있다. 나머지 한 가지는 쿠스코에서 세 시간 넘게 걸리는 기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차창 밖 풍경을 감상하며 가는 방법이다.
우르밤바에서의 하룻밤
핏속 헤모글로빈이 온몸 조직에 충분한 산소를 공급하는데 해발 3,400m는 너무 벅차다. 쿠스코에서 턱까지 찬 숨과 가빠진 호흡을 다소나마 고를 수 있는 곳이 바로 ‘아랫동네' 우루밤바인데, 상대적으로 표고가 낮고 따뜻해 원주민이 많이 살고 있다. 세계에서 첫 손에 꼽힐 정도로 품질이 좋은 고구마, 감자, 옥수수의 고장이기도 하다. 일정상 강행군의 피로와 시차부적응까지 겹쳐 우루밤바에 도착하자마자 저녁까지 거르고 열 몇 시간을 죽은 듯 잤다.
동면하듯. 한 번의 뒤척임도 없이. 긴 잠으로 털어버린 피곤함. 아침에 일어나니 다리가 가볍다. 마추피추발 기차를 탈 수 있는 오얀타이탐보역으로 가는 도중 잠시 찾은 인디오 마을. 그 중 한 집에 들렀는데 방안에 조상의 해골을 모시고 있는 그들의 풍습이 독특하다. 길조의 의미란다. 인디오 마을에서 마주친 아이의 해사한 눈빛과 한국의 그것과 흡사한 마을 집들의 기와가 눈에 선연하다.
태고와 회상의 기차여정
자, 이제 아우토바곤으로 불리는 기차를 탄다. 철로 위의 바퀴나 차체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나무다. 마주앉은 사람의 무릎이 맞닿을 만큼 공간이 협소하고 쉴새없이 엉덩이가 들릴 정도로 좌우 덜컹거림이 심하지만 하늘 아래 이보다 고상하고 장관인 기차여행이 있을까? 침보야 산기슭의 만년설을 근원으로 둔 우루밤바강을 왼쪽으로 흘리며 기차는 창밖으로 웅대한 봉우리와 폐허가 된 유적지, 거칠은 선인장과 잡초 등을 번갈아 보여준다.
출발한 지 1시간이 채 안돼 구불구불한 협곡으로 진입하더니 이내 수천m나 됨직한 거봉이 기차앞을 막아선다. 푸엔테 루이나스역에서 내려 죽 늘어선 인디오 보부상들의 왁자함과 간이시장에 널린 현란한 색채의 자수 옷감들을 뒤로하고, 우루밤바강의 다리를 건넌다. 그리고 마추피추 정상을 향한 버스에 몸을 싣는다. 이제 본격적인 마추피추다.
열 세 굽이, 8km의 갈짓자 비탈길을 꾸역꾸역 오른 버스는 정상 부근 휴게소 광장에 관광객들을 토해낸다. 발 아래 저 멀리로 황토빛 우루밤바강이 마추피추를 휘감아 돈다. 협곡 앞에는 해발 5,850m의 베로니카 봉오리를 포함한 만년 설봉들이 구름 위로 솟아 마추피추에 신성 불가침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그 상서로움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유행가 가사처럼 혼돈과 질주로 가득한 터질듯한 머리속도, 풍진 세상에 두 발을 디딘 고단함과 복잡다단함도 말끔히 사라진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 마추피추의 속살들은 저쪽 고령준봉들에 싸여있다. 멀지 않다. 마음이 급해지고 발걸음은 바빠진다.
자, 마추피추다!
머리속이 하얗다.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다. 그냥 숨이 탁 막힌다. 그 어떤 표현이 있어 이 장대함과 이 신비함과 이 경이로움을 설명할까. 수학, 과학, 측량술, 건축술…인간의 알량한 머리에서 삐져나온 것들과 인간적인 그 어떤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는 우주적 방대함, 그리고 수천 년을 흘러온 침묵. 뒤로 물러설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오직 하늘로 열려진 불가해한 도시. 바로 마·추·피·추!
케추아어로 ‘늙은 산'이란 뜻의 마추피추는 빌카밤바의 가파른 계곡 위 해발 2,400m 이상에 건설된 요새도시. 잉카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스페인 식민통치에 대항해 끈질긴 저항은 계속됐는데, 후아이나 카팍 황제의 둘째 아들이었던 망코 잉카가 비트코스요새에서 시해되자 사실상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갔다. 이 때의 요새가 바로 마추피추라는 것이 지배적인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추피추는 공중도시라는 명칭에 걸맞게 정상을 제외하고는 사면이 깊고 깎아지른 듯한 단애(斷崖)로 되어 있다. 고로 계곡 아래서는 마추피추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고 하늘에서 조망해야만 그 오롯한 모습을 드러낸다. 은둔의 요새인게다.
배수의 진을 치다
마추피추는 천혜의 장소다. 무엇을 위해서 말인가? 바로 외적의 침입에 대한 방어지로서 말이다. 연 강수량 약 1,000mm에 달하는 아열대의 다소 습한 기후는 채소, 감자, 옥수수 등의 풍성한 수확물을 안겨주었다. 한국의 산성 마냥 전시를 대비해 따로 식량을 비축할 필요가 없어 적과의 장기전에 끄덕없었다.
또 하나. 달의 신전이 있는 마추피추의 봉우리 와이나피추를 끼고 도는 우루밤바강은 배수진(背水陣)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땅 충주에 가면 만날 수 있는 탄금대와 같은 형상인데, 이건 의미심장하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명장 신립 장군이 그랬듯이 등뒤에 푸른 강을 지고 온몸으로 적을 맞은 것이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야만의 침략자들에게 송두리째 내어줄 수 없다는 잉카인들의 처절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들의 저항의 함성, 그 애끓는 몸부림이 수천 년의 세월을 건너 귓등을 때린다.
마추피추 정체는 잉카제국 신뢰받은 ‘신성도시’
마추피추를 둘러싼 역사적 기록과 다양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마추피추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놓고 여전히 설왕설래하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여러 사실을 놓고 얼개를 맞춰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밑그림이 나온다.
우선 마추피추는 군사적 요새 겸 자립경제도시였다는 믿음. 실제 깊은 계곡, 깎아지른 절벽 등 군사 요새를 위한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도시 서쪽에 자리잡은 대규모 계단식 농업지대와 주위의 작은 공간에 만들어진 농업용 테라스 등을 보면 1,000명의 잉카인이 자립하기 충분한 농토였다.
빌카밤바의 산줄기와 우루밤바강 연안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잉카 유적들은 마추피추 일대의 인구가 약 1만명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따라서 그 중심에 위치한 이곳은 계곡 전체를 관장하는 지방의 거점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최상의 축조술로 짜여진 신성 중심의 시설물들은 마추피추가 잉카제국의 절대 신뢰를 받아온 신성한 도시였음을 웅변한다.
첫댓글 잉카제국은 에니메이션 '라퓨타'에서의 사라진 문명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잼있었어요
뭔가 미스테리가 많은 잉카문명...캐고 말고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