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밍이 좋지 않아요

[녹림처사]

◈ 타이밍(timing)이 좋지 않아요 ◈

어느 날 스티브 잡스가 애플 신제품을 소개하는 자리에 섰어요

“2년 반 동안 이날이 오기를 기다려 왔습니다.”

첫마디 운을 띄운 후 잡스는 무려 7초 동안이나 침묵했지요

청중들의 눈빛이 기대와 긴장감으로 팽팽했어요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요

뒷날 그는 이렇게 적었어요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프레젠테이션 룸.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그들을 내가 원하는 곳까지 데려갈 것인가?’

잡스는 이런 침묵 화법을 자주 써먹었지요

아마 우연일 것이지요

엊그제 이원석 검찰총장도 검사장들 인사와 관련한 질문을 받고

7초간 말을 끊었어요

청사 앞에서 기자가 “사전 조율이 있었느냐” 묻자

그는 “어제 단행된 검찰 인사는…”이라고 입을 연 뒤

7초간 입을 다물었지요

그러고 나서 무거운 표정으로 “더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했어요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식의 보도가 불가피했지요

그의 침묵이 의도된 화법인지 해석이 분분했어요

TV에선 3초 이상 침묵하면 ‘방송 사고’로 치고 있지요

일본어로는 ‘마(間)가 뜬다’고 하지요

이 총장이 무려(!) 7초간 말을 끊은 사이 실시간 중계를 하던

방송사 스튜디오에도 묘한 긴장감이 흘렀으나 사고라는 생각은 안 했어요

때로는 화려한 말재주보다 질의응답의 여백과 제스처 같은

‘말 사이’에 훨씬 중요한 메시지가 담기기 때문이지요

말에 이격(離隔)을 두면 흡사 말굽쇠 공명(共鳴)처럼 듣는 이의 마음에

울림이 생기지요

유명 정치인에게 ‘침묵의 달인’이란 별칭을 붙일 때가 있으나

보통 인터뷰 화법하고는 결이 다른 얘기이지요

박근혜·최규하 전 대통령, JP 같은 분들이 정치적 난관을 헤쳐나갈 때

‘침묵과 칩거의 정치 달인’으로 묘사되곤 했었어요

반대로 강준만 교수는 연전에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책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을 ‘선택적 침묵’ ‘내로남불형 유체 이탈 화법’이라고

비판한 적도 있지요

2011년 애리조나 총기 사건 때 추도 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8세 소녀를 언급하며 “이 나라가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뒤 51초 동안 침묵했어요

그는 입술을 꽉 다물고 심호흡을 했지요

침묵의 다른 이름은 경청(傾聽)이라고 하지요

공명을 일으키는 신호탄이라고도 했어요

엊그제 공개된 최신 AI 모델은 사람과 비슷한 속도로 대화가 된다고 하지요

그러나 로봇이 인간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금세 알아차리지요

이원석 총장의 ‘7초 침묵’을 임명권자는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했어요

그런데 이원석 검찰총장이 14일 김건희 여사 관련 수사를 지휘하던

서울중앙지검 수뇌부 교체에 대해 “인사는 인사이고 수사는 수사”라고 했지요

“증거와 법리에 따라서 원칙대로 수사할 것”

“검사들을 믿는다”라고도 했어요

그러나 ‘법무부와 (수뇌부 교체 인사를) 사전 조율했느냐’는 질문에는

7초 정도 침묵한 뒤 “더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했지요

대통령실과 갈등설 등 인사 관련 추가 질문에도 말을 아꼈어요

검찰 인사는 법무장관이 검찰총장의 ‘의견을 들어’

대통령에게 제청하게 돼 있지요

전날 검사장급 39명의 교체가 발표될 때 이 총장은 지방 순회 중이었어요

자신의 참모진이 대거 바뀌는데도 대검을 비운 것은 불만의 표현일 수 있지요

이번 인사를 보고 4년 전 문재인 정권의 검찰 인사를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지요

당시 정권은 추미애 법무장관을 내세워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공작과

조국 일가 불법, 유재수 비리 수사 등을 지휘하던

윤석열 검찰총장 참모들을 전부 좌천시켰어요

윤 총장 의견은 묵살했지요

빈자리는 예외 없이 친문 검사들로 채워졌어요

서울중앙지검장엔 문 전 대통령의 대학 후배를 앉혔지요

윤 총장의 손발을 잘라 정권 비리에 대한 수사를 유야무야시키면서

청와대가 검찰 수사에 직접 개입하겠다는 뜻이었어요

문 정권은 정권 비리 수사 지휘부를 좌천시킨 데 이어

수사팀 중간 간부들도 쫓아내는 ‘2차 인사 학살’을 단행 했지요

울산시장 선거 공작 등 대통령과 정권 실세 관련 수사를 맡았던

서울중앙지검·동부지검 차장검사 5명을 모두 지방으로 발령 내

수사에서 손을 떼게 했어요

담당 부장검사까지 쫓아내며 수사팀을 공중 분해했지요

그런데도 윤 총장이 월성 원전 평가 조작 수사 등을 계속하자

‘윤석열 찍어내기’를 시작 했어요

국민은 불법을 덮으려고 수사팀을 공중 분해한 문 정권 행태에 분노하면서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한 윤 총장에게 박수를 보냈지요

그 결과로 윤 검찰총장이 유력 대선 후보가 되고 대통령이 됐어요

윤 대통령은 검찰 수사라인을 교체한다고 비위 의혹이 덮이지 않는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지요

문제가 있으면 언젠가 드러나게 돼 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윤 대통령이 자신의 부인을 수사하는

검찰 수뇌부를 갑자기 교체했지요

왜 이런 우를 범하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이원석 검찰총장은 경질돼야 마땅하지요

지난 2년간의 행태를 보면 무엇하나 제대로 수사한 것이 없어요

그 결과 검찰의 위상은 땅에 떨어지고 조롱거리로 전락한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나 왜 이때냐는 것이지요

이번 검찰 인사를 보면서 자신이 당한 일을 자신이 되풀이하는 듯한 모습에

뉴스 댓글에는 ‘국민이 믿고 맡긴 권력을 부인 보호에 쓴다’는

반응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뼈아픈 지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지요

타이밍(timing)이란

적기적소(適期適所)가 생명력이지요

언제나 한발 늦고 장소를 잘못 택한것이 '대파사건' 이지요

이번에도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꼴이 됐어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지요

-* 언제나 변함없는 조동렬 *-

▲ 이원석 검찰총장이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으로 출근하며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수수 의혹 사건 수사 및 검찰 인사 등에 관해 입장을 밝히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