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물점이나 가게(당시엔 슈퍼란 말은 없었고 80년대 슈퍼마켓의 글자를 줄여 등장했다.)에 가서 유리어항(어포기라고 쓰여있었음)을 사서 살짝 흐르는 물에 설치하여 물고기를 잡았었다.
경안천은 당시 물이 깨끗한 편이어서 재첩이나 가막조개 같은 것도 많았고 더 맑은 계곡물엔 가재도 있었는데 가재의 경우엔 그 서식장소를 비밀로 했었고 충주가는 길가 '김촌말' 의 작은 계곡을 파보면 가재가 있었다. 산의 이름이 따로 있었지만 아이들 끼리는 산중턱에 아모레화장품 광고판이 설치되어 있어 '아모레 산'이라 했었다.
(이 김촌말과 인근 최촌말은 수학능력시험의 한국지리 문제의 지도에도 등장한다.)
아무튼 6학년 봄 전학을 간 충청도와 경기도 접경의 동네엔 저수지가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 졌고 더 들어간 금왕읍엔 쌍둥이 저수지가 당시 만들어져 지역의 농민들은 수리안전답을 조성했다고 기뻐했고 가뭄이 심했던 시기 정부를 칭찬했다.
여주 이천쌀 못지 않지만 논농사를 하던 이들은 저수지를 수리조합이라고 부르며 가뭄걱정을 덜었는데 주변엔 수박이나 참외 그리고 과수원도 많았으며 다른 지역보다 더 많았던 것이 담배와 고추 같은 작물이었고 시골집 이곳 저곳엔 건조실이라는 흙으로 만든 건축물이 있어 사람들은 화건법으로 말려 농업소득을 자랑했고 담배를 알던 어떤 머리좋은 동창은 후에 연초학을 전공하여 관련 기술자가 되었다고 들었다.
아무튼 저수지가 많고 개울이 가까웠던 지역으로 이사를 간 나는 주변에 고기를 잘잡는 친구를 알게되어 동네 개울과 저수지를 찾아다녔는데 낚시대를 멀리 던지는 아저씨들을 보고 낚시를 조금 해보기로 했었다.
견지를 이용한 피라미낚시도 좋았지만 진짜 찌를 달고 멀리 던져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문제는 낚시바늘과 낚시대 비슷한 대나무는 구할 수 있었지만 물에 띄워 물고기의 반응을 알 수 있는 찌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낚시점이 있는 곳을 가려면 여러 동네를 통과하거나 인근 읍내에 어른과 함께(당시엔 혼자 갔다가 얻어 맞거나 돈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었다.)갔을 때 살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성격이 급한 나는 기다리지 못하고 자전거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달려(먼지가 나니 길에 또래의 아이들이나 특히 선배들이 없었다.) 이웃 읍내의 잡화점을 갔고 거기에서 '찌'를 구했는데 생각보다 종류가 많았고 어떤 것은 야간에 사용할 수 있다는 말에 비싼돈을 주고 사와 낚시를 하기로 했었다.
당시 찌라는 말보다는 '우끼'라는 일본말을 썼던 것 같다.
좌대가 있는 것도 그렇다고 그늘막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저수지에 가서 낚시를 했었다.
왠만하면 또래가 있는 곳을 피해 어른들이 있거나 독립가옥이 있는 지역의 저수지나 여울에 가서 (동급생이면 상관 없지만 선배나 인근지역 또래를 만나면 안좋은 경험이 있어서) 낚시를 했다.
큰 고기를 잡지 못했지만 기다리는 재미와 함께 낚시를 준비하면서 낚시도구를 사러가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