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년 1월 사찰순례지는 진전 길상사,보탑사, 증평 미륵사 입니다. 길상사는 1975년 2월 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김유신(金庾信:595~673)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원래 길상사는《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신라시대부터 김유신의 태(胎)가 묻힌 태령산 아래 사당을 건립하고 나라에서 제를 지내오다가 1399년(태종 8)부터 관행제(官行祭)로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당이 소실되자 1851년(철종 2)에 정재경, 박명순(朴命淳) 등이 백곡면 가죽리에 죽계사(竹溪祠)라는 이름으로 사당을 재건하여 조감과 함께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죽계사가 철거된 이후 진천읍 벽암리 소흘산(所訖山) 아래 서발한(舒發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사당을 짓고 계속 제향하였으나 1922년 홍수로 유실되었다.
1926년에 후손인 김만희(金萬熙)의 주선으로 현재의 위치인 벽암리 도당산성(都堂山城) 안에 길상사를 건립하였다. 6·25전쟁 때 심하게 파손되어 중수하였고 1976년 사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전면 신축되어 현재에 이른다.
김유신은 만노군(萬弩郡:충북 진천) 태수였던 김서현(金舒玄)과 만명부인(萬明夫人) 사이에서 태어나 673년(문무왕 13)에 79세로 별세한 신라의 명장이다. 후일 삼국통일의 이룩한 공으로 835년(흥덕왕 10)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고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에 배향되었다. 그의 묘(사적 21)는 경북 경주시 충효동에 있다.
입구의 홍살문과 본전인 흥무전(興武殿)을 비롯한 관리사·내삼문·협문 2동 등 총 6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흥무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주심포집으로 벽면과 기단 등을 콘크리트로 지은 현대식 목조건물이다. 안에는 장우성(張遇聖)이 그린 가로 98cm, 세로 187cm의 영정이 있는데 1976년 11월 5일에 봉안된 것이다. 그 밖에 뒤뜰에 흥무대왕신성비, 안뜰에 김유신장군사적비, 입구에 길상사중건사적비 등이 있다.
진천군에는 길상사 이외에도 장군의 여러 유적들이 있는데 장군의 태를 묻은 태령산의 김유신태실 및 돌담(충북기념물 108), 탄생지인 상계리의 김유신장군유허지(충북기념물 79) 등이 있다. 특히 탄생지와 태실을 포함한 상계리 일대의 129필지가 1999년 6월 11일 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보탑사는 충청북도 진천군 보련산(寶蓮山) 자락에 있는 사찰로, 1996년 고려시대 절터로 전해지는 곳에 비구니스님인 지광·묘순·능현스님이 창건하였다. 1992년 대목수 신영훈을 비롯한 여러 부문의 장인들이 참여한 불사를 시작하여 1996년 8월 3층목탑을 완공하였고, 그 후 지장전·영산전·산신각 등을 건립하고 2003년 불사를 마쳤다.
황룡사 9층목탑을 모델로 만든 3층목탑의 높이는 42.71m로, 상륜부(9.99m)까지 더하면 총 높이가 무려 52.7m에 이르는데 이는 14층 아파트와 맞먹는 높이이다. 목탑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모두 29개이다. 강원도산 소나무를 자재로 하여 단 한 개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전통방식을 고수하여 지어졌다 한다.
1층은 대웅전(199㎡), 2층은 법보전(166㎡), 3층은 미륵전(136㎡)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에는 사방불(동방 약사우리광불, 서방 아미타여래불, 남방 석가모니불, 북방 비로자나불)이 배치되어 있으며, 법보전에는 윤장대(輪藏臺; 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회전하도록 만든 책장)를 두고 팔만대장경 번역본을 안치했고, 한글법화경을 총 9t의 돌판에 새겨 놓았다. 미륵전에는 화려한 금동 보개 아래에 미륵삼존불을 모셨다. 2층과 3층 외부에는 탑돌이를 할 수 있도록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보탑사에는 그밖에 장수왕릉(장수총)을 재현해 만든 지장전, 너와지붕을 얹은 귀틀집 형식의 산신각, 부처가 500명의 비구들에게 설법하던 모습을 재현해 만든 영산전, 와불 열반적정상을 모신 적조전, 법종각·법고전·불유각·삼소실 등의 건축물이 조성되어 있다. 경내에는 보물 제404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석비인 ‘진천 연곡리 석비’도 있다.
미륵사는 대한불교 조계혜능종 사찰로서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관음보살입상을 기도처로 삼고 1940년에 관음보살입상옆에 작은 초막을 지은 것이 미륵사의 시작이다. 본격적인 사찰로서 여건을 갖추게 된 것은 이초막이 한국전쟁으로 불탄 것을 1957년 새로 전각을 새로 지으면서 미륵사라는 이름도 이때 가지게 되었다.
미륵사 주법전인 대웅전은 요사와 지장전 사이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만날 수 있으며, 요사 뒤쪽으로는 조립식 판넬로 작게 지어진 삼성각이 대웅전쪽으로 향하여 자리하고 있다.
석조관음보살입상은 전설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오래 전 한 마을전체가 원인모를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하여 매일 2,3명씩 죽어 나가고 있었는데, 어느날 한 노승이 나타나 마을 어귀 느티나무옆에 있는 관음보살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7일이내에 효험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해주고 사라졌다. 주민들은 처음에 그냥 흘리고 말았지만, 이후 더욱 질병이 심하다보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하였더니, 7일이 되자 마을사람들의 병이 씻은 듯이 완치되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마을에서는 느티나무 옆에 관음보살에게 매년 한번씩 모여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미륵사는 석조관음보살입상에서 보면 서쪽에 자리한 사찰이다. 전체적으로 나지막한 야산 끝자락에 자리하고 증평들판을 내려다 보고 있다. 동쪽 끝으로는 지장전이 있고, 여기서 동쪽으로 50m정도 떨어진곳에 수령 300년의 느티나무옆에 석조관음보살입상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보호각이 있다.
관음보살입상의 머리위에 있던 보개석은 깨져 보호각 밖의 고목밑에 있다. 눈썹사이에는 동그란 백호가 있으며, 눈·코·입 등이 정연하고 원만하다. 목에는 3줄로 새겨진 삼도가 선명하고 몸체는 비대한 느낌이 든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어깨에 걸쳐 옆으로 내려졌고 배꼽부분에는 하의가 선명하지 않게 새겨졌다. 왼손은 배 아래에서 손바닥이 밖을 향하고 있으며 불상앞에는 절을 할 수 있도록 돌이 놓여 있다. 머리에 썻던 관에 새겨진 작은 부처나 보개의 표현, 옷주름과 얼굴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 중기로 추정된다.
- 순례일시 : 2018. 1. 7(일) 08:00 대전세무서 출발
- 순례장소 : 길상사,보탑사(진천), 미륵사(증평)
- 순례코스 : 대전(08:00) → 길상사(09:30) → 보탑사(10:30~11:30) → 점심공양(11:30~13:00) → 미륵사(14:00) → 대전(16:00)
- 점심공양 : 보탑사
- 순 례 비 : 30,000원
- 입금계좌 : 농협 302-0925-3251-11(이옥자)
자비행사찰순례단 회장 김선기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