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야를 향하여/ 장소연/ 제12회 김유정 소설문학상 당선작
그녀는 언제 나갔을까? 이불을 들추며 몸을 일으키자 뻐근한 둔통이 등줄기에서 정수리로 올라온다. 몸을 비스듬히 일으킨 상태로 스탠드의 스위치를 누른다. 황금색 불빛이 사방을 비춘다. 몇 시쯤 되었을까? 일으킨 몸을 침대 끝에 고쳐 앉으며 협탁 위의 시계를 본다. 모닝콜을 훨씬 넘긴 시각이다. 전화기를 잠시 잡았던 기억이 어렴풋한 걸 보면 정신없이 잠을 잔 모양이다.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힌다. 빛은 기다렸 다는 듯 웅성거리며 싱싱한 아침을 몰고는 날쌔게 들어온다.
일정이 바쁘게 생겼다. 로비에서 일행들을 만날 시간은 이십분밖에 남지 않았다. 정수리 끝까지 다다른 둔통은 머리를 지탱하기 힘들 정도로 무겁게 짓누른다. 어제 밤 호텔 야외 바에서 그녀와 술을 마셨다. 맥 주의 맛은 담백했다. 오랫동안 그녀와 잔을 기울였고 그리고는 룸이었다.
오래 만에 안아 보는 여자였 다. 오월의 아카시아 향기처럼 코끝을 자극하는 그녀의 냄새는 굶주린 나의 남성이 오래 버티기에는 너무 강했다. 참기 힘든 욕정으로 그것은 금세 수그러들었고 바삐 그녀에게서 비 켜났다. 여행길에서 여자를 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꼭 일 년만이었다. 그동안 욕구를 풀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을 상처처럼 움켜잡고 있었다. 지난밤은 아내의 기일이었다. 여행의 시작은 용서할 수 없는 아내 때문이었고, 나는 아내의 기일을 이국에서 맞고 있었 다.
덴마크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이다. 이곳에서 이박을 하고 나면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여 떠나왔던 한국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애초 특별한 무엇을 꿈꾸며 출발한 여행은 아니었다. 그냥 복잡하던 마음을 잠시 놓아두기만을 바라며 열흘 전 인천공항의 게이트를 통과하였다. 그렇게 시작한 일정이 어제 아침, 베르겐을 출발하여 한 시간 삼십분 거리인 코펜하겐에 도착 하였다. 우리 일행이 입국신고를 마치고 출구를 빠져나오자, 그녀는 여행사의 이름 이 적힌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의 짧은 인사가 끝나고 이제껏 관광을 하였던 나라에서처럼 옷가지가 든 가방을 끌고 대기해 있던 노란색 미니버스 에 올랐다. 스쳐 가는 차창 밖으로 눈길을 두자 바다 가운데 우뚝 세워진 풍 력발전소의 풍차가 들어왔다. 흰색의 커다란 바람개비는 잔뜩 움츠린 하늘 아래 맑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신기한 것을 보는 듯 그것을 바라보았으 며, 그렇게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녀가 스쿠알렌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어제의 마지막 일정인 계피온분수를 관광하고 호텔로 돌아오던 차 안에서였다.
“심해상어는 생물체 중에서 유일하게 암에 걸리지 않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무게의 삼분의 이가 간으로 구성되어 있는 심해상어가 강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간유 안에 포함된 스쿠알렌의 효능 때문으로, 일반상어는 물 밖으로 나오면 내장이 파괴되고 눈이 터져서 곧 죽지만 심해상어는 물 밖에서도 상당시간 생존하는데 이는 심해상어의 강인한 생존능력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미니버스의 통로에 서서 덴마크의 입지적인 환경과 여건으로 인하여 형성되는 스쿠알렌의 효능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녀의 설명에 스쿠알렌이라면 국내에서도 많이 유통이 되는 것이라 일행들은 쉽게 이해를 하였고 또한 관심을 보였다. 그녀의 설명이 끝나자 곧 주문이 이어졌고, 나 또한 특별한 쓰임새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분위기에 묻혀서 세 개를 주문하였다. 그녀는 조수석에 놓여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노란색 박스를 꺼내어 주문한 개수만큼 통로를 바삐 오가며 일행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저만치 호텔이 보이는가 싶은 지점에서 벌써 계산은 끝나 있었고 일행들은 스쿠알렌이 담긴 노란 쇼핑백을 하나씩 손에 들고는 하차를 하였다. 그녀는 내일 아침 여덟시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는 타고 온 미니버스에 몸을 싣고 떠나갔다.
그녀는 언제 나갔을까? 다시금 그녀가 사라진 시각을 궁금해하며 협탁 위 에 놓여있던 선글라스를 집어 들기 위해 팔을 뻗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스쿠알렌 캡슐들이 눈에 띈다. 그것들은 마침 커튼 사이로 거침없이 들어온 빛으로 인해 노란 쪽물을 들인 것처럼 투명하게 빛이 나며 반짝거렸다. 나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낸 후 알약 하나를 목을 두어 번 젖히며 넘겼다. 빈속이어서인지 우기에 황톳물 흘러가듯 격하게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간다. 선연한 차가움에 진저리를 치자 불현듯 선짓국이 생각난다. 부추와 채 썬 무에 막 된장을 넣고 비빈 밥을 뜨거운 선짓국과 함께 먹었으면 좋겠다. 편안하지 못한 위장과 무거운 머리 탓이리라. 식당으로 내려가 우유에 곡류를 섞은 수프 한 그릇 먹기 힘든 빠듯한 시각에 선짓국을 생각하자 싱거운 웃음이 입가 에 묻어난다.
지난밤 그녀와의 정사는 뜻하지 않는 일이었다. 살다보면 기대를 배반하 는 일들이 도처에 있다는 것도, 또한 복병처럼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튀어나 와 뒤통수를 갈기는 것이 살아가는 일의 한 장막이라는 것도 일깨워 준 이는 아내였다. 어느 날 아내의 부정이라는 벽 앞에 섰을 때, 아내에게 일탈의 욕구가 있으 리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나의 생각을 비켜간 현실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틀을 집을 비우고 들어온 아내가 남자를 만나고 있다고 물기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하였을 때, 남자를 만나고 있다고? 너 지금…… 눈썹을 치켜세우며 아내를 몰아붙이면서도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아내의 말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내의 주변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는 미련스럽다 할 만큼 언제나 묵묵했고, 그 묵묵함이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감정의 폭이 없는 그녀였다.
벚꽃 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던 봄날, 아내의 남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검은 가죽장갑을 꼈다. 그를 패대기칠 작정이었다. 남자를 만나러 가는 모퉁이를 돌면서 까만 장갑 위로 양손을 맞잡고는 손가락 꺾기를 몇 번 시도하였다. 작은 불꽃이 가슴 가운데서 탁탁탁 튀어 오르며 머리로 치솟아 가는 분노때문에 나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심장이 박동을 했다. 아내의 남자는 당당하였다. 동네 한 구석, 낡은 수족관이 있는 다방에 앉아 아내의 남자는 조용히 그러면서도 분명하게 차근차근 말했다. 어떻게 그들이 알게 되었는지 그 것은 내게 관심 밖이었다. 정도 이상으로 그는 아내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았고, 아내의 특별한 서정성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개 같은 소리. 아내가 무엇을 좋아하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 나의 아내이면 되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를 향해 가죽장갑을 끼고 있던 손을 정면으로 날렸다. 팔을 뻗어 그를 향하여 몸을 싣자 테이블에 있던 커피 잔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내가 이혼을 요구한 것은 그날 이후였다. 나는 아내의 요구를 묵살했 다. 외간남자를 안 아내를 용서할 수 없었지만, 이혼 또한 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아이들이 걸렸고, 가정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느 날 문득 섬광이 일어나 빛이 찬란하게 퍼지는 그런 특별 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는 흔히 볼 수 있고 어쩌면 표준일 수 있는 사십 중반의 가장으로 적어도 부끄럽지 않게 가정을 돌보며 살았고, 그러한 성실과 정직으로 살아온 내게 아내는 정직하지 못한 모습으로 폭 풍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지옥으로 넘나드는 그 더럽고 불쾌하던 감정이 나는 수습이 되지 않았고, 애써 그것을 거두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받고 있는 상처만큼 아내에게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얼마나 내가 고통스러워하는지를 아내 또한 알아야 했다.
흩어져 있는 스쿠알렌을 대충 집어 여행용 가방에 넣은 후 1달러를 침대 위에 놓았다. 여권이 든 허리가방을 벨트에 매달고는 천근보다 더 무겁게 짓누르는 머리 위로 앞창이 불거진 파란색 모자와 선글라스를 쓴다. 방안의 사물들이 순식간에 한꺼풀 덧칠을 하며 가슴 한편에 편안한 닻이 내려진다. 언제나 선글라스를 쓰면 그때부터 세상이 적당한 거리로 떨어져 서 있는 듯 편안해졌다.
대충 거울을 본 후 카드 키를 뽑아 밖으로 나선다. 문이 자동으로 나의 몸을 밀어내며 큰소리 나지 않게 닫힌다. 황금색 카펫이 깔린 긴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를 타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흑인이 환하게 웃는다. 그를 따라 슬그머니 입가에 웃음을 묻힌다. 누구나 보면 친절하게 대하는 이국의 풍경이 낯설던 처음과는 달리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로 나서자 일행들이 보인다.
“아이고…… 이제 내려오십니까? 혼자라 밤을 지새울 일도 없을 텐데 간밤에 무얼 하셨길래 이제야 내려오시나요? 난 어제 밤 마누라와 스쿠알렌 먹고 밤새 한숨도 못 잤는데……”
여행길 내내 너스레를 떨며 좌중을 웃게 만들었던 해운회사에 다닌다는 박 부장이 예의 넉살좋은 농담을 하며 나를 반긴다. 아. 스쿠알렌. 나는 다시 한 번 주섬주섬 여행 가방에 꾸겨 넣었던 노란 알약을 생각한다.
미니버스를 타고 떠난 그녀를 다시 본 것은 밤 아홉시가 될 무렵이었다. 밤이라고는 하지만 한여름 북구의 밤은 백야 현상으로 인해 우리의 저녁 무렵이었다. 백야에 대한 상식이 없지는 않았지만 여행의 첫날, 러시아에서 맞은 밤의 그 어둡지 않은 풍경은 신기함을 넘어 생경하기가 그지없었다. 대낮처 럼 훤하게 밝아 있는 아홉시. 나는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며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건 순전히 그녀의 탓이었다. 룸으로 들어와 샤워를 마치고 속옷만 입은 채로 텔레비전을 켠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스쿠알렌을 여행용 가방에 넣을 참이었다. 세 개를 나란히 넣으려던 나의 눈에 포장의 뒷면에 붙여져 있는 조그마한 하얀색 테그가 들어왔다. 호기심에 나는 숫자로 표기된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어 나머지 박스의 뒷면을 차례로 들여다보았다. 다른 박스에는 그 어떤 표기도 없었다. 나는 다시 테그가 붙여져 있는 박스 를 보면서, 그것은 현지에서 유통이 되는 스쿠알렌의 가격일 것이라는 짐작 이 들었다. 잠시 후 나는 한국에서부터 줄곧 따라온 가이드인 김 대리를 룸으로 올라 오게 했다. 북유럽 동행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하던 그였다. 나의 전화에 금세 나타난 그 역시 샤워를 하였는지 머리에는 채 마르지 않은 물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를 촉촉하게 보이게 했다. 나는 테그가 붙여져 있는 노란색 박스와 그렇지 않는 두개의 박스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분명히 이곳의 현지 가격이겠죠?” “……맞는 것 같습니다.” 머뭇거리던 김 대리가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나의 짐작과 김 대리의 대답대로라면 이건 현지가격의 갑절에 해당되는 금액을 지불한 셈이었다.
“이 사람들이 사실은 수익성을 이런 것에서 내는 것은 대충 아실 겁니다. 한국에서 여행상품들을 워낙 덤핑으로 내놓다 보니 모든 일정에 드는 비용이 이쪽 현지여행사들의 몫이거든요. 입장료라든지 숙식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 하자니 어쩔 수 없이 때로는 억지 쇼핑을 하고 거기서 나오는 커미션을 가지고 막아나가죠. 그래도 수익이 안 날 때는 나 몰라라 하고 관광객들을 내려 놓고는 도망가 버리는 경우도 간혹 있어요. 낯선 이국에서 그 꼴을 당하면 애를 먹는 건 우리 같은 가이드들이지요.”
난처해하는 김 대리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그런 내용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하다 싶은 일이었고 그런 그들을 봐주고 싶은 마음은 더욱 아니었다. 이번 여행은 여름 휴가기간이라는 성수기에 온 관계로 세일 패키지는 아니었다. 애초 계약을 할 때 추가요금도 없고 또한 노팁의 계약이었다. 나는 그들을 봐 주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 여자 부르세요.”
나는 김 대리에게 강경하게 말을 하였다. 이번 여행은 다섯 쌍의 부부 동반 팀과 지인들과 온 두 팀을 합하면 도합 열다섯 명이었다. 그중 동행자 없이 떠나온 사람은 나 혼자였다. 그러한 일행들과 인천 공항을 출발할 때 딱히 이유도 없이 나는 팀의 대표격인 단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 순전히 김대리의 성화 때문이었다. 그 김대리가 그녀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그녀가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 다시 룸으로 돌아간 김 대리로부터 연락을 받고는 곧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는 한산했다. 김 대리와 앉아 있던 그녀가 나를 보며 일어서는데 관광을 하면서 보았던 낮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웨이브 진 긴 머리는 꽈리를 틀어 커다란 핀으 로 상투처럼 올려졌고, 화장을 지운 까만 얼굴은 마치 동남아시아인의 외양처럼 눈만 동그랗게 부각되어 있었다. 그녀가 나의 기대대로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 정도만 했었어도 나는 순순히 그녀를 이해했을 것이다. 적정 가격에 대하여 물었을 때 안절부절 못하는 것은 김 대리였고 오히려 그녀는 당당하였고 도도하였다.
“어떡하시겠어요? 돈을 전부 내어드리고 물건을 회수 할까요?”
일의 앞과 뒤는 인사치레라는 것이 있어서 적어도 죄송하다, 뭔가 착오가 있었다. 이런 대답을 기다렸던 내게 그녀는 보기 좋게 기대를 배반했다. 스쿠알렌을 구입한 것은 딱히 필요해서가 아니었기에 당장이라도 환불을 시키면 될 일이었지만, 그 순간 김 대리가 괘심했고 사과의 기미조차 없는 여자에게는 화가 일었다. 나는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과 낯선 이유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모양새가 어이가 없었다. 긴장감으로 내내 안절부절 못하던 김대리의 채근 때문이었는지 나는 연이어 맥주잔을 기울였다. 몸의 피돌기가 빠르게 흘러가자 취기도 순식간에 왔다. 앞의 여자는 여전히 꼿꼿했다. 어느 순 간 깊어지는 취기 속에서 양쪽의 눈치를 보며 수선스러워 하는 김대리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술기운이 내 몸의 아래쪽까지 흘러가는 순간 세상은 저만치 나 앉아 있었다. 살아오면서 줄곧 안고가야 하는 끓는 분노, 감당하기 힘든 내부의 격정, 그 팽팽하던 끈들을 놓아도 좋을 것 같은 순간이었다. 여자와 함께 룸으로 올라온 것은 김 대리의 떠밀림이라기보다는 만취와 잊고 싶은 일상에 대한 정지였을 것이다. 저만치 프론트 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김 대리가 보인다.
“잘 주무셨어요?”
여느 날과 똑같이 반가운 표정으로 사람을 대하는 김 대리인데 나는 민망해진다. 그녀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모양이다. 무거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는 겸연쩍음이 누른다. 그녀를 보면 자연스럽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이 미세한 조바심을 일으키며 불편함으로 옮겨간다. 지난밤에 나는 절제를 넘어 여자를 안았다. 애틋함을 동반하지 않는 정사를 나는 여행의 덤이라고 치부하기로 작정한다. 김 대리가 호텔 내 쇼핑센터에서 특산품을 보고 있던 일행들을 모여들게 한 후 인원을 체크한다. 김 대리의 체크가 막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호텔 원형 문을 밀고 들어선다.
“편안히 주무셨어요? 오늘 날씨가 무척 좋죠? 저기 정차해 있는 차에 타시면 되겠어요.”
어제 타고 다녔던 미니버스가 호텔 밖에 정차해 있는 것이 그녀의 손끝으 로 보인다. 웨이브 진 긴 머리가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다. 쌍꺼풀 진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하는 말이 경쾌하다. 그녀를 보면 어떻게 대할까 고심하면서 불편해한 내가 무색할 정도로 말도 외양도 말끔하다. 가슴 밑바닥에서는 반가운 마음이 일렁이는 동시에 희미한 배신감이 빠르게 지나간다.
그녀의 안내대로 대기하고 있던 미니버스에 오르자 차는 서서히 호텔을 빠 져나간다. 마이크를 잡고 통로에 서 있던 그녀는 이번에는 덴마크의 역사에 대하여 준비한 원고를 읽듯 한다. 귀는 그녀 편으로 열어 둔 채 시선은 창밖을 본다. 넓은 잔디구장은 이 나라의 자랑인 듯 지나가는 곳곳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들은 금방 물을 뿌려 놓은 것처럼 파릇파릇하다. 그 선명한 푸른빛 이 기분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삼십분 정도 달리자 버스가 정차를 한다. 나는 옆 좌석에 놓여 있던 카메라를 목에 걸친다. 버스에서 내려선 그곳은 아기자기한 집들이 즐비하다. 빨갛고 노랗고 파란 지붕이 동화 속의 삽화를 옮겨 놓은 것처럼 포근하다. 손바닥 만한 마당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하얀색 티 테이블이 앙증맞게 놓여있다. 테이블 주위로는 키 작은 꽃들이 수를 놓았고, 잎이 무성한 덩굴나무가 집을 감쌌다. 대문은 고향집 삽작문처럼 나지막한 것이 손가락만 갖다 대면 금방이 라도 열릴 듯 엉성하다. 그런 집들을 따라 이어진 길은 겨우 두 사람이 지날 갈 수 있을 정도로 좁다. 그 좁은 길을 따라 판박이를 해 놓은 듯한 집들이 쭉 이어진다.
“인형의 집 같죠? 동심의 세계로 돌아온 듯 하지 않나요? 이곳은 코티지예요. 쉽게 말하면 별장이죠. 도심지에 집이 있는 노인들이 시간이 나면 언제든지 와서 좁은 마당이지만 채소도 심고 꽃도 가꾸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 가는 곳이에요. 참 예쁘죠?”
그녀의 설명에 일행들은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늘어서 있는 집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미적거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색 현관문 을 밀치고 나오는 노부부와 마주친다. 노인이 상냥하게 웃음을 짓는다. 뱃살이 보기 좋게 나온 몸이 여유로움으로 느껴진다. 스패너를 쥐고 있던 노인이 마당의 의자를 뒤집고는 나사를 조였다. 뒤따라 나온 그의 아내는 허리를 굽혀 테이블을 요리조리 살핀다. 나는 그 모든 풍경들을 하얀 울타리에 손을 기댄 채 지켜본다. 한참을 요리조리 살피던 아내가 “헤이!”하고는 노인을 부른다. 살가움이 그들을 감싼다.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나요? 노후에는 누구나 저런 삶을 꿈꾸죠…… 저 도 그랬어요.”
어느새 왔는지 그녀가 딱히 내게 던진다는 느낌도 없이 몽환적인 목소리로 낮게 말을 하며 지나간다. 내게도 저런 꿈이 있었을 것이다. 아내와 노년을 살갑게 보내고 싶은 그런 작은 욕망이 가슴 깊은 곳에 필경 있었을 것이 다.
빌어먹을…… 순식간에 일어난 그 일은 그날따라 일찍 집으로 들어온 날이었다.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눕기 전 나는 아내와 한바탕 홍역 같은 심한 다툼을 치렀다.. 그즈음 아내와의 다툼은 일상적인 일이 되어 있었다. 가슴에 늘 무언가 얹혀서 내려가지 않는 느낌…… 그거 알아요?,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던 아내가 안방으로 들어가는 나의 등에 대고 거칠게 말하였다. 나는 문고리를 잡던 손을 잠시 멈추며 그녀를 향해 돌아서려다가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침대 위에 누웠다.
분홍색 커버가 씌어져 있는 안방의 침대 위에 누워 막 잠이 들려던 나를 깨운 것은 거실 벽에 붙어 있는 인터폰의 벨소리였다. 빠져들던 잠에서 설핏 깬 나는 계속해서 울리는 금속성소리에 신경이 날카롭게 섰다. 이 여자가 왜 전화를 안 받지? 거실에 있을 아내에게 짜증이 났고,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누웠던 몸을 일으키며 안방 문을 열었다. 거실로 막 나와 벽에 붙은 하얀색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바람에 팔랑거리고 있는 베란다의 연둣빛 버티컬 블라인드였다. 그것은 묘한 구슬음을 내면서 찰랑거렸 다. 햇빛이 잘 드는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거실에 있어야 할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순간 서늘함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인터폰 속의 경비는 다급하게 ‘여보세요’를 외쳤다. 나는 한동안 숨을 죽였다. 어질머리가 일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버튼을 눌러 일 층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올리고, 다시 이십 이층에서 내려가는 시간 동안 나는 무섭게 거칠어지는 가슴의 진동 때문에 긴 호흡을 하여야 했다.
아내는…… 입으로 손을 막고 짧은 비명을 지르며 서 있는 여자들 너머로 널브러진 채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가까이 다가가 본 아내의 몸집은 무척이나 커 보였으며 짓이겨져 있는 머리 쪽으로 그녀가 흘린 피가 바위를 물들였다. 그곳은 커다란 조경석으로 단장을 해 놓은 곳이었다. 돌과 돌의 틈새로 풀꽃들이 소복이 피어 있는 그곳에 육중한 아내의 몸은 곤두박질 쳐진 채 나자빠져 있었다. 내가 밤이면 베란다에서 피우던 담배꽁초를 무심코 던지면 정확하게 직선으로 낙하하던 그 지 점이었다. 그녀는 추락하는 담배꽁초의 코스를 따라 어긋남도 없이 그 돌 위에 떨어졌고, 돌 틈으로는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진분홍의 덴드로비움이 보였다. 칠십 킬로가 넘는 아내의 나자빠져 있는 몸은 돌과 꽃의 조화와는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런 아내를 보는 순간 나는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단지 혼미한 정신만이 시꺼먼 맨홀구멍으로 빠져 들어가 어둠으로 갈아탔다. 아득함이 동시에 덮쳤고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내를 생각하자 팍팍하게 아린 통증 하나가 명치끝을 누른다. 나는 울타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빼며 얼른 그들의 주위를 벗어난다. 저만치 그녀가 앞서가고 있다. 풍성한 머리채가 흔들리자 가느다란 바람을 타고 아카시아향이 은은하게 묻어온다. 지난밤 술기운에 묻혀 버렸던 그녀의 냄새였다. 맨살에 부딪히던 꼿꼿하던 젖꼭지의 감촉. 내 몸의 움직임에 따라 활처럼 휘어지던 그녀의 등줄기. 마지막 격렬하던 몸짓 속에서 그녀의 젖가슴 사이로 얼굴을 묻으며 나직이 불렀던 아내의 이름. 나는 그 모든 것을 떠올리며 잰걸음을 걸어 그녀를 따라 붙는다. “어제 밤에 내가 실수를 하였다면 사과를 하겠소.” 그녀가 대대신 피식 웃는다. 그녀의 그런 반응에 줄곧 민망해져 있던 마음이 먹먹해지며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내려간다.
“실수라…… 그건 자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군요. 어떠한 행위를 하였건, 어떠한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행위의 정당화를 덧씌울 수 있죠. 실수라는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는 마음의 배반을 다스릴 때 쓰는 말이라고 생각해 요.”
그녀가 가던 걸음을 멈추며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말을 한다. 이마 위로 내려온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그녀를 분명하고 고집스레 보이게 한다. 나는 마음을 들켜버린 어린아이처럼 늑골 근처로 거센 부끄러움이 밀려든다.
낮은 지붕들 사이 저 멀리 포복한 듯 낮게 엎드린 희미한 구릉이 보인다.
“저기 보이는 곳이 어디요?”
나는 민망함을 벗어나기 위한 출구를 찾으려는 듯 그녀에게 묻는다.
“스웨덴.”
그녀가 짧은 대답을 한다. 스웨덴이라. 이렇게 지척이었구나. 그곳을 지나 여기까지 왔는데 환영인 듯 여기서도 그곳이 보이는구나. 노르웨이를 거쳐 이곳으로 넘어오기 나흘 전 나는 스톡홀름에 머물렀다. 가는 곳마다 먼저 보이는 것은 호수인지 바다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물이었다. 거리는 세수를 한 듯 깨끗했고 공기는 맑았으며 바람은 신선했다.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촘촘히 박히는 기억에 목울대가 저려오는 순간처럼 어쩐지 몽롱해지는 기분에 멀미가 인다. 그녀가 발걸음을 떼며 총총히 걸어간다. 언제 빠져나갔는지 일행들은 보이지 않는다. 골목은 미로 같다.
사우나를 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층으로 올라가는 길, 통유리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발트 해. 열흘 전 나는 발트 해의 위쪽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앉아 있었다. 여행의 시작은 그곳부터였고 흘러서 그 끝의 바다에 이른 것이다. 고통도 시작이 있었다면 끝도 있으리라. 불현듯 그곳 바다에 가고 싶어진다. 호텔과의 사이는 오백 미터 정도의 거리다. 오층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버튼을 다시 누르며 곧장 로비로 내려온다. 모퉁이를 돌아 호텔 밖으로 나가는 원형 문에 몸을 담자 돌아가는 문 사이로 저만치 앉아 있는 김 대 리와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대로 나가려던 몸을 돌려 그들에게 다 가갔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어요?”
호텔에 도착하여 덴마크식으로 저녁을 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인 듯 김 대리 가 물어오며 슬그머니 일어난다. 그는 나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가벼운 목례를 남기고는 입가에 겸연쩍은 웃음을 묻힌 후 뒷걸음치며 호텔 현관을 향하여 갔다.
“저곳이 스웨덴이라고 했소?”
낮에 관광하면서 보았던 구릉이 호텔 앞 무성을 자랑하는 나무 사이로 보인다. 생각지도 않게 둘이 남겨짐으로 해서 불거진 어색함을 모면하고자 하는 말이었다. 어쩐지 그렇게 말해 놓고 나니 하루 종일 나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었던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예.”
“저 바다에 가보려고 내려왔소.”
그녀가 짧게 대답하는 사이 나는 발걸음을 뗀다. 그녀가 따라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게 자리를 잡는다. 혼자서 얼마를 갔을까. 휘적휘적 걸어 호텔을 벗어났을 무렵 손가방을 든 그녀가 옆에 선다. 반갑다. 엘리베이터에서는 빤히 보이는 거리였는데 걷기로서는 꽤 멀다.
호텔을 빠져 나와 4차선 도로를 건너자 잔디구장이 쭉 이어진다. 얼른 잔디 위로 올라서니 푹신한 감각이 발밑에서 깔린다. 기분 좋은 느낌이 전신으로 올라온다. 나는 구두 끝을 보면서 걸음을 조심스레 뗀다. 한국에서처럼 흔히 마주치는 ‘잔디를 밟지 마시요’ 라는 문구가 보이지 않아 마음이 자유로워진다. 나는 여유를 즐기며 가로질러 끝으로 간다. 이어 해변을 따라 이어진 보도가 나타나고 저만치 육지가 보인다. 그녀가 말한 스웨덴이다. 멀지 않는 거리, 나라와 나라 사이의 바다는 마치 큰 강폭을 보는 것처럼 펼쳐져 있다.
“당신 하고는 아직 청산해야 될 것이 있는 것 같소.”
어젯밤 그녀를 안았다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스쿠알렌 때문인지 알 수 없 지만 어쩐지 나는 자꾸 불편해진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에 다른 여자를 안아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특별히 아내에게 죄를 지었다는 느낌은 들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지난밤을 생각하면 어색했다.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을 뿐더러 너무 오랜만에 안아보는 여자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은 어제가 아내의 기일이었소. 이십 이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여름 날 아스팔트에 깨지는 수박처럼 머리가 터져 죽었소. 나는 내 손으로 아내의 제상을 차려야 된다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소. 그런 환장할 마음을 당신은 모를 거요.”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래층 여자를 만났다. 엘리베이터 벽에 풀죽은 배추처럼 힘없이 기대어 서있는 내 앞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연신 바뀌는 빨간 숫자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조그만 어깨는 힘이 잔뜩 들어갔고, 빳빳하게 긴장된 등을 칼날처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어떤 완강함. 나는 그것을 명확히 감지했다. 아내의 외도와 자살이 촉수처럼 발목을 잡고는 세상이 나로부터 닫혀 가고 있었다. 연회색의 선글라스를 장만한 것은 그때였다. 자존심이 곤두박질치는 부끄러움과 그로 인해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는 분노와 모욕이 되어 돌아오던 아내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감정.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일 년이 흘렀다.
그녀는 듣는지 마는지 묵묵히 앞만 보고 걷는다. 얼마를 걸었을까. 그건 참 생경한 장면이었다. 머리만 물 밖으로 보이며 수영을 하고 있던 여자아이가 상체를 쑥 내밀고는 뭍으로 힘차게 올라섰을 때였다. 열일곱, 여덟이 되었을까. 팬티만 걸친 여자아이는 아무 주저 없이 전신을 드러내었다. 상체는 당연히 입고 있어야 할 수영복은 보이지 않았고, 하체도 평상시 착용하는 여성 용 팬티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아이는 뭍으로 헤엄쳐 오고 있는 커다란 개와, 그 개를 따라 들어오고 있는 남자아이에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여자아이의 몸은 적당한 살집이 균형을 이루었으며 동그란 가슴은 그대로 드러나 젖꼭지는 콩자반처럼 까맸다. 선글라스 속 나의 눈동자는 옆에 있는 그녀가 의식되면서 잠시 쭈뼛거린다.
“이상하게 보이죠? 처음에는 나도 그랬어요.”
내가 무얼 보고 있는지 아는 듯 그녀가 말한다.
아이는 스스럼없이 들고 있던 플라스틱 윙을 기합소리와 함께 바다로 던진다. 그 소리는 마치 공이 굴러가는 듯한 느낌으로 물위에 파장을 일으킨다. 막 뭍에 도착하던 개가 아이가 던지는 플라스틱 윙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어 나아가고, 뒤따라오던 남자아이도 몸을 돌려 바다로 간다. 뒤이어 윙을 던진 여자아이가 쏜살같이 뛰어든다. 이미지처럼 그들이 연출하는 풍경이 절묘하 게 어우러진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란히 걷던 그녀가 길 옆 잔디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나도 걸음을 멈추고 그녀 옆에 앉는다.
“처음 남편을 따라 이 나라를 왔을 때 가장 부자연스러웠던 것들이 저런 모습들이었어요. 우리는 가슴을 드러내는 것을 치부를 보이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여기에서는 오히려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러워요. 별 생각 없이 한번 봐 보세요. 저기 보이는 처녀의 젖가슴이 성적인 자극이 되어 오는 지를요. 싱싱하고 매혹적이고…… 우리가 맨다리를 내놓았을 때처럼 그냥 사람의 몸일 뿐이에요. 보세요. 참 아름답지 않나요?”
나는 그녀의 말처럼 생각에 힘을 빼고 무념의 상태로 그들을 바라다본다. 개와 물장구를 치고 있는 아이들이 바다와 한 덩어리가 된다.
“이 나라를 오기 전 싱가포르에 근무할 때 남편을 만났어요. 그 곳에서 대학을 나왔고 또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에 바이어로 온 덴마크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한다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어요. 나는 자연스럽게 이 나라로 건너왔고 그리고 딸아이를 낳았어요.” 그녀는 손바닥을 쫙 펴고는 잔디를 쓰다듬는다. 윤기가 도는 연둣빛 잔디가 그녀의 손바닥 아래에서 쓰러졌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그녀의 손짓 속에 불현듯 아내가 뛰어내린 베란다의 버티컬 블라인드가 생각난다. 그 짙은 연둣빛 사이로 팔랑거리며 일던 마찰음도.
“결혼 육 년 되던 해에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어요. 남편은 서슴없이 이혼 하자고 했어요.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죠. 나는 너의 아내다, 너에게는 아이가 있다. 우린 가족이다, 라고 말했지요. 남편은 사랑하는 여자가 있고, 너와 이대로 살면 너를 기만하는 일이다. 라고 대답했어요. 어이가 없었죠.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런 만남과 이별을 남편은 바랬고, 나는 그게 아니었어요.” “…….” “이 나라는 사회복지가 잘되어서 다수보다 소수, 강자보다 약자에게 더 많은 혜택이 부여 되죠. 그리고 이혼이라든가, 혼자 산다는 것이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여지는 나라여서 개인의 자유의지를 중시해요. 전 외국에서 오랜 생활을 했지만 결혼생활에서 개인은 없어야 된다는 우리식의 의식이 밑바닥에는 있었던가 봐요.”
예상치 않은 그녀의 고백에 헐벗은 상처를 본다. 그 순간 나를 온종일 불편하게 하였던 것이 여자를 안았던 것도, 스쿠알렌의 처리 문제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말처럼 내 안의 것들이 문제일지 모른다. 다시 아이들이 뭍으로 올라섰다. 여자아이의 젖가슴이 크게 출렁거린다. 적당한 살집이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는 듯 풍성하다.
“남편과 헤어지고 난 뒤, 이 나라를 다시금 보면서 진정한 자아와 타인의 넋으로 살아가는 차이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게 되더라고요.” 그녀가 잔디 위에 놓여 있던 손가방을 끌어당겨 무릎에 놓는다. 지퍼를 열고는 알약이 촘촘히 박혀 있는 곽을 꺼낸 후 빠른 동작으로 돌출 되어 있는 한곳에 엄지손가락을 들이민다. 그녀의 행동사이로 빳빳한 포장지가 내는 소리가 빠삭거린다. 곧 단단한 껍질이 터지는 듯한 맑은 소리가 나며 노르스름 한 타원형의 캡슐이 미끄러지듯 손바닥에 흘러든다. 그녀가 그것을 집어서 내게 내밀었다. 스쿠알렌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 알의 스쿠알렌을 꺼낸 후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잡고는 손으로 돌려가며 유심히 그것을 바라본다. 여전히 아이들은 찬란하다. 플라스틱 윙을 던지고 그것을 따라 잡는 행동을 반복하면서도 질리지도 않는 듯 자지러진다. 그때였다. 스쿠알렌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황급히 일어서며 신발을 벗고는 팔을 어깨 뒤로 돌려 원피스의 지퍼를 내렸다. 어깨의 선을 살짝 끄잡아 내리자 사선이 그어진 연보라색 원피스가 나풀거리며 허물을 벗듯 아래로 미끄러진다. 싱싱한 어깨가 드러나고, 군살 없이 미끈한 허리선이 팬티 위에서 멈추어져 있다. 이어서 그녀는 단단하게 가슴을 조이고 있던 브래지어를 벗어던지고는 쏜살같이 바다로 뛰어 나갔다. 순식간의 일이라 나는 황망했다. 그녀가 흘려 놓은 옷가지가 상처처럼 잔디 위에 엎드려 있다.
바다로 뛰어든 그녀는 아이들에게 서슴없이 다가간다. 아이들이 탄성을 지른다. 남자아이가 쥐고 있던 플라스틱 윙을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던진다. 그녀는 마치 수중발레를 하는 것처럼 폴짝 뛰면서 그것을 받는다. 아이의 것보다 음영이 짙은 그녀의 젖가슴이 지상을 향하여 부끄럼 없이 모습을 드러낸 다. 순간 산소도 없고 태양 광선조차 닿지 않는 천 미터 심해에서 연한 비취색의 아름답고 영롱한 눈빛을 띄우며 사력을 다해 유영하고 있는 상어 한 마리를 본다. 마침내 유영하던 상어는 그녀가 된다. 그녀는 쥐고 있던 윙을 던지며 바다로 바다로 나아간다. 건너편 스페인은 해무에 가려 반쯤만 모습을 드러낸다. 잘 갈무리된 희망 하나가 쉼 없이 바다로 나아가고 있는 그녀 주위에 이슬처럼 떨어진다.
물장구에 지쳤는지 여자아이가 먼저 뭍으로 올라섰다. 아이가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털면서 거리낌 없이 내가 앉아 있는 정면으로 걸어왔다. 굴곡을 이룬 부드럽고 뚜렷한 허리선이 아이의 몸을 조각처럼 보이게 한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동그란 가슴이 출렁거리고, 등 뒤의 바다가 실루엣이 되어 아이를 빛나게 했다.
순간 가슴 한가운데서 돌덩이 하나가 쿵하고 내려지며 선짓국이 간절하던 아침이 기억났다. 핏빛의 선짓국. 어느 날부터였던가? 아내는 선짓국을 먹기 시작했다. 집안은 아내가 끓이는 국으로 인해 사골냄새에 파묻혀 갔다. 새벽녘, 그릇 부딪히는 소리에 우연히 잠을 깨어 거실로 나오면 아내는 묽은 주황의 식탁 등 아래 오두마니 앉아 국그릇에 수저를 들이밀고 있었다. 핏빛의 선지를 떠 넣는 아내의 입이 여물을 씹는 늙은 소처럼 게걸스레 보였다. 아내가 살이 찌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책임감과 성실이 사랑과 미덕이라 믿으며 상서로운 욕설로 아내의 머리채를 끌고 벽으로 부딪히던 날, 아내는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는 얼굴로 환멸을 늘어뜨렸다. 아내의 남자가 말한 남과 다른 그녀만의 무엇. 어떤 개별성. 그건 무엇이었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그것들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늘 사위어져가는 것은 나라는 생각만 했다.
손바닥 안의 알약이 이번에는 포획되어 수면에 올라와 내장이 터지고 장기가 파열된 한 마리의 상어가 된다. 머리에 피를 흘리며 널브러져 있던 아내가 알약 안에 투영된다. 지난 밤 아내의 기일. 남편이 없는 제상은 어땠을까. 내 아내이던 여자. 내 아이들의 엄마이던 여자. 일 년 동안 끝없이 받았던 내 상처. 나는 마음이 짙게 가라앉으며 아내에게 무릎을 꿇는 심정이 된다.
서서히 어둠이 몰려오고 있는 바다를 향해 그녀는 쉼없이 나아가고 있다. 건너편 스웨덴은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고, 바다 가운데 열을 지어 우뚝 서 있는 풍력발전소의 바람개비는 어렴풋하다. 나는 어둠에 묻혀 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를 보고자 황급히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곳은 어둡지 않았다. 백야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