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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어느 사이트에서 어느 혹자의 글을 보면,
림읍국(林邑國)
《中國歷史地名大辭典》에서 림읍林邑을 찾아보면,
林邑郡
隋置,見林邑縣條。
唐于歡州南僑置,非正林邑國,后廢,在今越南北境。
림읍군林邑郡
수隋가 설치하였으니, 상세한 것은 림읍현林邑縣條 조條를 보라.
당唐이 환주歡州 남쪽으로 교치置僑 하였으며, 림읍국林邑國이란 부르는 것은 올바른 것은 아니며, 뒤에 페廢하게 되었으니, 지금의 월남越南 북쪽 경계에 있다.
林邑縣
秦置,漢改曰象林縣,后漢末邑人區連者,因中原判亂,殺縣令稱林邑國王,隋時破之,置林邑郡,后仍為林邑年有,唐葉更號環王,后葉林邑徙國于占,因號占城,明時為越南所滅,今為越南南部地。
林邑縣림읍현
진秦 때 설치하여 한이 고쳐 상림현象林縣이라 불렀고, 후한后漢 말 읍인邑人 구련區連 이라는 사람이, 중원이 어지러움을 틈타서, 현령을 살해하고, 림읍국왕林邑國王이라 칭하였다. 수隋나라때 그것을 파破하여 림읍군林邑郡을 두었으며, 뒤에 거듭하여 해를 넘기다가, 당唐 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다시 고쳐 환왕環王이라 불렀으며, 말엽에는 림읍林邑은 점占으로 옮기니, 이로 인하여 점성占城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명明 때 월남越南에 소멸되니, 지금 월남 남부 지역이다.
위의 혹자는 중국역사지명대사전을 전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중국역사지명대사전,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근본적으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 서책들은 서구에 의한 아시아의 영토 강점 그 이후에 나온 책들로
서구가 만든 역사의 틀 안에서 만들어진 서책들로 보기 때문 입니다. 위의 기록대로 라면 임읍국은 월남 지경에 있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영애승람(瀛涯勝覽) 점성국(占城國)
其國即釋典所謂王舍城也。(그 나라는(점성국은)곧 불경에서 말하는 왕사성이다.)
성차승람(星槎勝覽) 빈동룡국(賓童龍國)
其國隸與占城,山地接連。有雙谿澗,水澄清,佛書所云舍衛乞食,即其地也。目連所居遺址尚存。人物、風土、草木、氣候,與占城大同小異。
(그 나라(빈동룡국)는 산지가 점성과 이어져 있으며 점성에 예속되어 있다.........불경에서 이르는 사위걸식 곧 그 땅이다. 목련존자가 살던 옛 자취가 남아있는 자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인물,풍토,초목,기후는 점성과 대동소이 하다.)
추재집(秋齋集) 권지칠(卷之七) 漢陽趙秀三芝園著
빈동룡(賓童龍)
賓童龍占城屬邦也。其俗喪禮設佛事。擇僻地而葬。佛書所云王舍城是也。
(빈동룡은 점성의 속방이다. 그 풍속은 상례때 불교식으로 치른다.....불경에서 이르는 왕사성이 이것이다.)
영애승람의 저자는 명조때 정화(鄭和)의 남해원정때 수행했던 마환(馬歡)이라는 사람이고 성차승람의 저자는 마환과 마찬가지로 정화(鄭和)의 남해원정때 수행했던 비신(費信)이라는 사람 이고 추재집의 저자는 조선의 시인 조수삼의 저작 입니다. 위의 영애승람,성차승람은 정화의 남해원정때 보고 들은바를 기록한 기행문 입니다. 본인이 인용한 기록들과 중국역사지명대사전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중국역사지명대사전의 기록들은 아주 중요한 핵심이 빠져 있습니다.
영애승람에서는 점성국이 왕사성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성차승람의 기록에서는 점성에 예속된 빈동룡국이 사위걸식의 땅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때의 시인(詩人)인
조수삼의 추재집에서는 빈동룡국은 점성의 속방이며 그 지역은 불경에서 말하는 왕사성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역사에서 말하는 점성국 즉 참파의 대한 역사해석을 다음 백과에 의거해서 보면,
"2~17세기에 존속했으며 대략 북위 18도선에서부터 남으로 케가 곶(바렐라 곶)에 이르기까지 베트남 중남부 해안지역에 걸쳐 있었다. 말레이폴리네시아 혈통으로 인도화된 문화를 가진 민족인 참족이 건설한 참파는 결국 베트남인들에게 흡수되고 말았으며 베트남인들은 참족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참파는 중국에서 한나라가 몰락할 때인 192년에 세워졌다(중국어 지명은 린이[林邑]). 처음 이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 대부분은 통킹에서의 중국 식민통치에 대해 끊임없이 투쟁을 벌이던 야만 부족들이었지만 점차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다음 백과에서 말하는 점성국=참파에 대한 역사해석은 서세동점기때 서구에 의해 새롭게 짜집기 된 역사해석에 불과 합니다. 명나라때 정화의 남해원정때 수행한 사람들의 기록인 영애승람,성차승람,조선의 추재집의 기록은 서구에 의한
서세동점기 그 이전의 기록이기 때문에 다음백과의 역사해석과 그 틀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에서 말하는 왕사성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네이버 백과에 의하면 왕사성은
"BC 6∼BC 5세기의 마가다왕국의 왕사성지(王舍城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다왕국을 한자(漢字)로 표기하면 마갈타국(摩竭陀國)이 됩니다.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보면,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2 석전잡설(釋典雜說) 서유진전(西遊眞詮)에 말한 오지 석후(五指石猴)에 대한 변증설
현장 법사(玄奘法師)에 대하여는 실제로 있었던 인물이다. 당 나라 정관(貞觀 태종의(太宗)의 연호) 3년(629)에 삼장(三藏) 현장이 서역(西域) 여러 나라에 들어갔으니, 곧 서번(西番)의 천방(天方)ㆍ묵덕나(黙德那) 등 지방이며, 그곳 나란타사(那蘭陀寺)에서 계현(戒賢)을 만나 유식(唯識)의 종지(宗旨)를 전수받아 돌아왔었다.
순암선생문집 제17권 잡저(雜著) 천학고(天學考) 을사년
명(明) 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정효(鄭曉)가 지은 《오학편(吾學篇)》에 이르기를,
“서역에 묵덕나(默德那)라는 나라가 있는데 곧 회회국(回回國)이다. 처음에 국왕 모한맥덕(摹罕驀德)이 태어날 때부터 영성(靈聖)하여 서역의 나라들을 신복(臣服)시켰으므로, 이들 나라들이 높여서 별암원이(別諳援爾)를 삼았으니 중국말로 천사(天使)란 뜻이다. 나라 안에 불경 30장(臧)이 있는데 모두 3천6백여 권이다. 글은 전서(篆書)·예서(隷書)·초서·해서(楷書) 등이 혼합되어 있는데, 서양이 모두 이것을 사용한다. 그 땅이 천방국(天方國)에 접해 있는데, 일명 천당(天堂)이라고 한다. 풍경이 융화(融和)하고 네 계절이 봄과 같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곡식이 풍성해서 사는 사람들이 생업을 즐거워한다. 음양·성력(星曆)·의약·음악 같은 기예를 가지고 있고, 풍속이 살생을 중히 여겨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며, 기구가 매우 정교하다. 선덕(宣德) 연간에 천방국을 따라 조공을 바쳤다.” 하였다.
위의 기록에서 모한맥덕(摹罕驀德)은 이슬람교의 교조인 무함마드에 대한 음차 표기이며,묵덕나(默德那)는 사우디아라비아 헤자즈 지방에 있는 내륙도시 메디나(Medina)에 대한 음차 표기이며,천방(天方)은 사우디아라비아 즉 옛날의
대식국(大食國)을 의미하며,천방교(天方敎)는 오늘날의 이슬람교를 의미 합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을 보면 천방(天方),묵덕나(黙德那)의 지역에 나란타사(那蘭陀寺)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에서 처럼 나란타사(那蘭陀寺)에 불교의 유명한 고승인 계현(戒賢)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현(戒賢)에 대해 네이버 백과를 보면 "동인도 출신의 왕족으로서 일찌기 학문을 닦고 마갈타국(摩揭陀國:Magadha)의 나란타사(那爛陀寺)에 들어가 호법(護法)을 스승으로 삼고 승려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계현(戒賢)이 마갈타국(摩揭陀國:Magadha)의 나란타사(那爛陀寺)에 가서 승려가 되었다고 하는데 다음의 문화원형 백과사전을 보면,마갈타국(摩揭陀國:Magadha)은 "중인도(中印度)에있었던 옛 왕국의 이름" 이라 되어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계현(戒賢)이 마갈타국(摩揭陀國:Magadha)의 나란타사(那爛陀寺)에 가서 승려가 되었는데 그 지역은 중인도(中印度) 지역 이었습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에서는
계현(戒賢)이 승려로 있었던 나란타사(那爛陀寺)가 있었던 지역은 천방(天方),묵덕나(黙德那) 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천방(天方),묵덕나(黙德那)는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을 의미하며 이 지역에 불교의 나란타사(那爛陀寺)
가 있었으며 나란타사(那爛陀寺)는 마갈타국(摩揭陀國:Magadha)에 있었으므로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가 옛날의 중인도(中印度)지역 이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역사의 기록에서 마갈타국에 왕사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마갈타국은 중인도(中印度)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명나라때 정화의 남해원정때 수행한 사람들의 기록인 영애승람,성차승람의 기록 그리고 조선의 추재집에서는 중인도 마갈타국에 있었던 왕사성이 점성국(占城國)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차승람의 기록에서는 구체적으로 "사위 걸식의 땅","목련존자의 유적지"가 있다는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점성국은 베트남 남쪽에 있었다고 역사해석을 합니다. 베트남 남쪽이 중인도란 말입니까? 베트남 남쪽에
불경에서 말하는 마갈타국 왕사성이 있었습니까? 또한 불경에서 말하는 목련존자의 유적지가 있었단 말입니까? 또한 현재의 역사에서는 점성국의 역사의 시원이 기원후 2세기에 시작인데 영애승람,성차승람,추재집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6세기가 됩니다. 오늘날 베트남 남쪽에 이러한 중인도의 문명이 있었습니까? 현재의 동남아 역사는 완전히 짜집기 되어 서구에 의해 새롭게 개편된 엉터리 역사에 불과 하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보면,
삼봉집 제5권 불씨잡변(佛氏雜辨) 불씨 걸식의 변[佛氏乞食之辨]
《금강경(金剛經)》에 이르기를,“어느 때 세존(世尊)이 식사 때가 되어 가사를 입고 발우[鉢]를 가지고는 사위성(舍衛城)에 들어가 그 성(城) 가운데에서 걸식(乞食)을 하였다.”
【안】 사위는 파사국(波斯國)의 이름이다.
위의 기록을 보면 사위 걸식에 관한 기록인데 여기서 "삼봉집"은 사위는 파사국이라 기록 하고 있습니다. 즉 사위 걸식의 해당되는 유적지는 파사국에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즉 원래의 역사에서는 파사국의 지역이 변천되어 와서
점성국,섬라,만자국등등으로 바뀌어 왔고 이를 두고 후대의 영애승람,성차승람,조선의 추재집의 기록에서 이들 지역이 고대에는 불교와 관련된 지역인 왕사성,사위걸식,목련존자의 유적지가 있었던 지역이라는 기록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역사는 서세동점기 사관에 입각하여 역사의 강역도 완전히 바뀌어 중동지역에 있었던 이들 나라가 동남아로 이전되어 왔고 또한 이들 각개의 나라의 역사도 완전히 다르게 개편되어 불과 400~500년 전의 기록에서는
점성국은 불교의 왕사성,사위걸식,목련존자의 유적지가 있었던 지역이었는데 서세동점기 사관에 의해 개편된 역사에서는 전혀 관련이 없는 지역으로 개편되었던 것입니다. 불과 400~500년 전의 기록인 "영애승람,성차승람"의 저자들이
지리적 역사적 지식이 어두워 잘못된 기록을 남긴 것일까요? 역사적 지리적 지식이 어둡고 무지인 사람들이 어떻게 대선단을 이끌고 남해원정을 간단 말입니까? 불과 150~200년 전의 조선의 추재집의 기록에서도 점성국은 불교의
왕사성이 있었던 곳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그 당대까지만 해도 현재의 역사관과 그 틀을 달리한 역사가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사료들을 참조해 보면 서구세력과 일본에 의해 조선과 아시아의 역사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음을 알수 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우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꼭 쓰고 싶었던 것을 먼저 잘 적으셨네요. 고맙습니다. 이미 추적하고 있는 림읍국에 관련된 자료이기에 <일반게시판>에서 옮겨왔습니다.
"天方"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지요. 이슬람교의 성지라고 하죠.
이슬람은 사우디 말이고 무슬림은 동남아지역 말로 인식 되던데요.
송(宋)의 주거비(周去非)의 저작인 "영외대답(嶺外代答)"을 보면 "其屬有賓朣朧國、賓陁陵國。目連舍基在賓陁陵,或云卽王舍城"(빈동룡국,빈타릉국이 (점성에) 속해 있는데 (불교에서의)목련존자가 살던 터가 빈타릉국에 있으며 혹 말하길 곧 이를 (불경에서의)왕사성이라 한다.) 위의 언급한 문헌 외에도 이처럼 다른 문헌에서도 점성은 중인도에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