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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
문월당은 임진왜란 때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인 문월당 오극성(吳克成)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자인데, 현재의 건물은 1969년에 중건하였다. 원래 대천 2리에 저택과 정자가 있었으나 화재가 발생하여 영양 서부리로 이건하여 살았다. 그 뒤에 다시 수비면 신원으로 이사하여 약 100여년을 살다가 다시 대천 1리로 옮겨 문월당 종택을 개축할 때 함께 중건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주도하여 문월공 고택 근처에 자리를 넓혀 누각을 중건하고, 류동수가 지은 「문월당기」 를 각자하여 편액을 걸어두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문월’이라는 아호는 이백의 시[술잔을 잡고 달에 묻는다 [把酒問月]에서 뜻을 취하였다. |
건축 특징 |
문월당은 1969년에 중건한 건물이다. 건물은 비교적 고건축의 수법을 지니고 있지만 근대식 건물의 형태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좌측 온돌방문 상부 벽에 환풍창의 역할로 짐작되는 유리창을 내었고, 난간을 두르지 않고 비교적 낮은 크기의 퇴칸을 낸 점 등이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실용적이고 간결한 미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
건축 구성 |
문월당은 오극성 고택에서 몇 백 걸음 떨어진 언덕 중턱에 위치한 정자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주위에는 토석담장을 둘러 내부를 막았으며, 우측 전면에는 2칸 규모의 대문채를 세워 정자로 출입하게 하였다. 2칸을 넣고, 우측에는 대청 1칸을 연달아 이어놓은 평면형이다. 또한, 전면에 반 칸 규모 의 퇴칸을 내었고, 대청의 전면에는 사분합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었다. 처마는 홑처마이다. |
현판 |
문월당(問月堂) |
문월당중건기(問月堂重建記) |
경신년(庚申)에 류동수(柳東銖)가 짓다. |
누정 이야기 |
- 누정이야기 |
문월당은 원래 1601년(선조34)에 옥선대 아래로 물러난 오극성이 지은 정자였으나, 후손들이 중건하여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문월이라는 아호는 이백의 시 「把酒問月」에서 뜻을 취하였으나 청련(靑蓮)거사인 이백이 낭만적으로 시를 읊었던 심정과는 사뭇 다르다. 오극성이 지은 <문월당> 시는 충정을 향한 그리움 또는 숭상하던 절개와 지절을 읊은 의미가 더 크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늘 충절을 품고 나라를 근심했던 뜻이 담겨 있다. 류동수는 「문월당중건기」에서 시에 담긴 의미를 이렇게 풀었다. 둥글고 기우는[盈虛]는 이치가 있다. 대개 선생은 마땅히 날마다 충정을 계획하였으나 다 쓰지 않았고, 승리를 하였으나 더불어 공을 다투지 않았다. 그리하여 공훈록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삼등에 그치고, 벼슬은 낭관에 그쳤다. 이는 모두 흐려서 맑지 않고, 어두워서 밝지 않은 것이다. ‘봉우리에 솟는 일 어찌 그리 늦나[出峀問何遲]’는 말은 후대를 기다리겠다는 뜻일 것이다.” |
관련인물 |
- 오극성(吳克成, 1559~1617) |
자는 성보(誠甫)이며, 호는 문월당(問月堂)이고, 본관은 함양이다. 부친은 오민수(吳敏壽)이고, 모친은 무안박씨 박붕(朴鵬)의 따님이다. 1592년(선조25)에 왜적이 침입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충성스러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한 절구를 읊었다. 선전관에 제수하였다. 그 뒤에 적의 정세를 자세히 탐지하여 돌아오는 등 소임을 다하여 충성을 드날렸다. 1596년(선조29)에 황간현감에 제수되어 수령된 자의 기강과 윤리로 모범을 보였다. 1598년(선조31)에 벼슬을 그만 두고 돌아왔으나, 10월에 통제사 이순신의 막하에 들어가 협찬한 공이 인정되어 삼등 공신으로 공훈록에 올랐다. 1601년(선조34)에 봉상시정에 제수되고 통훈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나 자신을 이익으로 꾀하는 일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영양 대천리 옥선대 아래에 문월당을 짓고 은거하였다. 죽음을 앞두고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내 평생 나라에 보답하기를 다하였으나 죽어도 오히려 한이 남는다. 너희는 모름지기 부지런히 배우고 입신양명하여 임금 섬기기를 아비 섬기듯 하면 어찌 아비의 뜻을 체득한 효도가 아니겠느냐”라고 하고, 향년 59세로 졸하였다. 문집으로『문월당집』4권2책이 있는데 부록으로『임진왜란일기』 가 포함되어 있다. |
주변경관 |
- 주변경관 |
대천리는 옥선대와 비파담을 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이곳은 오랫동안 함양 오씨 대천 종중들이 세거해 온 마을이다. 영해로 통하는 대로가 마을 앞을 지나고, 서쪽으로는 장수 계곡 맑은 물이 흘러서 동천과 합류한다. 삼구정을 지나면 도로 좌측으로 문월당 오극성이 태어난 고택이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이곳은 ‘오극성 고택’으로 불리며, 2006년 2월16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8호에 지정되었다. 이 종택에서 남쪽 언덕으로 몇 걸음 옮기면 오극성이 지은 정자, 문월당이 신축되어 있다. 문월당은 문월당 종택 개축시에 뒷산 아래로 옮겨 중건하였기에 근대식 건축 양식을 보인다. ‘효자청암함양오공삼성지려비(孝子靑巖咸陽吳公三省之閭碑)’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고, 단 칸 규모의 맞배기와집 안에 둘러져 있다. 눈길을 끈다. 이곳이 고월마을로, 마을 중심부에는 오창범 가옥이 위치하고 있다. 오창범 가옥은 토석담장 사이로 난 3칸 규모의 평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 이어 좁은 길을 따라 산 쪽으로 올라가면 산수유와 향나무가 어우러진 평지가 있고, 그곳에 1945년에 오승봉(吳承鳳)이 건립한 송원정이 있다. |
마을이야기
영양 > 영양청기권 > 영양읍 대천1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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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양읍은 서북쪽으로 일월산이 뻗어 내려와서 일월면을 읍의 경계로 접해 있으며, 다시 청기면 금성산을 사이하여 팔수곡 큰 재를 분기점으로 읍내 서부리와 연접해 있다. 영양읍의 동과 서를 가르는 반변천은 일월면 곡강에서 상원리를 돌아 대천 2리 입구에서 동천(東川)과 합류하고 감천리를 지나 입암면으로 흘러 낙동강의 동쪽 원류를 이룬다. 1 676년에 이르러 현재의 군청 자리에 동헌(東軒)이 들어서게 되면서 동부리와 서부리가 영양군의 중심을 이루었다. | |
대천리(大川里)는 흔히 한내[大川,旱川]라고 부른다. 이는 큰 냇물이란 뜻으로, 마을 앞에 큰 내가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조선 인조조에 함양오씨 용계(龍溪) 오흡(吳潝)이 이 마을을 처음으로 개척한 뒤에 가뭄이 십여 년간 계속되어 강이 말랐던 것에서 연유하여 한천(旱川)이라고도 한다. 영해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는 마을로, 골짜기가 많고, 들이 넓게 퍼져 있어 논농사를 주로 한다. 비파담소[沼]는 한내 서쪽에 있는 소로, 옛날에 어떤 미인이 이곳에서 비파를 타다가 빠져 죽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하천의 이름이다. 삼구정은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의 장자인 오흡이 세운 정자이다. 정자 이름을 세 개의 거북바위 정자라는 뜻으로 호칭하여 생긴 이름이다. 일부를 가르고 합쳐 대천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각각 자연 마을 단위로 이름과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달맞이하며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직곡(直谷)이라 하여 곧은 골짜기란 뜻으로도 불리었다. 문양 앞을 주머이골이라는 하는 것과 관련하여 마을의 자리가 주머니처럼 움푹 들어간 모습을 이르기도 한다.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의에 집에 한 채 밖에 없어 가까이 가보니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주인 몰래 부엌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새벽녘에 주인이 나가 보니 나그네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으니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 방으로 모셨다고 한다. 그 나그네는 암행어사였다고 전하고, 이 문양 앞을 주머이골이라고 한다. 전해진다. 문양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놀다가 하늘로 올라간 산이라고 하여 옥산이라 불렀다. 마을 입구에 절벽으로 된 바위가 있는데 이것을 옥선대(玉仙臺)라 한다. 추수(秋水) 엄순봉(嚴舜奉, 1903~1938)이 태어난 마을이다. 엄순봉은 김좌진 장군을 도와 조국의 광복운동을 하였으며 조선인 아나키스트 연맹에 가입하였다. 사람들이 장수하는 마을인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하였다. 그러나 황씨가 떠난 뒤에는 황곡(篁谷)이라 하였으니 깊고 큰 골짜기라는 뜻이다.
문원당 경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