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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합죽선의 비밀
김 화백은 남원 쪽으로 지리산을 나와 88고속도로를 타면서도 승용차의 속도를 시속 70km로 낮췄다. 고속도로라고 하기에는 곡선이 너무 심한 데다 승차감이 몹시 떨어지는 시멘트로 포장한 도로이기 때문이었다. 고속도로 양쪽으로 흘러가는 논밭에는 이미 추수가 끝나 움집처럼 쌓아놓은 볏짚가리만이 듬성듬성 보였다. 그래도 높고 낮은 산들은 활엽수 숲이 무성한 산자락마다 만추에 겨워 노랗고 붉은 단풍을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88고속도로가 경부고속도로와 만나는 지점에서 다시 부산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양산 통도사 인터체인지가 나올 것이었다. 김 화백은 승용차 백에 찔러둔 전국도로지도를 펼쳐보지 않고서도 통도사를 쉽게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김 화백은 낯선 곳을 찾아가는 여행자처럼 어젯밤 잠을 설쳤다. 엎치락뒤치락하다 골짜기를 훑는 바람소리가 잦고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또록또록 들리기 시작한 새벽 무렵에야 겨우 토막 잠을 잤던 것이다.
무심히 뻗은 듯한 도로도 목적지를 가기 위해서는 어느 지점에서 반드시 좌회전 우회전해야 한다. 인생길도 어느 순간에 누군가를 만나 알게 모르게 가는 길이 달라진다. 부부 사이도 그렇고, 연인 사이도 그렇고, 친구 사이도 그렇고, 혼자인 자신도 그렇다. 자신이 고독한 선택을 하여 길을 걸은 것처럼 믿지만 인생길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누군가와의 만남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다.
김 화백은 대학 졸업 무렵이 떠올라 핸들을 잡은 채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경봉스님에게 따귀를 한 대 맞은 후, 서울로 돌아와 극락암을 다시 그린 유화가 국내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국전에서 특선으로 뽑힌 것이다. 뜻밖의 특선에 대학원 진학이 결정됐다. 대학원 학비를 전액면제해주겠다는 지도교수의 종용과 미술학과 동문들에게 ‘천재 화가 출현’이라는 등등 선망의 대상이 돼버린 것이다.
극락암을 그린 특선작품은 취직이냐 진학이냐의 진로를 운명처럼 결정해버렸다. 그는 그 인연으로 화랑초대전에 개인전도 자주 가졌고 교수직도 쉽게 얻었다. 교수를 꿈꾸는 동문들처럼 이 대학 저 대학의 강사 생활로 이력을 쌓은 다음 퇴직하는 은사의 추천으로 힘 들이지 않고 모교 전임강사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김 화백은 배은망덕하게도 경봉스님을 곧 잊어버렸다. 극락암의 사건은 차츰 전생의 일처럼 아득해졌다가 뇌리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서재에 놓인 합죽선이 김 화백의 시선을 끈 적은 별로 없었다. 합죽선을 욕심내는 친구도 없었다. 다만 합죽선에 경봉스님의 친필로 쓰인 글씨만은 드물게 이야깃거리가 되곤 했다.
寒梅吐紅古佛心
“저게 무슨 말인가.”
“직역을 하자면 ‘찬 매화가 옛 부처의 마음을 붉게 토하네’ 정도지.”
“고승들 얘기는 알 듯 모를 듯한 것이 매력이란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황벽 선사의 게송 중에도 매화가 나오지. 저 벽에 압정으로 꽂힌 메모지의 시가 황벽의 선시네. 저 선시를 보면 경봉스님이 말씀한 것을 조금은 엿볼 수 있을 것 같아.”
뿌리의 티끌까지 벗어나는 것 비상한 일이니
고삐를 바짝 잡고 한바탕 일을 치러야 하네
매서운 추위가 한번 뼈에 사무치지 않았던들
매화가 어찌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逈脫根塵事非常
緊把繩頭做一場
不是一番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
대부분 황벽의 선시를 보여주면 고개를 끄덕였다. 매서운 추위가 뼈에 사무쳤기 때문에 매화는 고운 꽃을 피우고 향기를 퍼트린다는 구절인데, 수행자도 마찬가지로 치열한 정진 끝에 부처를 이룬다는 게송이었다. 김 화백이 삶의 좌우명처럼 여기며 벽에 붙여둔 것도 삼사구의 ‘매서운 추위가 한번 뼈에 사무치지 않았던들 매화가 어찌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라는 게으름과 타성을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김 화백은 통도사 입구인 신평에서 승용차를 멈추었다. 대학시절에 찾아들어가 국밥을 먹었던 집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거리는 대도시 도심처럼 네온사인이 훤한 낮부터 번쩍거리는 유흥가로 변해 있었다. 옛날의 국밥집은 흔적도 없었다. 대신 레스토랑과 커피숍, 그리고 가든 형식의 대형식당이 지나가는 관광객을 호객하고 있었다.
예전에 없던 거대한 산문 안으로 들어서자, 비로소 영축산의 솔 냄새와 계곡물 소리가 났다. 며칠 전에 내린 호우로 계곡물은 콸콸 소리쳐 흐르고 있었고, 바람이 세차게 불자 붉은 피딱지 같은 낙엽이 노란 차선을 지워버릴 만큼 아스콘으로 포장된 도로 위에 우수수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김 화백은 승용차를 송림 아래의 주차장에 세워두고 계곡 쪽으로 큰 가지를 늘여뜨린 낙락장송 밑에 앉았다.
낙엽이 뒹구는 무지개 모양의 일승교(一昇橋) 윗자리에 앉은 김 화백은 이미 일주문 안에 들어와 있었다. 김 화백은 소나무 아래 앉아서 현장을 감식하는 형사처럼 무언가를 찾았다. 그러나 대학원 시절 반야구도회 회원들과 통도사 참배를 왔던 일이 문득 떠오를 뿐, 특별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젊은이들을 이끌고 자상하게 법문을 해주셨던 경봉스님의 말씀이 어렴풋이, 그것도 단편적으로 기억이 날 뿐이었다.
“저 일승교는 나의 사형 구하스님께서 50년대 말쯤일 것이야. 그때 놓은 다리지.”
김 화백은 끝내 당시 경봉스님의 법문을 또렷하게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 경봉스님은 대학원생들의 근기에 맞는 어느 고승에게서도 들어볼 수 없는 당대 최고의 법문을 했다. 그날 스님의 법문에 매료되어 훗날 반야구도회에서 출가를 결행한 회원들이 속출했던 것이다.
그때 경봉스님은 통도사를 찾은 대학원생들에게 일주문부터 거인처럼 앞장서 뚜벅뚜벅 걸으며 법문을 했다. ‘여러분이 처음 여기 통도사엘 찾아올 때 일주문(一柱門)으로 들어왔는데, 이 일주문은 기둥은 넷이지만 한 줄로 서 있기 때문에 일주문이라 한다.
이 일주문이 설법을 하는데 예전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한 물건이 이에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명자(名字; 이름)도 없으니 위로는 하늘을 기둥하여 괴이고 밑으로는 땅을 기둥하여 받친다. 즉 천지보다 더 크다는 말이다. 밝기로는 해와 같고 검기로는 칠통 같다. 항상 움직이며 사용하는 가운데 있으되 거두어 얻지 못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하였다.
그 한 물건을 표현한 것이 만법귀일(萬法歸一)이니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는 그 하나를 표현하였으며, 공자님도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라 나의 도는 하나로 꿰였다 하였으니, 이것 또한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를 내세운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또 하나의 사천왕문(四天王門)이 있는데, 하나가 있기 때문에 넷이 있다. 천지가 벌어진 이치도 무극(無極)으로부터 태극(太極)이 있고, 태극의 이의(二儀)가 생기고 이의로부터 사상(四象)이 생겼다.
예전에 어떤 거사가 사천왕을 보고 그 절 스님에게 물었다.
- 저 사천왕은 무엇 때문에 절 입구에 세워둡니까.
-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옹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 아, 그렇습니까. 사천왕이 불법승 삼보를 옹호한다면 나라에서 불교를 탄압한 사태불교(沙汰佛敎)를 당할 때에는 삼보를 옹호하지 않고 어디 가서 있었습니까. 그 스님이 대답을 못하자 이번에는 다른 스님에게 물으니
- 어느 곳에 사태불교가 있었습니까. 하고 그 거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 그만하면 선원 원주(院主)는 할 수 있겠는데 조실(祖室)은 아직 이르군요. 그때 조실스님이 될 안목(眼目)을 갖추자면 뭐라고 했어야 되겠는가. 이것도 종문(宗門)에서 하나의 화제(話題)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불이문(不二門)이니 둘이 아니란 말은 둘만 아니란 말이 아니라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요 셋도 아니란 뜻이다. 일체 숫자가 뚝 떨어진 말이다.
이 말은 예전에 무착 문희(無着文喜)스님이 문수보살을 만나서 대중의 수효를 물으니 앞도 삼삼(三三)이요, 뒤도 삼삼(三三)이라고 한 바로 그 말이다.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 이 도리만 알면 불이문의 도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전삼삼 후삼삼 도리를 모르면 불이문의 뜻을 도저히 알 수 없다.
<유마경> 가운데 있는 말인데, 부처님께서 삼십육보살을 유마거사에게 문병차 보냈는데 거사가 삼십육보살에게 불이법을 묻자,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고 명(明)과 암(暗)이 둘이 아니라는 등 여러 가지로 둘이 아닌 법을 말하고, 최후에는 문수보살이 둘이 아닌 법을 잘 말하긴 했지만 이것도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에게 불이법을 물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언(?言)하였다. 이 법은 입을 열면 그르친다.
여기 통도사 적멸보궁(寂滅寶宮)에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기 때문에 등상불(等像佛; 불상)을 모시지 않았다. 사리탑의 모양은 종(鍾) 하고 흡사해서 이 사리탑을 석종탑이라고 한다. 범종각에서 울리는 큰 종소리는 온 산골짜기를 울리는데, 이 돌종은 소리가 없다. 아니 없는 것이 아니라 구도회 여러분들이 들을 귀가 없어서 못 들으니 수련기간 동안 참선도 열심히 하고 수련을 잘해서 저 돌종소리를 잘 들어서 그 소리를 가져오길 바란다. 돌아갈 때 돌종소리가 어떻다고 일러주고 가야 여기에 수련 왔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구도회 회원들이 경봉스님의 법문그물에 걸려든 것은 맨 마지막 구절이었다. 비록 일주일 동안의 짧은 출가 체험이었지만 회원들은 사리탑의 돌종소리를 듣기 위해 칠일 낮 칠일 밤 동안 전력을 다해 정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일주일 간의 용맹정진이 끝난 날에도 돌종소리를 들은 회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훗날 그 돌종소리가 화두가 되어 마침내 몇 명이 출가했을 뿐이었다.
그때 김재인은 개인적으로 수련기간이 시작된 날, 그러니까 결제법문(結制法門) 때 다음과 같은 경봉스님의 말씀이 더 가슴에 각인됐었다. ‘사과나 배를 한 개 다 먹어야 그 맛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콩알만큼만 떼어 먹어도 그 맛을 다 알 수 있듯이 법문을 많이 들어야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마디를 잘 들어 알면 된다. 그물이 천 코 만 코가 있더라도 고기가 걸리는 것은 한 코에 걸리며 경론(經論)이 많이 있지만 깊이 깨달을 수 있는 곳은 한 구절이다. 깨닫는다고 하니 공부는 하지 않고 깨닫기를 기다리며 알려고 하는 그것은 망상이다.
그러기에 선문에 들어와서는 지해(知解;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했다. 세상의 학문이나 과학은 익히고 배우고 이리저리 따져서 연마하지마는 이 일을 그렇게 해가지고는 점점 멀어지는 역행이다. 이 자리는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으며 이름과 향상으로도 얻을 수가 없다. 누구나 자기의 몸을 자기라고 착각을 하고 애지중지하는데 엄격히 따져보면 부모의 물건이지 자기의 물건이 아니다. 자기의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에는 버리고 가는 것이다.
남의 집에 하룻밤을 자도 주인을 찾아보고 인사를 하지 않고 가면 무례한 사람인데,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을 모른다. 여러분은 나를 찾아 진아(眞我)를 알아야 한다. 석가여래는 설산에 들어가서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내가 나를 모르니 국왕이 되면 무얼 하겠나 하고 나를 추구하러 설산에 들어간 것이다.’ 이어서 스님은 인연의 지중함을 역설했는데, ‘하루를 동행하는 것도 천겁의 인연이라 했는데, 정법을 설하고 정법을 듣는 이 인연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 하면서 조무래기 귀를 잡아당기며 비밀스러운 것을 말하는 골목대장처럼 히히히 하고 웃었다.
그러나 천하의 경봉스님도 끝내 명쾌하게 얘기를 못하는 대목이 있었다. 불법 즉 진리를 말할 때는 비유를 들이대며 이리저리 우회할 뿐이었다. ‘말과 글로서는 아무리 진리를 표현하려 해도 표현할 수가 없다. 여러분이 통도사에 와서 점심을 먹었는데 그 밥맛이 어떠냐고 물으면 뭐라고 할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맛있지요 구수하지요 하는 이도 있는데 실은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밥맛을 표현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거늘 하물며 일체 명상(名相; 이름과 형상)이 다 떨어지고 일체 유무(有無), 인과(因果), 언어(言語)가 다 떨어진 이 도체(道體; 진리 자체)는 말과 글로써 표현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부처님도 부득이해서 말로써 마음(心)이다, 성리(性理; 성품)다, 원각(圓覺) 자리다, 라고 말을 하셨는데 그것은 밥맛을 말하는데 하도 물으니까 이 사람아 밥맛은 말하긴 어렵지만 구수하기도 하니 그쯤 알아두라고 한 것밖엔 안 된다.
어떤 과수원 원정(園丁)이 나무를 하도 오랫동안 가꾸니 나무들과 이야기할 만큼 됐다고 한다. 나무들이 나는 목이 말라요, 나는 거름을 좀 주어요, 배가 고파요, 하는 소리를 눈으로 들을 정도는 된 것이다. 학생들이 그 노인에게 나무 기르는 경험과 기술을 배우려고 학교로 초대했는데, 노인은 분필을 들고 망설이기만 했다.
칠판에 글을 쓰려고 하다가 노인은 마침내 분필을 던지고 말았다. - 나는 못하겠소. 천상 나무가 와서 말을 해야 하는데 나는 나무가 아니오. 그런데 나무가 와도 나무가 말을 못하니 안 되고, 내가 말하려고 해도 말이 안 되겠지요. 그러니 이 수업은 안 되겠소.- 그런데 노인의 강의를 듣지 못한 학생들은 박수를 쳤다. 왜 그런가.
그것은 말로써 불가능하기 때문인데 거기에 호응해서 박수를 친 학생들의 수준도 재미있다. 그 원정이 말로써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 원정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들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잘해준다 해도 못 알아듣는 것이다. 설사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도 그 진진한 묘미는 말로써 설명이 안 되고 글로서 전달이 안 된다. 밥맛을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조금 지루한 듯한 법문이긴 했지만 끝에 이르러서는 게송을 유유히 읊조리는 창(唱)으로 마무리 지었는데, 김재인은 특히 스님의 그 목청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마음을 편안하게 다독여주는 주문 같기도 하고, 귀 기울여 듣는 그에게는 푸른 영축산이 되게 하고 맑은 낙동강이 되게 하듯 정신을 맑게 씻어주는 관욕(灌浴) 같았기 때문이었다.
구름이 영축산에 개니 천 길이나 푸르고
물이 낙동강으로 흘러가니 만 리나 맑구나.
雲收靈鷲千尋碧
水倒洛東萬里淸
김 화백은 승용차의 브러시를 작동하여 낙엽을 쓸었다. 낙락장송 밑에서 백일몽을 꾸듯 앉아 있는 동안에도 낙엽이 승용차 차창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던 것이다. 김 화백은 승용차를 극락암 가는 산길로 서행하다 말고 안양암 입구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안양암은 경봉스님의 은사인 성해(聖海) 화상이 주석했던 암자였던 것이다. 모친상을 당한 지 1년 만에 16세의 소년 용국(鏞國; 경봉의 속명)은 중이 되기 위해 고향 밀양을 떠나 누님이 다니던 통도사를 찾아왔었고, 초여름의 안양암 숲은 용국의 꿈 빛깔처럼 짙푸르렀다. 좀 전에 내린 장맛비를 맞은 나뭇잎들이 금싸라기처럼 반짝였다. 용국은 같은 밀양 출신인 사명당 같은 고승이 되어 사명당의 혼백이 표충사에 돌아와 있는 것처럼 그 역시도 구름인 듯 물인 듯 운수납자(雲水衲子)로 떠돌다 금의환향하고 싶었다.
그러나 유월초의 장맛비를 맞아 후줄근한 행색에다 다 떨어진 짚신을 걸친 소년을 보고 박대하는 중도 없지 않았다. 다만 안양암의 암주(庵主)인 키 작은 성해 화상만이 가출한 아들이 돌아온 것처럼 전봇대처럼 멀쑥한 용국을 보자마자 끼니를 굶은 그의 새카만 손을 잡아끌며 법당에서 흰 마지(摩旨; 부처에게 올린 밥)를 내려주며 기뻐했을 뿐이었다.
그 무렵에는 성해 화상 말고는 통도사의 어떤 중도 용국이 훗날 ‘영축산이 천 길이나 푸르고, 낙동강이 만 리나 맑구나’ 하고 통연한 진리를 읊조릴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불(佛)을 이루지 못한 중생이란 그런 존재가 아닌가. 눈앞에 길이 있는데 보지 못하고 산다. 눈뜬장님처럼 길을 앞에 두고 길을 찾으며 산다.
김 화백은 승용차를 다시 서행으로 운전했다. 산길을 두어 번 도니 멀리 극락암 입구의 다리가 보였다. 송도활성(松濤活聲)-. 파도치듯 살아 소리 지르는 극락암 뒤편의 솔숲도 보이고 있었다. 김 화백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합죽선을 경봉스님의 유물전시관에 돌려주자. 스님이 정표로 주었다 하더라도 이제 스님의 유품을 더 이상 내가 지녀야 할 의미는 없는 것 아닌가. 다만 한 가지 조건은 있다. 명담스님이 내게 寒梅吐紅古佛心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답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경봉스님의 뜻대로 합죽선을 지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합죽선에 담긴 스님의 마음을 알았다고 할 수 있으니까. 바람이 잠잠해지더니 하늘이 거짓말처럼 잿빛으로 변했다. 허공에서는 날벌레 같은 눈송이가 하나 둘 흩날렸다. 땅에 떨어지기 전에 녹아버려 처음에는 하루살이 같은 날벌레인가 여겼는데 자세히 보니 눈송이가 틀림없었다.
올해 들어 두 번째 보는 눈이었다. 지리산 산중 처소에서 강한 바람을 타고 흩날린 싸락눈을 초가을에 이미 보았던 것이다. 김 화백은 여전히 서행으로 산길을 올라갔다. 지리산을 떠날 때 명담스님에게 전화를 해두었으므로 스님은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에게 삼소굴 옆의 원광재(園光齋) 끝방으로 바로 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 화백이 주차장에 승용차를 세워두고 원광재로 갔을 때 원광재 끝방의 방문고리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그 바람에 김 화백은 잠시 맥이 빠져 주춤거리고 있는데 상원이 급히 달려와 은사 대신 사과를 해왔다. “은사스님은 급한 일로 지금 언양에 계십니다. 잠시만 삼소굴에서 기다리고 계시랍니다.” 삼소굴 굴뚝에서는 연기가 폴폴 솟았다. 늙은 처사가 김 화백의 숙박을 염두에 둔 듯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삼소굴은 서향으로 석양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데 반해 원광재는 북향인 듯 벌써 산그늘이 져 어둑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원광재 앞뜰에 핀 동백꽃 꽃망울도 찬 그늘 때문에 딱딱한 혹처럼 뭉쳐 보였다. 상원이 거듭 삼소굴 방으로 들어가 쉴 것을 권유했지만 김 화백은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극락암 마당을 배회했다. 법당 오른편의 수조에 졸졸 떨어지는 찬 약수를 한 모금 마시는 동안 잠시 몸이 진저리쳐지며 기분이 좀 개운해졌다. 약수터 표지석에는 경봉스님의 글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과 만물을 살려주는 것은 물이다.
갈 길을 찾아 쉬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물이다.
어려운 굽이를 만날수록 더욱 힘을 내는 것은 물이다.
맑고 깨끗하며 모든 더러운 것을 씻어주는 물이다.
넓고 깊은 바다를 이루어 많은 고기와 식물을 살리고 되돌아가는 이슬비 사람도 이 물과 같이 우주 만물에 이익을 주어야 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