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끝단에 위치한 넓이 406평방 킬로미터의 강화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역사 및 문화 유적이다. 수도 방어의 요충지로서 고려 시대부터 외세와 격렬하게 충돌해 온 역사의 현장인 강화는 그래서 호국의 기상이 돋보이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서 혹독한 박해를 겪어야 했던 신앙 선조들의 믿음과 순교에 이르는 열정도 함께 지니고 있다.
강화 지역이 교회와 특별한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양요와 이에 이은 병인박해 때이다. 어느 박해보다도 극심하게 이루어졌던 병인년의 교난을 야기했던 병인양요의 현장이 바로 강화도이다. 강화 군청의 적극적인 사업을 통해 말끔하게 관광지로 개발된 강화도는 특히, 지난 1970년 육지와 연결되는 강화 대교가 개통됨으로써 보다 편리하게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강화 지방에서 찾아볼 만한 교회 사적지는 관청리 형방, 갑곶 돈대, 황사영 생가 터 등이다. 강화섬 전체가 하나의 관광지이기 때문에 곳곳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다.
순례길 틈틈이 전등사, 청련사, 백련사, 보문사 등의 사찰과 강화산성, 마니산, 참성단, 지석묘 등을 찾을 수도 있다. 순례길에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내가, 인산, 길정, 황포 등 입질이 심심치 않은 낚시터도 곳곳에 있다. 충분한 숙박 시설과 편리한 교통등 가족 단위의 주말 성지 순례 코스로 매우 적당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 신촌에서 새벽 5시 30분부터 저녁 9시 30분까지 매 10분 간격으로 직행 버스가 강화읍을 지나 온수리와 외포리까지 간다. 수원 및 과천, 인천과 부평, 부천에서도 직행이나 완행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서울에서 버스 편으로 1시간 30분이 채 못 결려 강화 터미널에 도착하면 우선 가까운 곳에 강화 본당이 있어 강화도를 찾는 순례객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성당 위쪽으로는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인들에 대한 극심한 고문이 자행되던 동헌과 형방이 있다.
병인박해의 회오리는 강화 대교 서쪽 끝에 서 있는 갑곶 돈대(甲串墩坮)에서 일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강화 대교를 건너면서 강화도 왼쪽으로 보이는 갑곶 돈대는 1679년에 축조돼 8문이 대포를 설치한 포대를 두었다. 조선 숙종 5년(1676년) 강화에는 모두 5진(鎭) 7보(堡) 53돈대(墩坮)의 국방시설이 설치됐다.
1866년 병인 양요 때 조선 정부가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강화도를 점령하고자 했던 프랑스 함대가 바로 이곳으로 상륙,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다. 결국 프랑스 군은 후퇴했으나 이로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병인박해라고 불리는 새로운 박해를 받게 되었다. 갑곶성지에서 바라보이는 바다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들이 이슬로 사라졌다.
프랑스 함대를 방문하여 리델 신부를 만나 교회 소식을 전했던 성연순(成連順)과 원윤철(元允哲)이 1866년 10월 순무영에 넘겨져 양화진에서 효수형을 받았다. 그리고 1868년에는 최인서(崔仁瑞,요한)장치선(張致善)박순집(朴順集)의 형, 50세 된 조참봉의 부친 등이 병인양요와 연루되어 강화에서 순교 하였으며,1870년에는 통진 출신 권바오로가 20세의 나이로 강화에서 교수형을 받기도 했다. 또한 1871년, 신미양요(申未洋擾)때는 미국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당한 강화에 살던 천주교 신자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박상손(朴尙孫)등이 갑곶진두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갑곶 돈대 순교성지의 의미
성지란 성스러운 땅, 즉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의 배경이 된 장소등을 말한다. 갑곶성지 또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삶과 죽음을 표명하는 우리나라 중요한 성지중 하나인 곳이다.
서울에서 한시간여 거리에 떨어져 바다와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강화도는 많은 이들의 나들이 코스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좋은 자연환경과 많은 문화유적, 그리고 호국의 얼이 숨쉬는 곳이기에 강화도를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천주교인들에게 있어서 강화도는 또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신앙을 증거하기 위한 선배 신앙인들의 피어린 노력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화도의 갑곶성지의 유래는 한국천주교회 창립 초기인 1795년, 조선에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신부가 철종(哲宗)의 조모(祖母)인 송(宋)씨(은언군의 처)와 며느리 신(申)씨를 각각 마리아로 영세를 준 것이 조정에서 알려지게 되어 왕족인 고부(姑婦)가 함께 1801년(辛酉迫害)에 순교하게 되자, 이러한 연유로 1786년(정조 10년)부터 자식 상계군(常溪君)의 역모죄로 강화도에 귀향하여 살던 은언군(恩彦君 , 철종의 조부)도 강화부(관청리 형방)에 배소되어 처형되었고, 또한 신유박해의 순교자요 백서(帛書)를 쓴 황사영(黃嗣永)의 탄생지가 이곳 대묘동에 있어 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시기부터 인연을 갖고 있다.
1845년 5월 14일 김대건신부는 페레올 고(高) 주교의 명으로 선교사를 비밀로 입국시키는 해로(海路)를 개척하기 위해 서울 마포를 떠나 이곳 강화 갑곶(甲串) 앞바다를 지나 연평도, 백령도를 거쳐 순위도에서 관원에 잡히게 되었다.그래서 이곳 갑곶 해안은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해로 여행지가 되었고, 1856년 베르뇌 장(長)주교와 쁘띠니꼴라 신부, 쁘르띠에 신부, 1857년 페롱 권(權)신부가 비밀리에 입국한 요로이기도 하다.
강화도는 19세기 후반, 한국 역사에서 동, 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1866년(丙寅)부터 시작한 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나 현재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프랑스 선교사를 입국시키는데 협력한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치선(張致善) 회장과 천주교인으로 최인서와 함께 있다가 잡혀 서울 포청에서 옥살이를 하다 강화 병영지 진무영(鎭撫營)으로 호송되어 효수(梟首)당한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때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이곳 갑곶나루터(甲串津頭), 일명 막구터에서 목을 베어 말뚝에 올려놓아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갑곶나루터에서의 순교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병인양요 이후인 1871(辛未)년 4월에 강화도 해역에 미국함대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평양에서 조선인에 의해 방화된 사건의 책임을 묻고 통상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이를 거절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이때에 이승훈의 증손인 이연구(李蓮龜)와 균규(筠龜)가 제물포에서 잡혀 군문효수되고, 이승훈의 손자인 이재겸(李在謙)의 처 정(鄭)씨와 그의 손 이명현(李明玄)과 백용석(白用石) 등도 이와 관련하여 순교하였다. 미국군함이 물러간 5월 25일 고종(高宗)은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할 것을 좌우포도대장에게 교서를 내리게 되고, 이 때에 미국 함대에 왕래한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첫 번째로 잡혀가 갑곶진두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게 된 것이다.
문헌상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은 인천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는 그 자리를 매입하여 지금의 갑곶돈대 순교성지를 조성하였다. 이후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집중적인 개발을 진행하였으며 2001년 9월에는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이며 인천교구 역사의 증인인 박순집(베드로) 증거자의 유해를 성지내에 안장하였다. [출처 : 갑곶순교성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