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외과수술
우리는 지금 100세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이 발달하여 새롭게 나날이 달라지는 세상을 산다고 했더니 어느 날 주위를 살펴보니 100세 이상 사시는 노인들을 흔하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60세 환갑잔치를 요란하게 치르던 때도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환갑잔치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100세 잔치를 성대하게 치르는 것도 아니다. 수명이 늘어난 것은 의료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덕분이다. 이런저런 수술로 죽을 사람이 죽지 않고 생존하기 때문이다.
70고개를 넘어서니 위아래로 먼저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대부분 암이 사망 원인의 첫째이다. 암이 아닌 경우에는 대개 치료가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암도 초기에 발견되면 거의 다 완치가 되는 데 몇몇 특정 암이나 혹 늦게 발견되는 경우 사망에 이르게 된다.
지혜의 정점을 가리키는 성인들의 경우에도 병고와 빈곤은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천하의 명의라는 중국의 편작조차도 지금 생각하면 고칠 수 없는 병이 숱하다. 외과적인 수술이 꼭 필요한 경우에는 한방의 침과 탕약만으로는 도저히 치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에도 세 번의 외과수술로 수명을 연장하였다.
1
볼기에 종기가 나서 앉기가 불편했다. 손으로 만져보면 뜨겁고 부기를 느낄 수 있었다. 외사촌 동생이 근무하는 병원에 들렸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메스로 째고 고름을 짜자고 했다. 겁이 나서 거절하고 한강성심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은 결과 ‘치루’라고 했다. 입원해서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도 두 번에 나누어서 해야 한다고 한다. 항문 근처에 생긴 종양이 직장까지 번져서 터널이 생겼다고 한다. 조직검사를 해보니 결핵성 치루라고 해서 엑스레이를 찍고 결핵 초기라는 판정을 받았다. 엑스레이 필림 상으로는 눈으로 발견하기 조차 힘들만큼 초기에 해당된다고 했지만 그로부터 2년 동안을 약을 먹고 완치가 되었다.
과거 문학인들 중에서 결핵으로 고생하다가 죽은 사람이 많았다. 당시에는 마땅한 약도 없던 시절이었다. 나 역시 시절을 잘 만나서 별다른 고생도 하지 않고 고질병인 결핵을 완치할 수 있었다. 당시 나이 30 초반이었는데 요절할 뻔 한 것을 의학기술이 살려주었다.
2
어느 날 저녁부터 이유 없이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먹은 게 체했나 해서 소화제도 먹어 보았지만 아무 효과가 없고 배는 점점 더 아파왔다. 맹장이면 오른쪽 아랫배가 아프다던데 그것도 아니고 혀에 설태가 낀다는 데 그것도 아니고 다리를 구부리기 힘들다는 맹장의 초기 증세에 해당하지 않으니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밤새도록 통증에 시달리며 소파에서 괴로워하다가 아침이 되자 가정의에게 갔다.
가정의 역시 특별한 소견이 없어 응급실로 찾아갔다. 시티를 찍고나서 의사가 충수염(맹장)이라고 진단했다. 버나비 종합병원에 밤 10시에 수술 일정을 잡았다고 해서 엠블런스를 타고 이동했다. 생전 처음으로 엠블런스를 탔는데 급히 갈 일은 아니라서 사이렌은 울리지 않았다. 수술실에 누워있는데 백인 의사가 다가오더니 ‘이건 마술과 같은 것입니다. 전연 겁낼 것 없고 간단하다’고 위로의 말을 했다. 세 군데 구멍을 통해서 복강경 수술을 하는 것을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한국인이시군요. 이제 마취 시작하겠습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한국말을 하며 다가온 한국인 마취의사를 보며 마음이 편해졌다. 현대 의술은 온전히 마취의 발달로 이룩되었다고 한다. 마취가 아니고서는 외과수술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맹장이 터져서 염증이 배 안에 퍼지면 생명을 잃게 된다. 외과적인 수술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맹장수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급성인 경우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병이다. 서구에서는 일생동안 8%에서 발생하며, 10대에서 30대 사이에 최고조로 발생한다는 데 나는 60세의 늦은 나이에 수술을 했다.
3박4일 동안 입원한 후에 간호사가 퇴원하라고 해서 병원 문을 나서는데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단돈 한 푼을 낸 것이 없는데 그냥 가도 되는가 의아해서였다.
3
캐나다로 이민 온 이후 2014년 초부터 걸으면 다리가 저려와서 오래 걸을 수가 없었다. 서 있거나 앉아 있으면 괜찮은데 걷기 시작하면 얼마 못 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증세가 점점 더 심해져 갔다. 가정의는 정확한 원인을 가늠하지 못했다.
한의사도 여러 곳을 전전하며 침을 맞았는데 아무도 그것이 어디서 잘못되어 일어나는 통증인 줄을 몰랐다. 당시 논어강독을 마치고 대건문화센터에서 명심보감 강의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강의를 중단한 채 한국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보기로 하고 출국하려는 데 비행장으로 가는 도중 전문의 예약 날자가 한 달 뒤에 잡혔다고 전화가 왔다. 강남에 있는 통증전문의를 만나 시티촬영과 엠알아이 촬영을 하고 그날로 ‘척주관 협착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반드시 종합병원에서 수술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강남 세브란스 병원 신경외과 전문의를 만났다. 엠알아이 쵤영된 것을 살피던 의사는 “이럴 경우 수술하라는 말을 안 하면 범죄에 해당합니다.”하면서 당장 수술해야 한다며 일주일 후에 날자를 잡아주었다.
그 말의 뜻을 처음에는 짐작하지 못했다. 외과적인 수술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증상을 다른 이유를 대면서 지체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디스크를 빼서 인공대체물로 삽입하고 고정나사를 박았으며 튀어나온 뼈를 깎아서 척추관을 넓혀주는 수술이었다. 이 경우 외과적인 수술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전신마취 후에 수술을 마치고 2시간 후, 서서히 의식이 돌아왔다. 수술 직전에도 다리의 통증을 침상 위에서 느꼈는데 아무런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그 후로는 씻은 듯이 통증이 가셨다. 유능한 의사와 함께 현대 의학기술의 은혜를 입었다는 고마움을 느꼈다. 거의 일 년 동안 지속되던 통증으로부터 시원스럽게 해방되었다.
자연치유가 될 수 없는 상태에서 죽을 때까지 극심한 통증에 시달릴 것을 면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내 덕도 내 운수도 아니다. 오직 병원과 의사와 현대 의료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죽을 사람이 살아나서 평균 수명을 늘리는데 기여했다. 노년이 연장되어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만이 다행스런 일은 아니다.
언제 무슨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쇠약해져 가는 몸으로나마 내가 연장된 수명을 잘 활용해서 어떻게 삶을 가치있게 보낼 것인가 고민하지 안 된다. ‘그냥 사니까 산다’는 식의 타율적인 삶은 100세 시대의 놀랄만한 수명을 안타깝게도 허비하고 마는 셈이다.
예전에 50-60년을 살다가 간 사람들이 오늘날 오래 사는 사람들을 안다면 얼마나 부러워할까? 아득한 옛날부터 모든 사람들은 오래 사는 것을 가장 큰 소망이요, 복으로 여겨왔다. 우리는 지금 그 복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수명장수의 복을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더 사는 동안 세상의 양식만을 축내고 훌륭한 병원시설에 기대여 하는 일 없이 지낸다면 백 년을 산다해도 별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이 시대의 연장된 노년을 나름대로 잘 살아볼 궁리를 해야 하겠다. 아랫 집에 사시던 할아버지 한 분은 만날 때마다 한스런 푸념을 하셨다.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사는 지 모르겠어. 죽고 싶어도 죽지를 않아.”
그 분은 100세를 훌쩍 넘기고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