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주실의
마테오 리치 저 / 송영배 역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이벽(李檗)·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정약종(丁若鍾)·정약용(丁若鏞)·이승훈(李承薰) 등이 천주교신앙 실천운동을 일으켜, 1784년(정조 8) 조선천주교회를 창설하게 된 데에도 이 책이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한자로 엮어진 ≪천주실의≫는 일반대중에게는 가까이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에 따라 한글 번역본이 나왔는데, 18세기 중엽의 한글 고사본(古寫本)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
다산의 이 생각은 바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천주실의’는 중국 선비와 서양 선비가 천주교의 주요 교리에 대해 토론하는 방식으로 기술한 책이다. (다산독본)
==========
한양 인근 천진암에서는 실학파로 불리는 권철신, 이벽, 정약종, 정약용 등의 젊은 유학자들이 책을 읽고 토론하며 조선의 새로운 발전방향을 모색하고 신앙을 논했다. 그 중에는 「천주실의」와 「칠극」과 같은 천주교 서적도 포함됐다.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방안으로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가졌던 조선 지식인들이, 서양 사상의 바탕인 천주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차별 없는 사회를 바라던 사람들은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칠극
빤또하 저 | 박유리 역 | 일조각 |
『칠극』은 1777년(경조 1)경의 천진암(天眞庵)·주어사(走魚寺)의 강학에서 남인학자들에 의하여 연구, 검토되었음이 확실하며, 일찍부터 한글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혀져, 감화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글필사본이 절두산순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다산은 “내가 취몽(醉夢)에 대해 주장이 있는지라 마침내 이를 써서 그에게 준다”고 썼다. 무슨 주장이었을까. 흥미롭게도 그것은 천주교 교리서인 ‘칠극(七克)’의 한 대목에서 끌어온 내용이었다. ‘칠극’ 권 1 ‘극오난(克傲難)’은 서두가 이렇다. “꿈인 줄 아는 사람은 반드시 이미 깨어난 상태다. 악인 줄 아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선으로 옮겨간다. 처음 병을 치료할 때는 모름지기 병이 있는 줄을 안다. 만약 병을 인지하지 못해서 치료하지 않으면 치료하기가 어렵다.” (다산독본)
교요서론
페르비스트 저 | 노용필 역 | 한국사학
이 책은 일찍이 조선에 전해져 학자들 사이에서 읽혔는데, 신유박해 때의 심문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에는 김건순(金建淳)이 1789년(정조 13)에 삼전동 사람에게서 이 책을 얻어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정광수(鄭光受)가 장인인 윤현(尹鉉)의 방 구들장 밑에 숨겨 놓았다가 발각된 책들 중에 이 책의 1권이 있었다. 그리고 정복혜(鄭福惠)가 각처의 신자들에게서 거두어 들여 한신애(韓新愛)의 집에 묻어 두었다가 발각되어 소각된 책 중에는 한글본 『교요셔론』 1권이 있었다. 그러므로 『교요서론』은 늦어도 1789년부터 우리나라에 전해져 읽혔고, 1801년(순조 1) 이전에 이미 한글로 번역되어 초기 신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졌음을 알 수 있다.
주교요지
정약종 저 | 하성래 감수 | 성황석두루가서원 |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주교요지》는 상권은 천주의 존재, 사후의 상벌, 영혼의 불멸을 밝히면서 이단을 배척하는 일종의 호교서(護敎書)이고, 하권은 천주의 강생과 구속의 도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 교리서는 무식한 부녀자나 어린이까지도 읽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평이하게 한글로 서술하였다. 황사영(黃嗣永)은 그의 백서(帛書)에서 정약종이 이 책을 저술함에 있어 여러 가지 책을 인용하였고, 자기의 의견도 보태었다고 했으며, 주문모(周文謨) 신부도 정약종의 《주교요지》를 아주 적절한 것으로 인준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주교요지》가 단순한 한역서학서의 우리말 번역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주교요지》는 필사본(筆寫本)으로 전해져 오다가, 1864년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는데, 초기 교회 발전에 끼친 《주교요지》의 공헌은 절대적이었다.
=================
다산과 형님 정약전이 벼슬길에 올라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을 때, 정약종은 천주교에 올인했다. 뒤늦게 붙은 열정은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는 ‘주교요지’라는 천주교 교리 설명서를 썼다. 1795년 이 책을 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엄지 손가락을 척하고 올렸다.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이후 이 책은 조선천주교회가 공인하는 교리서가 되었다. 정약종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아예 ‘성교전서’의 편찬에 돌입했다. 중국에서 가져온 서학서를 종합해서 한 권의 결정판을 만들겠다는 야심이었다. 하지만 이 소원은 절반쯤 작업이 진행된 상태에서 그가 갑작스레 죽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산독본)
황사영 백서
옮긴이: 여진천 신부 | 출판사: 기쁜소식
두 자 가량 되는 명주천에 썼기 때문에 ‘백서(帛書)’라고 하는데, 깨알같이 작은 1만 3311자나 되는 방대한 내용의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략 3부분으로 되어 있다. 먼저 당시의 천주교 교세와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활동, 신유박해 사실과 이때 죽은 순교자들의 약전을 기록하고, 다음에는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처형 사실, 끝으로 당시 조선 국내의 실정과 이후 포교하는 데 필요한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황사영 백서>는 민족 감정에서 나오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한편 교회의 평등주의라는 원칙과 당시 조선사회에 미친 혁명적인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 일부 사가(史家)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황사영은 이 백서가 관변측에 압수됨으로써 1801년 대역죄인(大逆罪人)이 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원본은 당시 서울 주교로 있던 뮈텔(한자명 閔德孝)이 1925년 한국 순교복자 79위의 시복(諡福) 때 교황 피우스(11세)에게 바쳤는데, 현재 로마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교황청에서는 이를 200부 영인(影印)하여 세계 주요 가톨릭국에 배포하였다고 한다.
================
황사영은 캄캄한 토굴 속에 등불을 켜고 ‘음읍탄성(飮泣呑聲)’ 즉 울음을 마시고 소리를 삼키며 북경 주교에게 조선 천주교회에 불어 닥친 광풍을 보고하는 길고 긴 편지를 썼다.
가로 62㎝, 세로 38㎝의 명주천에 매행 124자에서 96자씩 122행에 걸쳐 썼다. 어두운 토굴 속 가물대는 등불 아래서 황사영은 이 작은 천 조각에 무려 1만3,384자를 또박또박 흐트러짐 없이 썼다. 피눈물을 흘리며 썼다. 확대경이 아니고는 글씨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았다. 옷 속에 넣어야 했기에 무조건 크기가 작아야 했다. 1791년 진산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신해박해에서 1801년 신유박해까지 조선 천주교회의 자취와 주요 순교자들의 행적을 낱낱이 적고, 교회 재건 방안을 건의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다산독본)
상재상서
정하상 저 | 윤민구 신부 역 | 성황석두루가서원 |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심해져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교인인 정하상은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이 글을 작성해두었다가 1839년(헌종 5) 6월 1일 체포된 다음날 종사관(從事官)을 통하여 재상인 이지연(李止淵)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별첨형식의 우사(又辭)까지 합쳐 모두 3,400여 자에 불과한 짤막한 글인데, 천주교 기본교리에 대한 설명, 호교론, 신교(信敎)의 자유를 호소한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글은 19세기 중반의 천주교 교인들의 신앙에 대한 열정과 교리에 대한 이해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데, 1887년 홍콩에서 정하상의 약전을 첨가하여 출판되어 중국의 선교에 널리 이용되었다. 국내에서는 블랑(Blanc, M. J. G.)주교의 서명이 들어 있는 필사본과 한글역본 등도 전해진다.
성경직해
1636년 북경에서 초간된 포르투갈인 예수회 선교사 디아스(Diaz)가 쓴 동전한문서학서(東傳漢文西學書) 『성경직해』의 한글번역본이다.
제목이 ‘성경직해’라 표기되어 있다. 한문본은 1784년 가톨릭 교회 창설시기를 전후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곧 우리말로 번역되어 교인들 사이에 필사본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1892년 당시의 교구장 뮈텔(Mutel) 주교가 이 필사본을 기본으로 하여 새로 가다듬어 전 9책의 활판본으로 간행하였다.
====================
사도세자는 자신이 본 소설책의 목록을 ‘대조목(大條目)’과 ‘소조목(小條目)’, ‘대중소질(大中小秩)’과 ‘음담괴설(淫談怪說)’ 등 모두 네 가지 범주로 나눠서 적었다. 이 중 ‘소조목’에 속한 책 이름 가운데 놀랍게도 ‘성경직해(聖經直解)’와 ‘칠극(七克)’이 들어있다. 세자는 이 두 책을 패관소사(稗官小史)의 하나로 본 듯이 썼지만, 조선에서 훗날 천주교 교리서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한 이 두 책이 당시에 이미 세자의 거처에 놓여 읽힌 것은 놀랍다. (다산독본)
성경광익
저자 마이야 | 역자 유은희 | 순교의 맥
1740년 북경에서 2권 2책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한글로 번역된 시기는 1790년대 초로 추정되며, 번역은 최창현(崔昌顯) 등이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사학징의』의 기록에 의하면,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초기 신자들의 집에서 이 책이 다수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글본 『성경광익』이 필사된 뒤 널리 읽혀졌음을 알 수 있다.
성경직해광익
주일과 첨례 때 사용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성경직해광익』은 현재 9권으로 된 1860년도의 필사본과 1866년 병인박해 때 땅에 묻었던 20권의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1801년 5월 22일 신유박해 당시 강완숙(姜完淑) 등 9명의 천주교인을 처형한 뒤 불살라버린 천주교 서적의 목록이 『사학징의(邪學懲義)』 중 「요서사서소화기(妖書邪書燒火記)」에 실려 있는데, 한글본 『성경직해』 4권, 한글본 『성경광익』이 1권, 한문본 『성경광익』이 14권, 한글본 『성경직해광익』이 6권이라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이로 보아 『성경직해광익』은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존재해왔음을 알 수 있다. 역관(譯官)이었던 최창현(崔昌顯)에 의하여 역술되었다고 하는 필사본은 그 뒤 여러 주교와 신부들에 의하여 정정 혹은 편역 되어 전해 내려오다가 1892년에 당시 교구장이던 주교 뮈텔(Mutel, 閔德孝)이 필사본을 기본으로 하여 다시 가다듬어 『성경직해』라는 이름으로 1897년까지 9권으로 나누어 간행하였다.
==============
초기교회에서 한글번역을 주로 맡았던 이는 역관 출신으로, 1801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최창현이었다. 최창현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였던 디아즈가 저술한 「성경직해」와 마이야가 저술한 「성경광익」을 발췌해 「성경직해광익」을 편찬하기도 했다. 특히 정약종은 천주교의 기본적 가르침을 순 한글로 명확히 설명한 「주교요지」를 지어 보급했다.
척사윤음
옮긴이: 김규형 신부 조지형 | 출판사: 인천가톨릭대학교출판부
18~19세기 조선은 ‘척사’라는 미명 아래,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했다. 아무리 왕정국가지만 수많은 백성이 희생된 이 사건에 대해서 백성들에게 그 정당성을 설명해야 했고, 더구나 유력한 정치인들까지 연루된 것에 대해 청나라에 해명을 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천주교 박해에 대해 조선 조정이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이 척사윤음이다. 박해시기 동안 4번에 걸쳐 발표된 척사윤음에서 조선 조정은 천주교에 대한 비판과 처벌의 개요를 적시하고, 천주교도를 회유하는 한편 일반 백성들에게는 정학에 힘쓸 것을 권면하고 있다.
척사윤음은 그 성격상 한국교회 순교자에 대한 시성 심사에도 적극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사에 큰 의미를 지닌다. 이 책에 수록된 달레 신부와 뮈텔 주교의 불역본이 심사에서 중요하게 사용된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신앙 선조가 겪었던 박해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을 것이다.
벽위편
역자 김시준 | 명문당
활자본, 7권 2책이다. 《벽위휘편(闢衛彙編)》이라고도 한다. 순조 때의 유학자 이기경(李基慶)이 편찬하고, 4대 손인 만채(晩采)가 다시 증보하여 1931년에 간행하였다. 원본은 1785년(정조 9)부터 1801년(순조 1)에 이르는 약 15년간에 걸친 천주교 박해의 전말을 보여주는 조야(朝野)의 계사(啓辭)·상소(上疏), 유림(儒林)의 통문(通文), 신도들의 서한을 수록하였는데, 현행본은 여기에다 천주교 전래의 내력, 신유년(辛酉年:1801) 사학죄인(邪學罪人)의 결안(結案), 기해박해(己亥迫害)까지의 치사(治事)전말을 덧붙인 것이다. 천주교 박해론자의 입장에서 편찬한 책이지만,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는 귀중한 자료이다.
=======
‘벽위편’ 권 4의 ‘경신년에 사학이 더욱 극성을 부리다(庚申邪學愈熾)’ 조에는 “중국인을 놓친 뒤에 임금께서 정약용이 틀림없이 그의 종적을 알고 있을 테니 그로 하여금 잡아들이게 하라고 했지만, 중국 사람을 구해낸 것이 본시 그들이 한 짓이었으므로 끝내 사실대로 고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보인다. (다산독본)
사학징의
조광 역주 | 한국순교자 현양위원회
저자와 저작연대는 미상이나 내용으로 보아 저자는 『벽위편(闢衛編)』의 존재를 알고 있고, 천주교 박해에 직접 관여했거나 형조와 관련이 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저작시기는 신유박해가 일어난 직후로 추정된다. 신유박해에 관한 가장 풍부한 자료로서 박해의 정확한 윤곽을 전해줄 뿐 아니라,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도 많은 참고자료가 되는 사료이다.
====
강완숙이 주문모 신부를 어떻게 보호했는지는 1801년 4월 강완숙 집안의 계집아이 심부름꾼이었던 김월임(金月任)이 천주교 죄인으로 끌려가 심문에 대답한 공초(供草)로 알 수 있다. ‘사학징의(邪學懲義)’에 실린 이 기록에 따르면 강완숙의 가족은 주인 집 가운데 방에 주 신부를 시골 친척이라 하면서 숨겨 두었다. 그 방에는 강완숙 모녀만 출입할 수 있었다. 강완숙은 이따금 혼자 그 방에 들어가곤 했는데, 들어갈 때마다 안에서 자물쇠를 잠갔다. 자신이 궁금해 창 틈으로 엿보려 하면 강완숙의 시어머니가 대경실색하며 이를 막아, 김월임은 그 집에 6년간 머물면서 한 번도 주문모 신부의 얼굴을 본적이 없을 정도였다. (다산독본)
기해일기
1839년(헌종 5)의 기해박해를 전후하여 순교한 천주교인들에 관한 순교기록을 담은 책이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과 여러 사람의 확인에 의하여 기록되었으며, 1925년에 시복(施福)된 79위 복자(福者)의 시복조사작업에 가장 중요한 사료로 이용되었다.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순교자 중 69위가 성인품에 올랐다. 조선교구 2대 교구장 엥베르(Imbert, 한국명 범세형(范世亨)) 주교가 기록하기 시작하여, 현석문(玄錫文), 페레올(Ferréol) 신부 등의 손을 거치면서 계속 보충되고 1846년(헌종 12) 병오박해의 순교자들까지 기록되었다. 기해박해와 관련한 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책이고 최초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이후 순교자들의 사적의 수집 정리가 계속 추진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묵상지장
지은이: 구베아 알렉산델 | 옮긴이: 유은희 수녀 | 출판사: 도서출판 순교의 맥
이 책은 ‘손바닥을 가리키듯 쉽게 묵상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책’이라고 해석되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묵상안내서의 고전인데, 모두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801년 신유박해 관련 기록인『사학징의』의 말미에 나오는 「부요화사서소화기(附妖畵邪書消火記)」에는 한문과 한글로 기록된 『묵상지장』과 그 편명을 책 제목으로 한 『묵샹졔의』, 『묵상식냥』등 한글 책자 등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이 18세기 후반 조선에 전래되면서 한글로 번역되어 신자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단권으로 된 한글 필사본(123장)과 한문본(59장)이 소장되어 있다.
===
묵상지장이란 한역 서학서로 묵상의 정의와 유익한 점, 방법등 묵상 전반에 관한 것을 성경과 여러 성인들의 실례를 들어 쉽게 설명한 책이다. 이를 통해 신앙을 받아들인 한국 천주교회의 특성과 신앙 선조들의 믿음살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진도자증
지은이: 샤바냑 | 옮긴이: 유은희 수녀 | 출판사: 도서출판 순교의 맥
‘진도자증’이란 ‘참된 진리는 스스로 증명이 된다.’는 뜻으로, 천주교 주요 교리를 명쾌하게 펼친 교리서다. 프랑스 선교사 샤바냑(?∼1717)이 저술하여 그의 사후 1718년 북경에서 초간되었고, 1796년 북경 구베아 주교의 감준 아래 중간되었으며,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
1787년 10월쯤, 이승훈과 다산 등이 천주학을 다시 숭상한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이기경은 슬쩍 떠볼 생각으로 이승훈을 만났을 때, 서양 서적을 빌려달라고 했다. 이승훈이 말했다. “믿어야지, 보기만 해서야 무슨 소용인가?” “알아야 믿을게 아닌가. 좀 빌려봄세.” 며칠 뒤 이승훈은 필사한 ‘진도자증(眞道自證)’ 3책을 가지고 와서 하루 밤을 자고 갔다. 이기경과 정미반회사에 얽힌 세세한 이야기는 ‘벽위편’에 실린 이기경의 ‘초토신(草土臣) 이기경상소’에 자세하다.(다산독본)
===
이때 다산의 당황스러운 반응은 같은 날 쓴 시 ‘벗 이덕조와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同友人李德操檗乘舟入京)’의 7,8구에서 “졸렬하여 맥락에 못 기댐을 깊이 알아, 남은 경전 붙들고서 옛 성현에 보답하리(深知拙劣絡無賴, 欲把殘經報昔賢)”라 한데서도 엿보인다. 놀라운 말을 들었지만 그냥 유가 성현의 글 공부나 계속 하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갑작스레 확 달라진 이벽의 확신에 찬 말과 행동에 호기심이 생긴 다산 형제는 상경 직후 이벽을 찾아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판토하(Pan-toja)의 ‘칠극(七克)’ 외에 샤바냑(Emericus de Chavagnac)이 쓴 천주교 교리서 ‘진도자증(眞道自證)’과 마이야(De Mailla)가 정리한 가톨릭 성인전 ‘성년광익(聖年廣益)’ 등을 빌려 읽었던 듯하다.(다산독본)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시복재판록
천주교 수원교구 / 수원교구 연구소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은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83위의 시복을 위해 1883년부터 1887년까지 열린 교구 예비심사의 재판 기록으로 순교자들과 관계가 있던 신자들의 증언과 순교자들의 생애와 순교 행적을 담고 있다.
현재 서울 절두산순교성지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기해ㆍ병오백해 순교자 증언록」은 총 5권으로 20×32cm 크기의 얇은 한지에 증언 부분은 순한글 궁서체, 선교사들의 서명이나 맹세 등은 프랑스어 또는 라틴어로 돼 있다. 영인본으로는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펴낸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시복재판 기록-」(2권)이, 현대문 윤문본으로는 수원교회사연구소가 펴낸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2권)이 있다.
자책
엮은이: 김영수 | 출판사: 흐름
이 책의 저자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교회 창립직후 가해진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신유박해(1801) 즈음에 흥해(지금의 포항)로 유배를 간 천주교인으로 보인다. 당시 천주교인들은 이 박해를 통해 약 1백여 명이 옥사하거나 처형되고 수백 명이 유배되었는데, 저자는 아마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자책』은 배교 후 귀양을 갔던 자의 자기고백서다.
신태보의 옥중수기
유소연 역 | 흐름(디자인흐름) |
신태보는 박해시대로 통칭되는 끔찍한 고문의 시대 속에서 천주교를 정착시키는 주춧돌이었다. 그에게 수난은 자신의 숙명이었다. 끝내 자신의 염원이었던 주교를 만나는 일은 이루지 못했으나, 1838년 시점에서 미완으로 남아 있던 옥중수기가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천주교 역사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복자 신태보는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13년을 감옥에 갇혀 지냈다. 그는 혹독한 감옥생활의 고통을 희생으로 껴안아 기도로 바꾸어 ‘은총’이라 고백했다. 신태보는 자신의 수기를 통해 순교는 물리적 죽음이 아니고 박해나 고통을 껴안고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는 힘이라고 말한다.
정산일기
지은이: 김윤선 | 출판사: 흐름
이도기는 충청도 정산 지역에서 살다 정사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순교자다. 『정산일기』는 그의 생애를 소개하고 정사박해로 옥에 갇혀 순교하기까지 이도기의 약 1년에 걸친 삶과 죽음을 다룬다. 이 책은 교회사의 사료로서뿐 아니라 한국 천주교 문학작품의 하나이다.
『정산일기』는 실제 일기가 아니다. 일기의 형식을 이용해 다른 사람이 이도기의 생애에 대해 쓴 작품이다. 저자를 알 수 없는 것은 이 작품의 단점이나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보다는 시대사적 배경 및 장르적 속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게다가 천주교 박해 시기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저자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저자보다 한국 천주교회가 순교의 현장을 이야기, 그 중에서도 일기의 형식을 통해 기록화하고자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정산일기』가 초기 순교자들의 수기를 기록한 글 중에서 유일하게 저자를 알 수 없었던 것은 책의 주인공인 이도기의 신분에서 유래한다. 이도기는 재산을 팔아 교우촌을 일군 도공이었다. 이 이름은 도가 일어나다라는 문자의 의미를 통해 이도기로 인해 정산 지역 천주교 공동체가 일어났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도기는 오지그릇을 뜻하는 말이기도 해서, 이도기 바오로는 이 씨 성의 옹기장이 바오로라는 의미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정사박해와 무명 순교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산일기』의 의미가 재구되어야 한다.
한국 천주교는 지식인 양반들의 학문에서 시작되었다. 학문에서 시작된 천주학이 차차 신앙으로, 그리고 양반만이 아닌 평민과 하층 계급 백성까지 포함하는 신앙공동체로 이어진다. 이러한 천주교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정사박해이기도 하다. 『정산일기』는 이를 배경으로 무명 순교자의 삶과 죽음을 통해 천주교인의 계층 확대와 천주교 신앙을 고취하고자 한 작품이다.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김대건 신부의 편지 모음)
지은이: 김대건 | 옮긴이: 정진석 추기경 | 출판사: 바오로딸
한국교회 최초의 사제 김대건신부가 사제가 되기 전 1842년부터 1846년 까지 쓴 21통의 편지글 모음이다.
1835년 겨울에 입국한 모방 신부는 방인 성직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1836 년에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어 신학공부를 하게 한다. 최방제는 그곳에서 병사하였고 김대건과 최양업은 사제로 서품을 받는다. 동갑이요 동기동창인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는 서양 학문을 정식으로 익힌 첫 조선인으로서 이 편지글들은 그 당시 조선의 국가 정세와 교회 사정 및 민생 상태에 관하여 예리하게 관찰하고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스승 신부에게 보고하는 내용이다.
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 (최양업신부의편지)
지은이: 최양업 | 옮긴이: 정진석 추기경 | 출판사: 바오로딸
한국의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가 1842년부터 1860년까지 거의 매년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스승 사제께 보고한 편지 모음집이다. 그동안 한국 신자들에게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던 최양업 신부는 김대건 신부와 동기동창생으로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김대건 신부의 순교는 전형 적인 피의 증거이고, 최양업 신부의 사목활동은 모범적인 땀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12년 동안 유일한 조선인 사제로서 조선 8도 중 5개도에 산재 한 127개의 교우촌을 담당하시며 모든 성사를 집전하였고 그 결과로 탈진 하여 만 40세의 한창 나이로 병사하였다. 19개의 이 편지에서는 박해의 암담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봉헌하며 목자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았던 한 사제의 모습을 가까이 느낄 수 있다.
성찰기략
1864년에 간행된 천주교의 고해성사 준비를 위한 성찰서(省察書).
프랑스 주교 다블뤼(Daveluy, A., 安敦伊)가 저술하고, 주교 베르뇌(Berneux, F., 張敬一)가 감준 하였다. 표지명은 ‘셩찰긔략’이다.
고해성사는 죄인의 죄를 그냥 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죄를 탁덕(鐸德:신부를 자칭하는 옛말)에게 낱낱이 고한 뒤에 사함을 받는다. 이 때 죄는 밖으로 드러난 죄만 고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에서 범한 죄까지 고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 고해성사를 돕고 신자들이 성찰하는 길을 열기 위해 고해를 예비할 때마다 보도록 성서에 기본을 두고 편찬된 우리나라 초기의 교리서이다.
===
베르뇌 주교는 성 최형(베드로)에게 출판기계를 맡기고 교회서적 출판 책임자로 임명해 책을 출판했다. 최형 성인의 문초 기록에는 성인이 “「천주성교공과」를 처음 발간하니 4권 1질로 됐으며 3000여 벌을 박아 냈다”고 말하고 또 “「성찰기략」은 60여 장이 1권으로 된 책이나 1000여 권 박아 내었다”고 말했다고 남아있다.
신명초행
보좌주교 다블뤼(Daveluy, M. N. A., 安敦伊)가 『팡세이비엥(Pensez-y-bien)』을 번역하고, 주교 베르뇌(Berneux, S. F., 張敬一)가 감준 하여 상·하 두 권으로 서울에서 간행하였다. 묵상서로는 이전부터 내려오던 『묵상지장(默想指掌)』이 있었으나 묵상 제목이 없었으므로, 이 결함을 보충하여 역술되었다.
다블뤼 주교는 이책의 서(序)에서 업반교리서의 묵상 부분이 부실함을 지적하고 이의 보충을 위해 이 책을 역술하였다고 밝히고 또 이러한 묵상으로 일상생활속에서 냉담과 태만을 물리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책의 구성은 서(序)를 포함하여 전체 34장(章)으로구성되어 있는데, 상권은 대월(對越), 구 령, 영원, 죄, 통회보속, 천주자비, 죽음, 사심판, 지옥, 천당 예수성탄, 예수평상행위 등 19장으로, 하권은 예수 수난, 최후의 만 찬 예수부활, 기도, 묵상, 평상성총, 고해, 성체, 소죄, 애주, 애인, 악한 표양, 혀죄성모 마리아 등의 14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또 각장은 초사(初辭), 계사(繼辭),종사(終辭)로 되어 있어 초사에서는 성서귀절을 인용하여 그 장의 묵상자료를 제시하고, 이어 계사에서는 묵상주제릍 해설한 후, 종사에서는 그 장의 묵상을 마무리짓고 있다. l938년 성서 활판소에서 단권으로 재판되었다.
치명일기
162면. 1895년에 간행된 이 책은 조선교구의 제8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주교 뮈텔(Mutel, G. C. M.)이 1891년 2월, 11년 만에 서울에 들어오자 곧 병인년 이후 박해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여, 4년에 걸쳐 전국 각지에서 모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지역적으로 정리하여 전국 본당에 배포한 것이다.
발행목적은 뮈텔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순교자들 가운데 모범되게 순교한 사람들을 뽑아 장차 성인품(聖人品)에 올리는 데 필요한 확실한 증언을 얻고자 하는 데 있었다.
『치명일기』에는 주교 베르뇌(Berneux, S. F.)를 비롯한 프랑스인 성직자와 한국인 순교자들의 출생지와 신앙상태, 붙잡힌 날짜와 장소, 치명일자와 장소, 나이 등을 지역별로 일련번호를 붙여 기록하였는데 모두 877명의 순교자가 수록되어 있다.
다만, 함경도 영흥에서 순교한 19명에 대하여는 성명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 그 행적에 대하여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치명일기』에 나타난 순교지의 분포로 보아 전국 8도에서 순교자가 생겼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각 지역별 천주교 교세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도 평가된다.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일성록(日省錄)』등 정부문서에 나타난 기록 등을 근거로 하여 26명의 시복(諡福) 수속자 중 24명이 1968년 복자위에 올랐으며, 다시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회죄직지
1864년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가 지은『회죄직지』는 시몬 베르뇌(Simeon Berneux, 張敬一, 1814∼1866) 주교의 감수를 받아 서울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그런데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1865∼1935)의『조선서지(朝鮮書誌: Bibliographie Coréenne)』에 의하면,『회죄직지』의 저자가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 알레니(Giulio. Aleni, 艾儒略, 1582∼1649)로 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알레니 신부가 지은 『회죄요지(悔罪要旨)』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회죄요지』란 책은 「외규장각형지안(外奎章閣形止案)」에 그 이름이 실린 것으로 보아 늦어도 1782년 이전에 조선에 전래되어『회죄직지』와 더불어 배포된 것으로 여겨진다.
===
천주교 서적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자 베르뇌 주교는 1861년 서울에 인쇄소를 설립해 여러 종류의 책들을 간행했다. 선교사들은 교우촌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면서 평신도 지도자인 회장들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볼 수 있는 한글 신심서적들을 저술해냈다. 1864년대에는 「성교절요」, 「회죄직지」, 「성교요리문답」 등을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이러한 작업이 이뤄진 데에는 다블뤼 주교의 공이 컸다. 그는 책을 출판하는 데에 힘쓰면서 「성찰기략」과 같은 책을 자신이 직접 한글로 저술하기도 했다.
성상경
옮긴이: 정종득 신부 | 출판사: 수원교회사연구소
「성상경」은 우리 인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겪으신 고통과 죽음, 즉 그리스도의 수고수난을 묵상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갈고 닦는 수신을 통해 참다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영적 지침서이다.
예수님의 행적을 갈바리아(겟세마니) 동산에 오르신 때부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져 성모님 품에 안길 때까지의 예수님 최후의 모습을 서른가지 대목으로 나누어 하루에 한 가지씩 30일간 묵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와 저술 시기는 불분명한데, 한국천주교회의 고유한 저작인지 아니면 번역본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간행된 1886년이 ‘박해 시기’에서 멀지 않고, 책의 내용 중에도 ‘배교’라든가 ‘성교대행’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박해가 완전히 끝나기 이전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천당직로
옮긴이: 정종득 신부 | 출판사: 수원교회사연구소
『천당직로)』는 중국 사천성(四川省)에서 활동하고 있던 모예 신부가 1776년에 프랑스어로 저술한 『은총론(Le Dogma de la Grâce, mis a la portée des fidèles)』을 중국 신자들이 좀더 이해하기 쉽게 한문으로 의역하고 요약한 것으로 중국 신자들의 영신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책은 박해시기에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어 한글로 번역된 후 신자 대중들에게 널리 읽힘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선조들의 신심함양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천주교회에서 신자들에게 가르치던 구원(영생)의 길이 하느님의 선물인 은총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 은총을 잘 간직하고 활용함으로써 계명을 지키고 선행을 실천해야 함을 설파한 심신수양서로서 커다란 가치가 있다.
이순이 루갈다 남매 옥중 편지
김진소 편저 | 천주교 호남교회 연구소
1858년 다블뤼 주교는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을 쓰고, 1859년부터는 약전에 대한 「보유편」을 작성하던 중 이순이 삼남매의 옥중편지를 발견해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어느 곳에도 원본이 남아 있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1868년 울산 장대에서 순교한 김종륜의 필사본이 유일하게 남아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돼 있다. 이 필사본은 김종륜의 손자인 김병옥이 소중하게 보관해 오다가 교회사가인 지원 김구정 선생께 기증한 것인데, 후에 다시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전해졌다.
한국천주교회 순교역사 안에서 동정부부 순교자 유중철과 이순이 두 분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삶의 표본으로 남겨준 은총이며, 이순이가 몸에 지녔던 십자가와 옥중편지는 그 은총을 증언하고 있다.
사후묵상
조선 땅에 살다 간 무명의 그리스도인 | KIATS 엮음 | KIATS
박해시기의 묵상집으로 당시 고난 당하는 가톨릭 신자들, 특히 일반신자들에게 적지 않은 격려와 위로를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짧은 이야기와 예화를 들고 있으며, 이 세상 삶의 허무함을 예로 드는 과정에서 평범한 사람에서 왕과 왕자에 이르는 다양한 직위의 사람들을 인용했다. 또한 당대 박해로 인한 삶의 덧없음을 강조하듯, 글 전체가 내세와 심판을 또렷하게 강조하고 있다.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다블뤼 주교 저 | 유소연 역 | 내포교회사연구소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다블뤼 주교는 특별히 신심서 및 교리서의 번역 저술을 비롯해 「조선사 서설 비망기」 「조선 순교사 비망기」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등 한국 교회와 순교자들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많은 기록들을 남겼다. 이 가운데 「조선사 서설 비망기」 「조선 순교사 비망기」는 1862년 파리로 보내져 한국교회 순교사를 알리는 귀중한 사료가 됐으며 샤를르 달레 신부는 이를 기초로 「한국 천주교회사」를 저술했다.
한국 천주교회사
샤를르 달레 저 | 안응렬,최석우 역 | 한국교회사연구소
달레가 ≪한국천주교회사≫를 엮을 때 기본 사료로 사용한 것은 1872년부터 1873년에 걸쳐, 조선에서 파리로 보내준 다블뤼(Daveluy,M.N.A., 安敦伊) 신부의 각종 자료였다. 다블뤼 신부는 20여 년을 두고 꾸준히 한국천주교사에 관한 자료와 증언을 수집하였고, 이를 정리, 초고화하여 파리의 외방전교회 본부로 계속 보냈다.
달레 신부는 다블뤼 신부의 이 초고를 거의 그대로 이용하였고, 초고에 없는 기해박해 이후의 사실은 재한 선교사들의 서한과 보고서로 보충하여 방대한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하였다.
세계 교회사상 그 유례가 없는 독특한 신앙의 수용과 교회의 창설과정, 그리고 영웅적인 순교사적 등을 알리기 위하여 1885년부터 파리외방전교회의 성직자들에 의하여 번역이 추진되어 1901년경 번역작업이 완성되었다. 이 원고는 교회에서 발간하는 잡지인 ≪보감 寶鑑≫에 연재되다가(1906∼1910), 그 뒤에는 ≪경향잡지 京鄕雜誌≫에 연재되었다.
그러나 이 번역은 외국인들에 의해 된 것이어서 몇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56년부터 현대문에 의한 새 번역이 착수되었으며, 그 번역이 부분적으로 ≪경향잡지≫에 연재되었다. 그러나 중도에서 중단되었다가 불문학자 안응렬(安應烈)의 꾸준한 노력과 한국교회사연구소(韓國敎會史硏究所)의 뒷받침으로 완역되었다.
이에 교회사가인 최석우(崔奭祐) 신부가 한국측 사료의 교합(校合)에 의한 학문적 주석(註釋)을 달아, 1979년 분도출판사에서 상·중·하 3권으로 분책되어 역주본(譯註本)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