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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24일 수요일, <소양교육>에 참가하시는 선생님들 참고하시라고 답사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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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굴 지역과, 1970년대 풍납토성 항공 사진(밑의 작은 사진은 몽촌토성)
8월 4일 낮 , 흐린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그쳤다하니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풍납토성으로 향했습니다.
493년간 한성백제의 왕성[王城]이었던 하남 위례성.
천호대교 오가며 차창 밖으로 눈을 주면 도로 안쪽으로 둑방 길 하나 서 있고,
풍납토성이 저 어디쯤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저 건너 쪽이나 아래 쯤일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리고 명색이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며, 녹슨 칼 반 토막때문에 고구려를 떠나야 했던 비운[悲運]의 왕자
온조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며 애석하기보다는 흥미진진해 하던 죄가 크고 해서 꼭 한번 찾아 봐야지 했지만,
설마 그 둑방이 풍납토성의 북쪽 성벽인 줄은 짐작조차 못했습니다.
풍납토성의 바깥 쪽인 차도를 지나 북쪽 성벽이 끝나는 곳, <극동씨티아파트> 앞으로 들어 왔습니다.
토성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성벽 끝은 주차장 만든 탓으로 토막 나 있고, 그래도 하고, 성벽 끝까지 가서 서쪽 성벽을 찾아보니 극동씨티아파트,
갑을명가아파트가 성벽 대신 오른쪽 한강 물에 맞서 우뚝 줄 지어 서 있으니 참으로 든든했습니다(?). ^^^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성벽이 무너져 유실되었다고 하지만 ,
그 때 남쪽 성벽 쪽에서 나온 청동 초두와 금허리띠 장식 같은 유물로 인해 이 곳이 하남 위례성이 틀림 없다고,
일본인 사학자 아유카이의 주장이 나온 것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가 새삼스럽습니다.
그래도 극동씨티아파트의 정문(?)과 낮은 담이 벽돌이 아니라 판석으로 쌓아 성벽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어,
역시 풍납토성 안에 있는 아파트는 남 다르구나, 혼자 고개 끄덕이며 한 번 웃었습니다.
여기 북쪽 성벽은 아직 남아 있던 성벽 자취를 따라 1976년 잇대어 쌓아 올린 현대식 성벽입니다.
성벽 안쪽은 정상 아래 쪽에 예비 병력이며 무기와 전투 장비를 마련해 두는 공간이 당연히 필요하지만,
성벽 바깥 쪽에도 같은 계단식 공간을 만든 것을 보면,
적군에 맞서는 '전투'보다는, 성벽 '보호'를 위한 우리들의 우선권이 재미 있습니다. ^^^
주차장과 나란히 서 있는 북벽을 걷다 보니 저 앞이 막다른 골목처럼 막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북벽의 끝, 동벽이 시작되는 커브길입니다.
전봇대 표지판을 보니 "바람드리 15길". 끝집의 대문 기둥을 보니 '한가람로 20길".
'바람'이 '비암(뱀)'이라고 본 두계(斗溪) 이병도(1896~1989)선생이 생각났습니다.
와세다대학 졸업-진단학회 회장-서울대 교수-문교부장관-학술원 회장 등등,
화려한 경력을 가진 그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해서 아차성과 함께 쌓았다는,
뱀 사(蛇)자의 ‘사성(蛇城)’이 바로 풍납토성이다" 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바람 풍(風)' '들입 납(納)'이니 풍납은 "바람들이" = '바람'은 '비암=뱀'이니까 뱀 사(蛇)'= 바람 풍(風)'
그러므로 풍납='사성(蛇城)'. 쉽게 말하면 A=B, B=C ∴ A=C 의 주장입니다.
더 나아가 하남시에 있는 춘궁동(春宮洞)에는 이성산성도 있고, 궁궐 '궁'(宮)자도 들어가니,
춘궁동이 하남 위례성이라고 국어학자도 아니면서 음운론을 근거로 들이댔습니다.
'바람들이 마을' 풍납동을 상징하는 것은 물론 바람개비입니다.
주민들이 직접 만든 바람개비가 <바람개비 동산>에 서서 바람의 방향에 맞춰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아무리 풍납토성이 왕성이라고 해도 주민들에게는 '동산'의 가치밖에 없나 봅니다.
갑자기 성벽이 크게 끊어지면서 성벽은 십자로처럼 차가 다니는 큰 길로 변하고 앞을 가로막는 온누리약국과
맞닥뜨리자 걷기에 지친 나그네, 고개를 잠깐 뒤로 돌려 축대를 받친 동벽의 단면에 시선이 갑니다.
동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한강변과 평행을 이루며 선박처럼 항해 하는 듯 보이는 풍납토성.
1999년 6월에 시작하여 4개월에 걸친 동벽의 구조 조사 결과는한 마디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지하 4m까지 파내려가서야 드러난 성벽의 밑단.
폭 43m, 높이 11~15m, 동벽 서벽(이 있다면) 각각 1500 m, 북벽 300 m, 남벽 200 m 다 합해 3,500 m.
토목공학자의 계산에 따르면 연인원 100만 명을 동원해야 가능한 공사.
구조적으로 성벽은 크게 중심토루와 내벽, 외벽의 3개 구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게다가 현대의 댐 공법처럼, 먼저 황갈색 모래땅 바닥에 50cm 두께로 뻘흙을 깔고 그 위에 20cm 두께의 진흙을 깔아
내진작업을 한 후, 여러 종류의 진흙을 벽돌 쌓듯 번갈아 쌓아 사다리꼴같은 중심토루를 만든 토목 기술은 판측법,
나무틀 안에 뻘흙을 넣고 나뭇잎과 볏집을 깔고 다시 뻘흙 깔기를 10여 차례 이상 반복하여 흙 쓸림을 막는 부엽법.
중심토루 안쪽으로 사질토와 모래, 점토다짐흙과 뻘흙을 다져만든 판축토루를 비스듬하게 덧붙여 내벽을 축조하였고,
내벽 마지막 토루 위쪽에는 강돌을 한 겹씩 깔아 3단으로 만들고, 그 안쪽으로는 할석을 1.5m 이상 쌓아 마무리.
나무로 직사각형 3단 틀을 만들어 1m 간격으로 계단처럼 세워 흙벽의 무너져내림을 막는 공법,
성벽의 바깥 쪽에 강돌을 계단식으로 깔아 방수 처리와 흙 쓸림에 대비했는가 하면,
구역별로 따로따로 성벽을 쌓아 맞춰서 이어나가는 작업은 고도의 측량기술 없이는 이루어 낼 수 없는 토목공법.
성벽에서 나온 목재의 탄소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1c에서 기원 후 2c에 이른다는 수치까지 나오자,
3c 이후를 백제의 온전한 건국으로 보는 기존의 학설을 뒤집기에 이르렀습니다.
더구나 풍납토성 안에서 출토된 왕성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막대한 양의 유물들과 건물지.
그러나 잃어버린 한성백제의 서울 위례성을 찾았다는 흥분은 이곳 주민들 앞에서는 위험합니다.
멱살 잡히기 전에 <한우마을>과 <왈순고기집> 사이의 좁은 길로 바람처럼 들어서자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
성벽 대신 집들이 늘어선 좁은 골목을 한참 걸어 빠져나오자 반갑게도 저 앞에 야트막한 성벽이 비로소 보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지나쳐온 <왈순고기집>에서, 풍납토성보다 더 유명한 맛집^^^ <유천칡냉면집> 간판이 걸린 여기까지의
동쪽 성벽은 무너져 사라진 것이 됩니다.
길을 건너 사람 키만큼 남아 있는 풍납토성 위에 올라섭니다.
제1동문으로 추정되는 이곳답게 교차로 사방은 크고 낮은 집들로 가득합니다.
풍납토성 안에 살고 있는 주민은 현재 1만 가구 5만 여명 정도.
문화재 보존이냐, 주민들의 거주지 보전이냐를 놓고 정부와 주민들간의 갈등이 15년째 진행 중에 있습니다.
재건축하려고 융자까지 받아 주택조합을 만들어 터파기 공사를 시작했는데, 땅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유물과 건물터.
공사는 중지되고 몇 달 지나고 해를 넘겨도 끝이 안 보이는 문화재 발굴,
발굴 경비는 모두 원인 제공자며 주택조합 수익자인 주민들 부담입니다.
발굴 경비와, 은행 융자에 따른 이자 부담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조합원들은 애가 타다 못해 2000년 5월 13일 굴삭기를
동원하여 발굴 현장을 훼손하는 큰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백제 왕성의 부활이 주민들에게는 저주로 다가왔고, 발굴팀들은 모두 주민들의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동벽과 나란히 걷는데 어느 집 담 밑에 기왓장이 쌓여 있는 것을 보자니 혹시 ? ,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물론 백제 기와가 아니었지만, 역사의 현장에서는 이런 재미가 있어야 탐방이 즐거워집니다.^^^
대아 아파트 뒤로 <현대리버빌아파트>가 보입니다.
1997년 1월 1일 진눈깨비 날리던 아침. 선문대 이형구교수가 현대아파트 터파기 공사 현장 5m 아래로 내려가 발견한 백제 토기와 목탄은 하남 위례성 발견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아파트 공사는 중지되고 문화재 발굴팀을 짜 1차 발굴에 들어가고, 백제 초기의 유물들이 대량으로 출토되면서 토성 안 재건축공사는 모두 중지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5년, 그 동안 <현대리버빌아파트>는 무사히 그 자리에 들어섰지만, 외환은행부지는 영어체험학교로 변했고,
경당연립부지는 작년 6월 <경당지구역사공원>으로 개장했고, 미래마을부지는 복토작업이 끝내기에 들어가 곧 역사공원으로 조성한다는 송파구청장의 알림판이 서 있습니다.
다시 동쪽 성벽을 따라 걷습니다.
또다시 성벽이 끊어지며 큰 길이 나타납니다.
영파여고 뒤쪽인 여기가 제2동문자리, 동벽의 정문자리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무더운데 비는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고, 조금씩 지쳐가는데 마침 길 옆에 마트가 있어 맥주 한 캔 사서 마시며 지나가는 백제의 후손들을 구경합니다. 동벽의 정문이 맞다면 이 일대는 백제의 귀족과 관료들이 사는 현대판 '강남 3구'로 자리매김이 되고,^^^ 실제로 우물터와 집자리가 발굴된 곳입니다.
또 이 부근에서 폭과 깊이가 각각 1.5 m 정도 되는 V자 모양의 3중 환호가 발굴되어 풍납토성을 쌓기 이전에 큰 규모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마침 지나가던 한 젊은이에게 사진 한 장 부탁하자 맥주 캔 들고 웃는 나를 싫다 말고 잘 찍어 주어 고마웠습니다.
동벽이 거의 끝나가는데 오른쪽 길에 위례성 발굴의 신호탄이 된 <현대리버빌 2차아파트> 표지가 보입니다.
그 앞을 지나자 토성초등학교, 학교 교문 옆 꺾어지는 길 옆에 안전거울 2개가 세워져 있고 거울 속에 내 모습이
비치길레 <현대 리버빌아파트> 이름이 크게 걸린 아파트 건물을 배경 삼아 사진 몇 장 찍었습니다.
미래마을부지를 보려고 강변 쪽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차도 건너 강변으로 가는 지하도도 보이고 <갑을명가아파트>를 지나서 미래마을부지에 도착했습니다.
발굴은 다 끝나가는 중이고, 복토를 하고 있는데 관리실로 쓰는 컨테이너 몇 개 시선을 끕니다.
재건축을' 훼방한' 이형구교수를 강제로 가두고 4시간 동안 폭언과 폭행을 하며 풍납토성이 위례성이 아니라고
허위 증언을 강요한 조합원들의 '사건현장'이기도 합니다.
미래마을부지는 초록색 철망으로 갇혀 있고,
아직 복토가 덜 끝났는지 발굴지가 한쪽에 보이고 군데군데 빗물 고인 곳이 눈에 띕니다.
5,000점이 넘는 기와조각과,기와를 장식하는 수막새, 초기 한성백제를 증언하는 토기들,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소의 어깨뼈인 갑골이며, 공방의 성격을 나타내는 쇠를 녹이는 데 쓰는 불가마인 화덕과, 대형 건물의 기둥터(*왼쪽 사진부터)는 왕성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유물이라 여기가 틀림 없는 하남 위례성 !!!
그러나 아무리 하남 위례성이라 해도 1500년 전 죽은 사람들의 집 자리에 불과한데,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느냐,
문화재 보존도 중요하지만, 우리들 산 사람 다 죽이는 문화재 보존, 누구를 위한 보존이란 말이냐 !!!
토성의 서쪽 중간쯤 되는 풍납동 197번지에 있는 미래마을부지는 20,955 ㎡ (6,350평) 정도의 면적인데 처음 터파기 할 때에는 기왓장 조각 몇 개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5개 지역으로 나누어 본격적으로 발굴에 들어간 2004년부터 5,000점이 넘는 다량의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고, 뒤이어 동서와 남북을 교차하는 판석이 깔린 넓은 도로, 쇠를 제련할 때 쓰는 불가마 흔적과 폐기물 구덩이, 중국제 자기 파편, 낙랑계 토기 등등.
무엇보다 초대형 여(呂)자형 건물터가 발굴되면서, 그 내부에 네 모서리에 터파기를 한 다음 바닥에다 초석(礎石)을 안치하고 그 위에 나무기둥을 세운 기단 갖춤 건물터까지 확인됨으로써 왕성의 지위는 점점 높아졌습니다.
주민들이 생존권을 내걸고 맞서도 잃어버린 한성백제의 서울인 하남 위례성을 보존하자는 국민들의 여론도 거세지자 결국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주민들의 거주권을 보존해 주자는 방침이 나오기에 이르렀습니다.
철망 가 여기저기에 빨간 나팔꽃과 참 오랜 만에 보는 분꽃이 피어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미래 부지 위쪽에 있는 경당지구에 왔습니다.
면적은 7,913 ㎡ (2,357평), 11년전 주민들이 굴착기를 동원해 발굴지 일부를 파괴한 사건 현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4억원의 공사비를 들여 2010년 6월 <경당지구 역사공원>으로 탈바꿈해 '풍납토성 마스터 플랜' 1호의 첫 영예를 안았습니다.
문은 없지만 입구 오른쪽에 공원 지도와 안내판이 나란히 서 있어 <역사공원>에 대한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자 주민을 위한 헬스기구들이 어서 오십시오란 인사를 하고 있고, 길은 황토 바닥으로 깔려 있어 편안하게 산책하듯 역사탐방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입구 오른쪽에 있는 1구역인 음수대가 있는 곳은 우물터.
처음엔 목탑인 줄 알았지만 발굴 결과,
지표면을 기준으로 최하층 바닥까지 전체 깊이는 4m, 위에서 내려다 본 평면은 위쪽은 타원형에 가까운 방형이며, 그 아래쪽은 각 변 길이 1.2m인 정방형. 상층 2m 가량은 석축이며 그 아래 70㎝ 가량은 나무판재를 짜서 축조한 구조로 드러났습니다. 나무 판재 층에서 완형 토기만 215점 수습하였습니다.
특이한 점은 토기의 입 부분을 일부로 깬 흔적이 있어 토기를 묻을 당시 제사행위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 경당지구 발굴 현장에 서 있는 이형구박사
정문으로 들어와 왼쪽에 있는 4구역은 직사각형의 창고 터.
통나무를 옆으로 뉘여 쌓아 벽체를 만들었고 내부에는 33개체 이상의 중국제 시유도기, 80점 이상의 백제 토기가 빽빽히 놓여 있었습니다. 중국과의 교류를 시사하는 유물입니다.
시유도기와 토기 안에는 도미와 복어의 뼈가 들어있어 귀한 음식물을 저장한 창고로 추정됩니다.
창고 터를 지나면 2구역, 4개의 폐기장이 서로 겹쳐 있는 구덩이 밀집 지역입니다.
구덩이 안에서 9마리의 말머리뼈와 2,000 여점의 토기류와 쌀, 팥 등의 곡물 흔적이 출토되었습니다.
단순한 쓰레기장이 아니라 어떤 제사를 지내고 나서 사용한 그릇과 희생된 동물을 묻은 것으로 보입니다.
물체질을 통해 수거한 운모조각과 복숭아 씨앗은 고대 도교에서 불로장생의 선약이라는 상징성에서 백제 왕실이 도교식
제사를 지낸 유력한 증거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大夫(대부)' '井(정)' 등의 문자가 새겨진 항아리도 기우제를 지낸 도교식 제사의식과 깊은 관련이 있고,
'直' (직) 이란 글자가 새겨진 전돌, 중국의 화폐인 오수전, 초대형 항아리들은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연결됩니다.
구덩이 터 위가 3구역, 미래마을부지에서 발굴 된 여(呂)'자 형상과 똑같은 대형 건물터.
두 건물 모두 훼손되어 남쪽의 작은 건물은 입구인데 동서 5.2m, 남북 6.2m 크기까지만 확인되고 있고,
북쪽의 큰 건물은 동서 18m, 남북 13m까지만 실측할 수 있었습니다.
두 건물 사이에 나무다리를 놓아 드나든 것으로 보이며, 큰 건물 주변에 1.5m 폭의 도량을 파고 깬돌을 깐 뒤 그 위에
깨끗한 숯을 가득 채운 것이 특이합니다. 큰 제사를 지내던 제의장소로 추정합니다.
백제인이 우물물 마시듯, 음수대에 와서 수도꼭지를 돌려 물 한 모금 마셨습니다.
밋밋한 아리수 물맛이지만 역사의 향기가 스며 든 물이라 버들잎 뛰워 마시듯 천천히 음미했습니다.
풍납토성 안 어디를 파도 백제의 유물이 나타나는데,
아직 대궐터라고 확증할 수 있는 건물지나 초석이 나타나지 않아 위례성 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실시한 발굴 면적은 풍납토성의 겨우 10% 정도라고 합니다. 이미 집들이 가득 들어차 있으니 더 이상의
발굴은 어렵지 않을까 싶지만 , 그래도 여기가 위례성이라는 점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한성백제의 서울 위례성을 찾는 노력이 계속되는 한 위례성의 진면목이 나타나리라, 믿고 싶었습니다.
답사의 마지막 코스는 남쪽 성벽, 지나온 길을 되짚어 동쪽 성벽 영파여고 뒤 쪽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이제는 성벽 바깥쪽으로 나와 남쪽을 향해 직행, 건물들이 방해하고 있지만 드문드문 오른 쪽으로 성벽이 보이다가
드디어 동벽의 끝에 있는 <송파종합복지관>이 나타나고,
복지관 뒤로 돌아가면 바로 남쪽 성벽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옵니다.
황토로 포장된 길에 들어서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세운 안내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지난 4월 20일부터 시작된 동쪽 성벽 구조 조사와 함께 해자의 유무를 탐색하는 공사로 인해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발굴 현장은 동벽의 끝이지만,
200m 길이인 남벽의 아래에서만 기웃거릴 수 없어 남벽과 서벽이 꺾어지는 성벽 위에 과감하게(?) ^^^ 올라갔습니다.
오른쪽은 한강극동아파트, 왼쪽은 아산병원, 정면 저멀리 극동씨티아파트가 흐린 날씨 탓에 희미합니다.
2주 전에는 새벽에 오늘처럼 풍납토성을 돌았습니다.
웬 일인지 요즘 들어 풍납토성에 연연해 하는 마음이 일고 있어 이상합니다.
얼마 안 있다 나도 이 토성을 쌓던 백제인들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는 잠재의식 탓인가 싶습니다.
문득 발 앞에 놓인 '풍납 03'의 위치를 표시해 놓은 <세계측지계> 표지석이 눈에 띄었습니다.
N547672. 357 E209805. 340 H17. 814m ,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의 정확한 위치를 측량해 기록한 표지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지구 표면 17m 고지 위에 발을 딛고 서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시간이 그대로 나의 역사라면,
과거의 역사인 이 토성에서 내려가 현재의 역사를 쓰는 저 저자거리로 용감하게 나아가야 겠다고 굳게 마음 먹습니다.
간간히 내리는 빗 속에서의 3시간에 걸친 풍납토성 답사, 쓸쓸했지만 역사의 향기 속에 내가 있었습니다. ****
*남벽 앞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사전답사기록은 현장감이 물씬 묻어나 모두 자신감이 들것 같습니다. 당일 뵙겠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너무 늦은 귀가로 인하여 공지는 날이 밝으면 하도록 해야 되겠네요. 다음주 수요일 풍납토성에서 뵈요*^^*
역~시~~~~~(풍월주인님) 짜 ㅇ 짜 ㅇ ^ ^
고맙습니다.
생생한 사전답사 기록물 재미가 넘쳐남니다 고맙습니다
지금 풍납토성 답사 마치고 왔습니다. 참가자는 11명. 이성주학예사님의 출토유물 알찬 해설 듣고, 미래마을지구, 경당지구, 동쪽 성벽 가볍게 밟고, 남쪽 성벽 올라가 서쪽 성벽 바라보았습니다. 유천냉면 먹으며 백제의 역사 속에 들어간 3시간 탐방 함께 공부하며 유익한 시간 가졌다고 평가했습니다. 선생님들, 부족한 해설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답사기를 오늘에서야 읽었습니다. 어제는 어찌 물 한병 사다 드릴 생각을 못했는지(아이고 두야)
..... 머리나쁜 사람은 할 수 없나봅니다. 올려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