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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13:30-33) 가데스 바네야 실패의 진짜 원인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우리가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13:30-33)
치명적인 선택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일 세대 중 이십 세 이상의 남자들은 가데스 바네야에서 하나님의 진군 명령을 거역함으로써 40여 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다 죽는 벌을 받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듯이 한 번의 잘못으로 아무 보람과 의미도 찾지 못한 채 인생을 허비해 버렸습니다.
오랫동안 품었던 큰 꿈이 이제 막 실현되려는 찰나에 무산되는 것만큼 실망스럽고 원통한 일이 없습니다. 사방이 완전히 막혀서 아무 소망이 보이지 않을 때는 그냥 체념하고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북한 주민이 70년이 넘도록 김씨 독재 왕조의 노예가 되어서 인권과 자유라는 말도 모르는 채 세계에서 최고로 가난하고 불쌍한 삶을 이어가듯이 말입니다.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노예로 살 때는 그것이 숙명인가 보다 여겼을 것입니다. 여호와가 선조 아브라함에게 구출을 약속한 때가 다가오기는 했어도 모든 상황이 그 실현을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히브리인의 노동력 덕을 단단히 보고 있는 애굽이 반란이나 탈출은 꿈도 꾸지 못하도록 막강한 군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이 아니고는 유대 민족만의 나라를 세워서 자유롭게 살아갈 길이라고는 현실적으로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절망 중에 갑자기 한 노인이 지팡이 하나만 들고 나타나서 너무나 놀랍게도 바로와 맞상대하여 열 번이나 무참하게 패배시켰습니다. 자기들 생전에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출애굽의 기적이 일어났고 그 나라의 금은보화까지 챙겨서 당당하게 걸어 나왔습니다.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추격해 오는 애굽의 전차 군단도 하나님이 홍해 바다에 수장시켜 버리고 이스라엘을 구해 주었습니다. 이제 그런 큰 권능의 하나님과 함께 가데스 바네야의 경계선만 넘으면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수백 년간 노예로 굴종하는 삶이 몸에 밴 탓인지 몰라도 스스로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가나안 진군을 거부했습니다. 출애굽 후 자유민으로서 맘껏 행동하는 기쁨을 맛보았으나 한순간의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오랜 민족적 소망은 산산조각났습니다. 시키는 대로만 일하면 먹고 마시는 것은 보장되었던 노예 시절보다 훨씬 못하게 되었으니까, 광야 방황 내내 차라리 애굽이 나았다고 하나님께 불평 원망했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었는가?
흔히들 이스라엘의 실패 원인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거나 부족했다고 진단합니다. 세상 어느 민족도 맛보기는커녕 알지도 못했던 엄청났던 기적 체험을 너무 빨리 쉽게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큰 권능을 온전히 믿고서 갈렙의 권면대로 담대하게 진군했더라면 분명히 그분이 주시는 큰 승리를 얻었을 것이므로 틀린 해석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취한 행동과 그에 따른 결말에만 주목한 너무 단순한 해석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겉으로 실현된 모습만으로 이해하면, 믿음의 성숙도도 하나님께 행동으로 얼마나 신실하게 순종하는지 한 가지 기준만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자신의 의지력과 실행력을 최대한 늘리는 것이 믿음이 자라게 하는 방안이 됩니다. 믿음이 없거나 부족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순종의 행동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믿음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그렇게 쉽게 또 빨리 잊었을 리는 만무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후에 사백 년간 노예로 지내느라 전투 경험이 전혀 없어서 애굽 국경 수비대를 보면 두려워할까 봐 광야로 우회시켰습니다. 또 시내 산에서 율법을 수여해 주면서 나라의 제도를 완비시켰고 성막도 만들게 했으며 전쟁을 치를 인구조사도 시켰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일 년 정도 걸렸기에 그 엄청났던 애굽의 열 재앙과 홍해의 기적이 불과 일 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광야 행군 중에도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의 생수 기적들을 누렸고, 처음으로 아말렉과 전투를 직접 치루면서 하나님이 주신 큰 승리도 체험했습니다.(출16, 17장) 가데스를 정탐하는 중에도 만나를 먹고 있는 판국에 어떻게 하나님의 권능을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따져도 그분의 권능을 열두 명 중의 열 명은 잊고 두 명만 기억했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기보다는, 열악한 신체 조건과 변변찮은 무기 상태와 전쟁 경험 부족으로 인한 자신들의 전투력을 도무지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가데스 거민의 장대함 때문에 하나님을 잠시 잊었을 수 있지만, 갈렙의 설득과 권면을 듣고는 그분의 권능을 다시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반역을 조금 다른 차원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행동적 측면으로 접근하지 말고 기본적인 마음의 상태로 파악해야 합니다. 머리에서 지시하는 대로 사지가 움직이는 것이 행동이지 머리와 행동이 따로 노는 법은 없습니다. 영웅이 되기는 쉬우나 좋은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고 말하듯이, 믿음을 한 번의 담대한 행동만으로 판단해선 안 되며 평소에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거의 일상적으로 체험하다 보니까 오히려 너무 과신했을 수 있습니다. 당시의 최강국 애굽을 상대할 때는 자기들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 혼자서 큰 기적으로 무참히 패배시켜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렇게 해주시면 되지 왜 굳이 저 장대한 자들과 싸우게 만드느냐는 의심과 원망이 들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따져봐도 패배가 뻔한 전투에 억지로 몰아넣는 것 같으니까, 비록 하나님의 명령이긴 해도 거역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승리를 주신다고 해도 많은 사망자가 나올 것이므로 진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실존과 권능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그분을 거역한 것이 전혀 아니며, 자기들이 직접 나서서 싸우는 것이 너무 귀찮고 싫었다고 해야 더 정확한 해석이 될 것입니다.
정탐의 목적
어쨌든 가데스에서 이스라엘의 믿음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는 있는데, 그 정확한 실상은 하나님의 생각과 이스라엘의 생각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눠진 것입니다. 불신앙을 행동으로 불순종하는 것보다는 마음이 하나님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차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당신을 위해서 의로운 행동을 해주기 이전에, 당신이 바라는 바대로 세상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가데스의 반역 사건은 신자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 잘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열두 정탐꾼을 보내는 일에서도 하나님의 생각과 이스라엘의 생각은 극명하게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정탐의 결과에 비추어서, 즉 가데스 주민들의 대응 태세에 따라서 이스라엘에 승리를 줄 것이냐, 패배를 줄 것이냐를 결정하려는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분에게 승리는 사백 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할 때 이미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에서와 광야에서 큰 기적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큰 권능으로 이뤄내는 큰 승리들을 미리 계속 보여 주었으며 또 그런 하나님이 함께하므로 안심하고 진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열두 정탐꾼을 보내라고 명하신 까닭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 땅이 정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대표들더러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둘째는 전쟁 전략과 전술을 상대의 대응 상태에 맞춰서 지혜롭게 짜라는 것입니다. 전투를 하느냐 마느냐는 그들이 선택할 문제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가나안과 전쟁을 쳐야만 하고 또 어느 정도의 희생도 당연히 각오해야 합니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사항은 하나님이 주실 승리는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정탐꾼들도 하나님의 첫째 이유인 가나안 땅의 상태에 대해선 정확히 확인했습니다. 포도송이가 너무 굵고 알차게 달려서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서 매어야 할 정도였고(23절), 그들 스스로 과연 그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르더라고(27절) 보고했습니다. 둘째 이유인 적진 탐색에 대해서도 요새의 위치와 군사 숫자와 무기 상태 등을 파악해 도면으로 그렸을 것이며 자기들끼리 어떻게 전투하는 것이 좋겠다고 논의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장대한 거민과 웅장한 성벽이 자꾸 아른거려서 승리에 대한 자신감은 점점 줄어들고 두려움에 휩싸인 것입니다.
그들이 그 땅은 좋은데 군사가 너무 강해 보이더라는 보고를 하자마자 이스라엘 회중도 함께 메뚜기 신드롬에 빠져버렸습니다. 전쟁 경험이 일천하고 변변한 무기가 없는 오합지졸들이라 순간적으로 그럴 수는 있으나, 그다음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당장 전쟁 치르기 싫다고 뒤로 자빠졌습니다. 말하자면 정탐 결과를 자신들이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 스스로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는데, 하나님이 정탐을 시킨 목적과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마음의 중심
이를 두고 상황이 바뀌면 연약한 인간이 그럴 수도 있다고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이 반드시 나아가야 할 향후 진로를 자기들 임의로 결정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사백 년 전에 확정해 놓은 계획이며 자기들도 흔쾌히 동의하고서 기꺼이 따라나섰습니다. 마지막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들만의 나라가 아름답게 세워지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자기들의 것이 됩니다.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픈 욕심 내지 소망이 없었을 리 없습니다. 문제는 무슨 일이든 하나님을 제치고 자기들 독단으로 결정해도 된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사소한 일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나안 정복은 이미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일입니다. 자기들은 물론 후손 대대로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온전한 보금자리를 차지하느냐 마느냐는 역사상 한 번뿐인 절대적인 순간인데도 그랬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근본적인 마음 상태가 하나님을 순전하게 따를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들 판단과 계획대로 인생을 살아가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인생관과 가치관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동안 여러 번 보여줬던 하나님의 큰 권능을 이번에도 양껏 발휘해 달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욕심이 나지만 자기들이 전쟁 치르다 죽는 것은 너무 싫다는 것입니다.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식으로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속내를 모를 리 없으며 애굽에 비하면 가나안은 슬쩍 한 번만 힘을 써주면 되는데도 왜 냉정하게 거절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적은 당신이 규정한 세상사를 통치 주관하는 법칙을 스스로 거스르는 일이므로, 그 운행 원리가 통하지 않는 비상한 경우에 한해서 발동하십니다. 애굽의 열 재앙과 홍해의 기적은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이 도무지 바로와 그 군대를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으켜 준 것입니다. 광야에서도 먹고 마실 것을 도무지 구할 수 없기에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의 생수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반면에 가데스와의 전쟁은 이스라엘 스스로 일상적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일지라도 하나님이 일상적 삶에까지 일일이 당신의 기적을 베풀 수는 없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혼자서 다 할 수 있는 일까지 부모가 대신 다해주면 아이는 어른이 되어도 평생 미숙아로 남기에 인간 부모도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가데스에서도 하나님은 이젠 당신을 믿고 따르는 너희들이 세상의 사악한 세력과 직접 싸워서 이기라고 정탐꾼을 보내게 했으며, 그 전에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이미 체험시킨 것입니다. 그때 모세가 산 위에서 아론과 훌과 함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면 여호수아는 산 아래의 전투에 직접 참여하여서 혁혁한 승리를 이뤄냈습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나안 땅에 진군해 들어가선 이미 받은 율법대로 거룩하게 살면서 열방들 앞에 여호와를 알게 해주는 제사장 나라로 든든히 서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려면 가데스의 전투에서부터 객관적 전투력의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믿고 담대히 싸웠더니 오히려 아낙 같은 거인 군대가 완전히 패배했다는 것을 애굽에서처럼 가나안 족속들 앞에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승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승리 후에 당신은 물론 당신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의 이름까지도 이방 세상에서 크게 높여줄 계획을 마련해 놓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하나님은 지금 한 치의 어김 없이 실현해 나가는 중입니다.
믿음보다 앎.
인간은 누구나 그분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기에 불신자들도 하나님의 실존과 권능은 믿습니다. 스스로 통제가 불가능한 큰 불행이나 환난이 닥치면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우스갯소리이긴 하지만 스님도 물에 빠지면 부처님 대신에 하느님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들도 인간과는 비교가 안 되는 큰 권능을 가진 절대자가 세상만사를 주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운행하는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 영원한 사실인 것처럼 그분의 실존과 권능도 영원한 진리입니다.
인간이 그분의 실존과 권능을 더 잘 믿으려고 노력을 더 많이 한다고 해서 없었던 그분이 갑자기 나타나고 또 없거나 부족했던 그분의 권능이 훨씬 더 늘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자존하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고 그분의 권능은 인간이 인지하는 시공간은 물론 그것을 훨씬 초월해서도 완벽하게 역사합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 자체가 그분의 실존과 전지전능하심에 대해서 더 이상 의심 없이 확실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굳이 따로 더 믿으려 노력할 필요가 없는 대신에, 그분의 실존과 권능을 신자도 자신이 속한 물리적 시공간을 뛰어넘는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이 위급할 때만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은 그런 존재와 평소에 친밀한 개인적인 관계를 전혀 맺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그 절대자가 불신자들의 인생이나 공동체를 향한 사전에 마련된 어떤 영광스러운 계획도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당연히 그와 정반대입니다. 그들 스스로 여호와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듯이, 당신만의 거룩한 계획을 갖고서 자기들을 대대로 보호 인도하시는 분으로 익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육신뿐 아니라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그분이 먼저 찾아오셔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해서 당신만을 섬기는 나라를 세워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이 실현될 시기까지 밝혀 주었고, 또 그때가 이르기 전에는 노예가 되어 오랫동안 이방 나라를 섬길 것이라는 것까지 계시해 주었습니다. (창 15장)
그 약속하신 때가 되자 구원자 모세를 보내어 큰 이적을 베풀며 출애굽 시켰고 또 먹고 마실 것 없는 광야에서 지켜 보호하신 후에 가나안 땅의 경계에까지 이르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그분이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도, 사실상 믿음으로 접근 이해 적용할 차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분의 약속은 단순하게 이미 확정된 사실이자 진리라고 알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안다면, 당신의 약속을 못 이룰 리 없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더러 그런 앎을 실제로 체험하게 하려고 그동안 현장 학습을 많이 시켰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굳건하게 ‘믿도록’이 아니라 확실하게 ‘알게’ 해준 것입니다.
불신앙의 뜻
따라서 가데스에서 이스라엘이 그분에 대해 취할 반응은 단순히 여호와께 기도하면서 가데스를 향해 진군하는 것 하나면 됩니다. 그렇게 하라고 그 땅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고센 땅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풍요롭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다시 확인시킨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이 사백 년 전부터 확정해 놓은 약속을 받지 않겠다고 대놓고 거부한 것입니다.
불신앙은 그분의 실존과 권능을 못 믿는 식의 초보적인 차원이 절대 아닙니다. 불신자들도 그 정도는 믿으며, 지금 이스라엘도 기적을 바라니까 그런 차원은 더 강하게 믿었습니다. 문제는 그분이 어떤 분이며 자기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정확히 따져보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노예살이하고 있던 와중에 모세가 나타나 여기까지 이르도록 하나님은 당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미처 기억하지 못한 것입니다. 출애굽부터 겪은 현장 학습들을 잠시 한 번만 리뷰했더라면, 아무리 아낙 자손처럼 가데스 군인들이 장대해도 그분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도 말입니다.
물론 눈앞의 고달픈 현실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을 잠시 잊어버릴 수는 있어도 다시 그분에 대한 앎을 떠올리면 됩니다. 불신앙이란 하나님을 온전히 하나님답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고 불순종은 그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처럼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는 그분의 방식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자기들 식으로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마저 자기 생각대로 고치려 드는 것이며, 최대한 양보해서 자기 마음에 들 때만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인생과 세상의 주인이라는 원죄의 뿌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원죄의 뿌리란 바꿔 말해서 하나님 그분 쪽에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정확히 모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분에게 어린애처럼 사탕만 달라고 졸랐으나, 그분은 이스라엘로 세상에서 최고로 멋진 신사로 키우려고 완벽한 계획과 방법으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도 그런 사실을 알고도 단지 귀찮고 게을러서 그분의 훈육을 의도적으로 거부한 것입니다. 학생이 학교 가기 싫다고 매번 울면서 투정 부리는 것을 넘어서, 학교 가라고 하는 부모는 부모로 인정하지 않겠다며 집을 나가서 갱단 생활을 하는 꼴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지금 구약 시대 이스라엘을 탓하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인정하지 않기는 이 세대가 가장 심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당신께서 죽기까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그것도 죄의 노예가 되어서 당신과 원수가 되었음에도 사랑한다는 확실한 증표이지 않습니까? 너희 모든 죄악을 내 죽음으로 대신 갚아 준 은혜를 순전히 믿으면 어떤 추궁과 추가 요구 조건 없이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겠다는 애끓는 호소이지 않습니까? 그 사랑을 순순히 받아들이면 영생이고 그런 사랑마저 거부하면, 어폐가 있지만 당신도 어쩔 수 없이 영벌을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인생과 세상의 주인이라고 고집합니다. 자기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용서를 받아들여야 할 만큼 죄인이 아니라고 자부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점이 없다고 큰소리쳐도 실은 겨우 법을 어기지 않아서 감옥에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말로나 생각으로나 가장 가까운 부모와 자식마저 수시로 살인하면서 자기 같은 자야말로 천국 가야 한다고, 하늘에서 보면 우습게 여길 수밖에 없는 헛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불신 세상은 그렇다 쳐도 교회 안이 더 문제입니다. 새벽 기도마다 당장 눈앞의 고난을 어서 빨리 없애달라고 떼만 씁니다. 그 고달픈 사정은 이해가 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기도하는 것 자체가 가데스의 이스라엘처럼 그분의 실존과 권능만 너무 화끈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하나님을 자기가 정한 때와 방식으로 조종하려고 든 것인데, 한마디로 인생과 세상의 주인이 신자 자신입니다. 그 고난이 대체로 자신이 직접 부딪혀서 하나씩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일상적 일인데도 기적적인 간섭을 긴급하게 일으켜 달라고만 기도합니다.
오로지 기도한 내용대로 자기 방식과 때에 응답되어야만 한다고 고집하는 것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죄인지도 모르고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방식은 물론 믿음의 내용과 결과도 자기가 미리 다 정합니다. 현실의 삶을 성경 말씀과 기도 가운데 계시해 주시는 하나님의 영적 진리와 연결시켜 보지 않습니다. 오직 형통 출세시켜 주거나, 최소한 고난에서 빨리 벗어나게 해서 무사 무탈하게 해주는 하나님만 열심히 믿겠다는 뜻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종교적 열심과 치성을 다 바칠 테니까 그에 걸맞도록 하나님도 나에게 베풀라는 것이 믿음의 거의 전부입니다. 좀 심하게 말해서 불신자들이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요구하는 내용을 하나님께 적용하고 있습니다.
신자란 십자가에서 자기를 대신해 죽으시고 죄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믿는 자입니다. 그분의 은혜를 순전히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영생 안에 동참한 것입니다. 마지막 날의 부활을 그 실현이 확정된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신자가 부활 영광을 누릴 때까지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것은 세상에 어떤 것도 없으며 신자의 죽음마저도 그 실현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약속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는 첫 단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실존과 권능만 붙드는 것으로 그치면 불신자의 믿음이고, 그분의 약속에 실제로 동참하여서 살고 있어야만 신자의 믿음입니다. 가데스에서 이스라엘의 결정적 잘못도 그분의 약속에 정확히 말해서 그분의 사랑에 동참할 의지는 물론 소원조차 사라진 것입니다. 대신에 그분의 권능만 자기들 필요와 요구에 맞춰달라고 고집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을 솔직히 점검해 보길 원합니다. 정말로 마지막 날 부활의 약속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실현이 가능하거나 실패의 가능성이 있는 약속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 그분의 약속입니다. 그분을 알고 있다면 그 약속에 그냥 참여하여서 누리면 됩니다. 이 땅에서 사람과 죄악과 사탄의 훼방은 전혀 문제 되지 않으며, 혹시라도 현실의 삶이 아낙 자손같이 거대해 보여도 주님의 손을 잡고 당당히 한 걸음씩 전진하면 됩니다.
(5/18/2025) 박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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