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사진집이다. 책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사진작가 성남훈은 2002년 3월 15일부터 4월 12일까지 아프카니스탄에 들어가 주로 여자와 어린애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그의 사진들은 전쟁을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전쟁이 어떻게 연약한 이들의 삶을 거머쥐고 뒤흔드는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현장성이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아프카니스탄이란 현장에 가지 않았다면 이 사진들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폐허가 된 임시학교 흑판 위에 남은 무수한 탄흔들, 목발을 짚고 둥근 산과 마주 보고 서 있는 소년, 오랜 내전(內戰)에서 오는 삶의 피로를 내면화하고 있는 고아원에 유폐된 소년들의 무표정한 얼굴들, 불안과 두려움을 담은 소녀들의 눈동자..... 전쟁의 공포와 파괴적인 흔적들은 개개의 삶과 그 주변의 풍경 속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다. 성남훈은 그 피사체들을 직선적으로 담아낸다. 그의 사진들은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사진들과는 다르다. 그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안정적 구도는 그가 자극적인 센세이셔널리즘을 피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그는 대상을 선택해 접근하고 사진언어로 투명화할 뿐 우리에게 제 주관적 판단이나 정서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의 사진들이 추상적이고 모호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대신에 있는 그대로의 생태학적 접근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전쟁은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물리적 힘으로 해결하려는 데서 파생되는 국가적 폭력의 한 형태다. 그것은 공의와 갖가지 명분으로 포장되지만 결국은 사람의 삶을 고통과 장애로 일그러뜨리는 인위적 재앙이다. 그 재앙의 영향력은 주로 힘없고 연약한 것들에 미친다. 전쟁은 남자들이 일으키지만 그것의 가장 큰 희생자들은 여자와 어린애들인 것이다. 모든 전쟁은 기념비적인 사진들을 남긴다. 사진은 지나가는 것의 현재화이며, 되풀이 할 수 없는 것의 물증화(物證化)다. 그렇다고 사진작업이 흐름을 부동화(不動化)시켜 시간을 화석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장소·시간과 작가의 의식 사이에 이루어진 능동적 소통의 흔적을 드러낸다. 성남훈은 전쟁의 파괴적인 힘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탐색하기 위해 구체적 세부를 물고늘어진다. 그의 사진들은 일광에 바랜 황토, 무너진 벽들, 황량한 폐허, 속수무책인 몸의 불행, 무겁게 내려앉은 회색빛 하늘들, 그것들과 대조적으로 여자들이 입고 있는 도발적으로 생기발랄한 푸른색의 옷과 차도르, 그리고 순진무구한 소년과 소녀들의 생생한 눈빛과 표정(때로는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을 느끼게 하는 표정들 !), 파안대소(破顔大笑), 무심한 듯 자명한 일상의 어느 순간들, 꽃, 그리고 원경(遠景)으로 잡은 하늘과 산에 포커스를 맞춘다. 작가는 정신적 외상(外傷), 불안과 공포, 전쟁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희생자들에 대한 문화인류학적인 접근에 애초부터 뜻이 없다. 물론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불가피하게 그런 흔적이 언뜻언뜻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전쟁이라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조차 절망을 이겨내고 희망을 붙잡고 싶어하는 작가의 의지를 더 선명하게 새긴다.
사진은 우연에 의해서 발화된 기회와 만남의 결과물이다. 성남훈의 어느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가슴이 저린 아픔과 감동을 동시에 느꼈다. 직관에 의지해 몇 줄의 글들을 덧붙인 것은 독자들과 내 느낌을 공유하려는 갸륵한 뜻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의도가 꼭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보는 것은 언어를 앞질러간다. 사진언어의 명증성을 통해 얻는 순간에 대한 명석한 해석과 심미적 기쁨은 오로지 사진작가 성남훈의 몫이고, 나머지 사진언어를 줄글로 동어반복한 지루함은 내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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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것은 무엇보다 좋은 것이다. 살아 있어 웃을 수 있다. 빵을 구한 저 형제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장미보다도 눈물보다도 더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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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푸른 옷자락에 가린 소녀의 얼굴을 보라. 푸른 색 속에 감춘 저 어린 생을..... 저 어린 생을 푸른 옷자락 속에 기어코 감춘 것은 그것이 다쳐서는 안될 심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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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고 있다. 당나귀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고 이동한다. 여기 아닌 저기에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빵과 꽃과 일들, 혹은 사랑하는 가족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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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감출 수가 없다. 때묻은 푸른 옷 속에 숨은 소년의 눈빛은 가난 저 너머를 바라본다. 저 소년이 언젠가 슬픔의 힘으로 꽃과 새잎을 피워 내리라는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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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조용하고 유순한 아이들 ! 문명적인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건물 벽에 나란히 기대앉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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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읽고 쓰며 배운다는 것, 그것은 숭고하다. 왜냐하면 배움은 알 수 없는 혼돈을 제 머리와 손의 기획 속에서 투명하게 만들어 가는 능동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창문으로 비껴 들어와 소년의 등을 비추고 있는 이 빛은 소년이 맞게 될 미래를 비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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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일은 사는 일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무엇을 먹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열 번의 겨울이 지나고 열한 번의 봄이 왔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정면을 응시하는 소년의 두 눈도 오랜 수고 끝에 먹이를 거머쥔 야생동물의 눈빛처럼 번뜩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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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실내의 천장을 향해 치켜든 이 손들은 피묻은 깃발들이 아니다. 이 적극적인 손들은 파괴하는 자들과 살육하는 자들을 향해 추악하다고 증언할 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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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추악한 것은 한번도 꽃 피어나 본 적이 없는 소녀들의 생의 가능성을 남김없이 앗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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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유랑지를 떠도는가 ? 우리는 왜 흙벽에 기대서서 울어야만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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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돌 위에 올라서서 지평선 끝을 응시한다. 땅에 낮게 엎드려 있는 천막 위로 검은 구름들이 떠가는 불길한 하늘만 광활하다. 저 지평선 너머에 방금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 젖빠는 송아지들, 꽃망울 벙그는 붉은 동백들, 책상 위의 읽지 않은 책들, 방금 구워낸 빵들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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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총을 들었나 ? 누가 내게서 타인의 가슴팍에 총을 겨누는 만행을 거부할 천부의 양심을 강제로 거스르게 하는가 ? 누가 내 손에 총 대신에 꽃을 들 천부의 권리를 앗아가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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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는 늑대가 아니다. 탱크는 쇠로 된 살육기계다. 탱크 위에 올라앉은 이 소년은 머지않아 살육기계의 운전병으로 징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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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복과 증오 때문이 아니다. 내 아이와 처를 지키기 위해 나는 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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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먹성 좋은 짐승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씹어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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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유를 차압한 권리를 그들에게 부여한 것은 누구인가 ? 내 청춘의 빛나는 가능성들을 묶고 있는 이 쇠사슬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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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유 속에 삶은 없다. 오로지 견딤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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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병사의 두 다리는 의족이다. 땅위에 굳건히 서고 걷고 달릴 수 있는 다리는 생명의 근원적 원천이다. 산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훨씬 더 많은 이 소년 병사는 두 다리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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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무차별적이다. 전쟁은 총을 들 수 없는 소년들의 손까지 뺏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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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헐벗은 이 들판 위에서 오체투지하며 신께 경배드릴 수 있는 자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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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누군가를 살상하기 위해 지뢰를 묻고 또 지뢰를 캐내는 어리석음을 반복할 줄 아는 유일한 동물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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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는 일의 이 하염없음이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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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의 지붕 위까지 빼꼭하게 올라앉은 이 사람들은 소풍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피난길에 나선 여기 이 사람들도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다. 피난은 오늘의 죽음을 내일로 유예시키는 덧없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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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이라니 ! 이 남자가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은 꽃이 아니라 피고지는 사람의 목숨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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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등성이까지 빽빽하게 들어선 흙으로 지은 가옥들 ! 사람들은 집이라는 낳고 죽는 장소를 발명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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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쳐 가는 산능선들, 그 위의 하늘. 신은 여기 어딘가에 깃들어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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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은 인간만의 유일한 능력이다. 푸른 베일 저 너머에서 젊은 여자는 자꾸만 새움처럼 돋아나는 웃음을 건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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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처럼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것은 문명의 산물이다 ! 타자를 잠재적 폭력자로 규정하고 그 근접을 차단하는 이 생생한 경계의 물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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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기쁨이다. 저 벽에 흰빛이 만든 무늬를 보라. 배움은 어느 순간에도, 심지어 전쟁 중이라도 멈출 수 없는 신성한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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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고 뜨거운 햇빛에 익어 가는 차들과 건물들을 보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저 자명한 일상 속에 살육의 힘들이 숨을 죽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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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잎 막 피어난 보리수나무의 그늘 같은 주름스커트 자락, 혹은 그 나뭇가지에 잠시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새 같은 망사스타킹 신은 발을 감싸고 있는 검은 구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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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옷을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들 뒤로 꽃핀 빈약한 나뭇가지들이 보인다. 전쟁으로 희망을 탕진한 땅에서도 나무들은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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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벽에 빽빽하게 달라붙어 있는 여배우의 사진들. 전쟁 중에도 아름다움에 대한 소비는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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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오래된 사진기 앞에 앉아 있는 소년은 세월이 흐른 뒤에 이 시간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순간의 빛과 소리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진기는 이 순간을 한 점 부동(不動)의 화석으로 붙잡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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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가 기다림을 낳는다. 기다림, 혹은 난생(卵生)의 꿈에서 부화되는 희망의 몸짓. 기다림은 인류의 역사만큼 유서가 깊다. 그것은 영원히 반복되는 인류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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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연과 무관할 때 숭고해진다. 먼 산 능선 위로 떠올랐던 해가 지고 있다. 지기 직전의 해 때문에 하늘 한편이 하얗다. 하늘은 하늘답고 산은 산답다. 그 앞을 네 사람이 숙연하게 걸어간다. 인간이 자연을 조악하게 훼손하거나 거칠게 제압하지 않고 그 안에서 겸손하게 공존을 모색할 때 세상은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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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두 개의 다리가 있어야만 지상에 굳건하게 발을 딛고 선다. 건강한 두 다리는 직립보행의 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잃어버린 것은 다리 한쪽이지만 이제 똑바로 서기 위해서는 남은 다리 하나에다가 두 개의 목발이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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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미쳤다 ! 저 미친 세상이 내 어린 생을 전염시킬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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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과 장난기를 가득 담은 어린 형제의 얼굴에 떠오른 이 웃음은 신실하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견고한 것들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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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굴은 무조건 무죄(無罪)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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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복잡한 문제들을 단 한방에 제압해버리는 이 파안대소(破顔大笑)의 한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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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跳躍) ! 땅에 다시 돌아오기 위하여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이 위태롭고 무위(無爲)한 행위는 예술과 운동의 한 장르에서 성공을 거둔다. 척박한 땅에서도 도약하는 무용수와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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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아이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서 있는 것은 폐허의 벽이다. 하늘에는 흰구름, 땅에는 아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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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속에 서 있으면 사람의 얼굴도 꽃이 된다. 때때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인성이 아니라 그가 받아들일 수밖에 현실의 조건이다. 현실의 조건이 인성조차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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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빛으로, 구속에서 자유에로 뛰쳐나가는 것은 소녀만이 아니다. 문밖의 세계를 향해 달려가는 소녀의 그림자가 임시학교의 내부에 아직 남아 있다. 마치 임시학교 안의 음험한 어둠이 소녀의 그림자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치는 것 같다. 그러나, 소녀는 곧 문밖의 세계로 사라질 것이고 그때쯤 그림자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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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 사이에 두 소년이 서 있다. 한 소년이 폐허의 기둥에 기대 피리를 불고, 그보다 더 어린 소년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다. 인류의 아주 오래된 평화로운 시간들이 이들 사이를 천천히 빠져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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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하게 생겨난 탄흔들이 흑판을 한 장의 추상화 화면으로 만들었다. 흑판 위에 멋진 필체로 써 있는 문자는 아랍어다. 흑판 위에 적힌 아랍어 문장의 뜻은 "누구나 학교에 가면 인간이 될 수 있고, 세계에서 유명한 사람도 될 수 있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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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축구공 하나만 있어도 소년들은 세상을 즐거운 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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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공이 소년들의 몸에서 역동적인 몸짓과 그 그림자를 이끌어낸다. 이 진지한 몰입은 가난과 전쟁 따위가 만들어내는 억압이 깃들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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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중심이다. 집은 피난처다. 집은 낙원이다. 그러니 세 형제가 손을 맞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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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세상을 구하러 내려온 성모(聖母)구나 ! 땅위에 솟은 새싹이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