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옹정의 내치에 관해서, 그리고 그 사람됨의 성격과 행동에 관해서 말을 했는데, 옹정은 항상 자신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대항하는 모든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 조차도 쉽게 다룰 수 없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옹정의 통제 영역을 벗어난 ─ 즉 소위 청 제국의 신민이 아닌, 전혀 별개의 존재들이 그러했습니다. 준가르 말입니다.
상종하기 힘든 무리들에 대해, 옹정이 내린 조치는 철군 조치였습니다.
청나라의 서북 전쟁은 여러가지 면에서 몹시 흥미로운데, 소위 말하는 '근대화' 되지 않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전근대적' 국가가 보여줄 수 있는 역량의 최고점과 한계, 마지노선이 바로 청나라의 서북 전쟁에 담겨 있습니다. 강희, 건륭 시절 청은 더욱더 멀고, 더욱더 보급이 어려우며, 더욱더 군사작전을 벌이기 어려운 지역으로 대규모 군단을 투입하기 위해 현지 개발, 교역선, 토지와 경제 정책, 현지와 조정의 협조, 더욱 많은 자원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제도와 그 제도를 원할하게 돌아가게 하기 위한 시스템의 활성화는 확실히 이전 국가들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부분이었으며, 청은 3000년 전부터 존재하던 유목의 세계로 제국의 영역을 더욱 넒혔습니다. 길고 긴 유목 세계와 문명 세계의 대립은 이제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옹정은 제국의 막대한 영향력을 더욱 서북으로 늘리려 하기 보다는, 철군 프로그램을 계속했습니다. 청나라는 군대를 동원해 티베트를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는 성가시고도 비용이 많은 일대신, 한두명의 대신을 파견하여 이들을 관리하고, 또 반 준가르 통치자를 임명해 준가르의 발톱이 티베트에 미치는것을 저지하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이리하여 선택된 인물이 칸체나스(khang chen nas)라는 사람으로, 이 사람은 생전의 연갱요 등이 지지하고 추천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칸첸나스는 다른 티베트 귀족들의 시기를 받았고, 결국 1727년 8월 5일 암살당했습니다. 1728년 9월, 청나라군은 라싸에 도착하여 칸첸나스를 제거했다는 혐의를 받은 사람들을 처형하고, 이번에는 폴하나스라는 인물을 티베트의 통치자로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라싸같은 곳에 대규모 부대를 주둔시키는것은 아무래도 무리로, 2천의 주둔군을 남기고 나머지는 신속히 후퇴했습니다.
칸첸나스가 암살당하던 1727년은 청에게도, 준가르에게도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준가르의 지도자 체왕 랍탄이 사망하고, 아들 갈단 체렝(噶爾丹策凌)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또한 청나라는 1689년의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이해에 다시 한번 러시아와 조약을 맺었는데, 이것이 바로 캬흐타 조약(Treaty of Kyakhta) 입니다.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로 나타난 여러가지 분쟁거리를 해결함과 동시에, 러시아의 시베리아와 청나라 관할 아래 있는 할하 몽골 사이의 2천 600 마일의 경계가 확정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현대 러시아와 몽골의 경계는 대체로 확정되었습니다.
새로 즉위한 갈단 체렝은 처음에는 위험한 노림수를 부리려기 보다는, 청나라와 관계의 끈을 이어 놓고자 했습니다. 1728년 갈단 체렝은 베이징으로 자신의 사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옹정은 이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특히 준가르가 소위 불법의 전파를 돕고자 라싸의 승려들에게 차를 공양하는 행위에 대해서 불쾌한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준가르는 서북 귀퉁이에 있는 작은 부족에 불과할 뿐이다. 그대들이 차를 공양하는것과 불법을 전파하는것이 대관절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옹정이 이렇게 비하적인 의미까지 써가면서 이를 저지하려고 한 것은, 몽골족들에게 있어 대상 교역단과 라마들을 대동한 이 사절단이, 티베트와 몽골의 정신적 연결 고리이자 상업적 연결 고리로서 매우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청은 준가르를 가장 가까운 다른 몽골족이나 티베트인들, 그리고 러시아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준가르와 티베트의 연결이 이어지는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음해인 1729년, 옹정은 평화를 유지하려는 얄량한 가면을 모두 걷어치우고, 준가르 국가를 멸망시키기 위한 원정을 계획 했습니다. 전쟁의 명분이 당장 없었지만, 옹정은 가르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준가르의 행위를 하나하나 들추어내어서 어거지로 명분을 짜맞추었고, 여러 가지 수단으로 자신의 원정을 합리화 했습니다. 다른 몽골족들은 모두 청에 항복했지만 오직 준가르만 완강하게 버티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준가르를 물리치는 것은 자신의 아버지 강희제가 본래 계획했던 일이고, 다만 강희제는 가르단을 물리친 후 군사가 너무 지쳤기에 하지 않았으며, 갈단 체렝은 티베트의 반도들과 공모했고, 따라서 옹정 자신은 아버지의 과업을 완수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역사에 덧붙이는것은 짜증나는 행위지만, 청나라의 몽골에 관한 태도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명나라에게 있어서 몽골은 끊임없는 탐욕과 폭력에 이끌리는 짐승 같은 존재였고, 인간사회보다는 자연력 ─ 즉 태풍이나 홍수 같은 ─ 경우에 가까웠습니다. 이들을 없애려고 노력하는것은 늑대나 홍수를 없애려 드는것보다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명은 '완전히 이질적인' 이들을 없애기 위해 큰 노력을 쏟지 않았고, 따라서 대체로 방어적인 정책으로 일관했습니다.
반면에, 청은 몽골을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간 행위자로 보았습니다. 제국이 내건 조건에 저항하는 자들도 여전히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선택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세계를 합리적 질서로 돌리기 위해' 청은 '황제의 자비에 폭력으로 대응한' 그들에 대해 적극적인 원정, 즉 '정당한 궤멸' 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1729년 4월, 푸르단이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북로군을 맡았고, 악종기는 26,5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로군을 맡았습니다. 둘은 각각 6월과 7월에 출발하여 갈단 체렝의 본거지에서 합류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옹정이 심각한 독감에 걸리는 등의 사태가 발생하자, 원정 계획은 미루어졌습니다. 다시 한번 공격의 태세가 정비된것은 1731년이나 되어서 였습니다. 옹정은 군의 보급 때문에 산시성의 현지 시장가격이 높아진다는 보고에 대해 짜증스럽게 반응했습니다.
준가르는 끊임없이 투루판을 습격했는데, 악종기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투루판 서쪽 170여 킬로미터에 있는 우루무치로 진격, 거기에 요새를 세워 적의 소굴을 쓸어버리겠다는 계획을 올렸습니다. 우루무치는 투루판보다 훨씬 큰 오아시스이고, 이곳을 점령하면 대군을 부양 할 수 없는 투루판의 보급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것만 같았습니다. 옹정은 현지 상황에 대한 악종기의 지식을 존중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1천 리나 떨어져 있다. 그대는 현장에서 결정해야 한다."
옹정은 자신이 친정을 하여 군사를 이끄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흥미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연 '투루판을 방어하면서' '우루무치를 공격하는' 악종기의 제안이 성공할까에 대해서도 의심스러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악종기가 아니라 푸르단이었습니다. 일전에 악종기는 푸르단의 진영을 방문했다가, 벽에 많은 칼과 창이 걸려 있는것을 보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푸르단이 대답하길,
"젊었을 때부터 무술에 힘써 왔기 때문에, 이렇게 젊은이들에게 본을 좀 보여주려고 하는 것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대해 악종기는 "대장군 된 자가 전략을 생각지 않고 개인의 무용을 자만하다니 이건 위험한 일이다." 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푸르단은 북로군을 이끌고 홉도로 진격해 요새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역사상 청이 가장 먼 서쪽으로 침투한 일이었는데, 이에 대해 갈단 체링은 자신의 장수인 체링 돈둡에게 3만의 부대의 주어 청을 공격하게 하였고, 자신은 1만을 이끌고 할하 몽골의 동태를 감시하러 나섰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푸르단은 준가르가 군대를 나누었다는 것을 보자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여기며, 1만의 부대를 이끌고 적의 소규모 부대를 추격했습니다. 준가르군 소부대는 성가시게 푸르단을 습격하면서 그를 점점 유인했는데, 푸르단은 3천의 군대로 2천의 준가르 부대를 패퇴시키는 성과를 거둡니다. 그는 이 모든것이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라는것에 대해서는 짐작도 못하고,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며칠간의 추격 끝에, 푸르단은 끔찍한 운명에 직면하고 맙니다.
파멸의 시간이 되어서야 푸르단은 자신이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자, 미리 숨어있던 준가르의 2만 부대는 산속에서 몰려나와 청군을 포위했습니다. 호톤 노르라는 곳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청군은 물러설 수도 없어 싸웠으나, 청군에 가세한 몽골 부대는 가장 먼저 도망쳤고, 청군의 장수들은 이내 전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푸르단은 격렬한 전투 끝에 간신히 사지를 빠져나와 홉도로 도착하였으나, 살아남은 병력은 오직 2천여 명 뿐이었습니다. 병력의 80%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푸르단은 자신을 죽여달라고 옹정에게 애걸했지만, 옹정은 그를 비난하면서도 성공적으로 퇴각했다고 용서했습니다. 현지의 대장은 아무래도 쉽게 바꿀수는 없는 일입니다. 한편, 악종기는 푸르단의 준가르의 부대와 만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재빨리 우루무치로 진격했는데, 준가르의 부대 일부가 그곳을 지키러 가 병력이 분산되는 효과를 기대했습니다. 악종기는 우루무치를 점령했지만 푸르단은 그 양동작전이 어떠한 효과를 보기도 전에 순식간에 패배했고, 우루무치를 지킬 방법이 없는 악종기는 재빨리 바르콜로 물러났습니다.
대승리에 고무된 갈단 체렝은 홉도 남동쪽을 약탈하려고 나가면서, 할하 몽골족들에게 자신만만하게 연합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할하 족은 자신들의 역량을 증명해보였는데, 갈단 체렝의 연합 제한을 거절하고 오히려 에르데니 자우 근처에서 준가르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할하의 지도자, 체렝.
이 전투에서 할하 몽골은 1만이 넘는 준가르 부대를 참살했고, 나머지를 알타이 서쪽으로 퇴각시켰습니다. 이 전투는 옹정에게 있어 엄청난 의미가 있었는데, 갈단 체렝은 달콤한 승리의 여파를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했고, 옹정은 자신의 군사적 실패를 최소한의 손실로 막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체렝의 승리로 준가르의 대승은 어떠한 연속성을 지닌 다른 사건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옹정은 대단히 감격하여 체렝을 울리아수타이(Uliastai) 정변좌부장군(定邊左副將軍)으로 임명했고, 궁궐과 도시를 만들어 주었으며, 사후에 태묘에 그 신위를 봉안해주었습니다. 몽골인으로서, 청나라의 태묘에 봉안된 사람은 오직 두명 뿐입니다.
하지만 청군이 준가르에 당한 최초의 대패. 이 패배는 대단히 예상 밖의 일이었고, 자신만만한 이 통치자에게 큰 시련을 주었습니다. 옹정은 자신의 계획을 모두 수정해야 했고, 이후 20여년 가까이 청은 준가르에 대해 적극적인 원정보다는 교역을 이용한 관계로 전환하였습니다. 1731년의 재앙 소식에 비틀거리며, 그는 사령관 악종기에게 조서를 보냈습니다. 이 조서에서는 그의 심리 상태가 적나라하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짐이 예상한 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짐은 실로 불안하고 두렵다. 고통스럽게 짐의 책임을 돌아보며, 짐과 대신들이 모든 비난을 자초했음을 알았다. 병법가들은 교만하게 세력을 보이는 자는 패하며, 적에 대해 자신을 기만하는 자는 패하며, 상대를 알지 못하는 자는 패한다고 했다. 우리군이 이 모든 잘못을 저질렀다. 양로군을 함께 준비시키는 것은 모두 도를 넘은 일이었다. 짐은 끊임없이 후회한다. 그저 하늘에 짐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할 뿐 이다. 짐이 무엇을 더 할 수 있었겠는가? 적의 세력은 짐이 알고 예상한것보다 훨씬 컸다. 진격하여 적을 섬멸하는 작전에 대해 말하건데, 우리의 힘과 기술이 미심쩍을 뿐만 아니라 하늘이 우리에게 가호를 내리지 않는것 가은데, 감히 우리가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중략)
"절대로 투르판을 구하려 하지 말거라. 짐의 이전 지시와 네 책략은 모두 틀렸다. 그대와 장군 이리부와 창지만이 이 뜻을 알고 있어야 하느니라. 투르판에는 스스로를 보호할 성벽이 있고, 위구르 병 1000과 우리병사 3000이 있다. 적이 투르판을 친다면 그들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지금 우리는 기다려야만 한다. 이 3000의 병사와 수많은 투르판 시민들을 구하지 못함은 짐이 몰인정하여서가 아니니라. 상황이 우리가 그럴 수 없게 하고 있다. 이 결과는 몹시 참기 힘들지만 어쩔 수 없다. 하늘이 우리를 이해하실 것이다."(중략)
"그대가 완벽하게 안전한 기회를 포착한다고 해도, 극히 신중하게 행도앟라. 만약 하늘이 우리에게 완전한 승리를 허락하고 적이 달아난다고 해도, 그대는 멀리 추격하지 말라. 왜 그런가? 우리는 전투 한번으로 성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적을 추격하더라도 성을 수백 리 이상 떠나지 말고 군대를 돌려라. 그대는 짐의 의중을 아니 이를 깊이 생각하라. 짐은 겁쟁이가 아니다. 단지 하늘의 명을 따르고 하늘의 뜻을 존중할 뿐이다. 그대는 짐의 의중을 가슴에 새기라. 그대는 변경에서 전투 의욕을 높이는 방법을 쓸 수 있고, 적을 섬멸하기 위해 진격을 선언하고 적을 죽이라고 군사들을 선동할 수 있다. 하지만 항상 짐의 지시를 신중히 따르라."
"요약하건대, 진중히 기다리며 동요하지 말라. 이는 짐의 명확한 지시요, 구원 원정에 대한 가장 간절한 명령이다. 그대는 이 조서의 사본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대가 이를 몇 번 씩 읽고 싶다면 잠시 관사에 두었다가 다른 명령서들과 한꺼번에 돌려 보내라."
"짐은 건강하니 괘념치 말라. 그대는 요즘 어떠한가?"
결국 1734년 9월, 옹정은 최고 대신들을 머나먼 준가르 땅으로 보내, 할하와 준가르의 영역을 구분하는 평화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원정이 실패함에 따라 옹정은 변경의 청나라 주둔군을 줄였고, 어중간한 화친 정책을 이어나갔습니다. 전쟁으로 서북의 경제는 심각하게 훼손되었는데, 옹정제 치하에서 제국은 준가르와 싸우는데 6천만냥의 자금을 소비했지만, 거의 타격을 주지 못했습니다. 서북에서 옹정의 군사적 성과는, 오로지 연갱요의 도움으로 이루어낸 것이었습니다. 연갱요가 없는 싸움에서 그는 궤멸적인 타격을 맞보았습니다.
옹정이 사망하고 난 뒤에 뒤를 이은 건륭도 한동안은 이런 어중간한 관계를 이어나갔기 때문에, 청군의 대패로부터 대략 20여년 정도는 서북에 평화라고 부른다면 평화라고 할 수 있는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영원하진 않을 것입니다.
첫댓글 음... 결과적으로 보면 그래도 대단히 운이 따른듯.
다만 이 시점부터 청의 군사력, 군편제가 좀 의심스럽긴 하네요. 규모에 비해 너무 느린 편성, 유목민 군대 이상은 아닌 준가르에게 1730년에 저리 고전하고 있는 점... 어떤 의미에선 건국초기보다도 못한 역량이 아닐까 싶습니다.
22 동의합니다.
오랜만에 쓰셧네요 잘보고 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이 준가르한테 깨졌지만 할하몽골이 준가르를 발랐으면 할하몽골이 뭔가 딴 생각을 할만도 했을거 같은데
오랫만에 오셔서 어디 가셨나했어요. 감사합니다.